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4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주교공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작위 서임식은 일사천리로 준비됐다.
사파에서 온 용사
방랑 백작 테온 크로우
“테온, 떨리지 않아요?”
“뭐가 떨리냐?”
“저, 전 어제 밤새도록 심장이 쿵쾅거려서 한숨도 못 잤어요.”
“아니, 행사는 내가 치르는데 네가 왜……?”
“각하, 서임 준비가 끝났습니다. 광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보다 더 떨고 있는 아우레오를 보며 황당한 마음에 되묻는데, 시종이 출발 시간을 알렸다.
오늘은 나의 백작위 서임일. 윈스크의 모든 시민이 중앙 광장에 모여 내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북부의 절대자인 보론초바 주교공도 오늘만큼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행사의 주인공인 나를 배려하는 것이다.
“가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이미 교회 정원부터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정원을 벗어나니 광장까지 타고 갈 백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순백 마갑에 은백색 수실로 치장한 말에 올라 천천히 광장으로 향했다.
“기사 중의 기사!”
“크로우 경, 서임을 축하드립니다!”
“하하, 이제는 크로우 백작 각하라고 불러야지, 이 사람아!”
일면식도 없는 군중이 나를 향해 축복과 응원을 쏟아 냈다. 북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것인지 불안할 지경이었다.
지금 북부인들에게 나는 가장 이상적인 영웅이었다.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졌지만, 오직 신앙과 명예, 일신의 무력으로 백작이 된 영웅.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팍팍한 삶을 사는 북부인들에게 한 모금의 감로수가 되어 주었다.
한참을 축복 속에 머물며 도착한 광장에는 이미 보론초바 주교공이 와 있었다.
평소 교수대로 쓰던 단상이 오늘은 멋들어지게 꾸며져 있었다.
단상 전체를 융으로 덮고 깃털과 말린 꽃으로 장식한 연단에 도시의 유력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단상에 올라서니 보론초바 주교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대단하다, 경. 평민에서 기사로, 기사에서 백작으로 올라서는 데 고작 몇 달밖에 걸리지 않았군.”
“다 예하 덕분이지.”
“후후, 경어를 익히는 것보다 신분이 오르는 속도가 더 빠르다니, 때로는 현실이 희극보다 우습도다.”
주교공은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나를 격려했다.
내가 기억상실이라는 핑계로 경어를 쓰지 않는다는 건 주교공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미 나의 상징처럼 굳어져서, 더 이상 북부에서 내 말투를 트집 잡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 테온 크로우는 주교공 전하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서임식은 도시 행정관의 진행에 따라 순조롭게 흘러갔다.
주교공의 검이 내 정수리와 양쪽 어깨를 오가고, 이내 내가 백작이 되었음을 알리는 선언과 함께 시민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시민들을 향해 첫 포부를 밝히게.”
“…….”
주교공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딱히 포부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내가 백작위를 받아들인 건 순전히 내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영지에서 꾸준히 나오는 돈으로 암시장에 마정석이 등장할 때마다 구입하고, 재수가 좋으면 갈 곳 없는 마법사를 섭외해 비밀 연구실을 차려 주고 마정석을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귀족들의 거창한 미사여구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때로는 담백한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나는 쓸데없는 수식어는 치워 버리고,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했다.
“나 테온 크로우는 지금 당장 북해로 달려가 해적들을 쓸어버리겠다. 야만인의 억압 아래서 신음하는 오덴세섬을 해방하리라!”
“와아아아아!”
“최고다! 서임 선언이 영지민 해방이라니!”
“역시 빛의 기사는 달라!”
‘그리고 그 섬에서 황금을 쭉쭉 빨아먹겠다.’
물론 뒷말은 생략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목청 높여 내 이름을 연호했다.
서임식은 자연스럽게 축제로 이어졌고, 그날 윈스크에서는 밤늦도록 술과 노래가 흘렀다.
* * *
많은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마침내 북부를 떠날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당연히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목적지는 북해 연안에 있는 오덴세섬. 내 영지가 될 땅이었다.
‘가는 길에 라프카스산맥에 들러야지.’
라프카스산맥은 드워프 용병대장 두란의 고향이다.
대장장이 드워프인 붉은 모루 부족이 사는 곳인데, 지도를 펼쳐 보니 마침 오덴세섬으로 가는 경로상에 있었다.
나는 이참에 거기도 방문해서 드워프들의 선물을 받아 챙길 셈이었다.
두란이 징표까지 줘 가며 호언장담했으니, 방문하면 큰 환영을 받을 것이다.
‘검은 운철묵검으로 충분하니, 대장장이 드워프에게는 다른 걸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나는 수레에 실린 묵직한 나무 상자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인에게 황금보다 귀한 것이 병장기다. 최고의 병장기는 여벌의 목숨과 같다.
지상 최고의 재료를 확보했고, 최고의 장인인 붉은 모루 드워프에게 제작을 의뢰할 테니, 분명 대단한 명품이 나올 것이다.
“테온, 테온!”
“엉?”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혼자 헤벌쭉 웃으면서.”
아우레오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교회 앞에서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우레오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글쎄.”
아우레오와 함께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이 크다 만 녀석과도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는 중부 대교구로 돌아가야 하니, 서쪽이 아닌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리는 분명 다시 만날 겁니다. 테온과 저는 같은 빛의 길 위에 있으니까요.”
아우레오가 확신하며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마 아우레오와 인연은 여기서 끝이겠지.’
여기서 헤어지면 이 넓은 대륙에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
아우레오는 중부 대교구에서 여생을 보낼 테고, 나는 중원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오덴세섬에 처박혀 지낼 가능성이 컸다.
별다른 계기가 없다면 우리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터다.
‘영지를 안정화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마정석을 구입하는 데 넉넉잡아 이 년 정도? 그때부터는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적극적으로 알아봐야 한다. 내가 이 세계에 머무를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군.’
중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다각도로 알아볼 것이다.
사실 벌써 몇 가지 단서를 찾았다. 공간을 격하고 이동하던 파블로의 공간이동 마법이 대표적이었다.
‘극도로 발달한 마법은 시공간을 초월해. 나를 이 세계로 끌어 들인 기묘한 빛도 분명 마법이었을 거야.’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패도련의 추격에 쫓기다 절벽으로 몸을 던졌던 그날, 나는 모종의 이유로 마법에 휩쓸렸던 게 분명했다.
‘뭐, 마법으로 안 되면 내가 무공으로 등선(登仙)을 해 버릴 수도 있고, 클클.’
실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지만, 영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는 고작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화경에 도달했다. 아직 내 육신은 이십 대 초반이었으니, 수행을 거듭하면 과거의 경지는 아득히 초월할 것이다.
어쩌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선계로 승천할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중원으로 돌아갈 또 다른 길이 열리는 셈이다.
‘뭐가 됐건 아우레오와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우연히 만난 녀석과 이렇게 깊은 인연을 맺을 줄은 몰랐군.’
나는 아우레오의 앳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과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지난 여정에서 그와 나는 여러 번 서로의 목숨을 구했고, 힘든 싸움에서 등을 맡겼다.
아우레오는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 약골 녀석이지만, 내가 이 녀석만큼 신뢰하고 등을 맡긴 사람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강호 무림을 종횡하면서도 말이다.
“껄껄, 우리도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친구.”
옆에 있던 힘릿도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잿바위 드워프들은 당분간 북부에 머문다고 했다. 영구동토에서 광산 개발 임무를 수행한다나 뭐라나.
“그래,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겠지.”
힘릿의 손을 맞잡았다. 생고무처럼 탄탄하고 두꺼운 드워프의 손이 내 손을 강하게 감쌌다.
“자네의 앞길에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하겠네.”
“다음에 만나면 백작 각하라고 부를게.”
에릭과 토마스도 작별의 말을 건넸다. 이어서 교회의 사제와 성기사 들도 한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이제 떠나자.’
나는 이런 작별의 시간이 영 어색한 사람이었다. 어영부영 그들을 일별하고 교회를 벗어났다.
주교공이 내준 말을 타고 도심을 가로지르는데, 윈스크의 시민들이 창문을 열고 내 앞길에 말린 꽃잎을 뿌렸다.
“용살기사의 앞날에 영광이 있으리!”
“크로우 백작 각하! 윈스크에 다시 찾아와 주세요!”
“북부는 언제나 각하를 환영할 것입니다!”
쏟아지는 꽃잎과 박수갈채를 받으며 윈스크를 벗어났다.
꽃이 귀한 북부에서 나를 위해 평민들이 말린 꽃잎을 준비하다니, 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렸나 싶었다.
‘낯 뜨거워서 다시는 못 오겠군.’
괜한 심술에 청개구리 같은 생각을 했다. 말을 재촉해 빠르게 도시에서 멀어졌다.
* * *
성문을 벗어나 서쪽으로 벗어나 며칠이나 말을 달렸을까. 나는 대륙의 북서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미개척지를 이동하고 있었다.
내가 탄 말 뒤로 또 다른 말 한 마리가 수레를 끌고 따라왔다. 수레에는 묵직한 나무 상자가 크기별로 세 개나 실려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숨어서 따라올 셈이지?’
아까부터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기척이 있었다.
자기 딴에는 기척을 야금야금 흘리면서 내 감각을 시험하는 것 같은데, 가소로우면서도 은근히 짜증이 났다.
“이쯤에서 슬슬 나오는 게 어때?”
“…….”
“계속 숨어서 따라올 셈인가? 난 누가 내 뒤를 몰래 따라오면 죽여 버리고 싶어지는데.”
“……나야.”
핏빛 안개가 내 앞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새빨간 입술, 마른 몸, 끈적하면서도 쨍한 목소리.
백룡 파블로를 처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암혈의 뱀파이어, 이자벨라 발렌티누스였다.
“따라오는 게 너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한데, 왜 날 따라오는 게냐. 이제 나한테 남은 볼일은 없을 텐데?”
이자벨라는 마정석을 전해 줌으로써 자기 목숨 빚을 갚았고, 구울을 조종해 백룡 파블로를 죽이는 데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 놀 주술사의 사쳇값을 치렀다.
그녀와 나 사이에 맺어진 피의 맹세는 이미 효력을 다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게…….”
이자벨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뜸 들였다. 무언가 잔꾀를 부리는 게 한눈에 보였다.
“거짓부렁할 셈이면 관둬라. 엉뚱한 짓을 꾸미는 것 같으면 단칼에 목을 잘라 버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