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30
내 입장에서도 귀찮은 싸움에 나서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좋았다.
“딱 한 가지, 말을 못 타고 계속 걸어야 하는 게 짜증 나네.”
내 불평에 아우레오는 작게 웃었다.
리암은 아우레오에게 도보로 종군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병이 없는 예비대에서 사제 혼자 말을 타면 오히려 경호가 어려워진다는 논리였다.
등신 같은 아우레오는 그 요청을 수락했다.
“눈치 없는 자식아, 그럴 땐 말 두 마리를 내 달라고 하면 되잖아. 수호자인 내가 함께 말을 타면서 지켜 주면 된다고.”
“종군 사제라면 모름지기 병사들과 눈높이를 맞추어야지요. 저는 봉사와 희생을 위해 나선 것이지 특권을 누리려는 게 아니랍니다.”
“너야 그렇겠지만 난 특권을 누리고 싶다고.”
“하하, 테온의 농담은 정말 재미있네요.”
‘농담은 니미.’
명랑하게 웃는 아우레오를 보니 짜증이 치솟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몇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말로 해서는 알아듣질 못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걷는 게 힘드시면 군장을 저에게 넘겨주세요. 제가 대신 짊어질게요.”
“지랄하지 마라. 약골 주제에 누구 짐을 대신 든다는 거야.”
“아도나이께서는 지친 노파를 업고 가시덤불을 걷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테온이 걷는 게 힘들다면, 제가 군장을 넘겨받아야지요. 제가 이래 봬도 하체는 튼튼하답니다.”
아우레오가 양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탁탁 치며 허세를 부렸다.
“너 지금 발에서 피나.”
“예?”
빈말이 아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아우레오의 신발 앞코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약골 자식은 벌써 발바닥이 부르트고 발톱이 깨진 것이다.
“앗, 이런. 아도나이께서 새로운 시련을 주시는군요. 기쁜 마음으로 잠깐 기도하고 갈까요?”
‘미친 새끼…….’
맑게 웃으며 말하는 아우레오의 눈동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제님, 짐을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에릭과 토마스가 다가와 아우레오의 짐을 넘겨받았다. 아우레오는 우물쭈물하다 결국 군장을 넘겼다. 발톱이 깨진 마당에 무거운 군장을 계속 짊어질 수는 없었다.
에릭이 웃으며 아우레오를 달랬다.
“사제님, 군장은 병사들이나 드는 것이지, 지체 높은 사제님까지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에릭과 토마스가 따라와서 다행이군.’
두 사람은 순례의 호위로 고용한 용병이니 이번 토벌에 나설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토벌에 참여하면 가야르도 백작에게 별도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아우레오와 친분 덕에 안전한 예비대에서 종군할 수 있었다.
다른 용병들에 비하면 거저먹는 임무였으니 냉큼 참전한 것이다.
“대열 재배치! 정찰 대형으로 헤쳐 모여!”
도시를 벗어나자 리암이 진형 변경을 명했다.
가두 행진은 행렬이 너무 가늘고 길었다. 이제 광야로 나왔으니 좀 더 안전한 대형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뭐 이리 어수선해?”
도시 상비군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용병 부대가 진형을 바꾸는 모습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리암이 구령을 하달하면 용병들은 멀뚱히 서서 각자 자기 용병대장을 쳐다봤다. 자기가 속한 용병대의 대장이 허락하면 그때 움직이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 싸움이나 제대로 하겠나?’
여러 문파가 연합해도 싸움에서는 일원화된 지휘 체계를 구축하는 게 무림의 방식이다.
관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장군의 호령에 십만 대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중원의 황군이다.
하지만 이곳의 병사들은 수많은 실전 경험에도 불구하고 군기가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역시 리암 경이야. 짧은 시간에 용병들을 휘어잡으시다니.”
“삐딱하게 구는 놈이 하나도 없다니 대단한걸. 이렇게 군기가 삼엄한 부대는 오랜만이군.”
다른 용병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우레오 사제님이시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백작 각하를 모시는 기예르모입니다.”
예비대로 다가온 중년의 사내가 아우레오를 찾았다. 토벌을 이끄는 세 기사 중 한 명, 기예르모 경이었다.
예비대장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아우레오도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영주와 주교의 정치적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출정을 나온 이상 두 사람은 전우였다.
기예르모는 앞으로 몇 주나 이어질 토벌 기간 동안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아우레오도 그런 건 질색하는 인간이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가 없어도 암묵적인 평화협정을 맺었다.
“예비대에 속해 있는 동안은 지휘에 따라 주십시오. 사제님께서 돌발행동을 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제가 아주 난처해지거든요.”
“물론이지요, 경. 출정을 결심했을 때부터 마음먹은 일이니 걱정 말아요.”
기예르모는 웃는 낯으로 부탁했고 아우레오도 흔쾌히 동의했다.
기예르모는 걱정을 한시름 덜어 낸 듯,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분은……?”
“아, 제 순례의 수호자이자 뛰어난 전사인 테온입니다. 테온은 이번 출정에 나설 의무가 없지만, 민생에 해를 끼치는 몬스터를 토벌한다고 하니 자발적으로 참여하셨어요.”
“오오, 그러시군요.”
아우레오의 소개에 기예르모가 감탄하며 나를 다시 돌아봤다.
그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기예르모는 영주를 따라 서부에서 건너온 개척 전사였고, 그에게 싸움이란 목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대가 없는 싸움을 하는 내가 신기할 만했다.
“훌륭하다, 테온.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그대가 나설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수호자가 싸움에 나선다는 말은 사제가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지금 반말을?”
아우레오가 급히 끼어들어 대신 변명했다.
“테온은 사악한 마법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입니다. 공용어를 다시 배운 지 얼마 안 되어서 경어에 익숙치 않으니, 기예르모 경이 이해해 주세요.”
“아아…….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기예르모의 얼굴에 옅은 불쾌감이 스쳐 갔다. 그는 말 머리를 돌려 선두로 돌아갔다.
“순례의 수호자는 사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게 아니었나?”
“명목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귀족과 동등한 입장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생각하는 수호자의 권위와 세속의 권위는 차이가 있어요.”
“알 만하군.”
생각해 보면 에릭이나 토마스도 내게 깍듯한 대우를 하진 않았다.
사제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신원이 보증된다는 것이지, 권세를 누린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래도 기예르모 부장의 태도를 보니 토벌 기간 중 불필요한 마찰은 없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테온?”
“……글쎄.”
기예르모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허리에 찬 박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선봉대의 리암은 놀의 흔적을 찾아 사방으로 정찰을 보냈다.
* * *
토벌대가 출정한 지 삼 일.
시종일관 밝게 웃던 아우레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첫 예배일이 되어서였다.
종군 사제인 아우레오는 병사들을 모아 진중 예배를 집행했는데, 예배에 참석한 인원은 전체 토벌대의 칠 할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종교의 권위가 강한 세계에서 삼 할이나 예배에 불참한 것도 놀랍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아우레오가 이토록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방황하는 병사들을 신의 품으로 이끌겠다며 눈을 반짝였겠지.’
아우레오가 분노한 것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병사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영 한쪽에 별도의 제단을 꾸리고, 각자가 모시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지,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대경한 아우레오가 드물게 큰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갔지만, 예비대장 기예르모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놔두십시오. 오르샤바는 서부 출신이 많습니다. 서부의 사내들은 각자의 신앙을 목숨처럼 생각하지요.”
“오르샤바에 아도나이의 숨결이 닿은 지가 벌써 몇 년인데, 가야르도 백작은 영주라는 자가 아직도 저런 토속 미신을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말씀이 지나치시군.”
흥분한 아우레오의 말을 자른 것은 기병대장 요네스였다.
토벌대를 이끄는 세 기사 중 한 사람이자, 그 역시 서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사내.
상급자인 요네스가 끼어들자 기예르모는 한발 물러섰다.
요네스는 말에 탄 채 냉막한 눈빛으로 아우레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도나이의 사제라는 신분이 모든 무례를 용서해 주지는 않소.”
“뭐, 뭐라고요?”
아우레오는 분에 겨워 어쩔 줄 모르면서도 속 시원히 맞받아치지 못했다. 역시 싸움도 해 본 놈이 잘하고, 화도 내 본 놈이 잘 내는 법.
이런 정면충돌은 아우레오에게 익숙치 않은 상황이었다.
“병사들의 신앙을 존중하시오. 내가 칼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당신을 존중하고 있는 것처럼.”
요네스는 자기 할 말만 던져 놓고 말 머리를 돌려 선두로 돌아갔다.
토벌대장 리암이 이쪽을 보며 피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애한테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이다니. 서부 기사란 놈들의 수준도 알 만하군.’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니 아우레오가 수모를 당하건 말건 나랑 별 상관이 없는 문제가 아닌가?
‘그간 정이라도 들었나.’
정이라.
이제는 참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물론 마녀와 싸울 때 아우레오에게 구명(救命)의 빚을 지기도 했고, 몇 달을 함께 여행하고 있으니 정이 들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도 어쩐지 인정하기는 싫은 기분이었다.
‘요네스는…… 왼손잡이군.’
요네스는 검을 오른쪽 허리에 패용하고 있었다. 그 말은 왼손으로 검을 뽑는다는 뜻이다.
‘난 왼손잡이가 싫어.’
나는 대열을 앞질러 선두에 있는 리암과 요네스에게 향했다.
내 기세에서 무언가 불안을 느낀 건지, 아우레오도 급히 내 뒤를 따랐다.
“어이.”
“……혹시 날 부른 건가, 수호자 테온?”
“그래, 너.”
내 부름에 앞서가던 요네스가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꼴이 실로 주먹을 부르는 표정이었다.
“아우레오의 발에 상처가 생겼다. 말을 대령해라.”
“……뭐라고?”
“귀먹었어? 사제가 말을 타야겠으니 기수들이 끌고 온 예비마를 대령하란 말이다.”
요네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동안 기사랍시고 품위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역시 칼에 기대어 살아온 놈답게 성질을 죽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테, 테온, 저는 괜찮은데요.”
“넌 가만히 있어.”
오히려 당황한 것은 아우레오였다.
병사들이 서부 잡신에게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열이 뻗쳤지만, 이런 식으로 수호자가 대뜸 싸움을 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만류하는 아우레오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요네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말 가져와.”
“이 개새…….”
요네스가 불쑥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이 악물고 삼켰다. 고삐를 힘껏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열 받지? 흐흐, 참지 마라. 유치한 기 싸움 따위 할 필요 없이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서열을 정리해 주마.’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토벌대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