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2
마라고사는 황당하게도 성벽이 없었다. 그냥 평지에 아무 장애물 없이 주거지와 상가가 들어선 것이다.
“이 근방의 몬스터는 모래 밑으로 돌아다니는 종이 많아요. 그러니 높은 성벽도 의미가 없죠.”
“몬스터는 그렇다 치고, 사람끼리는 전쟁 안 하나? 적의 군대를 막아 내기에는 부적절한 도시 형태인데.”
“이 주변은 대부분 황무지라서 돌이 귀하네. 그러니 축성 기술도 미미하지. 전쟁도 공성전보다는 평야에서 말을 타고 벌이는 회전(會戰)이 일반적이야. 서부 사내들은 대부분 유목민이니까.”
‘내몽고(內蒙古)와 비슷한 환경이라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큰 도시를 이뤘군.’
마라고사 인근 지역은 중원의 내몽고와 비슷한 환경이지만, 내몽고와 달리 이곳에는 말을 잡아먹는 몬스터가 다수 서식했다.
그렇다 보니 내몽고에 비해 정착민의 숫자도 많았고, 이런 기형적인 형태의 도시가 발생한 것이다.
‘서부의 인간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군.’
서부는 중부나 북부와 달리 뚜렷한 지배 세력이 없었다.
귀족이 있긴 하지만 여러 도시를 아우르는 대영주는 없었고, 종교도 도시마다, 마을마다 제각기 다른 미신을 섬겼다.
중부와 북부의 신앙을 일통한 아도나이 교회조차 서부에서는 수많은 미신 중 하나로 치부될 정도였다.
게다가 인구는 적은데, 땅덩어리는 끝도 없이 넓다 보니 큰 전쟁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서부인은 가족 단위로 떠돌아다니며 각자도생하는 유목 생활을 했다.
각자의 색깔을 간직한 사람들이 넓은 땅에 흩어져 제멋대로 살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서부였다.
“이런 곳에도 도시가 생기다니, 알고 보면 재미있는 곳이군.”
“그렇지? 마라고사는 아직 도시보다 무법지대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지만, 그 무질서 속에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을 걸세.”
카심의 설명을 들으며 마라고사에 입성했다.
마라고사는 ‘성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입성이라 부르기도 뭣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마라고사에 들어섰다.
사파에서 온 용사
황금 거미 상회
일행은 번듯한 여관을 잡고 목욕과 식사를 즐기며 하루를 쉬었다.
해가 저물고, 우리는 흩어져서 라프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끼익-.
나는 적당한 술집을 골라 안으로 들어섰다. 술집 출입문에서는 듣기 싫은 마찰음이 났고, 실내는 좁았으며 바닥은 흘린 술과 음식으로 지저분했다.
그나마 퀴퀴하게 젖은 냄새는 없었는데, 주인장이 청소를 열심히 해서라기보다는, 마라고사의 기후가 워낙 건조해서 그런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술을 나르는 종원업이 냉큼 달려와 물었다. 앳된 얼굴의 여급인데,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다.
“뭐가 있지?”
“뭐든 있지요. 저희 파랑새 여관이 처음이시라면, 주인장의 특제 생쥐 살코기 파이와 마유럼을 추천해요.”
“생쥐 살코기 파이는 역겨운 이름이지만 그래도 정체가 뭔지는 알겠는데, 마유럼은 대체 뭐야?”
“내륙식 마유주(馬乳酒)에 해안식 럼을 섞은 특제 술이랍니다.”
말 젖을 삭혀 만든 탁주에 매캐한 럼을 섞어 먹다니? 서부 새끼들은 입맛이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다.
“끔찍한 특제 요리 말고 좀 평범한 건 없나?”
심각한 내 표정을 본 여급이 깔깔 웃더니, 농담이라며 평범한 술과 안주를 소개했다.
나는 말린 고기 안주에 서부식 마유주를 주문하고 술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스읍, 킁킁!”
술집 구석에 자리 잡은 한 사내가 식탁에 얼굴을 파묻고 개처럼 킁킁대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며 무언가 깊게 빨아들인 것 같은데, 사내의 콧구멍 주변으로 황갈색 가루 몇 점이 떨어졌다.
‘라프란?’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접근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쿠프! 내 술집에서 꽃가루 빨지 말라고 경고했지?!”
퍽!
식탁에서 라프란를 흡입하던 사내가 밀대로 머리를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사내는 아픈 것도 모른 채 헤헤 웃으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행복에 젖어 뒤집혀 있었다.
“이런 젠장, 벌써 맛탱이가 갔네. 삼촌들, 이 새끼 좀 내다 버려요!”
밀대를 휘두른 여급이 주방 쪽을 보며 외쳤다. 그러자 남자 직원 두 명이 달려와 쓰러진 사내를 질질 끌고 나갔다.
‘라프란에 중독성이 있나?’
그런 이야기는 카심이나 이자벨라에게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진통 효과가 있다고 했으니, 마약으로 악용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여급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라셨죠? 보시다시피, 라프란 때문에 요즘 아주 골머리를 썩고 있어요.”
여급은 허락도 없이 내가 주문한 마유주를 한 모금 마시며 푸념했다.
나는 그녀에게 술을 더 권하며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략적으로 전해 들었다.
서부에서 라프란을 마약으로 악용하기 시작한 건 꽤 최근이었다. 여급의 말에 따르면 채 오 년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잠깐 유행하다 말겠거니 했어요. 유목민 주술사들이 쓰는, 소위 ‘기분 좋아지는 풀’ 따위는 흔하잖아요? 라프란도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죠.”
애초에 라프란은 서부인에게 생소한 식물이 아니었다.
과거부터 어떤 사람은 진통제로, 어떤 사람은 성관계의 쾌감을 북돋는 자극제로, 어떤 사람은 그냥 심심해서 라프란 꽃잎을 씹어 댔다.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은 드물게 자생하는 라프란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정도 용량은 인체에 별문제 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서부에 마라고사라는 ‘도시’가 탄생한 이후에 발생했다.
흩어져 살아가는 유목민과 달리, 도시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라프란에 깊게 빠져들었다.
다른 도시와 달리 통치하는 귀족이나 왕족도 없으니, 라프란 남용을 통제할 사람도 없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라프란을 즐기는 방법도 점차 발전했다.
처음에는 생잎을 씹는 단순한 방식이었는데, 나중에는 말려서 담배처럼 태워 연기를 흡입하기도 하고, 물에 끓여 증기를 쬐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괜찮았어요. 돈이 있는 사람은 즐기고, 없는 사람은 투덜거리며 참는 정도였죠. 하지만 ‘가루’가 나온 뒤부터는, 모든 게 엉망이라고요.”
라프란의 꽃술만 채취해 분말 형태로 가공하면 생잎과 비교할 수 없는 약효를 얻을 수 있었다.
강해진 자극만큼 중독성도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 건 당연지사였다.
주술사들이 쓰는 잎담배는 고통을 덜어 주고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지만, 라프란 가루는 그 반대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감각이 예민해지고, 쾌감이 극대화됐다.
그 강렬한 자극에 많은 사람이 생업도 내팽개친 채 골방에서 라프란만 빨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한낱 꽃가루가 도시를 좀먹고 있군.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신생 도시를 말이야.’
“라프란은 보기 드문 식물이라면서? 한데, 도시 전체에 널리 퍼질 정도라면, 누군가 작정하고 만들어 뿌린 거 아니야?”
“맞아요.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지금 라프란을 독점하고 있는 건 황…….”
끼익-.
술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험상궂은 사내들이 큰 소리로 떠들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신나게 떠들던 여급이 말을 바꿨다.
“나, 나 같은 술집 종업원이 라프란을 누가 유통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마지막 한 모금을 더 마신 여급이 급히 자리를 떴다.
용감한 그녀는 자리를 피하는 와중에도 검지를 들어 출입구 쪽을 가리켰다.
방금 들어온 사내들의 목덜미와 팔뚝에 노란 거미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황금 거미?’
문득 적혈귀와 라프란을 거래하던 상회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곧장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형씨들, 황금 거미 상회 소속인가?”
“앙? 넌 뭐야?”
싸구려 술집에서 죽치는 거친 사내들은 늘 그렇듯 나를 경계했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간단한 매타작을 해 주며 친분을 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두덩이가 새파랗게 부어오른 사내들이 십년지기 친구라도 된 것처럼 내가 묻는 말에 막힘없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예, 저희는 황금 거미 상회의 직원입니다. 재고 관리나 하는 말단입죠, 헤헤.”
“상회에서 재고 관리하는 놈 상판이 뭐 이리 험상궂어? 너희 상회 맞아?”
“아, 그게요……. 저희 황금 거미 상회는 이곳저곳에 손을 댑니다. 술도 팔고, 일꾼 소개 업무도 하고, 그…… 여성 인력도 취급합니다.”
“밀주, 노예 매매, 매춘도 한다는 말이로군.”
“그렇게 말씀하시니 섭섭합니다. 마라고사에서는 딱히 불법도 아니라고요.”
애초에 법이랄 게 없는 도시였으니, 살인이나 강간 등 범인류적 흉악 범죄만 아니면 불법이라 부를 만한 기준도 없었다.
황금 거미 상회는 무법 도시 마라고사에서 제법 잘나가는 집단이었다. 마라고사에서 손꼽히는 조직이라나 뭐라나.
가만히 들어 보니 이놈들은 상회이라기보다 중원의 흑회(黑會)에 가까웠다.
‘흑회를 여기서 뭐라고 하더라? 맞아, 갱단이라고 부르지.’
황금 거미 갱단. 그것이 이들의 진정한 정체성이었다. 마라고사에서는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너희, 라프란도 취급하냐?”
“흐흐, 저희 전문 분야가 바로 그겁니다요.”
마약을 다루는 놈들이니 은밀하게 알음알음 유통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이놈들은 오히려 자기네 상품을 홍보하고 있었다.
황금 거미 상회는 이름만 상회지, 사실상 갱단이다. 그러니 밀거래 품목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마라고사 뒷골목에 널린 시시한 갱단과는 규모가 달랐다.
그들은 단순히 상인들에게 보호비를 뜯는 수준을 넘어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고, 유통하는 물자와 현금도 상당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을 이끄는 회주(會主), 즉 보스는 무려 기사 신분이었다.
“기사라면 귀족이란 소리잖아? 그런 놈이 갱단이나 이끌고 있어?”
“보스는 귀족 태생이지만 작위는 없거든요. 남작 가문의 여섯째 아들이라, 물려받은 것도 없이 장성하자마자 집을 나왔다더군요. 방랑 기사 생활을 좀 하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지요.”
모든 기사가 빛과 명예를 좇으며 사는 건 아니다. 기사도 사람인지라, 자기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나쁜 짓에 손을 대기도 한다.
한평생 칼 쓰는 법을 배운 놈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폭력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황금 거미 상회의 보스도 그런 경우였다.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말 한 마리와 검 한 자루만 가지고 중부까지 방랑하며 주군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끝내 자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나중에는 노름에 빠져 여비도 전부 날렸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서부로 돌아온 젊은 기사는 이제 무법 도시의 뒷골목에서 갱단이나 이끄는 신세가 되었다.
이른바 ‘도적 기사’가 된 것이다.
‘뭐, 나도 옛날엔 그런 놈이었으니까.’
방랑 기사란 강호를 독보하는 낭인 검객과 비슷했다.
거대 문파나 명문세가처럼 자기를 밀어주는 배경이 있거나, 일찍이 자기 가치를 인정해 주는 주군을 만나면 정파의 명숙으로 성장할 길이 열리지만, 인생이 안 풀리면 사파로 흘러들어 악당이 되는 것이다.
“네놈들 보스는 어디에 있지? 내가 좀 만나 봐야겠는데.”
“보, 보스는 도시 번화가에 있는 황금 거미 주점에 있습니다. 항상 그곳에 있어요. 딱히 비밀도 아니지요.”
“거기가 네놈들 근거지인 모양이지? 보스는 어떻게 생긴 놈이냐?”
“얼굴은 평범한데, 오른팔이 꺾여 있어요. 보스는 팔이 불구거든요. 세간에서는 ‘외팔이 로드릭’이라고 부르죠. 면전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놈은 없지만요.”
‘로드릭?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나는 여기까지 듣고 놈들을 보내 줬다. 어차피 말단 조직원에 불과한 놈들이라, 더 털어 봤자 나올 것도 없었다.
이제 황금 거미 상회의 근거지를 알았으니, 놈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 봐야 했다.
‘일단 외팔이 로드릭이란 놈의 상판을 좀 봐야겠군.’
나는 그길로 운잠홍을 펼쳐 도시 번화가로 향했다.
* * *
곤륜의 무공은 은신과 잠입에 어울리는 무공이 아니다.
백도 무학 자체가 정면 대결에 초점이 맞춰진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곤륜파 무공은 도가의 원류로 꼽힌다. 외골수 중에 외골수들이 만든 무공이란 뜻이다.
하지만 곤륜의 개파조사도 아예 융통성이 없는 작자는 아니었는지, 단 하나의 은신술을 남겨 놓았고 그게 바로 운잠홍이다.
구름[雲]에 잠긴[潛] 기러기[鴻]가 모습을 숨기는 것처럼, 주변의 지형지물과 그림자를 적절히 이용해 기척을 숨기는 재주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은신술로서 그다지 상승의 절예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세계의 인간 중에서는 내가 최고지.’
무림에서는 이류 은신술 취급이지만, 무공이 없는 이 땅에서는 은잠홍만큼 은밀한 재주도 없을 터다.
안개로 변해 모래 밑에 숨는 뱀파이어나, 망령 주제에 이승에서 어슬렁거리던 보브찬친 같은 놈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운잠홍을 펼쳐 황금 거미 주점에 잠입했다.
황금 거미 주점은 마라고사에서 보기 드문 지하 2층, 지상 4층짜리 커다란 건물이었다.
지하에는 도박장과 매음굴이 있고, 일 층은 식당, 이 층은 주점, 삼 층은 여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