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75
“공간이동을 다시 쓰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이제부터 날아서 갈까요?”
“넌 비행해. 난 지상에서 경신법으로 쫓아갈 테니.”
공간이동이 힘들 땐 비행 마법을 사용했다. 이때는 오히려 내가 더 빨랐다. 이자벨라가 아무리 허공을 가로질러도 현경에 이른 운해비영보다 빠를 순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중간 지대를 벗어나 삼각주 인근 활엽수림에 도착했다.
“각하!”
울창한 수림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다. 대장로 나가타를 비롯한 다크엘프들이었다.
그들은 원정군에게 마차를 만들어 주고, 먼저 남쪽으로 출발했었다.
내가 그들에게 이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사전에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각하, 와 주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안 올까 봐 조마조마했었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믿고 있었어요!”
짓궂은 농담에 나가타가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심 불안했을 것이다.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크엘프들은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는 거니까.’
다크엘프들은 나를 도와 아크리치를 제압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주문 파괴자가 죽거나 다쳤다. 내가 나후타야를 죽여 줄 것이라 믿고 큰 희생은 감내한 것이다.
한데, 아크리치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성녀가 크게 다쳤고, 원정군은 기수를 돌려 북상하기 시작했다.
나후타야를 내버려 둔 채 인간들이 떠나면, 다크엘프들은 손해만 보는 셈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전투에 참여한 걸 나후타야에게 들켰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그럼에도 다크엘프들이 군말 없이 물러가고 복귀하는 원정군에게 마차까지 제공한 건, 내가 사전에 언질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남부로 돌아가라. 삼각주 인근 활엽수림에서 나를 기다려라. 나는 아우레오가 깨어나는 걸 확인하고 뒤따라가겠다.
나가타는 내 말을 믿었고, 그 결과 이렇게 활엽수림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이다.
“각하, 그 아우레오라는 어린 사제는 깨어났습니까?”
“그래, 멀쩡하더군.”
싱겁게 대답하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다시 생각해 보니 멀쩡하다고는 못 하겠네. 오른팔이 잘렸으니까.”
“이미 잘린 팔을 어쩌겠습니까. 그 흉악한 마력 폭풍 속에서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지요. 더구나 그 사제는 각하와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나가타는 몇 마디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받다 본론을 꺼냈다.
“저, 각하, 푸른 용 토벌은 언제쯤 시작할 생각이신지……?”
“시간 끌 이유가 있나? 당장 출발할 생각이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남하할 거야.”
“앗, 그, 그렇습니까?”
나가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얼굴이 마치 기대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저희가 준비할 건 없습니까? 푸른 용을 상대하려면 철저한 작전과 그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텐데요.”
“고작 용 한 마리를 잡는 데 거창하게 준비까지야……. 그냥 가서 때려잡으면 된다. 너희는 엘프들만 상대해. 내가 나후타야와 싸우는데 휘말리면 애꿎은 엘프들이 떼죽음을 당할 테니, 너희가 그들의 접근을 차단해라.”
“예? 아, 예.”
마치 여우 사냥이라도 나서는 듯한 말투에 나가타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방심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나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화경의 무공으로도 용과 비등하게 겨루던 나다. 한데 현경에 이르러 오색륜까지 얻었으니, 용 두세 마리가 덤벼도 문제없어.’
이건 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현경에 도달한 뒤 제대로 무공을 시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단순히 내공만 늘어난 게 아니라, 오색륜이 가진 각각의 공능도 유용했다.
게다가 아크리치의 힘을 고스란히 보유한 이자벨라도 나를 돕고 있다.
그녀는 지옥마력을 버린 대신 백룡마력과 화룡마력을 품었다. 이전보다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약해지진 않았을 터다.
‘지금의 나에게는 푸른 용이 아니라 푸른 용 할애비가 와도 삼초지적에 불과할 것이야.’
전투 상황을 여러모로 떠올려 봐도 내가 패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무공이 없는 이 세계에서 현경에 도달한 나를 위태롭게 할 상대가 있기는 할까 싶었다.
“요정숲으로 가자. 나는 이자벨라와 함께 갈 테니, 너희는 재주껏 뒤따라와라. 요정숲 북쪽 초입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각하.”
그 말과 함께 이자벨라가 공간이동을 시전했다.
다크엘프들은 허둥지둥 우리 뒤를 쫓아올 것이다.
* * *
공간이동과 비행을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더 남하한 끝에, 우리는 요정숲 북쪽 초입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멈추자. 다크엘프들이 늦는군.”
내 말에 이자벨라가 비행 마법을 해제하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연달아 펼친 마법에도 딱히 힘든 기색이 없었다.
공간이동에만 마력과 집중력을 소모할 뿐, 비행 마법 정도는 숨 쉬듯이 시전이 가능했다.
비행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기력을 회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굳이 기다릴 필요 있어요? 그냥 우리끼리 들어가서 나후타야만 죽이고 나오면 되잖아요.”
“나후타야는 수세에 몰리면 엘프들을 방패로 내세우고 도망칠 거야. 다른 용들도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미련 없이 도주를 택했거든.”
“에이, 푸른 용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우리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겠어요?”
“혹시 모르지. 만사가 불여튼튼이니, 다크엘프들과 함께 진입할 거다. 그들이 엘프만 상대해 줘도 변수가 대폭 줄어들어.”
“만사가 불여, 뭐라고요? 각하는 한 번씩 이상한 말을 한다니까.”
이자벨라는 기지개를 켜고 로브 안감을 떼어 내더니, 돗자리처럼 바닥에 넓게 깔고 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요정숲으로 소풍이라도 나온 사람 같았다.
“이리 와서 앉아요.”
이자벨라가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정실부인 행세를 하는 그녀였다.
“킥킥, 그나저나 헤어질 때 성직자들 표정 봤어요? 각하가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하니까 당황한 얼굴이던데요?”
“그럴 만도 하지. 혼자 남부로 가서 푸른 용을 사냥하겠다는 것도 약간 무리수였는데, 난데없이 기절한 여인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니…….”
나는 거의 생떼 수준으로 고집을 피웠고, 결국 요한나가 나서서 나를 두둔해 준 덕분에 불필요한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각하는 나한테 신세 진 거예요. 잊지 마요.
떠나기 직전 요한나가 귓속말로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씨팔. 나후타야를 죽이고 대교구로 돌아가면 속내를 이야기하겠지.’
어차피 대교구는 한번 들러야 할 곳이다. 아우레오에게 용의 수급을 가져다주겠노라 약속했으니까. 이건 그가 나에게 베푼 은혜에 비하면 작은 보답에 불과했다.
‘용의 수급을 가져가면 아우레오에게 선물도 되고, 나를 향한 작은 의심도 불식시킬 수 있겠지.’
내가 다소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고, 실제로 라니에르를 비롯한 몇몇 성직자들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푸른 용의 목을 들고 가면 전부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은 늘 그렇듯 나를 찬양할 것이고, 나의 태도나 기행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터다.
‘여기나 중원이나 똑같아. 태도 따위는 고만고만한 놈들 사이에서나 중요하지, 압도적인 위업 앞에서는 물거품이나 다름이 없어.’
복잡한 정치는 잠시 잊기로 했다.
이자벨라와 나는 다크엘프들을 기다리며 모처럼 생긴 휴식 시간을 즐겼다.
남부는 덥고 습했지만, 종종 가을바람이 불어와 열을 식혀 주었다.
이자벨라는 슬쩍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내가 어깨를 툭 튕기자 주둥이를 삐죽 내밀고 돌아앉았다.
사파에서 온 용사
푸른 용 토벌
잠시 휴식하며 기다리자, 다크엘프 마법사들이 하나둘 공간이동으로 도착했다. 그들은 제각기 흩어져 숨을 헐떡거리거나, 급히 눈을 감고 체내의 마나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훅, 후욱, 각하, 저희도 모두 도착했습니다.”
‘노인네, 숨넘어가겠네.’
다크엘프의 마법으로 이자벨라를 쫓아오는 건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호흡을 가다듬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분명 나후타야에게 마중을 나오라고 했는데, 좋게 말로 하니 들어 먹질 않는군. 푸른 용의 엉덩이가 무거운 모양이니, 매질로 버릇을 고쳐 줘야겠다.”
가벼운 농담에도 다크엘프들은 웃지 못했다. 그들은 전투를 앞두고 마른침을 삼키며 결기를 다지고 있었다.
푸른 용은 우리가 요정숲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침입을 눈치챌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나후타야의 앞마당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라. 너희가 할 일은 알고 있겠지?”
“예, 저희는 엘프들의 난입을 차단하며 각하께서 나후타야와 일대일로 겨룰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좋아. 그게 너희 동족을 최대한 살리는 길이라는 걸 잊지 마라. 그리고 이자벨라, 나후타야의 둥지 위치는 알고 있지?”
이자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닥에 깔았던 로브를 주섬주섬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근데 좀 이상한 게, 숲에서 나후타야의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요.”
“요정숲은 워낙 넓으니까……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느껴지겠지.”
“그런 게 아니에요. 평소 같으면 이 정도 거리에서도 그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혹시 나후타야가 부재중인 건 아닐까요?”
이자벨라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문득 의문이 생겼다.
적이 코앞에 와 있는데, 엘프들이 요격을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후타야는 요정숲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엘프들을 통해 몇 번이나 드러난 사실이지. 하면 최대한 요정숲 바깥에서 싸우고 싶어 할 텐데……?’
심지어 나는 나후타야에게 요정숲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고, 지금 내 곁에는 이자벨라도 함께 있다. 그녀의 마법이면 광범위한 숲을 한나절 만에 소각할 수도 있을 터.
내가 나후타야라면 굳이 상대를 요정숲으로 끌어 들이지 않고 길목에서 싸우길 택할 것이다.
푸른 용은 수계(水系) 마법에 능하다고 하니, 물이 많은 삼각주 인근에서 엘프들과 함께 상대를 포위하고 싸우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일 터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하군. 정말 나후타야가 요정숲을 비우고 다른 곳에 가 있는 건가?’
의문이 생겼지만, 요정숲 앞에서 정보를 더 얻겠다며 시간을 끄는 것도 부적절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리고 숲으로 진입했다.
“혹시 모르니 경계 태세를 갖추고 도보로 진입하자. 내가 앞장을 설 테니, 다크엘프들은 후방을 경계하며 바짝 붙어서 따라와라.”
“예, 각하! 목숨으로 뒤를 지키겠습니다!”
다크엘프들의 오랜 염원, 푸른 용 토벌이 시작되었다.
* * *
“용살기사가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아크리치는 변절한 것 같군요. 언데드가 용살기사의 뒤를 따르다니……. 마치 그를 호위하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다크엘프들도 다수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림자숲의 대장로, 나가타의 모습도 확인됐습니다.”
요정숲의 엘프들은 비상이 걸렸다. 특유의 무감정한 말투와 표정 탓에 침착해 보일 뿐, 지금 그들은 공황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나후타야가 전생 중일 때 용살기사가 들이닥친 것이다.
“푸른 생명의 어머니를 깨워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용살기사의 침공이니, 그분께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분을 깨우면 전생술이 깨질 텐데…….”
늙은 엘프가 침음성을 흘리며 고민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엔. 엘프의 대장로였던 그녀는 나후타야를 대신해 임시로 엘프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까……?’
용만큼은 아니지만, 아리엔도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녀는 전생 중인 나후타야를 깨우는 게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술이 외부 자극에 의해 깨지면 전생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심한 육체 손상을 입는다.’
그렇기에 나후타야도 엘프들에게 실험실 주변을 철저히 지키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엘프들의 전력으로는 용살기사를 막을 수가 없는데…….’
테온 크로우는 원래부터 강적이었는데, 지금은 한술 더 떠서 다섯 천사의 힘까지 지닌 상태다. 엘프들의 자연 마법 따위는 그의 손짓 한 번에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뒤를 엄호하며 따라오는 적발의 마녀는 분명 이자벨라였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으나, 아크리치의 통제권이 테온 크로우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