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5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무림인이라면 모를까, 양민에게 이곳은 중원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었다.
중원은 위험한 맹수가 출몰하는 곳만 아니면 길바닥에도 퍼질러 자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안전했다.
어지간한 요괴나 악귀는 땡중과 도사 들이 모조리 물리쳤고, 이제는 옛날이야기에나 등장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중원보다 미개척지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양민이라도 제 한 몸 건사할 재주는 있나? 내가 아직 이곳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런 걸지도.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자. 귀찮다.’
오늘은 낯선 두 사람과 함께 있으니, 어차피 운기조식도 할 수 없다. 나는 속 편히 누워 오랜만에 단잠을 청했다.
“에릭, 이 자식은 우릴 자기 하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며칠만 참자. 압생트 마을은 인구가 백 명도 넘는 곳이니까 도착하면 이놈을 손봐 줄 수 있겠지.”
“좋아, 마을 청년들과 합심해서 아주 묵사발을 내 버리겠어.”
두 사람이 무언가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운을 빌어 주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만나는 사람마다 색목인인 이유는?
여정은 생각보다 길었다.
막연히 하루 이틀 정도면 사람이 사는 곳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길바닥에서 벌써 닷새째 아침을 맞이했다.
“아으아어으…….”
토마스가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고, 에릭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야영지를 정리했다.
나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버릇없는 두 색목인과 함께하는 것도 슬슬 지겨웠다.
“출발할까요?”
“그려.”
지난 닷새 동안 에릭에게 간단한 단어 몇 가지를 배웠다. 짐을 꾸린 에릭은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출발했다.
“늙은 놈은 눈치가 있군. 어린놈은 글러 먹었고.”
에릭은 내가 하는 혼잣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표정을 살피는 반면, 토마스는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니, 에릭은 조심성이 있고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성격이었다.
“너 같은 애들이 장수한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에릭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토마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검지로 토마스의 이마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이런 놈은 상대를 못 알아보고 까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뒈지기 십상이고.”
토마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빌어먹을 아인종 놈이 아주 기가 살았군.”
“조금만 참아, 토마스. 거의 다 왔잖아.”
“언제까지 참을 거야, 에릭? 이놈은 보아하니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우릴 무슨 어린애 취급하잖아.”
“참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우리 둘이 덤벼서는 상대가 안 되잖아.”
“……제기랄.”
토마스가 부들대는 걸 보니 내 험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이놈이 말로만 까불지 첫 만남처럼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 오랑캐 말로 실컷 투덜거려라. 나도 약자의 넋두리 정도는 들어 줄 아량이 있다.”
“마을에 도착하기만 해 봐라. 삼 일 밤낮을 장대에 매달아 두고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을 거야.”
토마스는 이제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 꼴 보기 싫은 표정에 나는 급속도로 아량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더 손을 봐 줄까?’
강자가 즐비한 무림에서도 나를 상대로 저따위 표정을 하는 놈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무공을 잃었기로서니, 사파거두의 성질머리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가 토마스에게 다시 한번 예절을 주입해 줘야 할 시기가 된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길 너머로 목책을 빙 두른 마을이 보였다.
“다 왔다!”
“압생트 마을이 이렇게 반가워 보일 줄이야!”
에릭과 토마스가 신이 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나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저게 마을이야? 무슨 시골 마을에 저렇게 높은 목책을 세웠지?”
눈앞에 나타난 마을은 중원의 시골 마을과 분위기가 달랐다.
내공으로 시력을 돋우어 살펴보니, 목책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경비병으로 보였는데, 손에는 활까지 들고 밖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긴, 숲속에 요괴가 돌아다니는 곳이니까 저럴 만도 하지.’
생각해 보면 지난 여정 내내 에릭과 토마스는 번갈아서 잠을 잤다. 순번을 정해 둘 중 한 사람은 꼭 깨어 있었던 셈이다.
이곳이 아직 야성이 살아 숨 쉬는 땅이라는 방증이었다.
“이봐, 문 좀 열어 줘!”
“어디에서 온 누구냐! 신분을 밝혀!”
“숲 너머의 닉스 마을에서 온 에릭이야. 지난가을에도 왔었잖아! 내 얼굴 기억 안 나?”
마을 청년은 목책 위에서 활을 겨누며 방문자를 경계했다.
에릭과 토마스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무어라 자신 있게 외치며 웃고 있었다.
“너희 촌장에게 닉스 마을의 용병이 도착했다고 전해! 아마 버선발로 뛰어나올 테니.”
“닉스 마을의 용병? 그런 촌구석에 용병은 무슨. 일단 여기서 기다려.”
청년은 에릭과 토마스의 얼굴이 기억났는지 금세 표정을 풀었다.
청년이 목책 내부로 무어라 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마을에서 여러 사람이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오오, 에릭! 토마스! 역시 자네들이 와 주었군.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오랜만이오, 촌장.”
두 사람이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목책 내부를 대강 둘러보았다.
거창하게 목책까지 두른 것에 비해, 마을 내부는 아담하고 소박했다.
아낙들이 아이를 돌보며 식사를 준비하고, 사내는 방책을 돌보거나 짐승의 가죽을 벗겼다.
어린아이들은 마을 곳곳에서 웃으며 뛰어다녔다.
‘여기도 전부 색목인이군.’
이곳이 중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색목인이고, 그들의 옷이나 집, 사용하는 도구 따위도 생소한 형태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지난 닷새 동안 처음 보는 낯선 식물과 곤충을 수도 없이 발견했다.
중원에서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어쩌면 아예 다른 세계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이세계(異世界)에 온 것이라면,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게 쉽지 않겠어.’
이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애초에 내 무공이 도가 계열이고, 도가의 최종 목표는 등선(登仙)이다. 즉, 선계(仙界)로 가기 위한 공부라는 뜻이다.
신선이 노니는 세계가 따로 있다면, 또 다른 세계가 없으리란 법도 없다.
“그나저나 에릭, 저 사람은 누군가? 저 특이하게 생긴 검은 머리 친구 말이야.”
“아, 저자는…….”
“내가 설명하지요, 촌장! 우선 마을의 모든 장정을 소집해 주시오. 무기도 들고!”
마을의 대표로 보이는 노친네의 물음에 토마스가 흥분하며 내게 삿대질했다.
첫 만남에서 얻어터진 후 며칠 얌전하더니, 또 몹쓸 버릇이 나왔다. 역시 버릇을 고치려면 꾸준한 훈육이 필요한 것이다.
또각.
“끄악! 내, 내 손가락!”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손가락을 잡아 똑 하고 부러뜨렸다. 토마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노인이 무어라 고함을 지르고, 에릭도 마을 인파 속으로 합류하며 몸을 숨겼다.
“조심해요! 극히 위험한 놈입니다!”
“에릭, 저놈은 뭔데? 아인종인가?”
“나도 몰라요. 하지만 몹시 공격적인 놈입니다. 안전하게 제압하려면 여럿이 동시에 공격해야 해요.”
노인과 에릭이 빠르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 마을의 청년들이 각자 창이며 쇠스랑 따위의 조잡한 무기를 들고 나를 에워쌌다.
오합지졸이 모여서 허둥지둥 대형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나름대로 집단전 연습을 많이 한 것 같네? 이쪽 동네도 살기 팍팍한가 보구먼.”
이런 산골 마을 촌부까지 병진(兵陣)을 익혀야 할 정도라니, 마을이 외부의 공격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뜻이리라.
아마도 지난날 보았던 요괴들이 가장 직접적인 위협이겠지.
“어쨌거나, 말로 할 때 창은 내려놔. 후회하지 말고.”
애잔함으로 인해 가슴속 자비가 충만해진 나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사람들을 달랬다.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진 토마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에릭도 군중의 틈에서 다른 사람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일단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이방인인 내가 아무리 진정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찔러! 찔러 버려!”
“기다려! 민첩한 놈이니까 모두가 동시에 찔러야 해! 저놈은 공용어를 모르니 내가 신호하면 그때……!”
모두가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마을 안쪽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 짓입니까!”
백색 장포를 휘날리며 난입한 사람은 유약한 인상의 소년.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외모였다.
소년의 복장은 고급스러웠다.
한눈에 봐도 예복으로 보이는 깨끗한 흰옷은 은빛 실타래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목에는 장식 고리가 달린 목걸이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동그란 장식뿐만 아니라 줄까지 얇은 은줄로 만들어져 흔들릴 때마다 아름답게 반짝였다.
‘호오, 귀한 집 자제분이 나선 모양이네.’
참다못해 손을 쓰려던 나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백의 소년은 내 예상대로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켰다.
“창을 거두세요. 외모가 다르다 해서 같은 인간을 이토록 핍박하다니.”
“사제님, 물러서십시오! 이자는 몹시 위험한 작자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인간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하겠어요. 어서 창을 거두래도!”
백의 소년은 몇 차례 호통을 치며 사람들을 물렸다. 마을의 대표로 보이는 노인조차 백의 소년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모든 주민이 무기를 거두고, 싸우는 분위기를 조성했던 토마스와 에릭만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초, 촌장, 저분은 누구시길래……?”
“중부의 대교구에서 온 아우레오 사제님이시네. 자네들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이기도 하지.”
“헉, 대교구의 사제님요? 그럼 저분이 이번 여정의 의뢰주……?”
쑥덕거리는 에릭과 노인을 뒤로하고, 백의 소년은 내게로 다가왔다.
소년의 걸음걸이나 풍기는 기도를 보니, 내외공 어느 쪽으로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다. 아니, 무공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 체력도 부족해 보였다.
“반갑습니다, 이방인. 주민들의 거친 인사를 이해해 주시길.”
“이건 반갑다는 뜻이지? 나도 반갑다. 이제야 좀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났군.”
백의 소년은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설령 이곳이 이세계라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인사 정도는 다 비슷하기 마련. 나는 소년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백의 소년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걸 보니, 역시 내 판단이 옳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