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3
나는 삼 층까지는 볼일이 없어 곧장 사 층으로 직행했다.
사 층은 상회의 요직자들이 머무는 집무 공간이었다.
“빌어먹을, 라프란을 또 털렸잖아, 또!”
사 층의 여러 집무실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 그곳에서 한 남자가 제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었다.
남자는 묘하게 뒤틀린 오른팔을 잘 쓰지 못하는 듯, 왼팔로 정수리 부분을 뜯어 대고 있었다. 외팔이 로드릭이란 놈이 분명하다.
‘머리털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로고.’
언젠가 아우레오는 ‘사람은 결핍을 통해서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라고 했다. 저놈도 정수리가 텅 비게 되면 모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천장 들보 위에 숨어 놈이 하는 언행을 가만히 지켜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라, 저 자식 낯이 익은데?’
사파에서 온 용사
외팔이 로드릭
이름만 낯익은 줄 알았는데, 면상도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다.
누굴까 한참 고민한 끝에 기억 속 저 깊은 곳에서 놈의 정보를 끄집어냈다.
‘오르샤바에서 나한테 까불다가 혼쭐났던 놈이군!’
마르틴 가야르도 백작이 주최한 연회에서 나에게 대련을 신청했던 서부 기사 로드릭. 저놈이 바로 그놈이었다.
‘저놈 팔은 설마 나 때문에 저렇게 된 건가? 당시 내가 팔을 꺾어 놓긴 했지만, 대체 치료를 어떻게 했길래 아예 불구가 되었지?’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불구가 되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곳의 의학이란 대체로 미신 또는 자연 치유될 때까지 버티기가 전부였고, 부러진 팔이 잘못 붙으면 그대로 못쓰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나마 아도나이 교회의 사제들이 몇 가지 질병에 대해 제대로 된 치료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도나이교가 흥하지 못한 서부는 온전히 민간요법에 의존할 뿐이었다.
검을 쓰는 기사의 오른팔이 망가졌으니, 그의 출셋길이 막힌 것도 어찌 보면 나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자식들이지? 사창가의 샘 패거리인가? 아니면 사채꾼 웰슨 녀석이 벌인 짓일까? 제기랄, 생존자가 한 명도 없으니 흉수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출세에 미쳐 있던 놈이 출세를 못 하게 되어서일까? 로드릭은 정신병 걸린 놈처럼 혼자 지껄이며 분노를 토해 냈다.
때로는 재미있는 생각이 난 것처럼 낄낄 웃다가, 다시 울컥 화를 내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완전히 돌아 버렸네. 예전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로드릭의 모습은 과거 오르샤바에서 만났을 때와 사뭇 달랐다.
그때는 성깔 좀 더럽고 주제 파악 못 하는 철부지 느낌이었지만, 나름대로 젊고 야망 넘치는 기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격파탄자 깡패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정 기복이 극심하고 폭력성을 절제하지 못하는 듯했는데, 저런 성질머리로 이렇게 다양한 사업을 꾸리다니, 애초에 기사 노릇보다는 상재(商才)를 타고난 모양이다.
똑똑.
“보스, 보고드릴 게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한창 열을 내던 로드릭은 딴사람처럼 목소리를 깔고 부하를 대했다. 그의 왼손에는 뽑힌 머리카락이 아직도 올올이 붙어 있었다.
“보스, 라프란 생산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노예를 더 사 와야 할 것 같아요.”
“……노예를 뭐 하러 더 사냐? 채찍이나 더 사면 될 일이다.”
“하지만 보스, 매질로 몰아세우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노예들이 너무 지쳐서, 지난주부터 하나둘씩 쓰러져 뒈지고 있다고요. 이대로는 생산 목표를 못 맞춥니다. 노예를 더 사야 해요.”
“이런 젠장, 누가 몰라서 안 사겠냐? 라프란을 또 털려 버린 탓에 돈이 없단 말이다!”
격분한 로드릭이 책상 위에 있던 나무 잔을 부하에게 집어 던졌다.
부하 앞이라고 잠시 근엄한 척을 하더니, 채 일다경도 참지 못하는 성질머리였다.
로드릭의 부하는 자기 보스의 다혈질에 익숙한 듯, 고개만 슬쩍 움직여 나무 잔을 피했다.
“돈 없단 소리만 하지 말고 대책을 좀 세워 보십쇼. 보스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잖아요.”
“……노예가 몇 명이나 더 필요한데?”
“최소한 스무 명은 더 있어야 해요. 사실 많을수록 좋죠.”
추가로 투입해야 할 인력만 최소 스무 명이라니, 로드릭이 가진 라프란 농장이 꽤 큰 모양이다.
로드릭은 잠깐 머리를 싸매더니, 이내 갱단 보스다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굴다리 아래에 새로 생긴 거지패가 있다. 대충 서른 명 정도 되던데, 그놈들 데려다가 일 시켜. 처음엔 좀 뻗대겠지만, 매질 좀 하면 고분고분해지겠지.”
“또요? 당장은 괜찮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하다간 결국 거지 대장 놈 귀에 들어갈 거라고요. 안 그래도 그 멀대 놈이 보스를 손봐 주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던데……. 보스, 혹시 그놈이랑 한판 붙을 생각이세요?”
“못 붙을 건 또 뭐냐? 쳇, 하지만 납치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번 라프란 거래에서는 반드시 대금을 받을 테니, 그땐 노예시장에서 사람을 사다 주마.”
확신하는 로드릭과 달리 부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로드릭이 거지 대장과 싸울 수 있다는 말도, 다음 거래에서 대금을 받을 거라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
“멀대랑 싸운다고요? 낄낄, 보스 맞아 죽습니다. 그리고 라프란은 누가 채 간 건지도 모르잖아요. 범인을 잡은 것도 아닌데, 다음 거래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어요?”
“이 자식아! 멀대건 돛대건 일대일로 붙으면 내가 이겨! 잊었냐? 나 기사야! 기사 로드릭 경이라고!”
로드릭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감정 기복이 일곱 살 소년을 보는 듯했다.
잠깐 흥분한 로드릭은 또 순식간에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라프란 상단을 털어 간 범인이 누구든 상관없어. 다음 거래에는 용병을 잔뜩 고용한 다음, 짐꾼으로 위장해서 상행에 딸려 보낼 거다. 또 허튼수작을 부리면 개박살을 내 줘야지.”
“예? 노예 살 돈도 없다면서 웬 용병을 고용해요?”
“이 멍청아, 내가 진짜 돈이 없겠냐?”
로드릭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 부하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이거 받아.”
로드릭이 부하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제법 묵직한 주머니에 은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가서 야무진 놈으로 고용해. 숫자만 많은 허접들은 필요 없어. 보안을 위해서라도 소수 정예로 꾸려야 하니까, 진짜배기 실력자를 섭외해 봐.”
“돈이 이렇게 많으면서……. 쳇, 알겠수다.”
부하가 밖으로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도 로드릭의 거처를 벗어났다.
로드릭이 용병을 섭외한다니, 라프란 상행에 합류할 쉬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 * *
로드릭의 집무실을 벗어나 마라고사에 마련한 숙소로 돌아왔다. 카심과 이자벨라는 이미 숙소에 와 있었다.
나는 두 뱀파이어를 보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용병으로 위장하자.”
“용병?”
“그래, 용병. 라프란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갱단을 염탐하고 왔는데, 거기 보스인 외팔이 로드릭이란 놈이 실력 있는 용병을 고용할 계획이더라고.”
나는 카심과 이자벨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라프란을 털린 게 한두 번이 아닌가 봐. 상단의 호위 용병으로 고용되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적혈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두 뱀파이어도 듣자마자 저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묘수였다.
“잘됐네요. 각하가 지닌 실력의 일부만 보여 줘도 도시의 용병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겠죠.”
“황금 거미 상회에서 소수의 실력자를 원한다면, 분명 각하에게도 선을 대겠지.”
“바로 그거야. 한데…… 실력을 어디서 보여 주지?”
용병이란 건 그냥 ‘오늘부터 나도 용병이오.’ 하고 길거리에서 일을 받으면 되는 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황금 거미 상회에서 날 찾을 만큼 용병으로서 입소문을 타려면, 일단 실력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실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첫 의뢰를 받아야 할 텐데, 어디 가서 의뢰를 받아야 하는지부터 막막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 떼인 돈이라도 대신 받아 주러 다녀야 하나?”
“그런 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각하 정도의 실력자가 그런 헛짓거리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풉, 각하는 가끔 보면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 같다니까요.”
두 뱀파이어는 내게 용병 길드를 권했다. 별다른 경력이 없어도 용병 길드에서 실력을 입증하면 곧장 고급 의뢰를 받을 수 있단다.
“용병 길드? 그런 길드도 있어?”
길드란 주로 대장장이나 약재상, 보석공처럼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권 집단이었다.
무력이 없는 상인이나 기술자 등이 동종 업계끼리 똘똘 뭉쳐 자기들 권익을 지키는 단체인데, 그 결속이 어찌나 강한지 대도시의 길드장들은 해당 지역의 유지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 길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인데.’
중형 용병단 정도만 되어도 작은 마을 정도는 무력으로 점거할 수 있는데, 한 도시에 상주하는 모든 용병이 뭉쳐서 길드를 만든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이미 군벌이나 다름이 없다.
왕족이나 귀족이 눈먼 장님도 아니고, 자기 도시에서 그런 위험한 집단을 결성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다른 지역은 그렇지만, 마라고사는 달라. 알다시피 이곳은 영주나 귀족이 없는 신생 도시라 용병 길드를 견제할 만한 기득권이 없는 탓이지. 무법 도시답게 갱단에 의한 사건 사고가 자주 발생하니, 주민들도 용병 길드를 반기는 분위기고.”
다른 도시에서 용병은 거칠고 다루기 힘든 족속이었지만, 마라고사에서는 오히려 말이 통하는 족속이었다.
마라고사의 주민들은 갱단이 도시를 장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용병 길드가 득세하길 바랐다.
좌우지간, 이런 사정으로 마라고사 인근에서는 용병 길드에서 발행한 용병패가 있어야 용병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고용주는 용병패를 통해 해당 용병의 신분과 실력을 가늠했고, 용병패가 없는 자는 굵직한 일거리를 얻지 못했다.
“답 나왔군. 용병 길드로 가자.”
* * *
용병 길드 건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번듯하게 잘 지어져 있기도 했고, 길드 측에서 도시 곳곳에 약도와 안내문을 붙여 용병 모집을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병 길드 주변은 어수선하고 시끌시끌했다. 나 말고도 용병이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여럿 있었다.
“마라고사의 사내들은 용병 일을 하지 않아도 용병 자격은 획득해 놓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곳이니까요.”
이자벨라의 말처럼 모여든 사람의 면면이 실로 다양했다.
개중에는 ‘저놈은 오크와 혼혈인가?’ 싶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도 있었고, 용병은커녕 친구와 멱살잡이도 한번 안 해 봤을 것 같은 샌님도 있었다.
“용병 등록을 하러 왔는데.”
길드 건물에 들어가 접수원에게 용건을 말했다.
냉소적인 인상의 여직원은 도시 각지에서 몰려든 허당들 때문에 지쳐 버린 듯, 나를 위아래로 아니꼽게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 분이 같이 등록하실 건가요?”
“그렇다.”
“3인 이상이면 따로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초급 용병으로 인정해 드려요. 저쪽으로 가서 등록 비용을 지불하고 용병패를 받아 가세요.”
마라고사의 용병 길드는 용병을 네 개 등급으로 구분했다.
초급, 중급, 고급, 그리고 특급.
그중 초급 용병은 사실 용병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일종의 심부름꾼이었다.
태어나서 칼 한번 휘둘러 보지 않은 약골도 사지만 멀쩡하면 초급 용병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용병이 강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용병 일이란 게 위험한 전투에 나서기도 하지만, 적이 덤비지 못하게 머릿수만 채우거나, 적당히 무기 들고 서서 분위기만 험악하게 만들어도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강한 용병보다 저렴한 용병이 일거리가 많기도 했고.
“난 특급 용병 자격을 취득하러 왔다.”
문제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초급 용병 자격 따위가 아니란 것이다.
마라고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갱단인 황금 거미 상회에서 날 찾아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 실력을 어느 정도 보여 주고 소문을 퍼뜨릴 필요가 있었다.
물론, 태허도룡검기나 종학금룡기 따위의 진신 무력을 보여주면 안 되겠지만…….
“특급 용병 자격은 바로 받을 수 없어요. 시험으로 얻는 건 고급 용병까지고, 고급 용병 신분으로 임무를 여러 번 완수하며 신용을 쌓으면 그때 특급으로 올려 드려요.”
“그럼 고급 용병 시험을 치르지.”
“고급 용병 시험은 대련이 포함되어 있어요. 객기 부리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수가 있으니까, 정 아쉬우면 중급 시험이나 치르고 돌아가는 게 어때요? 당신처럼 호리호리한 남자에게는 중급 시험도 쉽지 않아요. 게다가 일행은 노인과 여자잖아요?”
접수원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에게 중급 용병 시험을 권했다. 아무래도 용병 길드에서 자격시험 도중에 다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말대꾸 그만하고 시험장으로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