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7
낮잠 자던 사람이나 낮술 마시던 사람도 허둥지둥 옷을 갖춰 입고 각자의 위치로 달려갔다.
“고블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허둥대는 꼴을 보니 외적이 쳐들어온 모양이었다.
“뭔 일 났나?”
“고블린 떼가 몰려오나 보군요. 하긴, 그놈들도 겨울 동안 비축해 놓은 식량을 모두 먹어 치웠을 테니, 슬슬 주변을 공격할 시기가 되었지요.”
“고블린이 뭔데?”
아우레오의 말에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많았지만, 대강 고블린 때문에 이 난리가 벌어졌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고블린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어려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괴상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한참 몸짓으로 설명하던 아우레오는 문득 내 얼굴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나는 아우레오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야야, 때려치워. 뭐 하는 거야.”
굳이 아우레오의 설명이 아니어도, 고블린이라는 게 외부의 적이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와 아이 들이 대피하고, 사내들은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뻔했다.
“일전에 싸웠던 퍼렇고 못생긴 요괴를 말하는 건가?”
고블린이 무엇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정체를 몰라도 싸움이 두렵지는 않다. 민초들이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울 정도라면, 애초에 내 적수는 아니란 소리다.
지금은 비록 무공을 잃어 처음부터 다시 쌓고 있다지만, 그래도 왕년에 사파의 거두였던 몸.
“까짓거, 오늘 내가 칼춤 한번 춰 주지.”
오늘은 무림인답게 밥값을 치러야겠다.
사파에서 온 용사
인간이 승리한 게 아니라 내가 승리한 것
거대한 예배당.
높은 천장에는 신의 형상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뿌연 유리를 통과한 빛은 부드럽게 실내를 채웠다.
“유일한 신 아도나이시여, 각기 다른 곳을 향하는 아홉 순례자의 앞길을 살피시옵고…….”
늙은 사제는 아도나이를 상징하는 성원상(聖圓像)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구도자의 엄숙한 기도는 잔잔한 울림이 되어 예배당 안에 퍼졌다.
“주교 예하,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테오도르 경.”
한참 기도하던 주교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쳐다봤다.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노기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순례 중인 사제들을 걱정하시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특히 아우레오 사제가 걱정이에요. 나이가 어리고 혈기가 넘치다 보니, 혹여 위험한 일을 겪지 않을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나이는 어리지만, 그 역시 신의 뜻을 받드는 어엿한 사제이지요. 잘 해낼 겁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주교는 미소를 지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푸근한 미소였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제 갓 수도원을 떠난 어린 사제들인데,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요.”
“무거운 짐이라면……?”
“고난의 길에서 빛의 용사를 만난다는 신탁 말입니다.”
주교의 대답에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미소 지었다. 지체 높은 주교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마치 손주를 걱정하는 시골 할아버지처럼 느껴진 것이다.
“아도나이께서는 추상적인 신탁을 내려 주시지요. 우린 그 뜻을 짐작할 뿐이고요. 말씀하신 고난의 길이 이번 순례인지는 아직 모를 일입니다.”
“그건 테오도르 경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길이라면 아무래도 첫 순례를 뜻할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홉 사제 모두 무사히 순례를 마칠 것입니다.”
테오도르의 위로에도 주교의 표정에 드리운 근심은 걷히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걱정이 커지는 모양이었다.
“어린 사제들이 신탁의 내용을 모른 채 떠났다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그들이 신탁에 나온 빛의 용사를 찾기 위해 불필요한 위험을 무릅쓸까 우려가 됩니다.”
“하하, 그렇다고 출발 전에 나온 신탁을 사제들에게 비밀로 할 수도 없었잖습니까?”
노기사의 너스레에 주교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 *
나는 훌쩍 뛰어올라 목책 위로 올라섰다.
사람 키보다 높은 목책이지만, 모처럼 내공을 운용해 경신법을 펼치니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테온, 당신 탄력이 대단하군요!”
“놀랐어? 큭큭, 무공에 일자무식인 놈 앞에서 대곤륜파의 답허성실(踏虛成實)을 펼쳐 보였으니, 놀랄 만도 하지.”
천하의 많은 경신법 중에서 빠르기로는 운해비영을, 가볍기로는 답허성실을 최고로 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우레오의 모습이 우스웠다. 아우레오뿐만 아니라 내가 목책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뒤로하고 목책 너머에서 다가오는 푸른 괴물을 바라보았다.
“고블린이란 건 역시 저놈들이구나. 내 그럴 줄 알았지.”
푸른 털이 듬성듬성한 못생긴 요괴가 떼를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마주쳤던 요괴들. 벌써 네 번째 만나다 보니 이제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마을 사람 중 요괴의 외모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반응을 보니 고블린의 공격은 이 마을의 연례행사 같았다.
“족히 일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데?”
“올해는 수가 좀 많군.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냐.”
마을 청년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결의를 다잡고 있었다.
나는 목책 안팎을 번갈아 쳐다보며 양쪽의 전력을 저울질했다.
‘저 고블린이라는 요괴는 건강한 성인 남자보다는 약해. 숫자가 많긴 하지만, 이쪽은 목책도 있으니 충분히 막아 낼 수 있겠군.’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 혼자서 고블린 여섯 마리를 때려죽였다. 약간의 무공을 회복한 뒤에는 여덟 마리를 어렵지 않게 죽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무림인이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내공을 상실했다 한들, 뇌리에 각인된 투로(鬪路)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니까.
무공을 배운 적 없는 평범한 마을 청년이라면 고블린 두세 마리를 상대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지금 압생트 마을의 주민은 전부 합쳐야 일백 명 정도고 싸움에 나설 만한 사내는 고작 서른 명 정도였다. 그렇게 따지면 양쪽의 전력은 비등했다.
‘단순히 계산하면 그렇지만, 이 정도 규모의 싸움에서 한낱 미물이 사람을 당해 낼 순 없지.’
압생트 마을은 무리 없이 고블린을 막아 낼 것 같았다.
짐승이 아무리 흉포해도 집단전에서 조직화된 인간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노릇. 목책 뒤에 숨어 장병기로 찔러 대면 고블린을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목책이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만일 목책이 무너져 난전이 벌어지면 압생트 마을은 지옥이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고블린 떼는 목책에 도달했고, 본격적인 이종(異種) 간 사투가 시작됐다.
“겁먹지 마! 양손으로 창을 단단히 잡아!”
“깊게 찔러! 단번에 죽여 버려!”
끼에에엑-!
“죽여라!”
요괴의 울부짖음과 사내들의 고함이 뒤섞였다.
고블린은 역겨운 외모만큼이나 듣기 싫은 괴성을 지르며 목책을 기어오르려 했다.
주민들은 침착하게 창을 내질러 고블린을 한 마리씩 죽여 나갔다.
푹! 푹! 푹! 푹!
목책 뒤에서 창을 힘껏 뻗을 때마다 고블린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활을 든 청년들도 한곳에 몰린 고블린 떼를 향해 쉬지 않고 화살을 쏘아 댔다.
고블린 떼도 이대로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산개하며 목책 주변을 빙 둘러싸기 시작했다.
“우리도 흩어지자! 고블린이 목책을 넘어오지 못하게 해!”
마을의 자경단을 이끄는 청년회장이 적극적으로 병력을 통솔했다.
청년들은 훈련받은 군인처럼 통제에 따르며 전술을 수행했다.
오랜 세월 고블린과 싸워 온 마을답게, 제법 체계가 잡힌 전투 수행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딜 기어올라!”
끼엑!
마을 청년이 또 한 마리의 고블린을 찔러 죽였다.
청년들은 목책 뒤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목책에 매달리는 고블린을 공격했다.
쿵! 쿵! 쿵!
그때 불길한 발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옮겨 보니 숲의 초입에서 처음 보는 커다란 고블린이 뛰어오고 있었다.
“‘홉 고블린’이다!”
“말도 안 돼! 푸른 고블린은 우두머리가 없는 종인데……!?”
오두막으로 찾아왔던 녀석보다도 훨씬 큰 고블린 세 마리. 사람보다 더 큰 개체가 전장에 도착했다.
꾸어어어억-!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포효를 내지른 홉 고블린 세 마리가 목책을 향해 돌진했다.
홉 고블린은 다른 고블린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커 보였다. 손에 든 몽둥이는 어지간한 절굿공이보다 길고 두꺼웠다.
키도 사람보다 크고, 팔다리에는 근육이 울룩불룩했다. 두둑한 뱃살 아래에는 커다란 양물(陽物)이 보기 흉하게 덜렁거렸다.
‘홉 고블린? 쟤는 무슨 아랫도리에도 몽둥이가 달렸네, 흐흐.’
나는 그 추한 모습에 웃음을 흘렸지만, 마을 장정들은 급격히 동요하고 있었다.
침착한 몇몇 사람은 홉 고블린을 향해 활을 쏘았지만, 대부분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좋지 않군. 저런 덩치가 들이받으면 목책이 쓰러지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홉 고블린은 날아오는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목책으로 돌진했다. 두꺼운 팔로 얼굴을 가린 홉 고블린은 화살에 맞아도 달리는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쿵!
이윽고 선두의 홉 고블린이 목책을 들이받았다. 단 한 번의 충돌에 목책 일부가 들썩였다.
쿵!
두 번째 홉 고블린이 부딪치며 체중을 싣자 목책이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우지끈!
그리고 세 번째 홉 고블린까지 도착했을 때, 결국 목책 한쪽이 허물어지며 큰 구멍이 생겼다.
꾸어어어억-!
마을 내부로 진입한 홉 고블린이 광기에 찬 포효를 터뜨렸다.
그 포악한 모습에 인간은 공포에 떨고, 고블린 떼는 사기충천해서 목책이 뚫린 곳으로 몰려들었다.
꾸어어! 꾸어어억…… 얽!
“그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거침없이 포효하던 홉 고블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입으로 들어온 창이 입천장을 뚫어 버린 것이다.
뒤통수로 삐져나온 창날에는 진득한 녹혈이 번들거렸다.
“큰 놈들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너희는 몰려드는 작은 고블린을 막아!”
나는 이곳의 말과 중원 말을 섞어 대충 소리치고 창을 회수했다. 뒤통수에 구멍이 뚫린 홉 고블린이 힘없이 쓰러졌다.
“테, 테온?”
“테온이 홉 고블린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