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1
이미 적혈귀 사냥에도 도가 튼 나다. 놈이 참격을 피하는 틈에 이형환위를 펼쳐 뒤를 잡았다. 상대의 등에 매달려 다리로 허리를 감고, 한 팔은 목을 감았다.
‘흡성대법!’
남은 한 손으로 놈의 얼굴을 덮고, 안개로 변하기 전에 한 수 앞서 흡성대법을 운용했다.
오랜만에 펼친 대법에 노궁혈이 활짝 열렸다.
쐐애애애액!
혈마력을 빼앗긴 적혈귀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첫 기습에 당한 여성 적혈귀는 아직도 바닥을 기며 사경을 헤매는 중이고, 공중에서는 이자벨라와 카심이 마지막 적혈귀를 상대로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무난하게 제압하겠군.’
두 암혈귀도 여러 번 호흡을 맞춘 덕에 무리 없이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얍!”
이자벨라가 소환한 핏빛 창이 적혈귀를 후려쳤다.
기껏 창을 소환해 놓고 제대로 다루지 못해 작대기처럼 휘두르는 꼴이 우스웠지만, 궁지에 몰린 뱀파이어에게는 그것도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크흑……!”
창대에 두드려 맞아 바닥으로 추락한 적혈귀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턱 아래에 날카로운 칼날이 와서 닿았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두 자루의 곡도를 든 리자드맨이었다.
쉬익-!
리자드맨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다른 한 마리는 쓰러진 여성 적혈귀를 제압하고 있었다.
이내 세 명의 적혈이 모두 제압되었고, 이자벨라와 카심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나도 흡수를 마친 적혈을 바닥에 눕혀 놓고 일행에게 다가갔다.
“훌륭하군. 이제 너희끼리 적혈귀 두 마리도 상대할 수 있겠어.”
“각하, 저놈은 흡수를 마친 거야? 그럼 죽여도 되나?”
나는 이자벨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나머지 두 적혈귀의 혈마력도 흡수했다.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몸 안에서 날뛰었지만, 이 갑자에 가까운 내공으로 짓누르자 금방 잠잠해졌다.
운기조식을 하기 전에, 일단 적혈귀들이 인간 상회에게서 강탈한 화물을 살폈다.
작은 나무 상자를 열자 앞서 보았던 황갈색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향기가 어찌나 감미로운지,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약제가 아니라 향신료 같군.”
“라프란은 실제 향신료로도 쓰여요. 같은 무게의 은보다 비싼 고급 향신료이지요.”
이자벨라가 냉큼 다가와서 라프란 향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녀도 적혈귀 못지않게 라프란을 즐기는 걸 보니, 나만 몰랐을 뿐 꽤 유명한 향신료 같았다.
카심도 은근슬쩍 다가와서 라프란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인간에게는 단순한 진통제지만, 뱀파이어에게는 최고의 향신료 겸 둘도 없는 약제야. 날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 자네가 내 가슴을 팔꿈치로 때려서 흉골이 몽땅 부러졌을 때 말일세.”
“아아, 기억하지.”
라프카스 산맥에서 카심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첫인사 대신 파쇄추를 먹여 주었다. 덕분에 카심은 흉부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고,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때 내가 급하게 꺼내서 마신 포션에도 라프란이 들어갔네. 주재료지.”
“호오.”
당시 카심은 유리병에 담긴 붉은 액체를 마시고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했다.
그 정도 효과의 물약을 만드는 재료라면 적혈귀들이 이런 대낮에 태양 아래로 기어 나와 인간 상단을 습격할 만도 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무법 도시 마라고사
“강도질이라, 흡혈귀나 인간이나 사는 꼴이 비슷하군.”
“그렇지 않네. 적혈의 뱀파이어들은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거짓말까지 해 가며 인간의 물건을 탐내는 건 어울리지 않아.”
카심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이례적인 일이야. 게다가 이놈들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이 흥미롭네. 이냐시오라면 적혈의 차기 왕으로 거론되는 놈인데……. 그런 거물이 탈피에 실패해 중태에 빠졌다면, 어떻게든 소생시키기 위해 라프란을 퍼붓고 있겠지.”
탈피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혈귀들은 나름의 고충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수십 명의 적혈귀를 사냥했는데 이놈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추적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파라쿨라 성채 내부에 더 급한 문제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각하,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그때 이자벨라가 재미있는 생각을 해냈다.
“라프란을 미끼로 쓰면 적혈을 계속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이놈들이 인간으로 위장해서 라프란 상인을 불러낸 것처럼, 우리는 라프란 상인으로 위장해서 적혈의 뱀파이어들을 꾀어 내는 거죠.”
“호오.”
흡혈귀 낚시인 셈이다.
사냥이 계속될수록 파라쿨라 성채 밖에서 적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지는데, 기가 막힌 우연으로 방도를 찾아낸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즉시 착수하지.”
모처럼 옳은 말을 한 이자벨라가 우쭐하며 단검을 꺼냈다. 그녀는 이번에도 적혈귀 세 마리를 해체하며 밝게 웃었다.
* * *
어두운 방.
창문도, 횃불도 없는 깜깜한 공간에 원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자들은 칠흑 같은 어둠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지, 촛불 하나 켜지 않은 채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라프란을 확보하러 갔던 젊은이들이 실종됐습니다. 심지어, 이번 확보 작전에는 테우노도 함께했는데 말입니다.”
“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원탁 주변으로 살기와 함께 혈마력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평범한 적혈귀보다 훨씬 강력한 기세였다.
“실종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젊은이들에게 맡겨 두지 말고, 우리 원로들이 직접 나서서 강력하게 대응했어야 합니다. 제가 진작부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언제는 내부 수습이 우선이니 실종 사건은 좀 더 두고 보자더니?”
“지금 우리끼리 시시비비를 가릴 때입니까?”
원탁을 사이에 두고 비난과 책임 전가가 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들은 다툼을 멈추고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마 테우노까지 실종될 줄이야. 그 아이는 일족의 동량(棟梁)이라 평가받던 수재가 아닙니까?”
“흉수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놈이란 뜻이지요. 더 이상 손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루빨리 흉수를 찾아 제거해야 해요.”
누군가의 성토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흉수를 제거하기는커녕, 누구인지도, 몇 명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했다.
“이번 실종 사건의 흉수로 짐작되는 곳이 있습니까?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실종 현장을 분석해 얻은 결론에 따르면, 흉수는 5인 이하의 소수 집단이오. 그 정도 숫자로 테우노를 제압했다면 대단한 정예라고 봐야겠지.”
“혹시 황금 거미 상회를 이끄는 로드릭이란 놈이 아닐까요? 우리가 벌써 몇 번이나 신분을 위장하고 그들의 라프란을 강탈했으니, 이제 슬슬 정체를 알아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오. 난 그 로드릭이란 놈을 직접 보았지. 녀석은 우리 실체를 파악할 책략도, 보복할 배포도 없는 소인배요.”
로드릭을 직접 염탐했던 이가 저렇게까지 장담하니 다른 자들이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왜소한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흉수는 용살기사가 아닐까요?”
“용살기사? 북해의 테온 크로우 백작을 말하는 겁니까?”
“오덴세섬에 처박힌 인간 영웅이 왜 서부에 나타나서 우리 적혈을 공격한단 말이오?”
모인 이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왜소한 그림자의 말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최근 인간 사제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크로우 백작이 새로운 신탁을 받아 서쪽의 악을 도려내러 떠났다고요. 심지어 시종이나 종자도 없이 홀몸으로 떠났다더군요.”
“그런 일이……?”
“크로우 백작이 아도나이의 신탁에 등장한 악을 뱀파이어라고 해석했다면? 그가 직접 광야를 떠돌며 우리 일족을 발견하는 족족 죽여도 이상할 게 없지요.”
“일리가 있군요. 용의 목을 베어 버린 크로우 백작이 범인이라면, 아무리 테우노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듣고 보니 흉수는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가 맞는 것 같았다. 어느새 회의장은 크로우 백작을 향한 원망의 장으로 바뀌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기가 아직도 방랑 기사인 줄 아는 건가? 영주씩이나 됐으면 자기 영지에 처박혀서 세금이나 열심히 걷을 일이지, 왜 서부까지 와서 들쑤시고 지랄이야, 지랄이!”
“소문에 따르면, 크로우 백작은 기사 중에 기사라더군요. 기사란 족속이 원래 명예에 미친 작자들 아닙니까? 적혈의 뱀파이어를 사냥하고 그 공을 뽐내고 싶은 것이겠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그놈은 역겨운 아도나이 교회의 수호자입니다. 빛의 유혹에 단단히 홀린 놈일 테니, 신탁을 받았다면 제 목숨 돌보지 않고 홀몸으로 서부까지 찾아온 것도 이해가 돼요. 성직자란 원래 미친놈들 뿐이니까요.”
얼마간 테온을 향한 욕설과 원망을 쏟아 내던 의원들은 이내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용살기사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용살기사는 평범한 체격에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고 합니다.”
“칼날부터 손잡이까지 전부 새까맣게 칠해진 검을 사용한다더군요.”
“그의 광휘는 색깔이 독특하다고 합니다. 검에서 나오는 광휘는 비취와 비슷한 색이고, 몸에서 나오는 광휘는 금빛이 돈다고 해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테온 크로우를 겁내지 않았다. 제아무리 용의 목을 벤 기사라지만, 그래 봤자 칼잡이다. 다수의 원로 뱀파이어가 각기 다른 혈마법과 피의 권능으로 공략하면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심지어 사제도 대동하지 않고 단독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용살기사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 * *
일행은 꾸준히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지평선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이는데, 저게 마라고사인가?”
“오, 맞네. 벌써 도착할 때가 됐나? 시간 참 빠르군.”
카심은 정말로 잊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그도 말로는 구박하지만, 이자벨라를 가르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하기 전에 리자드맨을 정리해야 하지 않나?”
“리자드맨은 모래 속에 숨겨 두면 돼. 정신지배는 언데드 지배와 달라서, 나에게서 멀어져도 지배력이 줄어들지 않거든.”
누런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을 바라보며 카심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흘렸다.
확실히 언데드 조종보다 살아 있는 몬스터의 정신을 지배하는 게 장점이 많았다.
“너희는? 인간으로 위장하고 도시까지 들어갈 생각인가?”
“물론이지. 어차피 마라고사에 우리의 정체를 알아볼 사람은 없네.”
“저렇게 큰 도시에 뱀파이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겉모습을 사람처럼 위장했다지만, 기감이 뛰어난 사람은 너희의 본질을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서부에는 아도나이교 사제가 많이 없지만, 다른 종교의 제사장이나 주술사 들도 뱀파이어의 독특한 마력은 알아볼 수 있을 터다.
또한, 대도시에 머무는 기사나 뛰어난 전사 중에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카심과 이자벨라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각하가 마라고사에 대해 잘 모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각하, 아무도 못 알아봐요. 호호,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이번에 배운 정신지배 마법으로 한번 속여 볼게요!”
“아서라, 네 실력으로 인간에게 정신지배를 시도하다가는 단칼에 목 떨어진다. 돌대가리가 무겁더라도 몸에서 떼어 놓아서야 되겠니?”
“에이, 씨! 돌대가리 아니라고요!”
두 암혈귀는 서로 농담이나 하며 다툴 뿐, 정체를 들키는 상황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마라고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뒤에야 두 흡혈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대도시 맞아? 무슨 난민촌 같잖아?”
“하하, 놀랐나? 마라고사는 면적으로 따지면 각하가 머물던 윈스크보다 훨씬 크지만, 그리 발달한 도시는 아니지.”
카심의 말대로, 마라고사는 크기만 클 뿐, 도시다운 느낌이 없었다.
낡고 허술한 집이 넓은 평야에 가득 들어차 있고, 산만하고 불규칙하게 뻗어 나간 골목길이 건물 사이사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단지 집이 낡아서 도시가 엉성해 보이는 건가? 아닌데, 지금까지 방문했던 도시와 무언가 다른 점이 있는데…….’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마라고사의 특징을 알아냈다.
사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특징이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성벽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