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94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저를 발견하고 진영 내부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습니다.”
아스칸다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관절 이곳저곳을 돌리며 몸 상태를 확인하고, 온몸의 비늘을 쫙 펼치며 몸을 떨었다.
“예, 검은 용이시여.”
나의 육체가 아스칸다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 황당한 꼴을 지켜보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기억이 난다. 난 아스칸다르의 용언 정신지배에 당했지. 하지만 내 정신이 모두 굴복한 건 아니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정신의 일부분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살아남았다.
심지를 보호하는 옥심귀일공의 공능이 용의 정신지배를 견디지 못하고 깨지면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나는 오색륜 중 청환에는 옥심귀일진기를 담았고, 황환에는 근원진기를 담았지. 어쩌면 내기(內氣)를 둘로 나누어 쓰던 탓인지도 모르겠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나에게 아직 이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육체의 지배권을 되찾고, 용의 정신지배를 파훼하는 게 급선무였다.
‘한데……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데.’
내 육신은 다른 사람이 빼앗은 게 아니었다. 지금 내 육신을 차지한 건 명백히 ‘또 다른 나’였다.
무당의 양의분심결처럼 내 정신은 둘로 쪼개졌고, 그중 하나가 검은 용의 마법에 굴복해 버린 것이다.
‘무턱대고 전면에 나섰다가 멀쩡한 의식까지 정신지배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아니, 애초에 전면에 나서는 방법도 모르겠어. 제기랄, 당장 사흘 뒤 총공격이라는데, 이걸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어쩌면 사흘을 꽉 채우지 않고 갑자기 총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
추정컨대, 아스칸다르는 지금도 중부를 초토화할 충분한 힘과 세력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가 사흘을 기다리는 이유는, 완벽을 추구하는 특유의 성품 탓일 것이다.
‘거체의 힘과 용의 권능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군. 수백 년 동안 쓰고 있던 맹약의 굴레를 벗었지만, 완벽한 상태로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오랜 시간 자다 일어난 사람은 당장 힘을 쓰기 어렵고, 장기간 정신지배를 당한 엘프들이 며칠을 앓아누웠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불행 중 다행이군. 남은 사흘 동안 어떻게든 육신을 되찾고 중부군에 합류해야 한다.’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세계를 부수고 밖으로 나갈 방법이 묘연했다.
‘누군가 외부에서 날 꺼내 줘야 할 것 같은데, 동방군 진영의 한가운데서 누구의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 * *
한편, 이자벨라는 요정숲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명상에 투자했는데, 명상을 통해 내면을 관조하고 아크리치였던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이었다.
기억을 떠올릴수록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도 늘고, 아크리치 특유의 효율적인 전투 방식도 배울 수 있었다.
다만, 주의 산만한 그녀가 종일 명상만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게 문제였다.
‘기술을 익히면 뭐 하냐고. 대련해 줄 각하도 없는데……. 힝, 심심해.’
아직 테온과 관련된 소식을 듣지 못한 이자벨라.
그녀는 하루하루 침상에서 뒹굴며 테온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명상이 지겨울 땐 엘프들이 고대 룬어를 번역하는 걸 구경했다.
이번 기회에 고대 룬어를 배워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배움이 더디고 재미가 없어서 금방 때려치우고 말았다.
‘예전에는 강해지고 싶어서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배웠는데, 이젠 쳐부숴야 할 적혈도 없고, 너무 강해져 버려서 동기부여가 안 되네…….’
심심한 이자벨라에게는 하루에 한두 번씩 요정숲 동쪽 경계를 들쑤시는 괴수 군단이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종종 동쪽으로 날아가서 괴수들에게 광역 마법을 퍼붓다 돌아오곤 했다.
“아아아아-! 심심해, 심심해! 드라고한(dragohan), 각하가 언제쯤 돌아올까?”
“…….”
이자벨라의 물음에 대답 없이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는 미지의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붉은 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대가리가 목 위에 붙어 있지 않고 엉뚱하게 손에 들려 있었다.
“모르겠다고? 쳇, 당연히 모르겠지. 넌 멍청한 언데드니까!”
이자벨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구박부터 늘어놓았다. 그리고 금방 표정을 바꾸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우리 다른 얘기 할까? 드라고한, 너도 사랑을 해 봤니?”
“……?”
드라고한이라 불린 언데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이번에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할 말만 이어 갔다.
“하긴, 너라면 사랑을 해 봤을 거야. 지금은 오비데우스의 비루한 몸뚱이에 들어가 있지만, 인간 시절의 넌 꽤 멋진 남자였으니까. 남자라면 자고로 살집이 있고 풍채가 듬직해야지, 암.”
드라고한의 정체는 놀랍게도 이자벨라가 애지중지하던 듀라한, 뚱보였다.
그녀는 아크리치 시절,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뚱보를 요정숲에 가져다 놓았다.
테온에 의해 의식을 되찾은 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뚱보에 관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썩, 썩었잖아? 히잉…….
기억을 되찾은 이자벨라가 급히 뚱보를 찾았을 때, 뚱보는 이미 심하게 부패한 상태였다.
아무리 방부 처리를 했어도 시체는 시체다. 습한 남부 밀림에 방치하면 당연히 살이 썩고 벌레가 끓는다.
데스나이트나 아크리치처럼 지옥마력을 품은 최고위 언데드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뚱보는 듀라한에 불과했다. 창조주의 마력이 끊기면 평범한 시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걸 어쩌지? 이렇게 썩어 문드러진 몸이면 듀라한은커녕 구울도 겨우 만들겠는데…….
고민하던 와중에 이자벨라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으니, 바로 오비데우스의 본체였다.
테온에 의해 목이 잘린 용인의 사체가 나후타야의 실험실에 놓여 있었다.
비록 전사의 사체는 아니지만, 그 어떤 인간 전사보다 강건한 육체다. 고작 듀라한을 만들기에는 과분한 재료다.
-호호, 잘됐네! 원래 몸이 썩어 버렸으니, 이참에 뚱보에게 더 강한 몸을 줘야겠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더라? 새옹지마? 전화위복?
이자벨라는 테온에게 배운 사자성어를 읊조리며 뚱보의 영혼을 오비데우스의 본체로 옮겼다. 거기에 더해서 화룡마력도 듬뿍 담아 주었다.
나후타야가 오비데우스의 본체를 여성으로 개조하긴 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붉은 용의 육신은 화룡마력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평범한 인간 남성이었던 뚱보가 무려 용인의 몸으로, 그것도 성전환한 암컷 화룡의 몸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거야말로 고금에 둘도 없는 희귀한 존재였다.
-이젠 뚱뚱하지가 않네. 매력이 조금 떨어졌어. 하지만 계속 아껴 줄게. 우리의 옛정이 있으니까.
이자벨라는 뚱보에게 강대한 힘과 함께 새로운 이름도 부여했다.
용(Dragon)과 듀라한(Dullahan)을 합성한 드라고한(dragohan).
앞으로 이자벨라를 근접 경호할 강력한 언데드 전사였다.
“각하가 날 생각하고 있을까? 난 헤어진 첫날부터 각하가 보고 싶어서 애를 태우고 있는데, 각하는 이런 내 마음을 알까?”
“오오오…….”
턱을 괴며 푸념하는 이자벨라. 그녀의 말에 드라고한이 입을 벌려 소리를 냈다. 다만,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이자벨라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할 일도 없는데, 인간처럼 요리나 배워 볼까? 솔직히 말해서, 각하는 좀 말랐잖아? 내가 매일 맛있는 음식을 해서 먹이면, 지금보다 더 멋있어질 거야.”
이자벨라는 벌떡 일어나서 서재를 뒤적거렸다. 나후타야의 실험실은 커다란 도서관이나 마찬가지여서, 어지간한 서적은 다 구비되어 있었다. 어쩌면 인간의 요리에 관한 책도 있을지 모른다.
“흥흥흥- 남자는- 여자가 하기 나름이야- 매일 열 끼씩 먹이면- 말라깽이 각하도 듬직해지겠지-.”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이자벨라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녀가 한창 혼자만의 단꿈에 빠져 있을 때, 다크엘프 야키치가 평화를 깨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이자벨라 님! 뿔이! 카라히사르의 뿔이 나타났습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어쩌다 마주친 그대
밖에서 들리는 야키치의 다급한 목소리.
이자벨라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점멸을 펼쳐 밖으로 나온 이자벨라는 야키치의 어깨를 붙잡고 다그쳤다.
“카라히사르의 뿔이 나타났다고? 직접 본 거야?”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경보 마법이 작동했고, 위치도 파악했습니다.”
“어디냐? 뿔이 있는 곳이 어디야!”
“요정숲의 북서쪽 경계 부근입니다. 삼각주 방면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에요. 속도도 빠르고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공중을 날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오안이다!’
카라히사르의 뿔을 지니고 비행하고 있을 인물은 전 대륙에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이자벨라가 그토록 기다렸던 인물. 어쩌면 그녀의 유일한 사랑인 테온 크로우보다도 목 빠지게 기다린 바로 그 인물.
필생의 원수, 이오안 블라디미레스였다.
“역시! 그 개자식이 한 번쯤은 요정숲 인근을 지날 줄 알았지! 나후타야의 탐지 마법진을 복구해 놓길 잘했어!”
과거 나후타야는 잃어버린 어머니의 뿔을 되찾기 위해 남부 전역에 탐지 마법진을 설치했다. 푸른 용의 거체가 남부에 진입하면 경보를 울리게 만든 마법진이었다.
이것은 이오안의 행방을 찾고 있는 이자벨라에게도 대단히 유용한 마법이었고, 그녀는 나후타야의 마법 지식을 활용해 탐지 마법진을 완벽히 복구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푸른 용의 뿔을 가진 이오안이 요정숲을 스쳐 가고 있었다.
“기다려라, 이오안! 지금 당장 죽여 주마!”
콰앙!
폭발하듯 공중으로 솟구친 이자벨라가 맹렬한 속도로 발견 지점을 향해 비행했다. 그녀의 전신에는 막대한 마력과 살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 *
한편, 은신처를 벗어난 이오안은 박쥐 떼로 변신해 삼각주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카라히사르의 맹독 주문을 습득한 그는 공격 계열 마법만 엄청나게 강해졌을 뿐, 이동 마법이나 정신계 마법 등 다른 여러 분야에는 여전히 소양이 부족했다.
공간이동은커녕 점멸도 익히지 못한 이오안이 삼각주까지 가려면, 박쥐로 변신해서 날갯죽지에 땀나도록 비행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엇……!’
열심히 날개를 파닥이던 이오안이 제자리에 멈췄다. 너무 뜬금없는 존재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저게 뭐지? 풍기는 느낌은 오비데우스의 영혼과 비슷한데……. 설마 요, 용인가?’
이오안이 발견한 건 지상을 배회하는 금빛 망령이었다.
망령은 지표면 아래에 얕게 숨어서 삼각주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 어찌나 거대한지 용의 망령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 진짜 용이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세상에, 살다 살다 용 귀신을 보게 되다니!’
이오안은 피의 일족인 뱀파이어. 게다가 일족의 모든 지식을 한 몸에 품은 왕사였고, 당연히 강령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미약하거나 은밀한 망령이라면 모를까, 이토록 강대한 영혼이 땅 밑에서 헤엄치는데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놈은 뭐야? 암혈의 뱀파이어인가? 암혈은 멸종한 줄 알았는데……. 한데, 뱀파이어 주제에 왜 검은 용의 마력을 품고 있지?]땅 밑에 숨어서 이동하던 금빛 용. 그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금빛 용은 중부에서 삼각주까지 직선으로 주파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빙 둘러서 이동 중이었다. 인간과 마주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엘프의 땅인 요정숲의 경계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상상도 하지 못한 괴상한 뱀파이어를 마주치게 되자 금빛 용도 당황해서 제자리에 멈췄다.
[어라? 검은 용의 마력뿐만이 아니고, 푸른 용의 존재감도 느껴지네? 이 하찮은 흡혈귀 놈이 품에 뭘 숨기고 있는 거지?]금빛 용은 이오안이 가진 카라히사르의 뿔을 똑똑히 느꼈고, 눈앞의 늙은 흡혈귀가 범상치 않은 힘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상대도 자기를 발견한 모양이니, 무시하고 떠나기에는 등 뒤가 불안했다.
“…….”
[…….]일족을 배신한 두 책략가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건 용이다. 왜 저런 꼴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육신이 없는 용이야.’
이오안은 오비데우스와 나후타야의 뒤통수를 쳤고, 지금도 용의 뿔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가 용을 만난 건 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하필 용을 마주치다니……. 내가 먼저 쳐야 하나?’
이오안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채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망치기에는 그가 가진 이동 마법이 형편없었고, 선제공격하자니 승산을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금빛 용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이오안을 죽여야 할 이유는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만약 상대가 환상 계열이나 왜곡 계열 마법을 사용한다면? 육신이 없는 금빛 용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싸움의 승패를 떠나서, 지상에 내 능력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위험해.]금빛 용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싸움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아도나이의 시선을 끌 우려가 있었다.
[아도나이가 날 발견하면 즉시 성직자들에게 알릴 거야. 어쩌면 무리를 해서라도 직접 벼락을 떨어뜨릴지도 몰라.]‘육신이 없다지만 용은 용이다. 오히려 육신이 없으니 더 어려운 상대야. 맹독 마법이 무용지물일 테니까. 역시 싸움은 피하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