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
주민들이 놀라는 동안 나머지 두 마리의 홉 고블린을 향해 쇄도했다.
한 마리는 흥분해서 포효하는 틈을 노려 손쉽게 죽였지만, 나머지 두 마리까지 죽이려면 애를 써야 할 것 같았다.
‘가죽이 질기군. 뼈도 사람보다 튼튼하고.’
창이 놈의 뒤통수를 꿰뚫을 때 느껴진 저항이 묵직했다. 나는 아직 외공을 단련하지 않은 상태. 내공이 고갈되면 나도 위험하다.
“그렇다면 초장에 승부를 봐야지!”
낭랑하게 외치며 답허성실을 펼쳐 공중으로 솟구쳤다. 단전에 차곡차곡 쌓아 둔, 채 한 줌이 되지 않는 내공을 섬세하게 풀어내 사지로 흘려보냈다.
허공에서 두 번째 홉 고블린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푹!
얼굴을 노렸지만, 홉 고블린도 팔을 들어 막았다. 창날은 홉 고블린의 팔뚝을 반쯤 뚫고 들어갔다.
나는 착지하지 않고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재차 이 격을 뻗어 냈다.
푸욱!
공중에서 여덟 번이나 몸을 뒤집는 절세의 신법, 곤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운룡대팔식이 낯선 이세계에서 펼쳐졌다.
‘내공이 없으니 여덟 번은커녕 한 번 뒤집기도 쉽지 않네.’
하지만 한 번으로 충분했다.
홉 고블린은 내가 착지할 위치를 예측하며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발 디딜 곳이 없어도 방향을 전환하는 운룡대팔식의 묘리는 예측하지 못했다.
꾸어어……!
두 번째 홉 고블린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못생긴 마빡에서 녹색 피가 왈칵왈칵 뿜어져 나왔다.
‘남은 건 한 마리.’
마지막 홉 고블린은 위협을 느꼈는지 슬슬 뒷걸음질 치며 다른 고블린들 사이로 몸을 피했다.
흩어졌던 다른 고블린들도 홉 고블린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우두머리를 엄호하는 것이다.
나는 내공을 바닥까지 긁어모았다. 홉 고블린을 향한 손끝에서 강한 풍압이 형성됐다.
피잉-!
건천일지공(乾天一指功)이 홉 고블린의 눈알을 꿰뚫었다. 원거리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괴물은 그대로 쓰러졌다.
“홉 고블린이 모두 죽었다! 지금이 섬멸의 기회야!”
촌장과 청년회장도 지금이 절호의 기회란 것을 깨달았다.
“놈들이 한곳에 모였다! 일제히 활을 쏘고 창을 던져!”
“집중 공격해!”
고블린 떼를 향해 창과 화살의 세례가 쏟아지고, 고통에 찬 짐승의 비명이 목책 안팎을 메웠다.
끼엑!
꾸어억!
결국 대부분의 고블린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살아남은 소수의 고블린 잔당은 허둥지둥 숲으로 도망쳤다.
“놈들이 물러간다!”
“와아아! 고블린의 습격을 막아 냈다!”
“이게 압생트 마을의 힘이다! 이 저주받을 몬스터들아! 하하하!”
전투는 단합한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 회관으로 대피했던 사람들도 환호성을 듣고 밖으로 나와 함께 기뻐했다.
“대단합니다, 테온! 위대한 승리예요! 용감한 자에게 아도나이께서 승리를 안겨 주신 겁니다!”
아우레오가 달려와 내 얼굴에 묻은 녹색 피를 닦아 주며 외쳤다. 백색 사제복에 고블린 피가 묻어 더러워졌다.
“야, 손 치워. 누가 보면 내가 네 새낀 줄 알겠다.”
“위대한 승리입니다! 고난의 길에서 마주한 승리라고요! 당신은 역시 빛의……!”
“아, 좀!”
아우레오는 뭐가 그리 기쁜 것인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지만, 아우레오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내 얼굴은 내가 알아서 닦을 테니까 좀 그만해. 그리고…….”
나는 아우레오의 양팔을 붙잡아 내리며 말했다.
“인간이 승리한 게 아니야. 내가 승리한 거야.”
사제라면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말은 바로 해야지.
어쨌든 밥값은 제대로 한 것 같았다.
사파에서 온 용사
순례의 수호자
고블린 습격으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그동안 내 일상은 똑같았다. 연공하고, 밥 먹고, 아우레오에게 말과 글을 배우고.
실력 행사를 한번 해서인지, 마을 사람들의 대접도 좋아졌다.
그러는 동안 날씨는 점점 따뜻해져, 겨우내 쌓인 눈이 대부분 녹았다.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니 식량 수급도 수월해지겠군요. 어서 봄철 과일을 먹고 싶네요.”
“과일?”
“그래요, 과일. 딸기나 사과, 포도 같은 것들.”
아우레오는 내게 여러 그림을 보여 주며 단어를 가르쳤다. 그 열정적인 수업 덕분에 나는 빠르게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이게 밭딸기고 이건 산딸기. 난 산딸기를 특히 좋아합니다.”
“오, 산딸기. 나도 좋아하는데.”
똑 똑 똑.
“테온, 나 촌장일세. 안에 있나?”
“들어와.”
방문이 열리고 촌장이 들어왔다. 주름진 손에는 산딸기가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있었다.
“사제님도 계셨네요.”
촌장은 성호를 그리며 인사했고, 아우레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테온에게 공용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촌장님은 이번엔 또 뭘 가지고 오신 겁니까?”
“산딸기가 익었길래 몇 줌 훑어 왔지요. 아직 쌉싸름하지만, 그래도 먹을 만할 겁니다.”
촌장은 그릇을 식탁에 놓고 합석했다.
‘촌장까지 왔으니, 오늘도 수다가 길어지겠군.’
처음엔 압생트 마을의 친절함이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간식거리가 눈앞에 쌓이니 어찌 싫겠는가?
하지만 좋은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 탓에 연공까지 방해받으니 슬슬 귀찮았다.
나는 산딸기를 쏙쏙 집어 먹으며 이전부터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아우레오, 넌 곧 북쪽으로 떠난다며? 그때 나도 같이 가자.”
“북쪽으로요? 당신이 왜……?”
“여기 눌러앉을 수는 없잖아? 이곳에 머무른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추위도 한풀 꺾였으니, 나도 이제 떠나야지.”
“테온은 북부보다는 사람이 많은 중부로 가는 게 나을 텐데요? 중부의 대도시에는 유능한 치유 신관이 많거든요. 당신의 기억을 되찾을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아우레오와 마을 주민들은 내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도 과거를 캐묻는 통에 대충 둘러대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손가락을 뻗어 홉 고블린을 죽이다니, 그런 놀라운 기술은 어디에서 배웠나요?
아우레오는 호들갑을 떨며 내 무공의 출처를 물었다.
하지만 내가 중원에서 왔다는 걸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설명할 수 있어도 굳이 밝히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이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나저나 이 딸기 맛있네.’
이곳은 종교의 영향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세계였다. 마을 주민은 누구라도 사제에게 깍듯한 예우를 했고, 아우레오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중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야.’
아우레오는 올해 겨우 열다섯 살이다. 외모는 실제 나이보다 더 앳되어서 열두살 정도로 보였다.
중원에서는 아무리 땡중이나 도사라도 저렇게 어린놈이 마을의 큰어른에게 안방을 내놓으라 할 수는 없는 법인데, 여기서는 겸손한 아우레오도 모든 편의를 마을 촌장에게 받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사제가 가지는 권위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내 과거에 관한 질문은 모르쇠로 일관하자.’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거나, 저들이 믿는 종교에 중대한 오류가 될 수도 있다.
아직 내 무공도 다 회복하지 못했는데, 먼저 나서서 정보를 줄 필요는 없다.
사파거두라 불릴 만큼 무공이 강해도 생각이 없으면 죽는다. 중원에서 뒤통수 거하게 얻어맞고 죽음의 위기까지 겪으며 얻은 교훈이었다.
내가 별말 없이 산딸기만 쏙쏙 집어 먹고 있으니, 아우레오는 내 생각을 확인하려는 듯 재차 물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북부로 향하는 여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미개척지에는 몬스터와 야만인, 무법자 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어요.”
“그럼 더더욱 나랑 같이 가는 게 좋겠군. 아우레오 너는 싸움도 못하잖아. 내가 대신 싸워 줄게.”
“제 입장은 그렇지만…….”
아우레오는 자기 입장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이상한 놈이었다. 사실 지금 그는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홉 고블린인가 뭔가 하는 괴물도 보통이 아니던데? 너 혼자서는 마을 밖에서 닷새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래서 경호원으로 현지 용병을 둘이나 고용했지요. 하지만 당신까지 고용하기에는 돈이 부족해요.”
“푸하핫, 돈? 아서라, 나 정도의 실력자를 그 돈으로 사려고? 네 코 묻은 돈으로는 어림없어. 아마 너희 교회가 가진 전 재산을 몽땅 털어 와야 할 거야.”
아우레오는 내 예전 실력을 몰라서인지 시건방진 소리를 지껄였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아우레오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풉, 교회의 전 재산요? 하아, 관두죠. 테온은 교회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군요.”
“……?”
아우레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은 진심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벌어진 허세 대결에서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산딸기를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무튼 돈은 필요 없다. 그냥 나한테 다른 목적지가 생길 때까지 함께 다니는 거야. 겸사겸사 너한테 글도 배우고.”
“고용 관계가 아니라면…… 당신이 내 순례의 수호자(guardian)가 되어 주겠다는 말인가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같이 다니는 동안은 내가 위험한 놈들을 막아 주마. 서로 좋잖아?”
대화를 나누는 동안 쉬지 않고 손을 놀려 산딸기 한 접시를 전부 먹어 치웠다.
아우레오는 뒤늦게 그릇에 손을 넣었다가 빈 접시만 느껴지자 흠칫하며 손을 거뒀다.
산딸기를 눈 뜨고 털린 와중에도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이 자식은 보기보다 수양이 깊은 사제였다.
“좋습니다, 테온. 당신은 저와 함께 북부로 떠나지요. 다음 주에 출발할 테니 준비를 해 두세요.”
인자한 표정과 달리 아우레오의 목소리가 약간은 차가워진 것 같다.
촌장이 빈 접시와 아우레오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는 걸 보니, 역시 산딸기 한두 알 정도는 남겨 두었어야 했나 보다.
* * *
시간이 흐르고, 나는 아우레오와 함께 압생트 마을을 떠났다. 촌장과 주민들은 멀리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조심히 가세요, 사제님. 추위는 한풀 꺾였지만, 그만큼 야만인과 강도가 횡행할 겁니다.”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촌장님. 너무 염려 마세요. 이렇게 믿음직한 일행이 있으니까요.”
아우레오는 촌장의 염려에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이런 작별 인사가 익숙지 않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테온, 마을에 행상인이 찾아오면 자네의 이야기를 꼭 전하겠네. 자네의 용맹은 널리 퍼져 나갈 게야.”
“알겠으니까 작별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빨리 출발하자.”
역시 일행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훌쩍 떠나고 싶지만, 당분간은 참기로 했다. 아직 이 세계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사람도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