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5
“젠장, 말 좀 곱게 할 수 없어? 이래서야 무서워서 같이 다니질 못하겠네, 정말.”
“……같이 다녀? 네가 왜 나랑 같이 다니냐?”
이자벨라는 잠시 심호흡하며 말을 고르더니, 이내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 힘을 빌리고 싶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좀 들어 봐! 나는 마정석 말고도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야.”
“……계속 얘기해 봐.”
이자벨라는 마력도 없고, 수중에 남은 마정석도 없을 텐데,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일까?
나도 호기심이 동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새로운 동행
내가 관심을 보이자 이자벨라도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넌 마법사나 마정석을 원한다고 했지? 지난번에 보니 손바닥으로 마력을 흡수해서 힘을 얻는 것 같던데?”
“그렇다.”
“처음 만났을 때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놀랍네. 각설하고, 나와 동행하자. 너에게 막대한 마력을 흡수할 기회를 만들어 줄게.”
“너에게는 남은 마정석이 없을 텐데?”
“맞아. 마정석은 네가 몽땅 빼앗아 갔으니까. 하지만 난 너에게 다수의 마법사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어. 마법사 집단에 대한 정보가 있거든.”
“……!”
이자벨라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내가 제안을 수락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나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넌 무얼 얻지?”
“복수를 얻지. 내가 마법사들을 만나게 해 줄 테니, 넌 그들을 만나는 족족 죽여 줘.”
복수라. 이자벨라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난 ‘암혈’의 뱀파이어고, 우리 일족이 ‘적혈’의 뱀파이어들에게 공격받아 멸망한 건 전에 이야기했지? 난 적혈을 무너뜨리고 일족을 재건하는 게 삶의 목표야.”
“나를 적혈의 뱀파이어와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건가? 그들은 마법을 사용하니까?”
“바로 그거야. 적혈을 모두 죽이고 싶은 나. 그리고 마법사를 사냥해서 힘을 얻으려는 너. 우린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적혈의 뱀파이어들은 ‘혈마법’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사용한다.
피의 권능과 마나를 동시에 사용하는 뱀파이어만의 술법인데, 사용 방식이 복잡하고 반쪽짜리지만, 마법은 마법이었다.
‘적혈의 뱀파이어……. 혈마법사라…….’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이 세계에서 일 년이 넘게 지냈지만 인간 마법사를 만난 건 고작 한 번이었다. 그만큼 찾기 힘든 족속인 것이다.
데스나이트나 용을 또 만나는 건 기대하기 힘든 일이니, 결국 내공을 단숨에 늘릴 길이 요원하다는 뜻이었다.
내가 굳이 멀리 떨어진 오덴세섬까지 찾아가는 이유도 거기서 벌어들일 돈으로 마정석을 사기 위함이 아니던가?
‘어쩌면 적혈의 뱀파이어가 새로운 마력 공급원이 될 수 있겠군.’
더구나 지금 나는 평범한 운기로 내공이 늘어나지 않는 상태였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백룡혈을 무리해서 흡수한 게 문제가 된 것 같았다.
‘명치 부근에 용마주가 생긴 뒤부터 아무리 운기를 해도 내공이 늘지 않는다.’
아니, 내공이 늘기는커녕 용마주가 내공을 조금씩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손톱이 자라는 것처럼 느린 속도긴 해도, 분명 용마주는 조금씩 커지고 그만큼 내 진신내공은 줄어들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뭐라도 시도해야 할 입장인데, 때마침 이자벨라가 찾아온 것이다.
“적혈의 뱀파이어가 어디에 있는데? 너무 멀면 안 가느니만 못해.”
“호호, 그건 걱정하지 마. 적혈의 근거지는 서부에 있으니까. 넌 오덴세섬을 영지로 받았다며? 오덴세섬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서부야.”
마침 위치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오덴세섬을 탈환하기 위해 북부와 서부의 중간 지대까지 가야 하니, 간 김에 서부로 넘어가 뱀파이어를 사냥하면 될 터였다.
올봄에 당장 영지를 평정해도 그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거두려면 가을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여름 동안은 서부에서 혈마법사를 사냥하고, 가을에 영지로 복귀하면 시기적으로 딱 맞을 것 같았다.
“좋다. 당분간 함께 다니지. 단, 오덴세섬을 평정하는 게 먼저야.”
“그야 물론이지. 잘 생각했어! 나랑 같이 다니면 너도 편할 거야. 여행 중에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줄 녀석이 많이 있으니까.”
그녀의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썩은 시체 더미가 걸어왔다.
평범한 구울부터 시작해서 맹독을 뿜는 녹색 구울, 달리기가 빠른 네발 구울이나 작고 날쌘 고블린 구울까지 각양각색의 사체들이었다.
“너도 짐이 많네? 내 언데드들에게 맡겨.”
“……이것들을 죄다 끌고 다닐 셈인가?”
“당연하지. 꼭두각시 술사가 꼭두각시 없이 다니겠어?”
“…….”
벌써부터 시체 썩는 냄새에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평범한 이방인이 아니고, 교회가 인정한 용살기사이자 보론초바 주교공이 보증하는 신실한 백작이었다.
빛의 기사가 저런 저주받은 존재를 대거 이끌고 다닌다니, 어불성설이다.
“제정신이냐? 당장 갖다 버려라.”
“뭐? 진심이야?”
“진심이지. 너야말로 진심이냐?”
이자벨라가 울상이 됐다. 사실 그녀도 저것들을 전부 데리고 다닐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 모른 척해 본 것이겠지.
“그럼 얘만 데리고 다닐게.”
그녀가 등 뒤에 서 있는 갑옷 거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간절하게 반짝였다.
“전에 오르샤바의 사원에서 나랑 싸웠던 놈이군. 이름이 뭐였더라……. 돼지였나?”
“이름은 ‘뚱보’야. 네가 팔다리를 부숴 버린 탓에 고치느라 애먹었지.”
익숙한 체형의 언데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자벨라는 그 언데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내가 뚱보와 싸우던 때가 떠올랐는지 가늘게 몸을 떨었다.
“팔꿈치로 때려서 듀라한의 뼈를 부수다니, 그때부터 보통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설마 용을 사냥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듀라한? 저놈 생전 이름이 듀라한인가?”
“이름은 ‘뚱보’라니까? 듀라한은 뭐랄까……. 일종의 분류야. 이런 형태의 언데드를 전부 듀라한이라고 불러.”
목이 잘려 죽은 시체를 활용해 만드는 강력한 언데드 전사. 이자벨라는 듀라한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뚱보에게 남다른 애착이 있는 듯 절대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뚱보는 특별한 방부 처리를 했기 때문에 썩는 냄새가 하나도 안 나. 피부가 회색인 게 흠인데, 얜 갑옷을 입어서 남들은 언데드인 줄도 모를 거야.”
“하지만 머리통을 손에 들고 다니잖아.”
“…….”
끄어어…….
뚱보가 머쓱한 듯 소리를 냈다. 사슬 철퇴 끝에 달린 머리가 입을 열어 소리를 내다니, 이보다 수상할 수 있을까.
“머리는 목에 붙여 놓을게. 무기와 방패는 새로 마련해 줘야겠군.”
“알겠다. 다만, 너나 뚱보의 정체가 발각되면 난 미련 없이 너를 버릴 거다. 지금 나에게는 약해 빠진 흡혈귀 동료보다 백작 신분과 명성이 훨씬 유용하거든.”
“말 안 해도 알거든! 좀 유명해졌다고 우쭐하기는.”
이자벨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즉시 뚱보의 머리를 꿰매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르샤바의 던전에서 내게 호되게 당한 덕분에 내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선량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이 오히려 대화를 잘 통하게 만들어서 내 입장에서도 편했다.
“자, 이제 됐지?”
뚱보의 목을 제자리에 붙이고 투구를 씌우니 겉모습은 그럴싸했다.
다만, 은은하게 흑마법의 기운을 풍기는 게 문제였다.
보통 사람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약한 기운이지만,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나 타고난 기감이 뛰어난 사람은 분명 알아챌 것이다.
“어린 시절 나병(한센병)을 앓았다고 하면 될 거야. 대부분의 인간은 나병을 흑마법과 동일시하니까 옅은 흑마법의 기운도 나병의 후유증으로 생각하겠지. 나병 환자는 피부가 짓무르니까 갑옷을 벗지 않는 것도 설명이 되고.”
“속 편한 계집이군.”
어쩐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어차피 당분간 도시에 방문할 일이 없으니 괜찮을 것 같다.
험한 라프카스산맥을 넘는데 뚱보처럼 힘센 짐꾼이 있다면 여정이 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여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내 시녀 행세를 해라. 뚱보는 호위 겸 짐꾼으로 소개하면 되겠군.”
“시녀? 쳇, 배알이 꼴리지만, 별수 없지.”
이자벨라는 인간 행세를 해 본 게 처음이 아닌 듯 금방 말을 맞췄다.
“혹여 다른 사람 앞에서 말실수라도 하면 허무하게 정체를 들켜 버릴 수도 있으니, 애초에 경어를 써서 실수의 여지를 없애는 게 어때?”
“내가 바본 줄 알아? 다른 사람 앞에서는 각하라고 부를 테니 걱정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자벨라는 그때부터 나를 각하라고 부르며 경어를 썼다.
사소한 말실수로 큰 곤란을 겪을 수 있으니,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출발 전에 꼭 해야 할 게 있어요.”
“또 뭐야.”
“서로 맹세를 나누는 게 어때요?”
“……?”
그녀의 표정이 진지했다. 목숨이 걸린 일을 제안하는 모습이었다.
“생각해 봐요. 각하가 변심해서 날 교회에 팔아넘기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겠어요? 반대로, 내가 각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날 배신하면 넌 내 손에 갈가리 찢겨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기 조각이 될 텐데,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설마 나를 배신할까?”
“말을 꼭 그따위로 해야 합니까, 각하?”
이를 악물고 말하는 이자벨라의 이마에 혈관 한 줄기가 도드라졌다.
“서로 확실하게 하자는 거죠. 힘없는 뱀파이어가 각하처럼 광휘를 펑펑 쏟아 내는 기사와 함께 다니기 위해서는 안전 보장이 필요하다고요.”
이자벨라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힘의 차이가 있으니 그녀는 나를 배신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언제든 그녀를 버릴 수 있는 입장이었다.
“난 각하에게 적혈의 뱀파이어를 제공하고, 일행으로 지내는 동안 각하를 배신하거나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피의 맹세를 할 테니, 각하도 날 교회에 넘기거나 죽이지 않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해 줘요.”
“난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이다. 내가 하는 맹세는 피의 맹세와 달리 그저 말뿐인데.”
“신앙을 걸고 맹세하면 되잖아요. 설마 나 하나를 팔아넘기기 위해 각하 같은 실력의 성기사가 광휘를 포기하진 않겠지.”
‘오호라, 이년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군.’
이자벨라가 내 본모습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지만, 내 힘의 원천까지 아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무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내 검기나 검강이 조금 독특한 광휘의 일종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하긴, 성직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들의 착각은 당연했다.
검기나 검강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보면 원래 알고 있던 것에 빗대어 이해하는 법.
그들은 검기를 색깔이 독특한 광휘의 검으로, 검강은 광휘의 검이 응축된 신앙의 결정체로 받아들였다.
“좋다. 일행으로 지내는 동안 네가 날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도 널 죽이거나 정체를 폭로하지 않고 동료로 대해 주마. 내 신앙을 걸고 맹세하지.”
“나도 각하와 함께 지내는 동안 각하에게 해가 될 행동은 하지 않을게요. 적혈의 뱀파이어를 찾기 위한 정보도 성실히 제공하고, 그들과 싸울 때 힘을 다해 돕겠어요. 내 피와 존재를 걸고 맹세해요.”
그렇게 교활한 사파거두와 어수룩한 흡혈귀의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사자인 이자벨라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