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il Returns to School Days RAW - chapter (203)
에필로그, 새로운 삶 (2)
2년 전.
김판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사람들은 명진건설이 앞으로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명진건설은 일반인들이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상장 회사는 아니나, 만약 그럴 권한만 존재한다면 김판호 테마주로 분류될 만한 조건을 갖추었다. 골든 게이트를 이끌었던 일등 공신 중 하나. 게다가 김현성이라는 연결 고리가 존재하다 보니, 그리 예상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새로운 정부가 아직 진통의 시기를 겪고 있을 때, 고명진 회장이 기자 회견을 진행했다.
“골든 게이트 사태를 지켜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부정부패는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고, 골든 서클같이 극악무도한 집단을 향해 손가락질하기에는 저 또한 깨끗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번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에 사활을 걸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저는 그 뜻에 동감하며, 명진이 저질렀던 비리를 자진하여 공개하고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청렴결백한 회사로 거듭나겠습니다.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 국민 여러분이 명진에 보내 주는 관심과 사랑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공개될 비리 내역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충격적인 행보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말했다.
굳이, 왜.
비리를 먼저 공개하는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이느냐고.
정부의 비호를 받을 것이 분명한데도, 명진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갔다.
실제로 명진은 내부 문서를 공개했다.
그동안 수주를 위해 사용했던 불법적인 자금 흐름, 업계에서는 관행이라고 통용되는 만행에 관련한 증거들. 한바탕 난리가 났다. 명진이 건설 업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명진건설은 거액의 벌금을 때려 맞는 상황에도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청약 몇 자리를 빼 주는 등, 좋은 이미지를 완전히 망쳐 버릴 수도 있는 문제도 공개해 버렸다.
평판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건 자충수(自充手)가 명백했고, 사람들은 더는 명진을 향해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저는 오늘부로 회장직을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책임을 지고, 고명진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는 고창범이 물려받았다.
고창범 또한 과거가 낱낱이 파헤쳐졌기에, 그가 흔들리는 명진을 지탱할 적임자라고 보지는 않았다. 명진의 아이덴티티는 고명진 회장의 장인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 새로운 미래를 맞이한 지금, 명진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명진은 대체 왜.
스스로 무덤을 팠을까.
그건 내부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진실이었다.
김현성은 복수만이 아닌 새로운 삶을 결심했고, 고민 끝에 대학보다는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수능 만점이라는 성적과 골든 서클을 무너트릴 정도의 무력에 재능을 적극적으로 살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김현성은 둘 다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김현성이 바라는 것.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삶이었다.
김현진이 대학에 진학하고 할머니가 일을 그만두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생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것 또한 학생으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삶이라고.
하지만 식물인간으로 살던 시절, 병실에서 생명만 연장하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던 가족의 흐느낌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들을 위한 삶을 사는 것 또한. 김현성이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었다.
고창범에게는 기회였다.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우스울 정도로, 그는 매일같이 김현성을 찾아가서 같이 일을 하자고 말했다.
조건은 후했다.
억대의 연봉뿐만 아니라, 회사의 주식까지.
임원에 해당하는 조건이었다.
그만큼 고창범은 김현성이 필요했고, 매력적인 제안임을 인정하고 조건을 달았다.
“제가 명진에 입사하면 제 계획을 전적으로 따라 주셔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명진의 행보.
김현성의 계획이었다.
고창범은 무지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명진과 임원을 설득하는 자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골든 게이트는 단순히 단발성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김판호 정부에서는 사회 고발이 일상처럼 벌어질 것이고, 골든 게이트와 관련하여 복잡하게 얽혀 있는 비리 관계가 낱낱이 파헤쳐져 그 죗값을 치르겠죠. 그러니 매를 맞아도 먼저 맞아야 합니다. 죄가 발각되는 것과 자백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며, 단기간은 명진이 가혹한 순간을 보낼지언정 절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집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회사의 비리가 아니라, 회사가 공급하는 집이 얼마나 퀄리티가 높냐입니다. 만약 원가를 절감하고 퀄리티를 낮추는 부류의 비리라면 분명히 치명적이겠지만, 저희가 공개할 비리는 구매 심리와는 철저하게 분리될 확률이 높습니다. 결국에는 ‘세월’이 명진의 가치를 증명하겠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야 했다.
김현성이 일반 고등학생이 아닌 것은 모두가 알았고, 실제로 김판호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강동철의 칼끝은 목표물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김현성일지라도, 그리고 명진건설일지라도. 그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칼을 겨눌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김현성은 아파트 청약도 반납했다.
사실 죽음을 각오했을 때는 집이라도 남길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살아갈 앞날을 생각한다면 굳이 그런 이득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벌어들일 돈은 훨씬 대단할 것이기에. 복수에 눈이 멀어 무소처럼 나아갈 때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더한 미래를 내다보며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고명진 회장의 자진 사퇴는 본인의 선택이었다.
처음에는 안고 갈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늙어 버린 자신을 대신해 고창범을 믿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의 시선은 김현성에게 머물렀다. 김현성이 있기에, 그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첫 1년.
예상했던 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도 명진은 본분을 잊지 않았다.
벌금으로 인해 금전적인 압박을 받는다고 한들, 건물의 퀄리티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그리고 명진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라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하자 보수를 철저히 보장했다.
씨앗을 널리 뿌렸다.
그렇게 2년이 지났을 즈음.
마침내 효과를 발휘했다.
그 시작은 대대적인 하자 문제였다.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기 때문일까요? 원자재 가격도 덩달아 상승함에 따라, 그동안 건설사들은 가격에 걸맞은 퀄리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익을 높이고자 원자재를 절감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돌아오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하자 건수가 급격하게 상승할 뿐만 아니라, 각종 사고로 인해 입주민들은 불안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어디는 금이 가고.
어디는 철근이 튀어나오고.
어디는 주차장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의 불만이 증폭되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하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은 명진건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명진건설은 노를 저었다.
비리 사실을 밝혔는데도 정부는 명진에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명진의 건물을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다 보니 지난 2년간의 손해를 단번에 만회했다. 그야말로 명진의 시대가 열렸다. 퀄리티에 대한 믿음 하나로 압도적인 이미지를 구축했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명진을 대기업으로 불렀다. 실제로 쏟아지는 일거리와 매출이, 대기업에 걸맞은 수준에 올랐다.
과거의 실수를 딛고 일어난 명진.
사람들은 말했다.
고창범 회장은, 전대 회장인 고명진의 뒤를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이어받았다고 말이다.
* * *
최근 고창범은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았다.
명진건설의 회장이기도 했지만, 미디어에 노출될 때마다 이상적인 인터뷰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까.
고창범의 현실은 안과 밖이 다르다는 것을.
“……미안해.”
고창범이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힐끗 상대를 확인했다가, 김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김현성이 말했다.
“회장님. 아니, 형. 제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제는 지방의 중소기업 후계자가 아니라, 건설 업계에서 인정하는 대기업 회장이라고. 형이 인터뷰에서 기분에 취하듯 내뱉은 공략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당장 지금은 별문제가 없더라도 서서히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을 거예요.”
“……명심할게.”
“진짜 사과는 빠르다니까.”
조금 전.
공식적인 인터뷰 일정이 있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질문을 받는 자리였는데, 고창범은 사람들이 원하는 요구 사항을 덥석덥석 받아들였다.
실무자로서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로, 돌아오는 차에서부터 지금까지 고창범은 신명 나게 털렸다.
“그리고 정부와는 최대한 거리를 떨어트려요. 지금이야 김판호 대통령이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있지만, 레임덕(lame duck)은 반드시 찾아올 거예요. 제가 아는 강동철 검사는 절대 김판호 대통령의 좋지 않은 과거를 그냥 좌시할 인물이 아니에요. 우리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적극적으로 그 배경을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자립하기 위해서임을 명심해요.”
“알겠어.”
“……그것 빼고는 인터뷰 좋았어요. 참 이상하게, 예전부터 인터뷰 하나는 정말 잘한단 말이야.”
“그래? 내가 회장 체질이라서 그런가.”
고창범이 방긋 웃었다.
밖에서는 나름대로 근엄한 회장으로 통했지만, 김현성 앞에서는 순한 양이나 다름없었다.
고창범은 스스로의 그릇을 알았다.
자신이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지금도 명진건설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모두 김현성 덕분이었다.
그래서 김현성에게 억대의 연봉과 회사 지분을 퍼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김현성이 아니라면 누릴 수 없는 것들. 고창범은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김현성은 명진을 택했다.
명진이라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이상적인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창범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아, 맞아. 현성아. 혹시 여자 소개받지 않을래? 이번에 대기업 사교 모임에 갔는데, 거기 회장이라는 사람이 은근슬쩍 네 얘기를 하더라고. 자기 손녀를 소개해 주겠다고. 알아보니까 학벌도 좋고 얼굴도 엄청 예쁘던데?”
“……제가 고졸에 흙수저인 건 알고 있대요?”
“알다마다. 그딴 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 바닥에서, 네가 명진의 핵심 인물인 건 유명한 사실인데. 네가 소개받겠다고만 하면, 거기 회장은 두 팔 벌려 반겨 줄걸?”
고창범의 말처럼.
일반인들은 모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업계에서는 김현성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명진의 브레인.
지금의 명진을 만들어 낸 핵심적인 인물.
사방에서 러브콜이 쇄도했다.
골든 게이트 사건을 터트렸다는 사실도, 김현성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치장하는 업적이 되었다.
뭐가 되었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남자이지 않은가.
김현성이 피식 웃었다.
“됐어요. 지금은 관심 없어요.”
걸음을 옮겼다.
이만 회장실을 빠져나가려다가,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창범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 오늘 저녁에 집에서 밥이나 먹을래요?”
* * *
김현성의 집.
대산의 고급 아파트인 노블레스였다.
명진에서 만든 브랜드이자 청약을 받았던 아파트였는데, 김현성은 청약의 권한을 반납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매매했다. 명진에서 2년간 받은 연봉으로 대출을 포함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김현성의 가족들은 지하를 벗어날 수 있었고, 내부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대리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할머니, 저 왔어요.”
“우리 창범이 왔구나!”
고창범이 휴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살갑게 들어서자, 할머니는 익숙한 얼굴로 고창범을 반겨 주었다.
고창범의 방문.
종종 있는 일이었다.
삼고초려를 할 때 매일같이 집 앞을 서성였던 일을, 할머니는 요새도 우스갯소리처럼 언급하고는 했다.
“이게 다 뭐야. 상다리 휘어지겠네.”
거실 한가운데.
진수성찬이 세팅되어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김현진을 위해서였다.
김현진은 2년 전에 당당하게 한국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겠답시고 1년을 홀라당 날려 버렸다. 사실상 다시 1학년을 다녀야 하는 수준.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어디서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가 활약하는 다큐멘터리에 꽂혀서는 군대 입대에만 또다시 1년을 날려 버렸다. 본인과 같은 나이인 친구들이 벌써 전역하고 복학을 생각하고 있을 때, 김현진은 이제 막 밀어 버린 빡빡머리를 내세워 정말 오랜만에 휴가를 나왔다.
“현진이, 근육 봐라. 이제는 상남자가 다 됐네.”
“형. UDT가 뭔지 알아요? 이 근육 보이죠? 이게 바로 UDT 평균이에요.”
근육을 자랑하는 김현진과 호응하는 고창범.
먼저 도착한 김시우는, 둘이 떠들든 말든 분주하게 움직이며 할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는 김현진보고 철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대에 입학했다고는 하나, 2년을 그냥 날려 버렸으니 말이다.
김현성은 괜찮았다.
오히려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그래도 돼. 내가 있으니까, 네 인생을 조금 허비하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해. 후회가 남지 않도록.”
뒤가 있는 삶.
악착같지 않아도 되는 삶.
김현성은 김현진에게 그런 삶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보기 좋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에, 김현성은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걸음을 돌렸다.
밝은 공간을 뒤로하고.
김현성은 잠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 *
캄캄한 방 안.
김현성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
털썩.
과도한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문득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전생이 없던 일처럼 느껴졌다.
복수에 악이 받쳐, 이를 아득바득 갈며 오로지 복수에만 매몰되었던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
괴리감이 일었다.
그때의 기억은 정말 경험한 일인 걸까.
지금의 자신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핸드폰을 들었다.
컴컴한 방을 비추는 불빛에, 김현성은 연락처 목록을 내려보다가 한 이름에서 손을 멈추었다.
[배성호]연락하고 싶었다.
한때는 윤현민의 몰락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기에, 그에게 윤현민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윤현민이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다면. 자신은 분명 상당한 만족감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야.”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가해자들에게 확실한 복수는 그들의 몰락과 더불어 피해자인 자신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더는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윤현민이라는 존재를 잊은 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누구나 그렇듯.
김현성은 행복할 자격이 있었다.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누릴 것이다.
김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자.
“할머니, 뭐 도와줄 거 있어?”
거실에서 비추는 환한 불빛이 김현성을 포근히 감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