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29
99화
싸움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다.
역량과 기술, 그리고 가진 힘의 크기.
알아야 할 것이 많은 만큼, 어떤 이도 시작부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꺼내지 않는다.
항시 삼 푼의 힘을 감추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감춘 그 삼 푼이 언젠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고수들 간의 싸움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노련한 고수일수록 공수를 오래도록 주고받으며 상대를 세밀하게 살피고, 확실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확실히 명줄을 끊는다.
격차가 많이 난다면 모를까, 비슷한 상대와의 싸움에서는 사냥감을 앞둔 범처럼 주의 깊고 은밀하게 틈을 찾아야 한다.
상대를 우습게 여겨서도, 방심해서도 아니다. 최강의 절초인 만큼 완벽한 틈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혹여 실패한 뒤에 있을 반격까지 염두에 두고.
그렇게 찾아낸 틈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또다시 지계라는 방어막에 모습을 숨겨 버리면 영영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차례 당했으니 더욱 조심스러워질 것이고, 더욱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단 일 합으로 끝내야만 하는 기회.
진무는 귀모의 진체를 느끼는 순간 내뻗은 일격에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담아 넣었다.
콰아아아!
응축된 조화의 힘이 만들어 낸 압력에 대기가 눌려 짜부라지고, 대지가 통째로 꺼진다.
[끄으으…….]귀모는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더 이상 숨을 수 없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진무의 손바닥이 거신(巨身)의 일격처럼 지계 전체를 덮어 눌렀다.
그가 노린 곳은 음기(陰氣)의 정수였다.
막지 못하면 산산이 깨질 것이다.
지계라는 세계 자체, 끝내는 자기 자신까지.
[이, 빌어먹을 자식!]달리 방도가 없었다. 귀모가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 올려 진무의 일격을 맞이했다.
꾸우우웅!
신이라 자부했던 이의 힘과 신이 된 이의 힘.
둘의 충돌로 인한 폭발이 만들어 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쿠아아아!
물 위의 파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충격파에 모든 것이 소멸했다. 돌이 부서져 흙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닿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탄 종잇장처럼 아스라이 흩어져 사라졌다.
서로를 향한 힘이 강해질수록 충격파의 폭풍도 강해졌다. 지계는 점점 더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크윽!”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금혼의 털이 충격파에 휩쓸려 뭉텅이로 빠지기 시작했다.
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하던 북리도천의 몸 또한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힘으로는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이런 젠장! 다들 내 뒤로 숨어!”
“……!”
여의의 외침에 금혼과 북리도천이 고민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렸다. 둘이 온전히 제 뒤에 숨은 것을 확인하자 여의가 곧바로 금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신수(神獸), 마고의 힘을 씨앗 삼아 신목 아래에서 자라난 그들.
신마의 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중재자로서 나섰던 만큼, 그들이 가진 힘은 거대했다.
터어엉!
“크윽!”
그러나 여의는 엄밀히 말해 신수가 아닌 신수의 후손이었다. 그마저도 오랜 시간 봉인되었었기에 완전한 성체로 자라나지 못한 용. 그러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충격파가 금빛 보호막을 강타하자 여의의 몸이 거칠게 진동했다.
“여의! 괜찮으냐?”
“닥치고 숨어서 나오지 마! 나니까 이 정도나 버티는 거야!”
북리도천의 걱정에 여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한 번의 충격을 느끼자마자 깨달았다.
두 번? 혹은 세 번? 자신의 힘으로는 겨우 그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망할, 보주(寶珠)만 있었어도…….
이래서야 승천도 못 한 이무기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를 악물고 충격파를 버티며, 여의는 귀모와 겨루는 진무를 바라보았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은 마치 고무줄의 양쪽 끝을 잡고 끝까지 당긴 것처럼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조금이라도 약한 쪽이 죽는다.
터어엉!
이어서 두 번째 충격파.
여의가 친 금빛 보호막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한 방이면 끝이다. 그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신진철로 만든 봉 속에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겨우 봉인이 풀려서 세상에 나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야! 이 시팔! 주인 놈아! 이러다가 우리까지 죽는다고! 제발 뭐라도 하란 말이야!”
여의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서 욕설을 내뱉을 때였다.
“……!”
생에 대한 의지가 가득 담긴 목소리에 진무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렀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약해 가지곤…….”
하지만 자신도 더 머뭇거릴 생각은 없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진무가 제자리를 찾은 눈동자로 희뿌연 영체를 노려봤다.
귀모의 진체.
저 막만 부수면 될 텐데…… 힘이 부족하다.
균형을 깨기 위해서는 약간의 힘이 더 필요했다.
한 끗 차이……. 젠장, 어쩔 수 없지.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진무는 미련 없이 몸을 보호하고 있던 힘까지 손에 더해 넣었다.
쩌적, 쩌저적!
이윽고 균형이 깨지고, 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진무는 이를 악물며 귀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찌이익!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보호력을 잃은 진무의 몸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뭉개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흉하게 모습을 드러낸 붉디붉은 근육이 비단 올처럼 풀려나가고 허연 뼈가 드러난다.
손, 그리고 팔…… 나아가는 만큼 몸이 부서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일순 정신이 아뜩해질 정도였다.
빠드득!
잇몸에 박힐 정도로 힘껏 악물었던 이가 조금씩 부러져 나가기 시작했지만, 진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집중했다.
오냐!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니 막이 먼저 부서지는지 내 몸이 먼저 부서지는지!
“하아압!”
거친 기합성과 함께 세 번째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그리고 부서진다.
진무의 힘을 가로막고 있던 막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귀모-오!”
막이 부서짐과 동시에 진무의 신형이 귀모의 영체를 향해 섬전처럼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 * *
온통 하얗기만 한 공간이었다. 경계도 구분도 없이 그저 하얀 공간.
“…….”
몇 차례 눈을 끔벅인 진무가 뼈만 앙상히 남았던 제 손을 내려다봤다.
멀쩡하다. 조금 전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환각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별다른 의문은 들지 않았다. 무척 당연하게 느껴졌달까?
손에서 시선을 떼고, 진무는 하얀 공간 안을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발소리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온통 하얗기만 하니까.
또한 누군가에게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었기에.
그러다 어느 순간 진무의 걸음이 멈췄다.
여전히 하얀 공간이었지만, 진무는 피식 웃으며 무언가를 잡아채듯 옆으로 손을 쭉 뻗었다.
콱!
“커억!”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건만, 진무가 낚아챈 무언가가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쳐 댔다.
“설마 또 놓칠 줄 알아?”
“끄으으…….”
손에 잡혀 있던 허공이 숨 막히는 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었다.
“보여라.”
읊조리듯 나지막이 뱉은 한마디에 허공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여인.
아니, 특별히 정해진 형체가 없는 놈이다.
그저 귀모라는 이름이 주는 편견에 기반해 진무의 상상이 만들어 낸 모습일 뿐이다.
목이 꽉 죈 채 버둥거리던 귀모가 진무를 죽일 듯 노려봤다.
“네놈이 어찌 나를…….”
“어째서는 뭘 어째서야? 이젠 다 보여.”
“뭐?”
“마귀면 마귀답게 시커멓게 해 놓든가. 이게 뭐냐? 아주 흰색으로 떡칠을 해 놨네.”
“……?”
손에 쥔 귀모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무가 고개를 휙휙 돌려 주위를 보며 비웃었다.
“이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어디면 뭐?”
“뭐?”
“네놈의 정신 세계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
귀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안다고? 이곳을? 대체 어떻게?
그리고 아까부터 이상했다. 어째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단 말인가?
“이, 이게 어찌 된?”
“왜, 어째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궁금해?”
“…….”
“당연하지. 내가 지금 제약을 걸었거든.”
“제약을 걸었다고?”
“그래.”
“불가능하다!”
“가능해.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
“…….”
“네 정신 세계 속이라서 네가 가장 강할 거란 착각은 하지 마. 결국 음의 힘으로 만든 이딴 세계, 내 마음대로 조율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그, 그게 무슨?”
“뭐긴 뭐야? 지금 너보다 내가 가진 힘이 훨씬 더 강해졌다는 뜻이지.”
“말도 안 된다! 네놈이 어찌 음의 힘을 깨우칠 수 있단 말이냐?”
“왜 말이 안 돼?”
“왜냐니, 그건……!”
“말했잖아? 니들이 가진 건 겨우 아류이자 모방이라니까? 내가 가진 게 원조라고, 알겠어?”
“…….”
“뭐, 그렇긴 해도 사실 나도 정확히 이해는 안 돼. 그냥 한순간에 깨달아 버려서 말이지.”
“그, 그냥 깨달았다고?”
“그래, 그냥.”
“…….”
달리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정말 그냥 불현듯 깨달았으니까.
사타와 싸우면서 오행의 화기를 깨달았을 때와 비슷했다.
문득 그 힘이 느껴졌고, 원래부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행 중 하나를 깨닫자 나머지 넷은 거저였다.
신목이 괜히 마고의 아들이라 불렀겠는가?
이건 뭐,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닫는 총명함은 둘째 치고, 활용까지 하는 재능을 선천적으로 가지게 되다니.
너무 쉽게 얻어서 도리어 심심한 맛도 있다.
자고로 노력은 쓰고, 열매는 달다 했는데…….
아무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귀모의 영체를 막고 있던 벽이 깨지는 순간, 음의 이치가 절로 깨우쳐졌다.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
하여 귀모가 만들어 낸 정신 세계 속에서도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 더 싸워 봐야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고, 이제 약속을 지켜 볼까?”
“약소…… 커억!”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목을 더 강하게 죄어 오는 힘에 귀모가 외마디 신음을 토했다.
서서히 숨이 막혀 왔다. 발악하듯 버둥거렸지만, 목을 파고드는 진무의 손가락 하나 뿌리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지? 죽여 버리겠다고.”
“……!”
웃고 있었다.
입술 새로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자신이 만들어 낸 공간보다 더욱 하얗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귀모는 견디기 힘든 서늘함을 느꼈다.
분노? 살기? 그딴 건 없었다.
무심.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담담함이 주는 섬뜩함이 가슴을 얇게 저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귀모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또렷이 떠올랐다.
죽음.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라고 예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미지에 대한 불안감이 현실화되는 순간, 귀모는 낯선 감정을 깨닫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
항거의 의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강렬하게 치미는 생에 대한 의지.
그리고 그때 알았다.
신이라 믿어 왔던 것은 자의식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라고. 자신은 그저 깨달음으로써 힘을 얻은 자, 그저 인간의 범주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살려…… 다오.”
“…….”
힘겹게 벌어진 잇새로 흘러나온 허망한 목소리에 목을 욱죄던 진무의 손이 멈췄다.
축 늘어져 버린 채 몸을 내맡긴 귀모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가 조용히 물었다.
“살려 달라고?”
“살려 다오…… 네 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
“…….”
귀모가 패배를 인정했다.
눈을 내리깔고 굴종을 표했으니, 전쟁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아니, 그건 예전 조건이지.”
“뭐?”
“큭큭큭.”
“……?”
뭘 쳐다봐?
상황이 바뀌었으면 조건도 바뀌어야지.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웃돈 정도는 받아야 수지가 맞을 것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