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57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백장미 성기사단이 은하수 성기사단의 산하 조직이 되는 꼴이다.
‘하지만 나를 단장으로 추대하면 라니에르에게 통제받을 이유가 없지. 그러니 저렇게 텃세 없이 다가오는 것일 테고.’
차라리 초면의 단장을 새로 모시는 게 낫지, 다른 성기사단의 통제를 받는 건 견디기 힘든 굴욕일 터다.
보통의 기사단도 아니고, 자기 실력과 소속에 자부심이 강한 중부의 정예 성기사들에게는 더더욱.
게다가 은하수 성기사단장 라니에르는 그 우락부락한 외모만큼이나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
그가 백장미 성기사단을 지휘하게 되면 초장에 기세를 휘어잡기 위해 지독한 잡도리를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하, 너무 짓궂게 구는 것 아닌가? 크로우 경께서 부담스러워하시잖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라니에르가 말을 몰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우람한 근육과 그 위를 뒤덮은 살집 탓에 갑옷 이음매가 터질 것 같았다.
생김새는 커다란 주먹코에 사각 턱, 눈썹이 진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했다.
좋게 말하면 사내다웠고, 나쁘게 말하면 기사라기보다 야만 전사 같은 인상이었다.
“크로우 경도 너무 데면데면하게 굴지 마시고, 성기사들과 함께 포도주라도 기울이는 게 어떻습니까? 오늘 밤, 제가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되었다. 나는 남부에 도착할 때까지 지원부대 야영지에 머물 예정이다.”
“하하하, 성기사들보다 부제들과 지내는 게 편하신가요? 크로우 경은 의외로 내성적이시군요. 이 라니에르가 미처 몰랐습니다.”
명백히 비꼬는 언행에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곁에서 듣고 있던 백장미 성기사들도 울컥하는 분위기였다.
당장 권풍을 날려 면상을 뭉개 줄까 고민하는데, 아우레오가 다가와 말렸다.
‘참으세요, 테온.’
아우레오는 눈빛으로 말했고, 나는 긴 숨을 내쉬며 말고삐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라니에르는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더니, 은하수 성기사단으로 돌아갔다.
‘저 덩치 큰 놈, 조만간 선을 넘겠군.’
라니에르는 요 며칠 계속 내 신경을 긁고 있었다.
마치 오르샤바에서 나에게 도전했던 로드릭처럼, 그의 두 눈이 승부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주제를 모르는 놈에게는 매타작이 보약인데…….’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밤 야영지 밖으로 불러내 흠씬 두들겨 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라니에르가 생긴 건 파락호 같아도, 명백히 원정군의 간부였기 때문이다.
“각하, 라니에르 경이 각하에게 경쟁의식을 갖는 모양입니다.”
“단장이 직접 손을 쓰기 뭣하시면, 저희가 따끔하게 경고하고 올까요?”
‘너희들이 왜…….’
백장미 성기사단의 행동에서 벌써 과잉 충성하는 기미가 보였다. 사자갈기 용병단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중부 성기사들이 이렇게 다혈질일 줄이야……. 검술만 강할 뿐, 행동거지는 용병들과 다를 바 없군.’
당장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성기사들의 알력 다툼을 보고 있노라니, 없던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원정군에 합류한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백장미 성기사단은 물론이고 테오도르나 아우레오도 나를 지휘관 중 하나로 취급했지만, 정작 나는 성기사단을 이끌 마음이 없었다.
‘오십 명이나 되는 벽창호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라고? 심지어 유치한 기 싸움까지 휘말려 가면서? 때려죽여도 못 할 짓이지.’
내 곁에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성직자는 아우레오 한 명으로 족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우레오를 제외한 다른 성직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성직자란 놈들은 대체로 자기 행동이나 판단에 도덕적 확신을 갖고 있다. 그 탓에 일을 벌이는 데 망설임이 없지.’
확신을 가진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 확신이 내 생각과 다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면에서 테오도르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테오도르 몬테파를로는 당대 최고의 성기사이면서 동시에 고위 사제였다. 아도나이 교회의 간판이자 최고 기득권인 셈이다.
그럼에도 테오도르는 언행이 겸손하고 생각이 트여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늙은이답지 않게 자기 경험을 맹신하지 않았고, 언제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심지어 성경에 적힌 내용이라도 자기가 모르는 숨은 뜻이 있을지 모른다며, 재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안드레아 사제처럼 시키는 일만 딱딱 처리하든가.’
문득 오덴세섬의 책임 사제인 안드레아가 떠올랐다.
그는 사제답지 않게 여기저기 설치지 않고 주어진 일만 깔끔하게 처리하는 성품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 영지로 부임해서 새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테온 경, 표정이 좋지 않군. 어디 불편한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말을 몰던 테오도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라니에르의 시건방을 우려하고 있었다. 서부 원정을 거치며 내 성품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이다.
“라니에르 경의 도발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말게. 젊고 야망 있는 친구라 그런 것이지, 경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야.”
“걱정 마.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것도 못 참을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하면 왜 그리 굳은 얼굴인가?”
“왜긴 왜겠어. 준다던 성물을 안 줘서 그러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에 테오도르가 웃었다.
테오도르와 아우레오가 출정식에서 성물을 하사받은 것과 달리, 나는 아직 성물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크로우 백작 각하에게 줄 성물은 따로 있어요. 남부 원정이 끝난 뒤 제가 직접 수여할게요.
요한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성물을 받지 못한 건 순전히 성녀의 변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여간 주는 것도 없이 미운 계집이라니까.’
성물은 다음에 받으러 오라며 호호 웃는 성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안 그래도 잡친 기분이 진창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경이 받은 성물이 뭔지 정말 얘기 안 해 줄 거야?”
“하하, 그건 비밀이라고 말했잖나.”
테오도르와 아우레오는 무슨 성물을 받았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받은 성물은 대중에 밝히지 않는 게 원칙이란다.
평소 내 말이라면 강아지처럼 따르는 아우레오도 입을 꾹 다물고 비밀을 지켰다.
“쳇,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툴툴거리자, 테오도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욕에 초연한 테온 경이 성물을 늦게 받게 되어 화가 났을 리는 없고, 혹시 백장미 성기사단장 직위가 성에 안 차나?”
‘누구더러 물욕에 초연하다는 건지, 원.’
강호의 노괴만큼 신병이기를 탐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테오도르는 나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
하지만 굳이 그런 얘기는 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성에 안 차는 게 아니라, 부담스러워서 그런다. 나는 중부에 정착할 생각도 없는데, 율리오 대주교가 독단적으로 성기사단 단장직을 떠맡기고 있잖아.”
“허허, 대주교 예하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분이니까.”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
율리오 대주교의 특이한 언행이 떠올랐다.
어떤 때는 현기를 흘리고, 어떤 때는 천박한 모습을 보여 주던 사내.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사내다.
“테오도르 경, 대주교와 대화하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이상하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대주교 예하의 몸매가 어디 흔한 몸매던가? 연회 때를 제외하면 평소에는 음식을 많이 먹지도 않는 것 같던데, 희한하게 살이 많이 쪘단 말이지…….”
“아니, 그런 거 말고. 말투나 성격 같은 부분에서 말이야.”
“말투나 성격? 그건 딱히 이상한 걸 못 느꼈는데.”
율리오 대주교를 오랫동안 지켜본 테오도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니? 내 마음속에 의심이 더 커졌다.
“그렇게 명백한 이질감을 나 혼자 느꼈다고? 말도 안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대주교가 수상하다는 건 아직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남부 원정이 끝날 때쯤에는 일각노괴가 성불을 하겠구나.’
화도 참아야 하고, 말도 조심해야 한다. 성직자들과 함께하는 여정은 하루하루 인내심을 시험받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내 인내심은 고작 일주일을 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혔다.
사파에서 온 용사
다투는 구슬들
원정군이 출발한 지 엿새.
나는 원정군 지원부대 야영지에서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철부지 아우레오가 눈치껏 내 천막을 따로 편성하다니, 많이 컸다, 많이 컸어.’
나는 과거 북부 순례길에서 운기조식을 위해 헛간 같은 곳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밤을 보내곤 했다.
아우레오는 내가 모종의 이유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 걸 기억했고, 미리 폐쇄식 단독 천막을 준비해 놓았다.
‘어디 보자…….’
조용히 눈을 감고 체내를 관조했다.
오늘도 백룡주와 화룡주는 서로 머리채를 잡고 뜯으며 싸워 대고 있었다.
뜨거운 성질을 가진 화룡주는 끊임없이 백룡주를 들쑤셨고, 차가운 성질의 백룡주도 지지 않고 맞섰다.
‘아파 죽겠네.’
두 용마주의 대결에 명치 부근의 혈도가 남아나질 않았다. 큰 혈자리는 물론이고 혈도를 잇는 혈맥과 경맥도 전쟁터처럼 곳곳이 깨지고 무너진 상태였다.
물론 나도 경혈이 이 지경이 되도록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옥심귀일공으로 정제도 시도해 보고, 때로는 진신내력을 동원해 찍어 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그럴수록 용마력의 반발은 거세져서, 이제는 함부로 손대기도 위험한 수준이 되어 버렸다.
‘미치겠군. 이러다 주화입마 오는 거 아냐?’
잡기(雜氣)의 체내 충돌은 대부분 주화입마로 이어진다. 흡성대법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오죽하면 흡성대법의 최고수로 알려진 악심파파도 주화입마로 죽었을까.
나도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흡성대법을 남용하지 않았다.
한번 흡성대법을 사용한 뒤에는 반드시 흡수한 기운을 옥심귀일공으로 정제했고, 완벽하게 갈무리가 끝난 뒤에 다른 적에게 흡성대법을 사용했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다니…….’
키르케네스에게서 흡수한 백룡 마력은 제멋대로 뭉쳐 내단으로 변해 버렸고, 옥심귀일공으로 정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오비데우스의 화룡 마력까지 흡수하자,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별수 없지. 당분간 흡성대법은 봉인하고, 체내의 기운을 다스리는 데 집중하는 수밖에…….’
입맛이 쓰다.
과거에도 화경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는데, 흡성대법을 얻은 지금도 똑같은 경지에서 벽에 부딪혀 버렸다.
심지어 이 벽은 언젠가 주화입마라는 괴물로 변해 나를 폐인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화경의 벽을 깨부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이렇게 된 이상 목숨을 걸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데, 천막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라니에르 경,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아우레오 사제는 왜 그렇게 크로우 경을 애지중지하는 겁니까? 크로우 경이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천막에 불쑥 찾아왔다고 마음에 상처라도 받겠습니까?”
“테온은 명상 중에 누가 가까이 오는 걸 극도로 싫어합니다. 제가 굳이 왜 폐쇄식 천막을 따로 준비했겠어요?”
“어허, 너무 유난 떨지 마십시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고된 행군길에 천막 한 동을 통째로 혼자 쓰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발소리가 뚜벅뚜벅 가까워졌다. 라니에르가 기어코 내 천막에 들어올 모양이었다.
나는 진기를 빠르게 갈무리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라니에르가 천막 안으로 면상을 들이밀었다.
“크로우 경, 저 왔습니다. 거, 혼자 궁상떨지 마시고, 나와서 성기사들과 함께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라니에르.”
“예, 크로우 경.”
“너 정말 죽고 싶냐?”
노골적인 모욕에 라니에르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니에르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경의 언행이 거침없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좀 과하시군.”
“과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내하고 있다. 네가 여전히 주둥이를 놀리고 있는 게 그 증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