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6
사파에서 온 용사
난쟁이와 거인 (1)
이자벨라와 함께하는 여정은 의외로 괜찮았다. 아무리 구박해도 굴하지 않고 맞먹으려 드는 게 문제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재주가 많은 동행이었다.
일단 뚱보의 괴력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 내가 윈스크에서부터 가져온 짐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라프카스산맥 초입에 진입하며 산세가 험해졌고, 수레를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뚱보가 없었다면 짐을 나르는 데 제법 고생했을 터다.
“각하, 저건 다 뭐예요?”
이자벨라가 뚱보가 짊어진 짐짝을 보며 물었다. 나무 상자를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가지고 다니니 그녀도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다.
“몰라도 된다.”
상자에 든 게 무엇인지 그녀에게 말해 줘도 상관없지만, 괜히 말해 주기 싫은 기분이었다.
이자벨라는 같이 있는 사람을 삐딱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우레오와 반대로군.’
아우레오는 말 안 듣는 토마스도 살살 구슬려 순한 양으로 만드는 녀석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자벨라는 아우레오의 대척점에 있는 유형이었다.
“그나저나, 놀 주술사 언데드가 안 보이는군. 그놈을 언데드로 만드는 건 실패했나?”
이자벨라가 데리고 온 수많은 언데드는 결국 땅에 파묻어 버렸다.
한데, 그 많은 언데드를 폐기하는 동안 놀 주술사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자벨라가 피의 맹세까지 해 가며 기어코 확보한 놀 주술사 사체인데, 어째서인지 언데드로 만들지 않은 것이다.
“놀 주술사는 연구용이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해부했기 때문에 언데드로 만들 수 없었죠. 특히 뇌는 거의 가루로 만들다시피 했거든요.”
“놀 주술사의 뇌를 연구해서 뭐 하는데?”
“‘정신지배’를 익히려고요. 난 요즘 정신지배에 푹 빠져 있답니다.”
“정신지배?”
“정신계 마법의 최고봉이죠. 자기보다 하등한 생물을 수족처럼 부리는 일종의 최면 마법인데…….”
이자벨라의 설명을 듣고 파블로 왕이 떠올랐다. 놈은 나에게 섭혼술을 시도했고, 실제로 거의 성공할 뻔했다.
왕실의 근위 기사단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파블로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그게 섭혼술이 아니라 마법의 일종이었군.’
어쩌면 섭혼술과 정신지배는 명칭만 다를 뿐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뚱보의 괴력 외에도 이자벨라가 가진 독특한 지식은 그녀와 동행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연구 성과는 좀 있었나?”
“…….”
이자벨라가 침묵했다. 그녀의 침울한 표정만 봐도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어렵더라고요. 언데드 조종은 금방 배웠는데, 살아 있는 생물의 정신지배는 잘 안 돼요.”
“넌 박쥐를 수족처럼 다루잖아? 비슷한 원리 아닌가?”
“그딴 건 뱀파이어라면 태어날 때부터 할 수 있는 거라고요. 그건 애초에 마법도 아닌걸.”
나는 마법에 집착하는 이자벨라를 보며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볼 때 마법은 독학으로 익힐 만한 재주가 아니었다.
게다가 암혈은 술법보다 육체가 강한 일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마법을 독학할 게 아니라, 그 시간에 피의 장막이나 박쥐 변신을 갈고닦아 잠입과 암살 실력을 갖추는 게 나아 보였다.
내 말을 들은 이자벨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육체는 각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해요. 게다가 적혈과 싸우며 얻은 부상도 심각하고.”
그러고 보니 이자벨라는 똑바로 걷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절었다. 탁한 숨소리를 들어 보면 폐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몸과 권능이 멀쩡할 때도 적혈을 당해 내지 못했는데, 저런 꼴이 되어서도 복수하겠다며 애쓰는 모습이 애잔하기도 했다.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굳이 조언까지 해 줄 사이는 아닌지라 그쯤에서 넘어갔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이자벨라와 나는 수월하게 라프카스산맥 깊은 곳에 진입했다.
“이렇게 험준한 지형인 줄은 몰랐군.”
“라프카스산맥은 알아주는 난관이죠. 겔라구스 왕국이 산맥 너머의 부족을 통합하지 못하고 공물만 받으며 내버려 둔 것도 이 산맥 때문이니까.”
그녀의 말대로 라프카스산맥은 북부와 서부를 가르는 천혜의 장벽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은 인간의 등반을 거부했고, 깊은 계곡은 마차가 다닐 수도 없었다.
그나마 이자벨라가 박쥐로 변해 주변을 살펴보며 수월한 경로를 찾아 준 덕분에 중부 능선까지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날도 이자벨라는 박쥐로 변신해 저 멀리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드워프 살려……!”
‘음?’
희미하게 들렸지만, 어디선가 메아리치는 소리는 분명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돌아온 이자벨라가 특이한 소식을 전했다.
“각하, 절벽 동굴에 웬 드워프들이 갇혀 있는데요?”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어떻게 생긴 드워프들이지?”
“드워프가 다 똑같지 뭐. 키는 짜리몽땅하고 팔다리는 울퉁불퉁하고 코는 크고…….”
“머리카락이나 수염의 색깔을 묻는 거야.”
“아, 하나같이 빨간 머리에 빨간 수염이에요.”
‘붉은 모루 일족이군.’
붉은 모루 일족이 왜 절벽 동굴에 갇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찾던 사람을 만나는 건가 싶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곧장 절벽 동굴로 가서 드워프를 만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길을 막아서는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쿵……. 쿵…….
멀찍이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각하, 꽤 큰 놈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 일단 숨는 게 어때요……?”
“숨긴 왜 숨냐.”
이자벨라의 걱정을 일축하고 계속 절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절벽 근처 산길에서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묵직하고 느릿한 발걸음과 함께 나타난 괴물은 키가 일 장(약 3m) 정도 되어 보이는 근육질의 거구였다.
전체적으로 인간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눈깔이 하나밖에 없었다.
“키클롭스잖아? 이런, 젠장.”
“왜? 호전적인 몬스터인가?”
이자벨라가 아는 체를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키클롭스는 단순한 몬스터라고 하기 애매해요. 아인종과 몬스터의 중간 정도랄까? 제법 지능이 높거든요. 문제는 그 지능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건데…….”
“지능이 높다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겠군.”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키클롭스는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자기가 궁금한 걸 끝도 없이 물어보는 놈들이라고요.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절대 보내 주지 않아요.”
이자벨라가 설명하는 동안 외눈박이 거인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거인은 어깨에 커다란 몽둥이를 걸치고 온몸에 짐승 가죽을 둘렀다. 몸에서는 짙은 땀내가 풍기고, 표정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너희! 드워프가 아니네?!”
‘말도 하네.’
키클롭스의 외침에 나는 귀를 막았고 이자벨라는 코를 막았다.
거인의 목소리는 징을 치는 것처럼 시끄러웠고, 날숨에서는 견디기 힘든 구취가 났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왔어?!”
“우리는 라프카스산맥에 사는 붉은 모루 드워프를 만나러 왔어.”
“빨간 난쟁이들? 걔들을 왜 만나?!”
“여기 계신 이분이 그들에게 받을 게 있거든.”
이자벨라가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녀는 키클롭스와 길게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자벨라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키클롭스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드워프는 자기들끼리만 나누고 남한테는 아무것도 안 줘! 그들은 욕심쟁이야! 그것도 모르는 넌 바보구나!”
“받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길 막지 말고 비켜라.”
나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키클롭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뭘 받으러 왔는데?!”
“나도 몰라, 인마. 썩 꺼져.”
“모른다고?!”
대답을 들은 키클롭스가 갑자기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발을 쿵쿵 굴렀다. 어쩐지 화가 난 모습이었다.
“각하, 키클롭스는 모른다는 대답을 제일 싫어해요. 흥분하면 난동을 부리니까, 어지간하면 성의 있게 대답해 줘요.”
이자벨라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녀는 키클롭스를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의 장막이나 박쥐 변신을 활용하면 저런 멍청한 거인 정도는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겁을 내지?’
이제벨라의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코앞에 있는 절벽에 드워프들이 있는 것 같은데,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웬 멍청한 거인과 실랑이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대답해! 드워프에게 뭘 받을 건데?!”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
키클롭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말이 몽둥이지 어지간한 사람 크기의 통나무였다.
“대답 안 하면 때린다! 이걸로 한 방 때리면 너는……!”
퍼엉!
“꺄악!”
키클롭스의 머리가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이자벨라가 비명을 질렀다. 잔뜩 움츠린 그녀의 어깨 위로 키클롭스의 뇌수 몇 점이 떨어졌다.
“더럽게 시끄러운 놈이군.”
“예고 좀 하고 저지를 순 없어요?!”
시끄러운 외눈박이 거인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더니, 이제 이자벨라가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피에 젖은 주먹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 줬다.
“…….”
이자벨라가 조용해졌다. 역시 그녀는 키클롭스처럼 눈치 없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몬스터랑 입씨름할 필요는 없지.”
“그렇다고 키클롭스를 죽여 버리다니, 엄청 피곤하게 됐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키클롭스는 동족이 죽으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복수한단 말이에요.”
“여러모로 귀찮은 놈들이군.”
살아생전에는 질문 공격으로 사람을 귀찮게 하고, 한 놈을 때려죽이면 나머지 동족이 집요하게 쫓아온다니, 이자벨라가 놈들을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됐다.
키클롭스는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인 족속이었다.
“일을 마치는 대로 여길 떠나면 되겠지. 제까짓 놈들이 무슨 재주로 오덴세섬에 있는 나를 찾아오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