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54
신탁을 받은 기사가 신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출정하겠다는데, 대주교란 작자가 거기다 대고 뭐라고 트집을 잡겠는가?
이런 경우에는 축복과 응원을 실어 주는 게 대주교의 올바른 역할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지? 발목 잡을 생각일랑 말아라, 율리오. 이 몸은 당장이라도 중부를 떠나야겠다.’
대주교의 복잡한 표정을 보며 속으로 웃고 있을 때, 아우레오가 다가와 속삭였다.
“테온, 남부에 등장한 아크리치는 우리를 습격했던 그 리치가 아닐까요?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탈취해 간 검은 리치요.”
“그러고 보니, 그 리치는 평범한 리치보다 훨씬 강했다고 했지?”
성직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오덴세섬에서 그놈과 손을 섞으며 실력을 대강 파악한 상태였다.
‘그놈이 동방의 괴수 군단을 혼자서 쓸어버릴 정도인가?’
검은 로브를 두른 리치는 빠르고 강했지만, 혼자서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정도의 화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전령, 남부에 등장한 리치의 생김새가 어떻다고 하더냐? 복장이나 기타 외관상 특징은 없나?”
“있습니다. 놈은 알몸으로 나타났는데, 특이하게 백골 상태가 아닌 피육이 온전한 몸을 갖고 있었습니다. 긴 적발을 휘날리는 모습이 인간 여성과 비슷하다더군요.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무척 아름다운 외모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장내의 성직자와 귀족 들이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피육이 멀쩡하고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있단다. 게다가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라니? 평범한 리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건 리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마녀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사용하는 마력이나 마법의 특성이 리치 특유의 흑마법이었습니다. 현장을 직접 목격한 개척 사제의 판단이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으음, 아크리치는 원래 외모가 다른가……?”
성직자들은 남부에 등장한 리치가 아크리치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듯했다.
리치답지 않게 강력한 전투력이나, 남다른 외모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아크리치라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었다.
“우리를 습격한 검은 로브의 리치도 말도 안 되게 강했는데, 그보다 더 강한 언데드가 나타나다니…….”
테오도르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검은 로브의 리치에게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탈취당한 일로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한술 더 뜨는 강적, 아크리치가 등장한 것이다.
아우레오도 한껏 심각한 얼굴로 귓가에 속삭였다.
“테온, 남부로 출정하시려거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시일을 잘 골라서 가는 게 좋겠어요. 무턱대고 싸우기엔 너무 위험한 상대예요.”
“칼 한 자루 들고 가면 되지, 준비는 무슨. 우린 전쟁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몬스터 한 마리를 잡으러 가는 거야.”
“아크리치는 그렇게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니까요? 저희를 습격했던 리치만 해도 엄청나게 강했다고요.”
“아크리치고 나발이고, 결국 언데드잖아? 사체로 만든 몬스터 따위가 아무리 강해 봤자 용에 비할까.”
아우레오는 진중하게 충고했지만, 나에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한번 상대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 리치는 내 적수가 아니었다.
‘정황상 남부에 등장한 아크리치는 오비데우스의 분신으로 만든 새로운 리치일 확률이 높다.’
특히, 붉은 장발을 휘날렸다는 점이 추론에 설득력을 더했다.
여성의 외모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오비데우스는 송옥처럼 고운 얼굴을 가졌으니 멀리서 보면 여인으로 오인할 만하다.
용의 본체도 아니고, 고작 분신으로 만든 리치란 뜻이다.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귀혈의 뱀파이어를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했지? 그럼 결국 뱀파이어 언데드인 셈이군. 평범한 리치보단 강할지 모르겠으나, 결국 내 적수는 아니다.’
이 몸은 화경의 검객이자 백오십 년이 넘는 내력을 보유한 내가고수다.
반면, 리치는 흑마법에 능할 뿐 신체 능력은 형편없었다.
뱀파이어도 딱히 육체가 강한 종족은 아니니, 인간으로 만든 리치와 비교해서 유의미한 차이는 없을 것 같았다.
‘여러모로 따져 봐도 내가 몇 수 위다. 오덴세섬에서 싸울 땐 그놈이 기습적으로 스크롤을 사용하는 바람에 도주를 막지 못했을 뿐이지.’
그때와는 다르다.
약점을 이미 알고 있으니, 다시 싸우면 순식간에 달라붙어 승부를 낼 자신이 있었다.
“크로우 백작 각하의 말이 맞네. 용살기사의 앞길을 한낱 언데드 리치가 막아설 수는 없지.”
율리오 대주교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방금까지는 말리더니,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출정을 독려했다.
“남부에 등장한 리치가 정말 아크리치라면, 응당 처단하고 그 영광을 누려야 하네. 빛의 종을 자처하는 우리가 악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나?”
‘뭐야, 이 영감탱이. 노망났나?’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이 낯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주교는 말을 이어 가며 조건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각하의 단독 출정은 반대네. 그건 너무 위험해. 대신 대교구에서 성기사단을 내줄 테니, 그들과 함께 출정하게.”
율리오 대주교는 교묘한 화법으로 나와 대교구를 엮었다.
나는 순전히 내 결심에 따라 남부로 출정하는 것인데, 저런 식으로 말하니 내가 대주교의 명을 받들어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꼴이 되었다.
게다가 성기사단과 함께 가라니? 그가 무슨 성기사단을 붙여 줄지 뻔히 보였다.
‘전에 말했던 백장미 성기사단을 딸려 보내겠지?’
대주교가 내게 단장직을 맡아 달라고 청했던 바로 그 성기사단이다.
남부까지는 말을 타고 가도 몇 달이나 걸리는 먼 길이니, 긴 시간 함께 숙식하다 보면 내가 얼렁뚱땅 그들의 대장 노릇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
‘허, 생긴 건 묘웅(猫熊, 판다) 같은 놈이 하는 짓은 여우가 따로 없네.’
물론 율리오 대주교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서 출정할 수도 있다.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막무가내로 떠나 버리면 대주교라고 별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대주교의 호의를 자꾸 거절하면 중부 대교구의 사제들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지금껏 공들여 쌓아 온 아도나이 교회와의 우호 관계에 균열을 만드는 셈이다.
“……좋다. 대교구의 성기사단을 내준다니, 감사한 일이군.”
“하하, 감사는 무슨. 대주교로서 그 정도는 응당 해야지.”
‘뻔뻔한 넉살은 이번 한 번만 참아 주마. 하지만 조심해라, 율리오. 나를 이용해 먹으려던 놈들은 하나같이 끝이 좋지 못했으니까.’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직은 대교구로부터 얻을 게 많으니,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언젠가 대교구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겠지. 그래도 최소한 쓸 만한 성물 몇 개는 받아 낸 뒤에 갈라서야 할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내 표정은 본 율리오 대주교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노사제가 성직자 총회 개최를 건의했다.
“대주교 예하, 성직자 총회를 여는 게 어떻습니까? 요정숲에서 일어난 전투와 관련해서, 정보를 종합하고 교회의 대응 수위와 방안도 논의해야 하니까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대주교의 이름으로 총회를 개최할 테니, 부제들은 지금 즉시 르망의 모든 교회에 전서조를 띄우세요.”
율리오는 기다렸다는 듯 총회 개최를 못 박고 소집령까지 내렸다. 달갑지 않은 전개였다.
‘성직자 총회가 열리면 최소 하루는 통으로 날아갈 텐데……. 출정도 그만큼 늦어질 것이고.’
요정숲에 숨어 있는 리치가 하루 이틀 차이로 이사를 가진 않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했다.
중부 생활이 성격에 안 맞기도 하고, 한시라도 빨리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되찾고 싶었으니까.
‘이럴 때 아도나이가 신탁을 내려 주면 좋을 텐데. 시간 끌지 말고 당장 남쪽으로 가라고 말이야.’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총회를 건의한 노사제가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르망의 성직자들이 모두 모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리는 동안 아도나이께 신탁을 청해 봅시다. 정말 아크리치가 나타났다면 지상에 큰 재앙이 닥친 것이니, 그분께서 무언가 말씀을 주실지도 모르지요.”
“신탁을 청해서 받을 수도 있나? 천상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줄 알았는데?”
“흘흘, 그건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경.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지만, 저희가 먼저 아도나이께 말씀을 청할 수도 있지요.”
신탁은 각 교구에 비치된 성수반(聖水盤)을 통해 전해진다. 그릇에 담긴 성수가 진동하고, 그 위로 빛나는 글자나 그림이 떠오르는 식이다.
하지만 중부 대교구는 성수반 외에도 신탁을 얻는 수단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구경을 하겠군.’
어차피 성직자 총회가 끝나기 전에는 출정도 할 수 없으니, 나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성직자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신탁을 받으러 가는 장소는 대교구의 안뜰, 대성원상(大星圓像) 앞이었다.
* * *
대교구 안뜰에 들어서자, 잘 정돈된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중정(中庭)에는 색색의 화초가 자라고, 연못에는 살찐 고기들이 여유롭게 유영했다.
중앙에는 흰 대리석을 깎아 만든 대성원상이 우뚝 서 있었고, 주변으로 은은한 광채와 꽃향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그 옆에, 웬 거지꼴의 소녀가 나비를 쫓으며 놀고 있었다.
‘쟨 뭐야?’
대교구 안뜰에 출입하는 걸 보면 지체 높은 인물의 여식일 텐데, 옷이라고는 하얀 소복 차림에 심지어 맨발이었다.
소녀의 풀어 헤친 머리칼은 땀에 젖어 얼굴과 목에 달라붙었고, 손톱은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깨끗한 인상을 풍겼는데,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면 투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은하(恩下), 오늘도 정원에 계셨군요. 가을바람이 쌀쌀한데요.”
“어머, 대주교 예하. 공개 예배 시간이 아닌데 안뜰에 오시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요?”
“크흠, 무슨 그런 말씀을…….”
소녀가 대놓고 면박을 주었지만, 율리오 대주교는 얼굴을 붉히며 말꼬리를 흐릴 뿐이었다.
‘큭큭, 대주교한테 저따위로 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네.’
이어서 율리오 대주교가 소녀를 소개했다. 예상대로 소녀는 지체가 높은 인물이었다. 아니, 단순히 지체가 높은 정도를 넘어서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신분이었다.
“인사하시게, 각하. 이쪽은 우리 교회의 당대 성녀(聖女)이신 성(星)요한나 은하시네.”
“성녀?”
성녀라면 일전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세상에는 종종 아도나이와 직접 소통하는 소녀가 태어나는데, 교회는 그 아이를 성녀라 칭하고 특별하게 대우했다.
성녀가 교회 내에서 행정권이나 명령권을 가진 건 아니지만, 직책이 갖는 위상이나 발언의 권위는 대주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소녀라더니, 생각보다 더 어린 계집이었군. 생긴 것도 고위직에 어울리지 않고.’
당대의 성녀 요한나는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소녀였다.
첫인상은 맑고 투명했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어린아이답지 않게 볼이 홀쭉하고 팔다리도 가늘어 박복한 인상이었다.
“반갑다. 나는 오덴세의 영주 테온 크로우 백작이다.”
“헤, 테온 크로우요? 능태오가 아니고요?”
“……?!”
사파에서 온 용사
세 가지 신탁
능태오.
분명 능태오라고 했다. 놀라울 만큼 정확한 발음이다.
요한나의 돌발 발언은 내가 이 세계에서 들은 어떤 말보다 충격적이었다.
너무 예상 밖의 말인지라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호호, 아니에요, 예하.”
율리오 대주교의 물음에 성녀 요한나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이어 갔는데, 그 목소리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크로우 백작 각하는 생각보다 어린 청년이었군요. 생김새도 용살기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고요. 첫인상은 강하고 예리했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기사답지 않게 턱이 작고 체구가 가벼워서 약해 보이는 인상이에요.”
‘이년 봐라? 독심술까지 써?’
성녀 요한나는 내가 했던 생각을 똑같은 순서로 비꼬아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숨 쉬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법인가? 아니, 교회의 주요 인물이니 마나를 다루진 않을 테고, 신성력을 활용한 재주인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요한나의 체내에서는 마력이나 신성력이 움직이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마법도, 신성력도 아니라면…… 성녀의 고유 권능인가?’
사제들이 길을 잃지 않는 것처럼, 성녀는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계집이군.’
독심술이라니, 경우에 따라서는 용보다 더 불편한 상대다.
나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다. 내 측근 중에는 뱀파이어도 있고, 오크도 있다. 때로는 지박령과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다.
당장 나부터도 중원에서 차원 이동한 인물이니,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섭리를 벗어난 존재인 셈이다.
‘이 계집은 내 과거를 전부 꿰뚫어 볼지도 몰라.’
과거를 알 수 있다면 현재의 상태도 알 수 있을 터. 내가 마법사나 데스나이트, 심지어 용의 마력까지 흡수해 재활용하는 괴물이란 걸 세상에 폭로할지도 모른다.
‘성녀는 나에게 위험 요소다.’
마음속에 살심이 스멀스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