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56
그놈이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훔쳐 갔으니 도로 가져오려는 것뿐이지, 굳이 싸울 생각도 없었다.
‘리치의 배후에는 푸른 용이 있을 터. 하수인이 위기에 처하면 푸른 용이 직접 싸움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가능하면 피해야 할 싸움인 셈이지.’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성직자들도 원정군의 세부 편성을 마쳤다.
그들은 한참 설왕설래한 끝에, 두 개의 성기사단과 하나의 전투 사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굵직한 문제를 다 해결했지만, 성직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앉아 있었다. 마지막 안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부의 화룡을 처단한 용사들에게 줄 포상을 정해야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저와 성녀 은하가 결정했겠지만, 이왕 성직자 총회를 개최한 김에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대주교의 말은 나를 기쁘게 했다.
중부를 급히 떠나게 되었으니 포상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대주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예하. 목숨을 걸고 용살의 업적을 이룬 성직자에게 마땅히 상을 주어야지요.”
꼬장꼬장한 노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비록 오비데우스의 사체는 리치에게 빼앗겼지만, 용살의 공적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포상은 뭐니 뭐니 해도 황금이 좋겠지요. 서부 원정에 나섰던 정예 성직자들에게 각각 금화 일천 닢씩 하사하면 적절할 듯합니다.”
“용살의 영웅들에게 주는 포상이 고작 금화라니요? 금화 일천 닢은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더해서 패물과 칭호도 하사해야 마땅합니다.”
귀를 의심할 만한 대화가 오갔다. 금화 일천 닢이라니? 과연 대교구의 부(富)는 상상을 초월했다. 중부의 알토란 같은 땅을 독차지한 교회다웠다.
‘천 닢이면 거의 십 관(37.5kg)이 아닌가? 일 인당 황금 십 관을 기본으로 준다니, 돈이 썩어 넘치는 자들이로군.’
아우레오와 테오도르를 포함해 오비데우스 척살에 참여한 정예 성직자는 무려 열 명이다. 나까지 포함하면 열한 명이니, 포상으로 줄 황금만 백십 관에 달한다. 어지간한 대영주도 함부로 쓸 수 없는 돈이다.
하지만 중부 대교구의 고위 사제들에게는 그것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황금과 패물만으로 용살의 공적을 치하할 수 있겠습니까? 대주교 예하, 용사들에게 마땅히 성물을 하사해야 옳습니다.”
“으음, 리마리오 사제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열한 개의 성물을 한 번에 하사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인데요.”
한 노사제의 주장에 율리오 대주교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두툼한 손가락이 말랑말랑한 턱살을 조물거렸다.
“주요 공적자 세 명에게는 성물을 하사하고, 다른 이들은 축복받은 무구를 주는 게 어떻습니까?”
“주요 공적자 세 명이라 하시면……?”
“모두가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굳이 일등 공신 셋을 뽑자면 크로우 백작 각하와 테오도르 경, 아우레오 사제가 받아야 마땅할 할 것입니다.”
노사제 리마리오의 의견에 다른 성직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용의 목을 직접 벤 사람이니 당연히 일등 공신이고, 아우레오는 맨 처음 서부 출정을 결심하고 이끈 사람이었다.
‘테오도르는 말할 것도 없지. 서부에 도착한 뒤 실질적으로 성직자들을 지휘했으니까.’
용을 무찌른 성전(聖戰)에 일등 공신과 이등 공신을 구분한다는 게 부적절해 보일 수 있지만, 중부 대교구는 이미 종교 단체를 넘어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지극히 귀족적인 사고방식으로 논공행상을 진행했고, 결국 리마리오 사제의 의견이 채택됐다.
“황금은 즉시 지출하겠습니다. 성물은 제가 따로 성녀 은하와 논의한 뒤 품목을 정해 하사하겠습니다. 각자에게 유용할 만한 성물을 신중히 골라야겠군요. 수여식은 원정군 출정식을 겸해 거행하겠습니다.”
‘빌어먹을, 하사할 성물을 정하고 출정 행사까지 치르려면 적어도 이틀은 더 걸리겠군.’
느려 터진 관료식 일 처리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부를 겨누라는 신탁이 내려왔는데, 당장 출정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고 호통치고 싶지만…….
‘호통치기에는 너무 큰 돈이다.’
얻을 게 없다면 모를까, 황금 십 관에 더해 성물까지 준다는데 마다하고 떠날 수는 없었다.
* * *
남부 원정군 파병이 결정되고, 그 소식은 곧장 나후타야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는 개구리밥 위에 앉아 볼을 부풀리며 고민했다.
‘검을 들어 남쪽을 겨누라니? 아도나이가 미쳤나? 이건 인간들에게 남부 정벌의 명분을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남부는 푸른 용의 영역이다. 고대부터 그래 왔고, 아도나이와도 맹약으로 확정한 사실이다.
한데, 그 미지의 땅에 인간의 군대가 발을 디디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도나이의 신탁에 기대서.
‘이건 아도나이가 용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도나이 이 자식,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일족을 끝장낼 생각인가? 대체 왜?’
꾀가 많은 나후타야조차 아도나이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중부를 차지한 인간들은 최근 북부까지 세력을 넓혔다.
오비데우스와 적혈이 공멸했으니, 서부도 조만간 인간들 세상이 될 게 뻔하다.
지금 대륙에는 인간들이 정착할 빈 땅이 넘쳐 난다.
아도나이가 굳이 무리수를 두어 가며 남부를 공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태생은 천해도, 어쨌거나 아도나이는 신이 되었다. 천상에서 한자리 차지한 놈이 신탁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고대의 맹약은 용들에게만 제약을 거는 게 아니다.
인격을 벗어나 신격을 얻은 아도나이에게도 그에 합당한 제약이 생겼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진실의 멍에’였다.
신이 지상에 전하는 음성은 반드시 진실이어야 한다.
아도나이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신탁을 내리는 이유도 만약의 경우 빠져나갈 구멍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말장난에도 한계가 있으니, 완전한 거짓이나 턱도 없이 허황한 말은 신탁으로 내릴 수 없다.
‘게다가 뭐? 다섯 천사가 오리라?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지상에 천사를 다섯이나 내려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도나이가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그런 짓을 벌이고 무사할 순 없다. 인과율에 의한 대가는 신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니까.
‘진짜 천사가 다섯이나 강림하진 않겠지만, 신탁까지 내린 걸 보면 그 비슷한 일이라도 벌어진다는 뜻일 텐데. 젠장, 도저히 모르겠다.’
나후타야는 답답했다. 감히 하찮은 인간들이 철 쪼가리로 만든 옷을 입고 그녀의 땅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늪지대에 숨어 가짜 신분으로 살아온 그녀지만,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하등 생물을 보고 있으니 꾹꾹 눌러 왔던 용의 파괴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감히 남부 땅을 밟기 전에 길목에서 분쇄해 버리고 싶지만…….’
나후타야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아직은 참아야 할 때다.
최소한 신탁에 나온 다섯 천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섣불리 싸움에 나설 수 없다. 천사가 아니라 성인(聖人)급 성직자만 등장해도 싸움에 큰 변수가 생긴다.
‘나는 어차피 남부를 벗어날 수 없으니, 엘프들을 보내야 하는데……. 애매한 숫자를 보내 봤자 원정군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하겠지.’
원정군은 다수의 전투 사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서 성인까지 등장한다면?
엘프들의 조잡한 자연 마법은 물거품처럼 흩어질 것이다.
‘성인의 막강한 신성력을 뚫고 마법으로 한 방 먹여 주려면 이자벨라 정도는 보내야 하는데…….’
지금 이자벨라를 대교구와 싸우게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가장 강대한 적, 동방의 검은 용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와중에 최고 전력을 엉뚱한 곳에 배치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자벨라와 중부 대교구는 상성도 안 좋아. 아크리치가 언데드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근본이 흑마법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
원정군을 분쇄하라고 이자벨라를 보냈는데, 만에 하나 진짜 천사가 강림하거나 성인이 여러 명 등장한다면? 힘들게 완성한 아크리치가 허무하게 소멸할 우려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급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후타야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늪의 조언자라는 그럴싸한 신분 뒤에 숨어 시간을 끌 계획을 세웠다.
다른 용들과 달리, 나후타야에게는 인내심이 있었다.
홧김에 일을 벌이지 않고, 침착하게 세 치 혀를 놀려 상황을 푸는 게 그녀에게 익숙한 방식이었다.
“아시온.”
“예, 푸른 생명의 어머니시여.”
나후타야의 부름에 곁에 있던 엘프가 대답했다. 이오안의 뒤를 쫓고 있는 샬릿을 대신해 나후타야를 보필하고 있는 엘프 마법사였다.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르망 방면으로 가라. 남하하는 대교구 원정군을 길목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자극하지 말고 대화를 시도해라. 나의 음성을 전하며 시간을 끌어라.”
일단은 원정군의 발을 묶고 대화를 시도하는 게 상책이다.
시간을 끄는 것과 동시에 성직자들의 언행을 통해 아도나이의 의도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후타야는 몇 가지 지침을 하달했고, 아시온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자매들과 함께 공간이동으로 사라졌다.
‘아도나이……. 네놈이 대체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흐리멍덩한 개구리 눈에 살기가 짙게 맺혔다.
사파에서 온 용사
원정군
원정군은 일사천리로 편성됐고, 이틀 만에 남부로 출정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이동했는데, 어쩌다 보니 대교구에서 내준 백마를 타고 선두에서 이끄는 모양새가 됐다.
‘우습군. 나는 남부로 가는 길도 모르는데, 원정군 전체가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다니.’
중원에서 온 엉터리 길잡이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남쪽으로 똑바로 내려가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 던져 놔도 길을 잃지 않는 사제들 덕분이었다.
‘그나저나, 일이 너무 커졌네.’
원래 계획은 오덴세섬에서 출발해 중부까지만 성직자들과 함께하고, 남부는 나 혼자 가는 거였다.
대교구에 방문해 포상과 축복을 받은 다음 홀로 남부로 내려가 늪의 조언자를 만날 생각이었으니까.
한데, 새로운 리치의 등장에 이어 신탁까지 내려오며 일이 점점 커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수명 백의 원정군과 함께 남하하고 있었다.
‘황금을 받은 건 기쁜 일이지만, 상황은 좀 부담스럽군. 평범한 징집군도 아니고, 중부 대교구의 정예 성직자들과 동행하라니…….’
지금 내 뒤에서 따라오는 군세는 그 숫자가 물경 이백여 명에 달했고, 하나같이 엄선된 인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핵심 인물로 대접받고 있었는데, 이건 내 명성 때문도 있지만 원정군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까딱하면 성기사단 하나를 내가 떠안게 생겼어.’
대교구에서 파병한 남부 원정군은 크게 네 개의 조직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백장미 성기사단.
오십 명의 정예 성기사로 이루어진 기사단인데, 특이하게 기마술보다는 검술과 난전에 특화된 조직이었다.
얼마 전, 기사단장 톨레노 경이 은퇴를 해 버린 탓에 율리오 대주교가 나에게 떠맡기려 했던 바로 그 성기사단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은하수 성기사단.
마찬가지로 오십 명의 정예 성기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상 창술과 돌격 전술에 특화된 전통적인 형태의 기사단이었다.
이들은 젊고 야심만만한 거구의 성기사, 라니에르 경이 이끌고 있었다.
세 번째는 전투 사제단.
오십 명의 사제로 구성된 조직으로, 원정군의 총대장인 테오도르 몬테파를로가 직접 이끌었다.
이들은 리치의 흑마법을 분쇄할 원정군의 핵심 전력이었는데, 사제답지 않게 승마에 능숙하고 체력도 좋아서 고된 행군을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마지막은 소위 지원부대라 불리는 기타 인력들이었다.
진중 예배를 돕는 부제부터 말발굽을 관리하는 장제사까지 다양한 비전투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이하게 아우레오가 지휘를 맡았다.
아우레오는 어린 나이에도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가졌고, 북부 순례와 서부 여정을 통해 진중 생활에 적응한 상태였다.
율리오 대주교는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해 아우레오에게 지휘관 역할을 맡긴 것이다.
‘아우레오가 원정군 삼대장 중 하나라니, 어린놈이 출세했군.’
원정군은 총대장 테오도르를 필두로 은하수 성기사단장 라니에르와 지원 부대장 아우레오가 양익을 담당하는 모양새였다.
공식적으로는 세 사람이 원정군의 간부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으니…….
“하하, 각하! 앞서가지 마시고, 저희 백장미 성기사단과 보폭을 맞추시는 게 어떻습니까?”
슬쩍 뒤를 돌아보니, 순백색 갑옷을 입은 오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나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백장미가 아니라, 새 주인을 만난 백구 같은 표정이었다.
“맞습니다, 단장! 단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지요.”
“누가 너희 단장이냐?”
성기사 한 명이 은근슬쩍 단장이라 부르는 걸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번 남부 원정에서 가장 불편한 점이 바로 이거였다.
‘율리오 이놈, 내가 분명 싫다고 얘기를 했거늘…….’
백장미 성기사단은 벌써부터 나를 자기네 단장으로 대우했다. 확신에 찬 표정을 보니, 율리오 대주교가 출정 전에 미리 언질을 한 게 분명했다.
그나마 출정 초기에는 눈치를 좀 보더니, 며칠 동고동락하며 얼추 친해졌다 싶으니까 대놓고 단장이라고 부르는 지경이었다.
‘하긴, 자기들 대장이 없으니 마음이 불편하겠지.’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백장미 성기사단. 그들의 속사정을 알 만했다.
백장미 성기사단은 원정군의 네 개 조직 중 유일하게 우두머리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러니 당장 전투가 벌어지면 임시로 라니에르 경의 지휘를 따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