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3
추풍대궁은 백도무림의 중견 문파였던 추풍문의 독문절기로, 양팔 너비의 거대한 활에 십 량(약 400g)짜리 화살을 걸어 포탄처럼 쏘아 대는 무식한 궁술이었다.
추풍문이 패도련의 공격으로 멸문할 때 비급이 유출되었는데, 나도 읽어 본 터라 전반부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반쪽짜리 추풍대궁이지만, 무공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천하제일의 궁술이다.’
추풍대궁에는 경신법도 포함되어 있으니, 제대로 익히면 원거리 전투에서 토마스의 적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 세계의 몬스터는 체격이 크고 가죽이 질기니 이보다 효과적인 기술이 없었다.
“다음은 에릭. 너에게는 검법을 가르쳐 주지.”
에릭에게도 어울리는 무공을 전수했다. 검과 방패를 사용해 안전한 싸움을 추구하는 에릭에게는 지구검(地龜劍)이 제격이다.
“지구검법은 말 그대로 땅거북이 같은 무공이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탁월한 검법이지. 열심히 수련하면 기사 네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을 거야.”
지구검은 초식의 팔 할이 수비고, 나머지 이 할이 반격기로 이루어진 독특한 검법이었다.
살상력이 부족해 무림에서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는 지구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식이랑 칠 주야를 싸우다 결국 내가 기권했으니.’
지구검의 전승자는 완행공자(緩行公子)란 놈이었는데, 나는 젊은 날 그놈과 시비가 붙어 겨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칠 일 밤낮 동안 완행공자를 공격했지만 결국 그의 방어를 뚫어 내지 못했고, 결국 팔 일째 되는 날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나고 말았다.
‘뒷간이 급해서 더는 못 싸우겠더군.’
배고픔과 목마름도 참아 가며 칠 일을 싸웠지만, 인간인 이상 변의를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똥오줌까지 참아 가며 칠 주야를 싸운 게 아주 헛짓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칠 일 동안 완행공자와 싸우며 그의 무공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고, 직접 검을 맞대며 지구검의 운용 묘리를 상당 부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완벽한 지구검은 아니라도, 시골뜨기 에릭에게 가르치기에는 충분했다.
지구검의 검로와 방패술을 완숙하게 익히면, 수준 높은 성기사도 에릭의 방어를 뚫기 어려울 것이다.
토마스와 에릭도 내가 전수한 무공이 평범한 기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듯, 사력을 다해 연마했다.
수련 도중 막히는 부분이나 헷갈리는 것이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질문할 정도였다.
‘중원에서도 제자를 거두지 않았던 내가 이런 조무래기들한테 시간을 할애하고 있군.’
그럼에도 나는 성실하게 그들을 가르쳤다.
단지 정이 들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두 사람에게 부탁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파에서 온 용사
주교공의 제안
“부탁? 이미 출세한 네가 우리에게 부탁할 게 뭐가 있지?”
“너보다는 에릭에게 부탁할 게 있지.”
토마스에게는 오르샤바까지 아우레오를 잘 호위하라고 당부했는데, 사실 이건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당연히 토마스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아우레오에게 정식으로 고용된 경호 용병이고, 먼 길을 함께하는 길동무니까.
중요한 건 에릭에게 할 부탁이었다.
“윈스크에 내가 잘 아는 꼬마 네 명이 있다. 에릭, 네가 그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 줬으면 해.”
“자네…… 숨겨 둔 자식이 있었나?”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어쩌다 알게 된 녀석들인데, 사정이 딱하거든.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네가 삼촌 역할 좀 해 줘.”
그 아이들은 다름 아닌 보브찬친의 동생들이었다. 북부를 떠나기 전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그 녀석들이었다.
보브찬친이 남겨 놓은 은화가 있다지만, 어른의 보살핌 없이 어린 소년들이 안전하게 장성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으음, 아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망설임 없이 나서겠네. 자네에게 검술을 배웠으니 그 정도 보답은 당연하지. 하지만 대부가 되는 건 좀…….”
“……?”
“북부에서 대부는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잖아?”
“그래서? 돈이 아까워서 싫다는 거야?”
“싫다는 게 아니라, 당장 내 밥벌이도 구하지 못한 처지이니까 하는 말일세.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수는 없잖은가.”
에릭의 걱정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머나먼 타지에서 정착하려는 은퇴 용병 신세. 가진 재산이라고는 아우레오의 순례 호위를 마치고 받은 은화 몇 닢이 전부였고, 앞으로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 넌 공작 영애의 호위병이 될 테니, 돈은 넉넉하게 벌 수 있을 거야. 내가 그쪽으로 다리를 놓아주지.”
“공작 영애? 보, 보론초바 공작 영애의 호위병 자리를 주선해 주겠다는 말인가?”
에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공을 전수할 때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에 어쩐지 얄밉기도 했다.
“마침 공작 영애도 그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거든. 내가 주교공과 공작 영애한테 미리 이야기를 해 둘 테니, 넌 그동안 무공이나 열심히 갈고닦아. 자리에 걸맞은 실력을 갖춰야 하니까.”
“아, 알겠네! 먹고 자는 시간도 쪼개어 단련하겠네!”
에릭의 눈동자가 의지로 불타올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만사에 의욕을 잃은 모습이었는데, 난데없이 찾아온 출세의 기회가 그의 꺼진 마음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하긴, 에릭처럼 평생 삼류 용병으로 굴러먹던 놈에게 갑자기 공작 영애의 호위병 자리가 들어왔으니, 흥분할 만하지.’
귀족 영애의 호위병은 알토란 같은 보직이었다. 일반 병사와 달리 영애를 밀착 경호하는 덕에 늘 쾌적한 곳에서 깨끗한 복장으로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스칼렛이 어디 평범한 귀족 영애이던가?
용살대전 이후 북부의 절대자로 올라선, 머지않아 북부의 왕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블라토프 보론초바 주교공의 금지옥엽이었다.
그녀의 비위를 잘 맞추고 금일봉이라도 하사받으면, 평생 일해서 벌 돈을 하루아침에 벌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토마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끼어들었다.
“그, 그럼 나도 윈스크에 남을까? 나도 호위병 노릇 잘할 수 있는데.”
“이 새끼가…….”
헛소리를 내뱉은 토마스가 찔끔하며 눈을 피했다.
“명심해라. 내가 밉상인 네놈에게 무공을 전수한 건, 오르샤바까지 아우레오를 안전하게 데리고 가라는 의미다. 내가 은원은 뭐라고 했지?”
“은원은 철칙이라고…….”
“그래, 은원은 철칙이다. 넌 내게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갚아라.”
“알겠다고, 젠장.”
토마스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태도는 불손해도, 저놈은 제 역할을 다할 것이다. 버릇이 없어서 그렇지, 최소한의 신의는 있는 녀석이니까.
‘개꿈 꾸지 말고 추풍대궁이나 열심히 수련해라, 이놈아. 비록 전반부지만, 제대로 익히면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이다.’
토마스는 모르고 있지만, 그가 추풍대궁의 전반부를 대성한다면, 귀족의 호위병 따위가 아니라 거대 용병단을 이끄는 용병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 * *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북부를 어느 정도 안정화한 보론초바 주교공이 나를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보론초바 주교공은 내 예상을 넘어서는 말을 했다.
“……뭘 주겠다고?”
“백작(伯爵)의 위를 하사할 생각이네. 경에게 그리 과분한 작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태평하게 앉아 뿔잔에 담긴 맥주를 홀짝이는 주교공. 그는 지금 나에게 작위를 하사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나는 무덤덤한데, 옆에 있던 아우레오는 금방이라도 감격의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너, 왜 그래?”
“어흑흑……. 테온이 백작이라니, 이런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한다는 게 너무나 기뻐요.”
“진정 좀 해.”
아우레오에게는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나도 내심 놀란 상태였다.
용살대전에서 큰 위업을 달성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주교공이 대뜸 세습 작위를, 그것도 남작이나 자작도 아닌 백작위를 하사할 줄은 몰랐다.
‘주교공의 그릇도 보통이 아니군. 이 시점에 내 명성을 견제하기는커녕, 작위를 하사하다니.’
주교공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지금 도시의 여론은 주교공과 나를 동시에 찬양하고 있었다. 이럴 때 괜히 내 명성에 흠집을 내기보다는, 작위를 하사해 확실하게 서열을 정리하고 안으로 품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이가 새롭게 떠오르는 영웅에게 힘을 실어 주는 건 알고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새삼 그의 배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하, 테온을 백작으로 임명하신다면, 봉토도 하사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지.”
주교공의 대답에 아우레오가 소리 죽여 웃으며 내 옆구리를 마구 때렸다. 좋아 죽겠다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하의 결정은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군.”
“북부 전체의 영웅으로 떠오른 크로우 경에게 내가 이 정도도 베풀지 못하겠나? 작위 서임식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장 진행하지. 다만…….”
“다만?”
“작위와 별개로, 경이 봉토를 얻기 위해서 선행해야 할 숙제가 있네.”
그럼 그렇지. 뱃속에 구렁이를 열 마리쯤 담아 둔 정치인이 쉽게 땅을 떼어 줄 리가 없었다.
이어지는 주교공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주교공의 속내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네에게 줄 봉토는 겔라구스 서쪽 국경 밖에 있네. ‘오덴세섬’인데, 북해 연안에 있는 꽤 큰 섬이지. 단순히 넓이만 따지면 윈스크보다도 큰데, 그 섬을 통째로 주겠네.”
“국경 밖의 섬? 그럼 겔라구스 왕국의 땅이 아니란 소린가?”
“행정적으로는 겔라구스 왕국의 영토가 맞아. 겔라구예비치 왕실이 오랫동안 소유한 땅이니까. 하지만 워낙 멀기도 하고, 왕실도 몰락했으니 이제 무주공산이라고 봐야지.”
“가서 깃발만 꽂으면 된다는 말이로군.”
내 대답에 주교공이 부드럽게 웃었다.
노련한 정치인의 미소에는 언제나 숨겨진 계획이 있는 법. 나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사실 오덴세섬에서는 벌써 몇 년째 공물이 올라오지 않고 있거든. 이런 경우는 북해의 야만 부족이 섬을 무단으로 점거했을 가능성이 큰데……. 정확한 실태는 경이 직접 가 봐야 알 수 있을 거야.”
“섬의 내부 사정을 알 수 있는 소식통은 없나?”
“겔라구예비치 왕가에 충성을 바치던 영지 관리인이 있긴 한데, 공물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죽었을 테지. 섬을 차지한 야만인들이 관리들을 살려 둘 이유가 없으니까.”
야만 부족이라고 지칭하면 산에서 오두막 짓고 사는 토인을 상상하기 쉽지만, 사실 북해의 야만 부족은 해적에 더 가까웠다.
그것도 배 한두 척으로 까불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 해적이 아니라, 장정만 수백 명이 넘는 대규모 해적단.
즉, 봉토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칼을 들고 찾아가 섬을 차지한 해적을 몰아내고, 놈들이 다시 찾아오지 못하게 근거지까지 소탕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분쟁 지역을 봉토로 하사하고, 신임 제후가 직접 그 땅을 정벌하게 한다……. 중원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방식이지.’
중원과 이곳은 서로 다른 체제를 가졌지만,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인 만큼 정치의 본질은 비슷했다.
칼을 휘두를 땐 남의 손을 빌리는 게 상책. 북부의 왕이 되려는 보론초바 주교공에게 테온 크로우라는 젊은 영웅은 써먹기 좋은 칼이었다.
게다가 그 젊은 영웅의 명성이 너무 높아서 언젠가 북부 장악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정도라면?
당장 세금도 걷지 못하는 외딴섬을 주고 멀리 보내 버리는 게 이득이었다.
잠재적 정적도 제거하고, 공물이 끊긴 섬에서 세금도 걷을 수 있고, 자기 배포도 과시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인 셈이다.
게다가 이건 내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섬을 장악한 해적을 몰아내면 그 섬을 통째로 준다니…….’
토지는 막강한 힘이다.
땅은 사람의 손길을 만나 작물을 낳고, 작물은 인구의 증가를 유발한다.
그렇게 늘어난 인구는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하고, 막대한 부를 지주에게 안겨 준다. 이른바 자본의 선순환이다.
“오덴세섬은 농사를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땅이지. 하지만 토지라는 게 개발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주교공의 말대로 토지란 개발하기 나름이다. 꼭 농사가 아니라도 땅이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안 그래도 마법사를 찾아다니는 게 사막에서 바늘 찾기 같았는데, 차라리 영지를 활용해 돈을 버는 게 낫겠군.’
영지가 생기면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야금야금 마정석을 매입할 수 있다.
그럼 굳이 몇 년씩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마법사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능한 심복을 구하면 마정석을 직접 생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쉽지 않겠지만…….’
마정석을 자체 생산하려면 뛰어난 마법사를 포섭해야 하는데, 언뜻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교회가 즐비한 북부에 머무는 것보다는, 외딴섬에 내 영지를 꾸리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목표는 내공이야.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당장 몇 년 이내에 최대한 내공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다.’
내가 화경에 도달하며 왕년의 무공을 거의 되찾긴 했지만, 무림으로 돌아갈 걸 생각하면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지금 내가 가진 내공은 채 백 년 치도 안된다. 이 정도 내공으로는 강기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과거에도 내공이 부족해 몇 번 낭패를 겪었던 터라, 이번에는 천하제일의 내공을 쌓아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정석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서 내공으로 바꾼 뒤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자. 굵직한 마정석을 열 개 정도 더 흡수하면, 강호에 적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