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43
“샬릿, 샬린느! 여기에 있었군요.”
도착한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는 반갑게 인사하다가, 샬루의 시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엘프부터 테온까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더니, 정말 엘프 하나가 죽어 있었다.
“샬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이 까맣게 타 버린 사체는 또 누구고요?”
성직자들의 등장과 이어지는 질문에 나후타야는 기발한 생각을 해 냈다.
‘뱀파이어 추적은 인간 성직자들이 전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용이라는 걸 모르지.’
인간을 앞세우면 도망친 이오안을 빠르게 추적할 수 있을 터.
나후타야는 아우레오와 테오도르에게 거짓말을 시작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최후의 일격
나후타야는 샬릿과 육체 공유를 끊고, 텔레파시로 말을 전했다.
샬릿의 입이 열리고, 아름답지만 우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뱀파이어 잔당이 샬루를 기습해 살해했습니다. 흉수는 늙은 남자 뱀파이어인데, 섭리를 거스르는 마법을 사용하더군요. 이 불탄 시체가 보이십니까? 그자는 자기 동족마저 제물로 사용할 만큼 사악한 마법사입니다.”
“그럴 수가! 제물까지 사용하는 흡혈귀 마법사라니, 이보다 끔찍한 존재가 또 있을까요?”
아우레오가 경악했다. 테오도르는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도나이 교회의 성직자들이여, 늪의 조언자께서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부디 엘프를 살해한 뱀파이어를 뒤쫓아 주세요. 그를 처단하는 것은 단순한 복수를 넘어, 정의의 집행입니다.”
“과연 그렇군요. 그토록 사악한 존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테온이 불길함을 느낀 이유가 있었네요.”
아우레오는 당장이라도 흉수의 뒤를 쫓을 기세였다. 그는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테오도르 경, 함께 악의 뒤를 쫓아가실 거죠?”
테오도르는 잠시 현장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늪의 조언자로부터 큰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보답도 해야 하고.”
테오도르의 말에 나후타야가 소리 죽여 웃었다.
테오도르는 품에서 반으로 갈라진 구리 메달을 꺼냈다.
황야에서 적혈을 사냥할 때 쓰던 성물, 피의 길잡이 메달이었다.
웅웅웅…….
반으로 갈라진 성물이지만, 그 효용은 그대로였다.
피의 길잡이 메달에 신성력을 불어 넣자, 메달은 그새 꽤 멀리 도망친 이오안의 피 냄새를 감지했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떨림이 있군. 점점 잦아드는 걸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은 도망치고 있는 거야. 서둘러야 해.”
테오도르가 앞장서고, 아우레오와 샬릿이 뒤를 따랐다.
샬린느도 함께 가려는데, 나후타야의 텔레파시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추격은 샬릿에게 맡기고, 샬린느는 남부로 돌아와라. 샬루와 저 이자벨라라는 년의 시신을 여기로 가지고 와라.]샬루의 시신은 몰라도 뱀파이어의 시신까지 챙겨 오라니? 다른 사람이라면 의문을 품었겠지만, 샬린느는 군말 없이 나후타야의 명령에 따랐다.
“저는 샬루의 시신을 수습해 요정숲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 그렇게 하세요. 도망친 뱀파이어는 한 마리라고 하니, 우리 셋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아우레오는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샬린느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사체 두 구와 함께 공간이동을 펼쳤다.
‘뱀파이어 사체는 왜 챙겨 가지?’
경험 많은 테오도르는 엘프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여기서 혼자 생각해 봤자 답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샬릿과 아우레오를 이끌었다.
* * *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를 이룬다는 끔찍한 말이다.
‘시산혈해로군…….’
파라쿨라 성채의 핏빛 대회랑.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시산혈해였다.
넓은 대전에 적혈귀 사체가 언덕처럼 쌓여 있고, 그들의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피가 석재 바닥을 찰랑찰랑 덮고 있었다.
피비린내와 불에 탄 살점에서 나는 노린내가 뒤섞여 코를 간지럽혔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질퍽한 피가 신발에 스며들어 찔꺽대는 소리가 났다.
더 끔찍한 것은, 이만한 희생을 치렀음에도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르륵-!
오비데우스의 손을 떠난 불덩이가 사방을 휘저었다.
가스파르테를 비롯한 적혈귀 원로들은 가까스로 화룡의 불을 피하며 혈마법을 펼쳤다.
바닥에 고인 핏물은 수십 개의 창으로 변해 오비데우스를 공격했다.
솟구친 창은 대부분 용의 비늘을 뚫지 못했지만, 일부는 이미 생긴 상처를 통해 속살을 찔렀다.
“헉, 이 박쥐 새끼들……. 허억, 전부 죽여 버리겠다……!”
오비데우스는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뱀파이어를 향해 증오를 쏟아 냈다. 그는 수적 열세와 치명적인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싸웠다.
적혈의 뱀파이어는 가스파르테를 비롯해 원로 몇 명만 간신히 살아남은 상태였고, 그마저도 오비데우스가 화염 마법을 펼칠 때마다 한두 명씩 죽어 나갔다.
싸움의 끝이 보이는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붉은 용이 휘두르는 지옥 불을 막아 낼 방법이 없었고, 오직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헉, 허억, 오비데우스…… 여기가 네 무덤이다……!”
가스파르테 역시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핏발 선 눈으로 오비데우스를 저주했다. 그의 얼굴은 절반이 녹아내린 상태였지만, 싸움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파라쿨라 성채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오비데우스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다.
용인의 몸 곳곳에서 비늘이 떨어졌고, 꼬리는 뿌리쯤부터 잘려 나가 짤막해졌다. 한쪽 눈은 터져서 진물이 흘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반이나 뜯겨 나간 심장에서 계속 화룡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글부글……!
오비데우스의 가슴팍에서 또 한 방울의 화룡혈이 떨어지고, 바닥에 고인 피가 끓어올랐다.
싸움 초기에는 줄줄 흐르던 화룡혈이지만, 이제는 오비데우스가 격하게 움직일 때만 몇 방울 떨어질 뿐이었다.
그만큼 그의 체내의 혈액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 터.
“죽어라, 오비데우스!”
가스파르테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다. 바짝 세운 손톱에 진득한 혈마력이 흘렀다.
용을 향해 쇄도하는 흡혈귀 왕의 등 뒤로 원로들이 뒤따랐다.
‘가스파르테가 이번 공격으로 승부를 낼 셈이군!’
나는 기척을 숨기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지금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가만히 기다리면 저들은 서로의 생명을 계속 갉아먹을 것이다.
성직자들도 같은 마음인지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납작 엎드려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불의 안식!”
오비데우스가 외치자 그의 몸 주변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반구형 화염이 생겨났다. 고열로 몸을 보호하는 화염계 마법이었다.
‘굳이 시동어를 외치다니, 오비데우스도 어지간히 지쳤군.’
용은 인간이나 엘프, 뱀파이어와 달리 주문과 시동어를 생략하고 의지만으로 마법을 쏟아 내는 존재다. 하지만 아까부터 오비데우스는 일일이 시동어를 외쳐 가며 싸우고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가스파르테나 적혈의 원로들이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저 꼴이 된 지 한참 지난 모양이었다.
“지쳤구나, 오비데우스! 고작 이 정도 화력으로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독기를 품은 가스파르테가 앞을 가로막는 화염을 무시하고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불의 장막을 통과해 손톱을 힘껏 휘둘렀다.
휘잉-!
“앗!”
하지만 화염의 건너편에는 오비데우스가 없었다.
지금껏 계속 시동어를 외치던 오비데우스가 이번에는 시동어 없이 점멸을 사용한 것이다.
“처, 처음부터 이럴 셈으로 계속 시동어를……. 카악!”
놀란 가스파르테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오비데우스는 이미 가스파르테의 배후를 점한 상태였다.
치이익-.
쇳물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용의 손이 흡혈귀 왕의 등가죽을 뚫고 척추를 잡았다. 살이 타는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크흐흐흐, 건방진 새끼, 네가 감히 나한테 덤벼?”
가스파르테를 완전히 제압한 오비데우스.
그는 가스파르테의 머리를 밟고 척추를 힘껏 잡아당겼다.
“아악, 아아악!”
흡혈귀 왕의 척추가 조금씩 피부를 찢고 딸려 나왔다. 끔찍한 비명이 핏빛 대회랑을 가득 채웠다.
“왕이시여!”
“그 손 놓아라, 오비데우스!”
적혈의 원로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고, 오비데우스는 미련 없이 물러섰다. 이미 가스파르테는 회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흐흐, 싸우는 내내 라프란 포션을 처먹더니, 드디어 바닥난 모양이지?”
오비데우스가 웃으며 원거리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이 번갈아 움직이고, 백염과 적염이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적혈의 원로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공격을 피했지만, 중태에 빠진 가스파르테를 업고 용의 마법을 피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펑! 화르륵!
최후까지 버티던 원로들도 하나둘 오비데우스의 화염구에 맞아 재로 변했다.
오비데우스를 업고 뛰던 원로 몽티조는 땅에서 솟아난 용암 손아귀에 붙잡혀 두 발이 녹아 버렸다.
무릎 꿇은 몽티조와 그의 등에 업혀 사경을 헤매는 가스파르테.
두 흡혈귀 앞에는 이미 오비데우스가 서 있었다.
“너희를 죽이고, 너희 일족의 생존자를 마지막 한 마리까지 찾아서 박멸해 주마. 황무지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말이야. 크흐흐, 저승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봐라.”
“이 쓰레기 같은……!”
화르르르륵-!
몽티조가 내뱉은 마지막 욕설은 끝을 맺지 못했다.
오비데우스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맹렬한 화염이 몽티조와 가스파르테를 동시에 태워 버렸다.
화력이 어찌나 강한지, 둘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말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쿨럭……!”
적혈의 대를 끊어 버린 오비데우스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뱀파이어들의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그도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후우, 후우…….”
오비데우스는 숨을 고르며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심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상처는 마법으로 금방 치유할 수 있었다.
다만, 화룡혈을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체내의 마나가 회복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는 가까스로 주변의 마나를 긁어모아 치유 마법을 배열했다.
“파!”
갑자기 들린 외침에 거의 완성되어 가던 배열이 산산이 부서졌다.
오비데우스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내가 서 있었다.
“잘 지냈어? 이렇게 또 만나네?”
“테, 테온 크로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비데우스의 눈에 공포가 드리웠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지상에 두려울 게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분노보다 공포가 앞서는 신세다.
“네가 여길 어떻게……!”
“내가 말했지? 널 죽여 버릴 거라고.”
푸욱!
오비데우스가 채 한마디를 뱉기도 전에 운철묵검이 놈의 목을 관통했다. 절망이 용의 머릿속을 뒤덮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