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4
피식 웃어 보인 접수원이 검지를 들어 뒤뜰을 가리켰다. 그녀의 표정은 ‘오늘도 세상 물정 모르는 뜨내기 한 놈 실려 나가겠군.’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쪽으로 가 보세요.”
나는 접수원을 일별하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카심과 이자벨라도 내 뒤를 따랐다.
사파에서 온 용사
용병 테일로우
예상대로 용병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무법 도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체계적인 평가 기준을 갖추고 있어 놀라웠다.
우선 무거운 돌을 들거나 짧은 거리를 정해진 시간 동안 왕복하는 등 기초적인 신체 능력을 측정했는데, 용병이 아니라 도시의 경비병을 뽑는 것처럼 진지한 분위기였다.
‘마라고사의 용병들은 다른 지역보다 수준이 높겠군.’
또 한 가지 의외였던 점은 문자나 산수, 응급처치, 독도법(讀圖法) 등 전투 외적인 능력도 평가해서 높은 가산점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용병을 그저 돈 받고 칼질이나 해 주는 날건달 정도로 생각했는데, 서부에서 용병은 다양한 일을 믿고 맡기는 용역 업체 같은 느낌이 강했다.
“저 자식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외지인인가?”
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다른 용병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확실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미약하지만 내공까지 사용해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한두 번 들기도 어려운 돌덩이를 스무 번씩 던져 대고,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순발력 시험을 치렀다.
“테일로우 씨, 대련 준비하세요.”
용병 길드 직원이 나를 호명했다.
나는 테온 크로우라는 이름을 적당히 바꿔서 가명을 지었다.
‘대련은 좀 더 보여 줘야겠지?’
마라고사의 용병 자격시험이 아무리 체계적이라도, 칼부림은 역시 실전에서 증명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나와 대련하게 된 다른 지원자는 이미 잔뜩 위축된 상태였다.
휘릭!
굳이 상대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빠르게 접근해 무기를 날려 버리고 유권으로 쓰러뜨려 제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대단한 놈이 지원했군.”
“실력은 이미 특급, 그 이상이에요. 지금은 고급 용병이지만, 신용만 쌓으면 즉시 특급 용병으로 올라가겠네요.”
용병 길드 관계자들도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이자벨라와 카심도 각각 중급 용병 자격을 얻었다. 혈마법을 드러낼 수 없는 두 뱀파이어의 신체 능력은 형편없지만, 다른 잔재주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의료 지식을 내세우자 심사관들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간단한 응급처치는 물론이고 해독과 상처 봉합 능력까지 보유한 용병은 그 자체로 중급으로 인정받기 충분했다.
“세 분은 일행이라고 하셨죠? 하나의 용병단으로 묶어서 등록하면 접수 비용을 절약할 수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하지.”
접수 담당 여직원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용병단 창설을 권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비용 절약 요령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다니, 역시 대접을 바꾸는 데는 실력을 보여 주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었다.
“용병단 이름은 무엇으로 등록해 드릴까요?”
“……이름? 옥심 용병단으로 할까?”
내가 용병단 이름 따위를 미리 생각해 두었을 리 없고, 갑자기 지으려니 엿 같은 이름만 떠올랐다.
‘옥심은 발음이 어려우니까 차라리 우정과 낭만이 가득한 사파 용병단으로……. 아, 아니지. 내가 미쳤나?’
그때 이자벨라가 끼어들어 말했다.
“검은 박쥐, 우리는 검은 박쥐 용병단이에요. 찍찍!”
‘찍찍은 뭐야…….’
내가 한숨을 내쉬는 동안, 용병 길드 직원은 웃으며 등록 절차를 마쳤다.
그렇게 마라고사에서 검은 박쥐 용병단이 처음 존재를 알렸다.
* * *
며칠이 어영부영 흘렀다.
나는 그동안 용병 길드에 매일 출석해서 임무 소개를 받았다.
하지만 황금 거미 상회에서 사람이 오지 않는 바람에, 아직은 모든 의뢰를 거절하고 있었다.
‘이 자식들, 일 처리가 왜 이렇게 느려?’
분명 로드릭이 부하에게 빨리 알아보라고 했는데, 황금 거미 상회는 아직도 용병 길드에 방문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다른 용병과 주먹다짐하거나, 괜한 힘자랑을 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내며 지냈다.
그 과정에서 ‘싸움꾼 테일로우’라는 그럴싸한 별명도 붙었고, 아직은 경험이 없어 고급 용병이지만, 실력으로는 특급 용병 세 명보다 낫다는 세평도 얻었다.
‘특급 용병에게 시비를 걸어 때려눕힌 게 유효했군.’
실제로 특급 용병 다섯에게 시비를 걸어 한꺼번에 때려눕히고 얻은 세평이니, 이견의 여지도 없었다.
이렇게 평판을 다져 놓으면 나중에 일을 구하기도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주는 황금 거미 상회, 임무는 상행 경호, 필요 인원은 특급 용병 세 명이요!”
의뢰 중개인이 소리 높여 외치며 희망자를 받았다.
대금의 절반을 선불로 준다는 말에 금방 특급 용병 두 명이 지원했고, 나도 냉큼 다가가 의뢰 참여 의사를 밝혔다.
“아직 한 자리 남았지? 우리 검은 박쥐 용병단에서 맡았으면 하는데.”
“테일로우 씨? 안 돼요. 특급 용병만 받는다니까요? 고급 용병은 벌써 여럿 구해 놓았다고 해요.”
“그냥 해 줘. 어차피 더 이상 지원할 특급 용병도 없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특급 용병들이 내 눈을 슬슬 피했다. 지난 며칠 동안 패악을 부린 게 이럴 때 도움이 됐다.
몇몇 특급 용병은 대놓고 사양의 뜻을 밝혔다. 물론, 그들도 자존심이 있으니 싸움꾼 테일로우가 무서워서 손을 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황금 거미 상회? 걔들 요즘 라프란을 계속 털리고 있다면서? 말이 상행 경호 임무지, 사실상 갱단끼리 싸우는 데 칼 빌려 달란 소리 아니야?”
“심지어 습격한 놈들이 누군지도 모른다던데? 보스인 외팔이 로드릭이 독이 바짝 올랐다더군. 누구랑 싸우는 건지도 모를 의뢰는 사양이야.”
목숨 내놓고 일하는 용병들답게, 최근 황금 거미 상회가 몇 번이나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용병들의 반응에 의뢰 중개인은 물론이고 황금 거미 상회의 관계자도 표정이 굳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말했다.
“난 길드 내규 때문에 고급 용병이 된 것이지, 실력은 특급 용병에 뒤지지 않는다. 당신도 봤잖아?”
의뢰 중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내가 시험장에서 보여 준 능력은 특급 용병을 한참 상회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첫 상행에서는 임금을 고급 용병 한 명 몫만 받겠다. 나머지 중급 용병 둘은 경험을 쌓을 겸 날 따라오는 것뿐이야.”
“정말요? 그래도 되겠어요?”
이 정도 조건이면 황금 거미 상회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말이 상회지, 그 본질은 갱단인 놈들이다. 실력 있는 용병을 초짜라는 이유로 싼값에 데려오는 데다, 덤으로 고기 방패 겸 허드렛일에 써먹을 수 있는 중급 용병 두 사람까지 공짜로 준다니 오히려 환영이었다.
“좋다. 검은 박쥐 용병단이라고? 너희를 고용하겠다.”
황금 거미 상회 관계자는 그 자리에서 선금을 치렀다.
“첫 상행은 삼 일 뒤다. 삼 일 뒤 동이 트자마자 황금 거미 주점으로 찾아와.”
관계자는 집결 일자와 장소를 알려 주고 자리를 떴다.
나는 미소 지으며 앞으로 펼쳐질 적혈귀 사냥을 기대했다.
* * *
삼 일 뒤.
황금 거미 주점으로 찾아가니 벌써 출발 준비를 마친 상단이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오는군. 검은 박쥐 용병단이야.”
“테일로우, 실전 임무는 처음이지?”
다른 특급 용병 두 명이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특급 용병 외에도 고급 용병으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 있었다.
이전까지는 용병 길드에서 오며 가며 마주친 사이였지만, 오늘부터는 서로의 등을 맡길 전우였다.
“용병들! 전부 이쪽으로 와. 상회 사람들과 인사부터 나누고 출발하지.”
용병 길드에서 보았던 상회 관계자가 나를 잡아끌며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갱단 소속의 상단이라 그런지, 짐꾼이나 마부의 인상이 더럽고, 덩치가 우람했다.
‘상판 한번 찌글찌글하군. 건달티는 숨길 수가 없어.’
외모뿐만 아니라 눈빛이나 태도도 무역이 아니라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황금 거미 상회는 그간 몇 차례 화물을 탈취당해서인지,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갱단의 보스, 아니 상회의 회주인 외팔이 로드릭이 직접 상행을 이끄는 것이 그 증거였다.
“보스, 이번에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특급 용병 두 명에 고급 용병이 아홉 명, 중급 용병이 둘이에요.”
“앙? 특급 용병은 세 명 섭외하라니까 왜 두 명이야? 그리고 떨거지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 중급 용병은 뭐 하러 데리고 왔어?”
로드릭은 이제 기사의 탈은 완전히 벗어 버린 듯, 용병들의 면전에서 저딴 소리를 지껄였다.
“어이구, 씨발? 심지어 중급 용병이랍시고 데리고 온 게 하나는 계집이고, 하나는 늙탱이네? 너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로드릭이 한 손을 자기 관자놀이 근처에서 빙빙 돌렸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흠잡을 데 없는 갱단 두목의 언행이었다.
“아, 그게요, 이렇게 세 사람이 같은 용병단인데, 한 묶음으로 고용하면 임금도 아낄 수 있고…….”
로드릭의 짜증에 부하가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특급 용병을 상회하는 실력에 중급 용병까지 덤으로 얹어서 저렴한 비용으로 고용했다는 말에, 로드릭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으래? 흐흐, 운이 좋았네. 어이, 검은 박쥐 용병대장. 이름이 테일로우라고?”
“그렇소만.”
“쯧, 용병단 이름은 괜찮은데 대장 이름이 좆같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이랑 비슷한 이름이야.”
로드릭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놈답게 혼잣말을 길게 중얼거리고 나서야 용병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이번 임무를 잘 수행하면 앞으로도 종종 고용하겠다는 둥, 상여금도 고려해 보겠다는 둥 입에 발린 말이었다.
일장 연설을 마친 로드릭이 마차에 올라타고, 본격적인 상행이 시작됐다.
마라고사를 벗어나자, 상단 호위를 맡은 갱단 조직원들은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싸고 도보로 이동했다.
‘저번 상행에는 노예들을 호위로 쓰더니, 이번에는 깡패 새끼들을 여럿 끌고 나왔군.’
용병을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서 황금 거미 상회의 다른 사업 구역을 지키는 조직원들까지 동원하다니, 로드릭도 라프란 유통에 조직의 사활을 걸고 있는 모양이다.
용병들은 갱단 조직원들보다 바깥쪽에 배치됐는데, 로드릭은 수시로 마차의 창문을 열고 용병들이 제대로 주변을 경계하는지 확인했다.
“저놈이 로드릭이에요? 예전에 각하가 팔 부러뜨렸다는?”
내 옆에서 털레털레 걷던 이자벨라가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했다.
“그래, 혼잣말하는 걸 들어 보니 아직도 나한테 앙심이 있나 봐.”
이자벨라가 킥킥 웃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기는커녕 응원과 격려를 건네는 로드릭이 우스웠나 보다.
“그 역용축골술? 그거 나한테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엄청 유용하네, 킥킥.”
상행은 순조로웠다.
행렬의 규모가 크고 죄다 무장을 갖추고 있으니 어설픈 마적 따위는 감히 덤비지 못했고, 운이 좋아서인지 몬스터의 습격도 없었다.
이윽고 상단은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래 장소는 이번에도 인적 드문 광야 한가운데였다.
“다들 긴장하라고. 구매자가 언제 도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니까.”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로드릭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갱단 조직원들과 용병들이 짐꾼 노예로 위장하고 있으니, 구매자가 볼 때는 경호 인력이 평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본색을 드러내면 즉시 제압하는 거야. 생포해서 고문한 다음, 뒷배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로드릭의 말에 상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기다리자, 지평선 너머로 세 명의 구매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각하.”
카심이 남모르게 나를 불렀다. 그가 슬쩍 꺼내서 보여 준 탐혈의 은반에 붉은 점 세 개가 찍혀 있었다.
‘첫 상행의 첫 거래부터 당첨이군.’
라프란 구매자는 인간으로 위장한 적혈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