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52
“무슨 이런 절망적인 신탁이……. 예언의 내용이 너무나 불길해요.”
“뭐가 문제야? 꽃을 지키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잖아. 오히려 좋은 내용 아닌가?”
“그렇지 않아요, 테온. 신탁이란 추상적인 문구로 전해지지요. 얼음 위에서 꽃이 자랄 수 있나요?”
“없지.”
“그러니 이건 어린 양에게 찾아올 횡액을 막을 수 없다는 뜻으로 봐야 해요. 횡액을 당할 어린 양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무고한 이들이겠지요. 십수 년 만에 신탁까지 내려올 정도라면 엄청난 피가 흐를지도 모릅니다.”
아우레오의 해석에 윈스크 교구의 사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우레오 사제의 순례가 무사히 끝났으니, 관례대로면 주교 예하께서 축하 연회를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양하고 싶네요.”
어린 사제가 중부에서 북부까지 몇 달이나 걸리는 순례를 성실히 마쳤으니, 관습에 따라 주교는 큰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
게다가 아우레오는 중간 지대에서 나를 만난 이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사연이 벌써 음유시인을 통해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더더욱 대접받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아우레오는 겸손한 놈이었고,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에서 자기를 위한 연회를 열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반면, 오랜 노숙에 질릴 대로 질린 나는 술맛이 그리웠다.
“고작 그거 때문에 연회를 취소해? 신탁이란 건 그냥 점괘 같은 거 아냐?”
“큰일 날 소리 마세요, 테온!”
아우레오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눈으로 욕이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신탁은 아도나이께서 인간을 아끼는 마음으로 미래를 일러주시는 겁니다. 그분께서 모든 미래를 가르쳐 주시는 건 아니지만, 한번 내려온 신탁의 내용은 반드시 현실에서 일어나요.”
‘호오, 그게 진짜라면 대단한 일인데?’
미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건 실로 신의 권능이라 할 만했다. 그러니 불길한 신탁을 받아 든 사제들의 얼굴이 침울한 것은 당연했다.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횡액을 앞둔 어린 양의 표정이었다.
“연회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당분간 치유 사제를 도와 에릭의 치료에 열중하겠어요. 참, 에릭이 완치될 때까지 일행인 토마스도 교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제가 이번 순례에서 두 사람에게 신세 진 게 많거든요.”
“그 정도는 물론 배려해 드려야지요.”
아우레오는 용병들의 거취가 정해질 때까지 우선 교회에서 지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
나는 두 사제를 지켜보다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응접실을 나왔다.
‘젠장, 북부에 도착하자마자 술상 한번 거하게 얻어먹고, 곧장 마법사 사냥에 나서려고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북부 교구의 도움을 받아 마법사를 사냥하는 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신탁에서 말하는 ‘횡액’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지나갈 때까지 윈스크의 모든 성직자는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을 태세였다.
‘아우레오는 한동안 교회에 처박혀 지낼 모양이고, 에릭은 병신이 되어 누웠고, 토마스도 에릭을 간병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할 테니…… 당분간 나 혼자 지내겠군.’
나는 당장 내공을 회복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입장이었다.
마법사를 찾겠다며 나 혼자 이 넓은 북부를 헤집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졸지에 시간이 붕 떠 버린 것이다.
* * *
그렇게 윈스크에 도착한 첫날을 허무하게 보내고, 그날 밤 곧장 운기조식으로 체내를 살폈다. 하지만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 그때 분명 데스나이트에게서 마나와 다른 무언가가 넘어왔는데.’
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기경팔맥을 모두 훑어도 이질적인 기운은 없었다. 내가 착각한 것인가 싶다가도, 너무 또렷한 기억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젠장, 알 수 없는 건 잊자.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거야.’
나는 별 성과도 없는 혈도 탐색을 그만두고 이자벨라에게 받은 마정석을 흡수했다.
데스나이트에게서 빼앗은 오염된 마나도 옥심귀일공으로 정화해 깨끗한 내공으로 만들었다.
‘좋아. 벌써 이십오 년 치 내공을 쌓았다.’
내공을 다시 쌓은 시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할 때, 실로 놀라운 발전 속도였다.
이제 마법사를 한두 놈 더 흡수하거나, 이자벨라가 마정석을 추가로 가져오면 반 갑자 이상의 내공을 확보할 수 있을 터.
‘그때부턴 두려울 게 없다.’
곤륜의 무공에서 반 갑자 내공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불가무공만큼은 아니지만, 도가무공도 웅혼한 내력이 뒷받침되어야 본래의 위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위력의 차이를 넘어 반 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초식도 많았다.
초반에는 발전이 더디지만, 내공이 쌓일수록 폭발적으로 강해지는 건 곤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종무공이 가진 특성이었다.
‘내공 흡수도 마쳤고. 이제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도시 구경이나 다녀와야겠다.’
기왕 시간이 떴으니, 오르샤바의 밤거리를 즐겼던 것처럼 당분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는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천하에 어느 누가 이런 기막힌 경험을 해 보겠는가? 팔자 사나운 놈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즐길 줄도 알아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며칠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쉬었다.
척박한 북부의 도시인지라 딱히 즐길 거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꼴에 왕국의 수도라고 제법 큰 번화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북부의 사내들은 과연 듣던 대로 거칠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호탕하고 사내다워서 하룻밤 술잔을 부딪치며 어울리는 재미도 있었다.
특히 북부의 술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큰 잔에 가득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는 맥주가 내 입맛을 저격했다.
“이렇게 청량하고 고소한 술은 난생처음이다. 할 수만 있다면 중원에 가져가고 싶구나.”
모처럼 입맛에 딱 맞는 술을 찾아 즐겁게 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교회로 돌아갈 때였다.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테온? 아니, 오르샤바의 늑대 도살자.”
“……? 너희들은 뭐냐?”
골목 어귀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하늘색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우레오의 은백색 예복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북부정교회’의 신관들입니다. 아도나이의 충실한 종이자, 윈스크를 넘어 북방의 동토까지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부지런한 일꾼이지요.”
“교회? 윈스크 교구에서 너희 같은 놈들은 본 적이 없는데.”
“후후, 그러시겠죠. 저희는 그들과 다른, 별개의 종파입니다. 아도나이라는 뿌리만 같을 뿐, 중부 대교구와는 성경의 해석이나 믿음의 방향이 조금 달라요.”
‘사이비인가?’
이런 놈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물론 같은 신을 모신다고 해도, 종파(宗派)가 다를 수는 있다. 당장 중원 곤륜파와 무당파도 같은 도교지만 그 가르침은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이놈들은 어쩐지 가까이하기 싫은 기운을 풍겼다.
수수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아우레오와 달리, 북부정교회의 신관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복색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맨 앞서 말을 하는 놈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몹시 비열한 인상을 풍겼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대강 알겠는데, 난 너희한테 볼일 없으니 길 막지 말고 비켜라.”
“그러지 말고 저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시죠. 당신에게 좋은 제안이 있습니다.”
“좋은 제안?”
“예, 저희는 당신에 관한 정보를 많이 수집했습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희가 굳이 뒤를 캐지 않아도, 당신의 소문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거든요.”
북부정교회 신관은 혀로 입술을 살짝 핥고 말을 이어 갔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순례의 수호자 테온, 어린 사제 아우레오의 순례가 끝났으니, 이제 북부정교회로 개종하십시오.”
“……?”
“당신 같은 영웅이 중부 대교구의 꼭두각시가 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윈스크 교구의 사제들을 만나 보셨겠지요. 그들은 하나같이 멍청이뿐이에요. 스스로 자결권을 포기한 채, 중부 대교구가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바보들이죠.”
“너희는 뭐가 다른데?”
“저희는 북부에 어울리는, 북부인에게 필요한 아도나이교가 될 것입니다. 매년 중부 대교구로 가는 거액의 헌납금은 온전히 북부인을 위해 쓰일 것이고, 예배와 기도문 등 여러 절차를 새롭게 해석해서 북부 실정에 맞게 수정하고 있지요.”
‘교회의 종파끼리 영역 다툼을 하고 있군.’
무슨 상황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교회의 덩치가 워낙 커지다 보니, 슬슬 자기 밥그릇을 따로 꿰차려는 놈들이 나오는 것이다.
사파에서 온 용사
북부정교회
생각해 보면, 북부의 성직자 중 일부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영역을 구축하려는 건 당연히 벌어질 일이었다.
이곳에서 교회는 기득권 그 자체였다. 재력과 권력이 모두 신앙에서 나왔고, 이 세계의 모든 신앙은 교회로 모였다.
그러니 교회를 차지하려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먼 북부에서,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 독립한다면 중앙에서 제압하기도 쉽지 않겠지.’
교회를 이끄는 중부 대교구가 어느 정도의 무력과 행정력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어 본 이 세계의 수준을 고려할 때, 중부 대교구에서 이 얼어붙은 땅까지 병력을 보내 이놈들의 독립을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떻습니까, 테온? 당신도 이방인이니 중부 대교구의 폭정에 질릴 대로 질리셨겠지요. 저희 북부정교회로 개종하신다면 즉시 ‘성전사’의 직책과 함께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성전사[Crusader]? 성기사[Templar]가 아니고?”
“예. 우리 북부정교회의 성전사들은 중부 대교구의 성기사와 달리 높은 임금을 받습니다. 유능한 전사를 신앙으로 얽매 무보수로 부려 먹는 중부 대교구와는 다르지요.”
“그건 좋네.”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성전사가 되는 과정에는 ‘광휘의 검’으로 신성을 증명하는 구시대적인 절차도 필요 없습니다. 전사라면 전사답게 실전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면 되는 거죠.”
의외로 이놈들이 하는 말은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사파무인인 내가 듣기에는 주류인 중부 대교구보다 비주류인 북부정교회가 더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느껴졌다.
‘하긴, 본래 사이비가 말은 더 그럴싸하게 하는 법이지.’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 내 모습에 만족했는지, 북부정교회 신관은 밝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사실 당신은 실전에서 실력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당신의 영웅담 중 한두 가지만 사실이어도 성전사가 되기에 충분하니까요.”
“나의 영웅담? 그런 게 있나?”
“저희를 떠보시는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에 관한 건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요. 압생트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 떼를 물리치셨죠? 그중 홉 고블린 한 마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는데 죽었고요. 중간 지대에서 마녀를 생포한 것도, 드워프 용병대장을 팔씨름으로 꺾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오르샤바에서 놀 부락을 토벌하고 맨손으로 웨어울프를 두 마리나 죽인 것도 물론 알고 있어요. 게다가 윈스크로 오는 길에 타힐 마을에 들러 데스나이트를 처단하셨다죠?”
북부정교회의 신관은 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두란이랑 팔씨름 한 것도 영웅담으로 쳐주다니, 이곳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일에도 명예니, 영웅이니 하며 치켜세우길 좋아했다.
“물론 음유시인이 전하는 모든 이야기를 믿을 순 없지요. 애초에 현실성이 없는 일화도 많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중 한두 가지만 진실이어도 당신은 대단한 전사입니다.”
“흐흐,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희는 사람을 잘못 골랐다. 난 북부에 정착할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쯤에서 서로 갈 길 가는 걸로 하지.”
“후후, 자꾸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이미 당신이 북부에 도착한 뒤 윈스크 교구와 데면데면하게 지낸다는 것도 다 알고 왔습니다. 심지어 윈스크의 주교는 순례를 마친 사제를 위한 연회도 열지 않았다지요? 수호자였던 당신도 최근 며칠 동안 도시의 뒷골목에서 술만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지 말고 당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북부정교회로 오십시오. 그토록 뛰어난 실력으로 왜 그런 푸대접을 견디고 계십니까?”
이놈들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요 며칠 내가 혼자 다닌 건, 윈스크 교구에 내려온 불길한 신탁과 에릭의 부상 등등 여러 이유가 겹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이놈들은 내가 순례를 마치고, 윈스크 교구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해 앙심을 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람 잘못 골랐으니까 그냥 꺼지라고.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라. 난 인내심이 몹시 부족한 사람이니까.”
“뭐, 뭐라고요? 이보세요. 나는 북부정교회에서 ‘심판관’의 직책을 맡은 사람입니다. 아까부터 하대하는 것도 참아 주었는데, 이젠 면전에 대고 모욕까지……!”
“테온!”
그때 누군가 불쑥 끼어들어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아봤는데, 거기엔 예복을 입은 아우레오가 씩씩대며 서 있었다.
“웬일로 밖에 나왔냐? 종일 교회에 처박혀 지내더니.”
“교회 첨탑에서 테온의 모습을 보고 급히 달려왔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북어장국회라고 하던데?”
“북부정교회입니다.”
북부정교회의 심판관이라는 놈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아우레오에게 악수를 건넸다.
아우레오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손을 맞잡았다.
“북부정교회에서 오셨다고요? 저는 중부의 대.교.구에서 온 사제 아우레오입니다.”
“중부의 평사제이신가요? 저는 북부정교회에서 심.판.관 직책을 맡은 자바니에입니다.”
‘얼씨구? 지랄들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