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42
“이, 이오안……!”
죽음을 각오했던 이자벨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오안의 표정을 본 그녀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이오안……?”
“……흐흐, 카라히사르의 뿔은 역시 네가 가지고 있었구나.”
이오안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오안은 이자벨라를 구하기 위해 샬루를 공격한 게 아니었다.
그저 늪의 조언자의 시선을 피해 뿔을 독차지할 목적으로 기습한 것뿐이었다.
“카라히사르의 뿔은 너처럼 무식한 계집이 품기에는 너무 큰 보물이다. 그러길래 주제에 맞게 행동했어야지.”
“그깟 마법 무기가 탐나서 나를 버리겠단 말이냐? 일족의 왕사라는 작자가 재물 때문에 동족을 버려?”
“네가 처음부터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고 뿔을 나에게 넘겼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녹색 완드를 보지 못했다며 나를 속였지. 믿을 수가 없는 계집이란 말이야.”
이오안이 이죽거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자벨라의 옷을 벗기고, 자기 옷을 벗어 이자벨라에게 입혔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이오안!”
“흐흐, 샬루는 네가 죽인 걸로 하자. 늪의 조언자가 여자 뱀파이어를 찾아다녀야 내가 숨어 지내기 편할 게 아니냐?”
이자벨라가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세상을 통째로 녹일 듯 이글거렸다.
이오안은 이자벨라의 시선을 피하며 할 일을 계속했다.
장신구까지 모두 이자벨라에게 넘겨준 이오안이 단검을 들었다. 그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잊지 않겠다, 이오안! 내가 죽어 악귀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너를……끄윽.”
이오안은 망설임 없이 이자벨라의 목을 찔렀다.
이자벨라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그녀의 가녀린 육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꾸륵…… 콜록……!”
목에서 흐른 피가 폐로 넘어갔다가 기침과 함께 역류했다.
이자벨라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왔다.
‘각하…… 나 좀 구해 줘요. 이대로 죽기 싫어요, 각하…….’
최후의 순간, 이자벨라는 테온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파에서 온 용사
이유 모를 불안
“잘 가거라, 이자벨라. 암혈의 재건은 내가 완수할 테니, 저승에서 선조들과 함께 지켜보거라. 너도 시간이 흐르면 내 심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오안은 짧게 읊조렸다. 이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족의 대망을 위한 것이라 되뇌였다.
그는 독백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은 마지막 양심을 지워 내는 듯했다.
이오안은 주문 각인 완드를 이용해 이자벨라의 시신을 불태웠다.
지글지글.
이자벨라의 육신이 마법 불꽃에 타들어 갔다. 기름기 없는 몸이라 그런지, 새카맣게 탄 피부가 과자처럼 부서졌다.
“옷과 장신구를 내 것으로 바꾸었으니, 늪의 조언자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자벨라를 찾아 헤매겠지. 얕은수지만, 늪의 조언자가 나를 찾아내는 걸 조금은 늦춰 줄 수 있을 터.”
지금 이오안에게는 하루하루가 귀했다. 카라히사르의 뿔이 그의 손에 들어왔으니, 필요한 건 오직 시간뿐이었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이 초록색 완드에 담긴 맹독 마법만 습득하면, 늪의 조언자가 아무리 많은 엘프 척살조를 보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이오안은 늪의 조언자가 남다른 능력을 지닌 엘프라고 알고 있을 뿐, 설마 푸른 용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런 어설픈 수작이 통할 것이라 믿었고, 과감한 배신을 저지를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암혈에게 필요한 것은 약해 빠진 여자 뱀파이어 한 명이 아니라, 압도적인 마법이 담긴 무기와 그 무기의 사용법을 알아낼 시간이다.”
이윽고 할 일을 마친 이오안이 박쥐로 변해 자리를 떴다. 카라히사르의 뿔이 손에 들어온 이상, 굳이 오비데우스와 적혈의 싸움을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지금부터 완드에 담긴 파멸의 마법을 연구할 것이다. 누구도 찾지 못할 은밀한 장소에서, 자기 손으로 복수를 이룰 만큼 완숙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이오안이 떠난 자리에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이자벨라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 * *
“뭐?! 오비데우스가 파라쿨라 성채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어?!”
나는 샬릿의 말에 경악하며 되물었다. 늪의 조언자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렇습니다, 테온 크로우. 당신은 지금 당장 파라쿨라 성채로 가야 합니다. 오비데우스가 적혈의 총공세를 견뎌 낸다면, 당신이 난입해 그의 숨통을 끊어야 합니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어서 공간이동을 준비해라. 파라쿨라 성채 내부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나?”
샬릿은 고개를 저었다. 샬릿과 샬린느가 가진 마법 실력으로는 파라쿨라 성채 인근까지 이동하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용과 뱀파이어가 싸우고 있다니, 테온의 이간계가 통했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처음 계획과는 약간 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경의 심계가 제대로 먹혔군!”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를 포함한 성직자들도 감탄을 터뜨렸다. 모두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만면에 웃음을 보일 만큼 상황이 좋았다.
“성직자들도 함께 가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마법의 힘을 빌려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속죄는 모든 싸움이 끝난 뒤 하겠습니다.”
우리는 엘프들의 공간이동에 몸을 맡겼다.
서너 번 연달아 공간이동이 펼쳐지고, 어느덧 황무지에 우뚝 선 파라쿨라 성채가 보였다.
“여기까지가 공간이동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음?”
말을 하던 샬릿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동시에 샬린느도 무언가 이변을 느낀 듯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 먼저 들어가시죠. 저와 샬린느는 주변을 좀 둘러보고 뒤따라가겠습니다.”
“갑자기 왜 그래? 이 주변에 볼일도 없잖아?”
“샬루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녀는 가스파르테를 만난 뒤 성채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말을 하던 샬릿이 갑자기 눈을 감고 파르르 떨었다. 늪의 조언자로부터 급한 텔레파시가 온 모양이었다.
샬릿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눈을 뜬 그녀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한쪽으로 달렸다. 그녀의 뒤를 샬린느가 쫓아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그러게나 말일세. 혼자 있던 샬루가 황무지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나?”
영문 모를 일이지만, 일행이 굳이 엘프들을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일단 파라쿨라 성채로 진입하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시점이 관건이다. 오비데우스가 적혈을 상대로 살아남는다면, 싸움이 끝난 직후 가장 지쳐 있을 때를 노려 쳐야 했다.
“들어가자.”
나는 파라쿨라 성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채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췄다.
-각하…… 나 좀 구해 줘요, 이대로 죽기 싫어요, 각하…….
‘……?’
손끝이 떨렸다. 가슴 한구석에 떨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영문 모를 일이지만, 나는 또렷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것은 ‘느꼈다’라는 추상적인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노강호의 직감은 때때로 신탁보다 정확한 법이지.’
사파무림에서 굴러먹길 수십 년, 나는 이 또렷한 불길함을 외면하지 않았다. 만사가 불여튼튼이라, 위험에 대비해서 나쁠 게 없다.
“……아우레오.”
“네, 테온.”
“성직자 중 일부는 엘프들을 따라가야겠어. 예감이 좋지 않다.”
“예감이요?”
밑도 끝도 없는 요구였다. 어찌 보면 성직자들이 맞이할 영광을 빼앗는 요구일 수도 있다.
용살의 순간이 눈앞에 있다.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할 업적이자, 신을 모시는 성직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명예로운 위업이 다가오고 있다.
성직자들은 당연히 파라쿨라 성채로 진입하고 싶지, 이 시점에 영문도 모른 채 엘프의 뒤를 쫓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으음, 테온의 예감은 잘 맞는 편인데…….”
하지만 다행히도, 아우레오는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녀석이었다.
그 역시 다른 성직자들이 엘프를 쫓아가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고, 결국 엘프를 쫓을 사람은 자기뿐이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테온. 테온이 그렇게 말한다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지요. 저는 엘프들이 달려간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아우레오가 결연하게 말했다. 다른 젊은 사제들이라면 모를까, 아우레오는 자기가 믿는 정의를 위해서 일신의 명예도 포기할 수 있는 사제였다.
“……나도 함께 가지.”
“테오도르 경?”
“엘프들이 급히 달려간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사제를 지키려면 성기사가 한 명은 따라가야지.”
테오도르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동행해 준다면 나도 한시름 놓을 수 있다.
“고맙다, 테오도르 경. 아우레오의 경호를 부탁하지.”
“걱정말게. 자, 그럼 당장 출발할까?”
테오도르의 물음에 아우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와 잠깐 눈을 맞추고, 이내 몸을 돌려 파라쿨라 성채를 빠져나갔다.
나는 나머지 여덟 명의 성직자를 이끌고 성채 내부로 계속 진입했다.
하지만 층을 오르는 동안 단 한 마리의 적혈귀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시각 성채의 모든 뱀파이어는 핏빛 대회랑에서 오비데우스를 향해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으니까.
* * *
샬릿과 샬린느는 바람 마법까지 시전해 가며 빠르게 달렸다. 두 엘프는 머지않아 성채 인근에 널브러진 샬루의 시체를 발견했다.
“샬루……!”
샬릿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샬루의 목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처의 형태를 보니, 뒤에서 날카로운 단검 따위로 찌른 다음 거칠게 비틀어 뽑은 모양새였다.
그 옆에는 새까맣게 타 버린 시체가 한 구 더 있었다. 워낙 훼손이 심한 탓에 누구 시체인지 한눈에 알 수 없었다.
“흐읍.”
숨을 깊게 들이마신 샬릿이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그녀의 오감이 남부에 있는 나후타야와 연결됐다.
“샬루가 정령의 세계로 돌아갔구나.”
샬릿의 입이 열리고, 나후타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후타야의 시선은 샬루를 지나 검게 탄 사체에 다다랐다.
사체는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불에 타지 않은 몇몇 장신구가 그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이오안의 시체인가? 하면, 그 어린 계집이 샬루와 이오안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건데…….’
어딘가 이상하다. 어린 뱀파이어 계집이 샬루와 이오안의 협공을 이겨 냈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오안의 시체를 굳이 불태웠다는 것도 이상했다.
‘어린 계집이지만, 어찌 됐건 어머니의 뿔을 손에 넣은 년이다. 예상외로 싸움에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도망치기 바쁜 와중에 굳이 왜 이오안의 시체를 불태웠을까? 그것도 이렇게 숯덩이가 될 때까지 말이야.’
나후타야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오안은 성급한 마음에 많은 것을 놓쳤다.
그는 나후타야의 집요함을 간과했고, 시신를 다른 곳에 숨기지 않고 바보처럼 불태운 채 남겨 두었으며, 결정적으로 나후타야의 진짜 정체를 몰랐다.
나후타야는 샬릿과 육체 공유를 잠깐 끊고, 요정숲에 있는 개구리의 몸으로 돌아와 현실 왜곡 마법을 펼쳤다.
일전에 오비데우스의 부탁을 받아 펼쳤던, 과거의 한 장면을 다시 돌아보게 해 주는 환상 마법이었다.
[카라히사르의 뿔은 너처럼 무식한 계집이 품기에는 너무 큰 보물이다. 그러길래 주제에 맞게 행동했어야지.] [흐흐, 샬루는 네가 죽인 걸로 하자. 늪의 조언자가 여자 뱀파이어를 찾아다녀야 내가 숨어 지내기 편할 게 아니냐?] [옷과 장신구를 내 것으로 바꾸었으니, 늪의 조언자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자벨라를 찾아 헤매겠지. 얕은수지만, 늪의 조언자가 나를 찾아내는 걸 조금은 늦춰 줄 수 있을 터.]얇은 수막 위로 이자벨라가 살해당하던 순간이 다시 펼쳐졌다.
나후타야는 그 모든 광경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았고, 샬루를 죽이고 어머니의 뿔을 훔쳐 간 범인이 이오안이란 걸 알았다.
“이 건방진 흡혈귀 새끼가…… 어머니의 뿔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서, 감히 나를 속이려 들어?”
분노한 나후타야는 다시 샬릿과 육체 공유를 시전했다.
하지만 이오안은 이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고, 잠시나마 그녀의 손에 돌아왔던 어머니의 뿔도 영영 찾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놈을 어디 가서 찾아내지? 이오안은 이자벨라와 달리 뿔의 가치를 아는 놈이니,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을 텐데.’
이오안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뿔에 담긴 카라히사르의 마법을 모두 익힌 다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후타야도 섣불리 이오안과 대적할 수 없을 터다.
샬릿의 몸을 빌린 나후타야가 대책을 고민하고 있을 때, 아우레오와 테오도르가 현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