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201
성자와 성녀의 기도가 한 점에서 만났다.
구름 위로 한 줄기 휘광이 아우레오를 비추고, 그의 이마에 모인 신성력과 합쳐졌다.
“언니, 피해요!”
요한나의 뾰족한 외침과 동시에 이자벨라가 사라졌다.
이자벨라가 테온에게서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도나이의 빛이 아우레오의 이마를 떠났다.
팟!
아우레오의 신성력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 테온에게 닿았다.
화경이 아니라 현경의 고수라도 피할 수 없는 절대 속도였다.
‘성공이다!’
아우레오와 이자벨라, 요한나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얼음이 봄볕에 녹아 깨지듯, 짙은 어둠이 새벽의 여명에 물러가듯, 테온의 정신을 지배하던 아스칸다르의 마법에 균열이 생겼다.
사파에서 온 용사
내면의 사투
‘잘했다, 아우레오!’
나를 둘러싼 무의식의 세계가 흔들렸다.
아우레오의 빛은 아스칸다르의 정신지배를 절반 정도 날려 버렸고, 내 육신을 차지한 또 다른 나도 머리를 부여잡고 공격을 멈춘 상태였다.
세차게 두드리는 신성력에 마법은 곳곳이 깨지고 구멍이 뚫렸다.
‘자(自)는 의(意)요, 의(意)는 지(志)요, 지(志)는 아(我)이니…….’
옥심귀일공의 보심구결을 암송하며 무의식의 빈틈을 억지로 열었다.
나의 정신은 무의식의 세계를 찢고 의식의 세계로 향했다.
아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힘겨운 시련이었지만, 창공을 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 내야 할 도전이었다.
‘됐다!’
마침내 의식 세계에 첫발을 딛는 순간, 인세의 시간이 멈추고 주변 환경이 변했다.
“여기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 익숙했다.
지저분한 진창, 냇가에서 멱 감는 사내들, 뼈다귀를 씹는 떠돌이 개와 그 개를 잡아먹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꼬마 거지들…….
“능가촌이잖아?”
내가 사부를 만나기 전까지 구걸로 연명하던 곳. 중원의 흔한 변두리 마을 능가촌이었다.
“어이.”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네놈이 내 정신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건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옥심귀일공에 기대어 아스칸다르 님의 축복을 거부한 모양이지?”
“축복 같은 소리 하네. 사파의 거두라는 놈이 고작 도마뱀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내 앞에 서 있는 놈은 나의 또 다른 자아였다.
내가 무의식의 세계를 벗어나 육체를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의 또 다른 자아도 무의식의 세계로 쳐들어와 나를 흡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의식과 의식이 합쳐진 정신세계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난 육신을 다른 놈이랑 나눠 쓰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야.”
또 다른 자아가 운철묵검을 뽑았다. 나도 운철묵검을 뽑았다.
‘이곳은 정신의 세계. 현실 세계와 달리 저놈도 오색륜을 사용하겠지.’
두 자아는 똑같은 힘을 갖고 있다. 똑같은 내력, 똑같은 깨달음, 똑같은 초식으로 똑같은 육신을 가진 상대와 싸워야 한다.
내 삶에 이보다 어려운 상대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어디 실력 좀 보자!”
“흥, 각오해라!”
나는 비룡축전을 펼쳤고, 또 다른 자아는 신행미종보로 대응했다. 허공에서 두 자루의 운철묵검이 부딪히며 검은 불똥이 튀었다.
* * *
한편, 아스칸다르는 테온에게 걸어 둔 정신지배 주문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 실시간으로 느꼈다.
테온은 아스칸다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지만, 통제를 벗어날 경우 위험한 적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렇기에 아스칸다르는 테온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정신지배가 깨지거나 약화되면 즉시 알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다.
‘대체 누가 나의 정신지배를 파훼하는 거지? 드라타레스는 망령 상태라 빛의 힘을 사용할 수도 없을 텐데?’
드라타레스와 요한나, 아우레오, 이자벨라가 한곳에 모여 있다는 걸 아는 건 천상에서 모든 걸 지켜보는 아도나이뿐이었다.
아스칸다르는 꾀가 많은 용이지만, 지금 테온이 맞닥뜨린 상황은 현장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내가 한 방 먹었군. 아도나이는 애초에 내가 드라타레스에게 테온을 보낼 걸 예상했던 거야!’
아스칸다르는 어려운 선택을 마주했다.
지금 당장 테온이 있는 곳으로 공간이동 해서 직접 금빛 용을 처단하든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정보를 좀 더 수집하든가.
‘전자를 택하면 미지의 적을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후자를 택하면 테온을 잃고 드라타레스는 도망쳐 버리겠지.’
불확실한 도박과 확실한 손해 사이에서 양자택일. 검은 용의 고민은 짧았다.
[공간이동.]아스칸다르가 공간이동을 시전했다. 넘치는 용마력에 더해서 굳이 시동어까지 읊어 가며 시전한 공간이동.
아스칸다르는 삼각주에서 요정숲 북쪽 경계까지 단 한 번의 공간이동으로 도착했다.
* * *
그 시각, 이자벨라는 테온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우레오의 빛에 노출된 테온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신지배와 싸우고 있는 건가? 더 이상 신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걸 보면 마법은 파훼된 것 같은데?’
테온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두 자아의 싸움은 외부에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테온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테온의 주변을 감싼 묘한 살기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지금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
이자벨라의 직감은 정확했다.
그녀를 비롯해 일행 중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지금 테온은 제공검막(制空劍幕)을 펼쳐 놓고 내면의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테온의 제공검막은 반경이 십 장에 달했고, 누구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육신이 자동으로 반응해 비검강을 난사할 것이다.
“언니! 상황이 어때요?!”
저 멀리서 요한나가 외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금빛 새장을 지키고 있는 요한나와 드라고한, 그리고 아우레오가 보였다.
아우레오는 강력한 기술을 사용한 후유증인지 한쪽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각하가 움직임을 멈췄어! 각하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 각하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정신세계로 들어가진 않았을 테니까!”
이자벨라도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요한나와 아우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테온의 정신력이면 분명 검은 용의 저주를 이겨 내고 자아를 되찾을 겁니다. 그를 믿고 기다릴 일만 남았군요.”
“맞아요, 아우레오 사제. 그대의 공이 크네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크로우 각하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그와 함께 군영으로 돌아가요.”
테온만 되찾으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대교구의 군대가 동방의 상륙군을 상대하는 동안 테온이 검은 용을 처단하고, 그와 동시에 금빛 용의 영혼을 소멸시키면 모든 일이 끝난다.
“우리의 장대한 사명의 끝이 보이는군요. 이 전쟁이 끝나면 대교구 안뜰에 은방울꽃을 심어야겠어요.”
“저도 은하와 함께하겠습니다.”
두 어린 성직자가 다가올 평화를 기대하며 사담을 나눌 때, 주변의 마나가 크게 요동치며 공간이 길게 찢어졌다.
“이런!”
가장 빨리 반응한 건 이자벨라였다. 그녀는 누군가 이곳으로 공간이동을 시전했다는 걸 느끼고, 즉시 점멸을 시전해 일행을 한군데로 모았다.
파파파팟!
메뚜기 널뛰듯 연달아 점멸을 시전한 이자벨라. 그녀의 손에 이끌려 모두가 한곳에 모였다.
금빛 용을 가둔 새장을 중심으로 이자벨라, 요한나, 아우레오, 드라고한이 네 방위를 지키고, 약간 떨어진 곳에 테온이 서 있는 대형이었다.
“저건……!”
“검은 용이 직접 왔군. 쳇, 이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공간을 찢고 등장한 묵빛 거체. 그 주인공은 바로 아스칸다르였다.
장내에 난입한 아스칸다르가 요한나와 아우레오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지금 중부 대교구는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를 삼각주 전선에 배치했을 텐데, 요정숲 인근을 얼쩡거리는 두 사제의 모습이 생뚱맞았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의 영혼은 완전무결한 순백색이었다. 때가 묻지 않는 소녀의 영혼. 이것은 아도나이 교회의 성녀를 뜻했다.
[저건 또 뭐야? 오비데우스의 분신과 본체잖아? 한데 각각 다른 영혼이 들어 있네? 빈 육신을 찾아 전생술로 영혼을 옮긴 건가?]이자벨라와 드라고한의 존재도 의문투성이였다.
아스칸다르는 이곳으로 공간이동 하며 낯선 적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와 보니 상상을 뛰어넘는 괴이한 존재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뭐, 딱히 위험해 보이진 않는군.]네 사람의 전력을 대강 가늠해 본 아스칸다르가 피식 웃었다.
용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능을 되찾은 그에게 고위 성직자 두 명과 마녀, 언데드 전사 하나 정도는 그리 버겁지 않은 상대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가운데에 있는 빛의 새장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안에 갇혀 있는 금빛 망령과 눈을 맞췄다.
[아도나이의 말이 사실이었군. 네가 아직도 지상에 숨어 있었다니…….] [아, 아스칸다르!]드라타레스와 아스칸다르가 서로를 알아봤다.
아스칸다르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 찼고, 드라타레스의 영혼은 절망에 빠졌다.
아스칸다르의 눈동자가 흉광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며 드라타레스의 영혼을 잡아 비틀었다. 영체를 직접 타격하는 왜곡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빛이여!”
“보, 보호막!”
아우레오가 또 한 번 신성력을 짜내고, 이자벨라도 평소 외치지 않던 시동어까지 사용해 가며 보호막을 펼쳤다.
드라고한은 온몸으로 새장을 감싸며 아스칸다르의 마법을 막으려 했다.
[끄아아아아아-!]하지만 그들의 힘은 아스칸다르의 마법 앞에 너무나 미약했다.
기습적으로 펼친 왜곡 마법에 드라타레스의 영혼은 갈가리 찢겼고, 다시 뭉쳐서 짓뭉개졌다.
다른 용들과 달리 드라타레스는 실체가 없는 존재. 그는 대가를 치르고 용언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위기를 탈출할 수단이 아예 없는 것이다.
파스스…….
뭉치고 쪼개지길 반복하던 드라타레스의 영혼이 결국 빛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아스칸다르는 불필요한 대화를 주고받지도 않고, 쓸데없이 힘을 아끼지도 않았다. 그는 드라타레스의 영혼을 대면하는 순간 최대 출력의 왜곡장을 펼쳐 금빛 용의 영혼을 소멸시켜 버렸다.
[큭, 큭, 큭…….]아스칸다르의 웃음이 낮게 깔렸다. 이곳으로 공간이동 하기 전에 고민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막상 직접 움직이니 금방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도나이여,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바로, 최후의 용이다! 파하하하하!]검은 용의 앙천광소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떨렸다. 그의 격이 변하고 있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후의 용이 되었으니, 옛 권능을 온전히 되찾을 때가 되었다.
아스칸다르의 입에서 용언이 흘러나왔다.
광역 마법 시동어에 용사 일행은 바짝 긴장했지만,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칸다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흐흐흐, 좋아. 용언마법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