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53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약골 둘이서 악력 대결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먼저 손을 뺀 건 아우레오였다. 역시 이놈은 힘으로 하는 건 뭐든 못하는 놈이었다.
“테온, 왜 이렇게 늦었어요. 모두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교구로 돌아가요.”
“테온, 당신이 어린아이도 아닌데, 해가 졌다고 교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오늘은 저희 북부정교회로 가시지요. 당신을 위해 밤새워 이어질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어린 사제와 젊은 신관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북부정교회인지 북어장국인지 관심 없다니까? 칼잡이가 필요하면 딴 데 가서 알아봐.”
몸을 휙 돌려 윈스크 교구로 향했다.
아우레오가 환하게 웃으며 깡총깡총 따라왔다. 등 뒤로 심판관 자바니에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 도살자 테온……. 그대는 이미 다른 중부 대교구의 사제들처럼 교만에 물들었군. 오늘 이 모욕은 절대 잊지 않겠다.”
사파거두로 수십 년을 살아온 내게 저런 협박은 너무 식상한 말이었다.
“그래, 힘내고.”
북부정교회와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 * *
윈스크 교구로 돌아온 뒤, 아우레오는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내일 중앙 광장에서 대규모 공개 처형이 열리는데, 교구의 사제들이 참관합니다. 저도 함께 가고요.”
“공개 처형?”
“네. 사형을 선고받은 흉악범들을 도시의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는 겁니다. 그들의 죄목은 제각각이지만, 사형 집행은 일시에 한다더군요. 테온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죄수를 처형하는 데 내가 따라갈 이유가 없다. 한데 어째서인지 아우레오의 눈동자는 반드시 함께 가 달라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마누라도 아니고…….’
아우레오는 북부정교회에서 내게 접근하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 자식은 나를 자기네 교회로 포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인데, 계속 나 혼자 도시를 돌아다니다 저런 제안까지 받는 걸 보았으니 불안해진 듯했다.
“함께 가요, 테온. 사제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관심 없는데.”
“이번 집행에는 주교 예하께서도 참석하십니다. 북부에 온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 아직 인사도 드리지 못했잖아요? 이번 기회에 만나 보시죠. 제가 적극적으로 소개할게요.”
“흐음…….”
윈스크의 주교를 만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첫날부터 마중을 나와 환대하던 오르샤바의 옐란치노 주교와 달리, 윈스크의 주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마법사를 찾고 사냥하려면 윈스크 교구의 도움이 필요한데, 계속 이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아서는 곤란했다.
“좋다. 주교의 낯짝이 궁금하니 함께 가지.”
“하하, 잘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윈스크의 주교는 왜 이렇게 콧대 높게 구는 거야? 멀리서 온 손님에게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않다니, 누가 보면 대단한 벼슬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주교는 대단한 직위가 맞아요.”
“…….”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옐란치노 주교는 이러지 않았으니, 비교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윈스크의 주교 예하는 다른 지역의 주교와는 좀 달라요.”
“다르다니?”
“그분은 교구에서 예하로 불리지만, 다른 곳에서는 전하(殿下)로 불리거든요.”
순간 내가 모르는 단어인가 싶었지만, 아우레오가 말한 호칭은 분명 전하였다. 중원에서는 왕이나 제후에게나 붙는 전하.
“윈스크의 주교이신 블라토프 보론초바 예하께서는, 주교인 동시에 공작의 작위도 갖고 계십니다. 주교공(主敎公)이시지요.”
“뭐 그런 경우가 다 있어?”
교회의 고위 사제인 동시에 세속의 대귀족이라니, 중원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로부터 종교와 정치가 합쳐지면 나라에 망조가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보론초바 주교는 귀족, 그것도 수도 윈스크의 대영주였다. 세속 권력으로 따져도 겔라구스의 국왕 다음가는 사람인 것이다.
“드문 경우이긴 하죠. 주교와 백작을 겸하는 주교백은 몇 명 있지만, 주교공은 보론초바 예하가 유일하니까요.”
“대단한 권세가였네. 콧대가 높을 만했군.”
“그렇다기보다는, 워낙 공사가 다망하시니 저희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지요. 불길한 신탁 때문에 교구가 어수선한 탓도 있고요.”
아우레오는 늘 그렇듯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의 변호를 해 댔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나니 주교의 낯짝이 더욱 궁금했다.
‘북부의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국왕 바로 다음가는 대귀족이라. 종합적인 영향력을 따지면 왕보다도 한 수 위겠는데?’
오르샤바의 옐란치노 주교나 가야르도 백작도 거물이었지만, 윈스크의 보론초바 주교공은 차원이 다른 거물이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나 볼 수 있는 최고 권력자일지도 모를 거물.
세상을 움직이는 거인에게는 반드시 배울 점이 있는 법.
나는 보론초바 주교공과 만남을 기대하며 처형식 참석을 약속했다.
한데 듣다 보니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일전에 네가 말하기를, 북부는 왕실, 귀족, 교회가 서로를 견제하는 삼두정치로 굴러가고 있다면서? 한데 그 보론초바라는 영감이 주교인 동시에 공작이면, 귀족과 교회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지요. 그 탓에 북부의 삼두정치가 깨어질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직까지는 괜찮게 유지되고 있어요.”
“내 경험상 괜찮다는 말 앞에 ‘아직까지는’이나 ‘결과적으로’라는 말이 붙으면 괜찮은 상태가 아니던데.”
“하하, 그런가요?”
아우레오는 웃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정치에 밝은 녀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며칠 동안 제법 주워들은 게 있었는지 말하는 내용이 알찼다.
본래 북부를 지탱하는 세 축은 겔라구스 왕실과 윈스크 교구 그리고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윈스크의 대영주인 블라토프 보론초바 공작이 교회로부터 신앙을 인정받아 주교의 직위까지 획득하자 힘의 균형추가 급격히 기울었다.
귀족과 교회의 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세력이 바로 북부정교회입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덩치를 불렸고,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전체 북부인 중 삼 할 정도가 북부정교회로 개종했다더군요.”
“왕실에서 힘을 실어 줬겠지.”
“역시 테온은 눈치가 빠르네요. 이럴 때 보면 무슨 백 살 먹은 노인 같다니까요.”
“…….”
“맞아요. 듣자 하니 주교 예하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걸 두려워한 겔라구스 왕이 대놓고 북부정교회를 지원하고 있다더군요. 왕국에 이단이 준동하는데 벌하지는 못할망정 권력 다툼 때문에 삿된 신앙을 인정하다니, 통탄할 노릇이지요.”
‘통탄은 무슨. 정치란 게 다 그런 것이다.’
큰 힘은 그만큼 많은 견제를 받기 마련이다. 주교공의 권력이 커졌으니, 그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권력자들이 힘을 합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 주교공이란 사람을 만나는 건 재미있겠군. 혼자서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거물이라니,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두면 마법사 사냥에 큰 도움이 되겠어.’
어쩌면 마법사 사냥뿐만 아니라 중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정도 거물이라면 말 한마디로 안 되는 일이 없을 정도일 테니까.
사파에서 온 용사
교수대의 망령
다음 날, 나는 예정대로 아우레오와 함께 공개 처형식을 참관했다.
처형식이라길래 엄숙하거나 두려운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축제 같은 분위기로 진행됐다.
서른 명의 죄수가 교수대 앞에 나란히 꿇어앉아 있고, 도시 행정관이 단상에 올라 큰 소리로 그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읊었다.
“이자는 부녀자 여덟을 강간하고 그중 넷을 살해했으며……!”
“사형을! 사형을!”
교수대 앞에 모인 군중은 죄인의 죄명이 밝혀질 때마다 썩은 과일이나 말똥을 던지며 사형을 외쳤다.
흉악한 범죄자를 대하는 그들의 표정은 일견 반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척박한 북부의 삶을 견디며 쌓인 울분. 그것을 쏟아 낼 대상을 찾은 모습 같기도 했다.
‘증오의 정치인가.’
가만히 보니 북부의 공개 처형은 일종의 치세 수단이었다.
위정자들은 끔찍한 범죄자를 앞세워 도시의 미움을 한곳에 모으고, 그들을 처형함으로써 자기들이 가진 권위에 정의를 덧씌웠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며 도시의 시민들은 자기 삶이 힘겨운 이유를 통치자에게서 찾지 않고, 범죄자에게서 찾게 되었다.
“처형을 시작한다!”
행정관의 선언과 함께 첫 죄수가 교수대에 매달렸다. 양치기를 쇠스랑으로 찍어 죽이고 양 세 마리를 훔친 강도살해범이었다.
줄에 매달려 한동안 발버둥 치던 죄수는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와아아!”
“지옥으로 떨어져라!”
군중이 환호하는 동안 집행관들이 죄수의 시신을 내렸다. 사제들이 재빨리 달라붙어 성수를 뿌리고 기도문을 외웠다. 죄수의 영혼이 타락해 산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절차였다.
“그나저나 보론초바 주교공이 보이지 않는군. 집행은 벌써 시작했는데.”
“그게…… 예하께서는 급한 공무로 오늘 집행에 불참하셨습니다.”
“뭐? 이런 젠장.”
내 물음에 아우레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역시 주교의 불참은 예상하지 못했을 터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군. 먼저 돌아가마.”
아쉬운 듯 입만 뻐끔거리는 아우레오를 뒤로하고 돌아설 때였다.
[저 새끼는 뭔데 보론초바 영감을 찾는 거야?]머릿속을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내 몸이 우뚝 섰다.
‘혜광심어(慧光心語)?’
[허, 그 새끼. 괴상하게 생긴 주제에 옷은 엄청 고급 옷감을 썼네? 게다가 옆에 있는 사제도 쩔쩔매고, 이거 뭐 하는 놈이지?]다시 한번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주변을 살폈다. 사방을 둘러봐도 혜광심어를 쓸 만한 고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엉뚱하게도 공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저게 뭐야?’
도시 광장을 떠도는 망령이 있었다. 망령이라니 황당하지만, 그건 망령이 아니면 표현할 단어가 마땅치 않았다.
반투명한 몸에 공중을 헤엄치듯 움직이는 사람 형상의 귀신.
무슨 이유인지 승천하지 않고 지상에 남은 망령이 나를 보며 험담하고 있었다.
[뭘 놀라? 누가 보면 내가 말한 걸 들은 줄 알겠네.] [그래, 네가 말하는 걸 들었다.] [헉!]나는 망령이 있는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며 똑같이 혜광심어로 대답했다.
혜광심어는 말이 아니라 의지를, 귀가 아니라 상대의 심지에 직접 전달하는 전음의 최고봉이었다.
나조차도 말년에야 묘리를 깨달은 상승의 수법인데, 습득 난도에 비해 딱히 쓸모가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혜광심어를 들은 망령은 어찌나 놀랐는지 연달아 헛바람을 들이켰다.
[네놈은 누구길래 육신도 없이 영혼만 이승에 남아 있지? 잡귀신 주제에 지나가는 사람의 험담이나 하고 말이야.]둥실둥실 떠 있는 망령에게 물었다. 체형을 보니 생전에 남자였던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 [사람을 불러 놓고 대답을 안 하네. 귀신이라 얻어맞을 걱정이 없으니 사람 말을 무시하는 건가?] [드디어…… 드디어! 으헝!]망령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우렁차게 울어 대는지, 머리가 깨어질 듯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