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6
“하하, 이걸 보세요. 제가 호의로 대하니 이자도 역시 호의로 답하는군요. 한데, 공용어를 할 줄 모른다고요?”
“예, 사제님. 그자는 저희가 숲길에서 마주친 사내인데, 공용어를 모르는 데다 성질도 폭력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보시다시피 외모나 복장도 무척 이질적이라…….”
“사악한 아인종으로 착각하셨나 보군요.”
“예.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만 사제님이 보시기에 아인종은 아닌가 보지요?”
에릭의 말에 백의 소년은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는 에릭과 대화하면서 종종 나를 쳐다보았는데, 눈빛에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악수까지 했는데도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군요. 이자는 인간입니다. 혹여 처음 보는 아인종이라고 해도 마력이 없는 종족이라면 적대할 이유가 없지요.”
“그야 그렇지만…….”
에릭은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끝내 말끝을 흐렸다.
나는 이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대강의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의 소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굽혀지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복장부터가 범상치 않아 높은 신분인 듯하니, 다른 촌부들은 백의 소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어 보였다.
“손님이 오면 대접을 하는 것이 도리지요. 일단 마을을 방문한 분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줍시다.”
“예? 아, 뭐, 그래야지요.”
백의 소년의 말에 노인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눈을 피했다. 백의 소년의 제안이 노인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백의 소년은 그러거나 말거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양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번 순례길에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라더니, 이토록 특색 있는 이방인이 나타날 줄이야…….”
“겁대가리 없는 놈이네. 어르신 어깨에 손을 올려?”
귀한 집 자식도 장유유서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소년 사제 아우레오
“아우레오, 내 이름은 아우레오입니다. 아.우.레.오.”
자신을 가리키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백의 소년. 아마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겠지.
“아우레오? 네 이름이 아우레오야?”
“맞아요. 아우레오. 발음을 곧잘 따라 하시네요.”
“흐흐, 웃기는 이름이군. 이 몸은 일각노괴 능태오 님이시다. 태오, 능태오!”
나도 내 가슴팍을 엄지로 가리키며 이름을 말했다.
아우레오는 발음이 어려운지 쉽게 따라 하지 못했다.
“일각…… 느응…… 테온? 이름이 테온인가요?”
“그래, 태오. 능태오다.”
“테온, 그대의 이름은 테온이군요!”
발음이 어설프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당장 통성명이 가능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았다.
“테온,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하하, 이것 참 기대되는군요.”
“하하하, 뭐라는 거야.”
“하하하하, 이걸 보세요. 이방인도 저처럼 웃고 있잖아요? 우린 좋은 인연이 될 겁니다, 아하하하!”
아우레오는 날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유쾌하게 웃었다.
약골 주제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같이 웃어 주었다.
잠시 후, 주민의 안내를 받아 마을 중앙의 큰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을 공동 회관으로 사용하는 건물로 보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음식이 준비될 것입니다. 후루룩 쩝쩝 먹는 거. 음식요.”
아우레오는 손으로 무언가를 떠먹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는 어린아이와 대화를 많이 해 본 사람인지 표현력이 남달랐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손짓과 의성어, 과장된 표정으로 쉽게 내용을 전달했다.
“오, 밥상 차려 온다고? 좋아, 좋아. 일이 술술 풀리는군. 흐흐, 넌 좀 마음에 든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아우레오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 모습 본 주변의 장정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아우레오는 웃고 있었다.
그때 마을 아낙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식탁 위에 하나둘 놓이는 음식을 보니 마을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곡식이 부족한 모양이군. 하긴, 긴 겨울이 이제 막 끝난 참이니까.’
내어 온 음식이라고는 곡물 가루로 만든 푸석한 건빵과 육포 몇 점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것도 어렵사리 긁어모아 온 것인 듯 촌장의 표정에 아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자, 어서 드시죠.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마주 앉은 아우레오는 의외로 눈치가 없는 것인지, 양팔을 걷어붙이며 음식 먹을 준비를 했다.
‘씨팔, 불편한데.’
까부는 놈을 죽도록 패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가난한 놈에게 밥을 빼앗아 먹는 건 영 못 할 짓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비렁뱅이 출신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서는 대차게 행동하기 어려웠다.
마지못해 말린 고기를 잡으려는데, 아우레오가 내 손을 톡 치며 말렸다.
“뭐야?”
아우레오는 나를 보며 따라 하라는 듯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무언가 중얼거리는 모습.
“기도하는 거야?”
그 모습이 무척이나 경건해서 평범한 습관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다 아우레오의 기도가 끝난 뒤 말을 걸었다.
“너는 이 세계의 땡중이나 도사 같은 인물이구나.”
“저요? 네, 저는 사제입니다. 유일한 신 아도나이의 충실한 종이지요.”
우리는 서로를 가리키며 손을 모으고 하늘을 쳐다보는 등 손짓, 발짓을 총동원해 어렵게 대화를 이어 갔다.
아우레오가 이곳에서 도사의 역할을 한다면, 내가 당분간 도움을 받기에는 최적의 인물일 것이다.
“테온,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대화는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이어졌다.
아우레오는 나에게 이것저것 계속 물었고, 나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질문에만 손짓, 발짓으로 답했다.
“난 무림인이다. 사파 무림인. 사람을 이 육포 썰듯 썰어 버리는 일을 하지.”
나는 식기로 허공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음식을 삼지창과 언월도로 먹냐.’
무기로 음식을 먹는 특이한 놈들이다. 식기랍시고 내온 것들이 수저가 아니라 앙증맞은 크기의 방천화극과 청룡언월도였으니.
“칼을 휘두르는 걸 보니 테온은 군인이나 용병인가 보군요. 아니면 검투사?”
“사제님, 이자가 야만인이라면 그런 분류는 의미가 없습니다. 야만 부족의 사내는 모두가 군인이며 용병이고, 동시에 검투사이니까요.”
아우레오의 옆에서 촌장이라 불리는 노인이 말을 거들었다.
촌장은 아우레오와 달리 나를 마을에 들인 것이 영 불안한 모습이었다.
“사제님, 에릭과 토마스가 말하기로 테온의 무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덤벼들었는데도 발길질 몇 번에 제압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에릭과 토마스도 제법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자들이라면서요?”
“특히 에릭은 용병 출신입니다. 현역 시절에 큰 도시를 세 곳이나 다녀온 베테랑이지요. 사제님의 순례길에 함께 보내려고 닉스 마을에 특별히 부탁해서 데려온 것인데…….”
“그런데도 테온을 당해 내지 못했다고요? 심지어 두 사람이 동시에 덤볐는데?”
“예. 그러니 테온이 아까처럼 난동을 부리면 다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흐음…….”
나는 아우레오와 촌장의 대화를 멀뚱히 듣고 있었다. 딱히 알아들을 만한 내용은 없었지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슬슬 지겨운데.’
말이 통하지 않는 오랑캐와 대화하는 건 처음 한 시진 정도만 흥미진진했다.
배도 부르겠다, 답답한 대화에 염증이 느껴지자 이제 좀 쉬고 싶었다.
‘어디 방구석에서 운기행공이나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질 텐데. 아니면 오랜만에 외공을 수련하면서 몸을 한번 풀든지.’
내가 몸을 풀 기회는 보름이 지난 뒤 찾아왔다.
* * *
보름 동안 내 일과는 계속 똑같았다.
촌장은 내게 작은 쪽방 한 칸을 내주었는데,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내공을 수련하며 보냈다.
마을에서 제공해 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으니, 숲속 오두막에서 지낼 때처럼 내공의 회복에 매진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매일 한 시진에서 두 시진 정도 이곳 언어를 배우는 것뿐이었다.
“배움이 빠르군요, 테온. 놀라울 정도예요.”
“흐흐, 놀랐어? 내가 성질이 불같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똘똘하거든. 타고난 오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이건 우리 사부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아직은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손발이 덩달아 바쁘지만, 점점 활용할 수 있는 단어가 늘고 있었다.
나는 아우레오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마을을 거닐었다.
‘그나저나, 역시 이곳은 중원이 아니었군.’
아우레오와 이야기를 나누며 확실히 깨달았다.
그가 설명하는 지형이나 지명, 종교와 사회, 문화 등등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웠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확인하니 허망한 기분이었다. 어딘지도 모를 이세계에서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에 앞길이 막막했다.
‘일단 이곳에 적응하자. 중원으로 가는 방법은 무공을 온전히 회복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막연히 손을 놓고 있기보다는 당장 해야 할 일부터 찾아서 하는 게 옳다.
‘첫 번째 목표는 이곳에서의 생존, 두 번째는 무공의 회복.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야.’
이 두 가지 시급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무공 수련과 정보 수집이었다.
‘아우레오를 만난 건 행운이로군.’
아우레오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나를 대했지만, 태도와 별개로 제법 지체 높은 인물 같았다.
먹고 죽을 식량도 부족해 보이는 압생트 마을이지만, 그들은 끼니마다 십시일반으로 음식을 갹출해 아우레오를 대접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아우레오의 손님이 된 덕분에 굶지 않고 꼬박꼬박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는 일도 없이 방구석에 처박혀 공짜 밥만 먹었더니 눈치가 보여서 원…….’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은원(恩怨)을 갚는 것은 무림인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밥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민들을 도와 벽에 칠을 하거나, 장작을 패거나, 지붕 고치는 일 따위를 하긴 싫었다.
‘무림인은 칼로 빚을 갚는 법인데. 이런 시골 마을에서 내 솜씨가 필요할 일이 있으려나.’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마을의 평화를 깨는 소음이 있었다.
뎅 뎅 뎅 뎅 뎅-!
비상 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 소리에 마을의 모든 장정이 각자 무기를 꼬나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사전에 많은 연습을 했는지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성성한 촌장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사람들을 지휘했다.
“다 큰 사내는 전부 목책으로 배치 붙어! 여자들은 애들 데리고 마을 회관에 숨고!”
“‘고블린’이다! 고블린 떼가 온다!”
창을 든 사내는 목책 뒤로 붙고, 활을 든 사내는 목책 위로 올라섰다.
아낙들은 각자 아이를 둘러업고 회관을 향해 뛰었다. 경비하던 사내가 고블린을 외치자, 모든 주민이 목소리를 높여 복창했다.
“고블린이다! 고블린이다!”
“이봐, 톰슨! 지금 낮잠 잘 때가 아니야! 고블린이 습격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행여 종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봐 집마다 대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