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2
“…….”
이런 상황이 낯 뜨겁지만 싫지는 않았다. 알게 모르게 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 운철묵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
북부병단이 기다렸다는 듯 환호했다.
* * *
영구동토에서 벌어진 장대한 싸움은 빠르게 세상에 알려졌다.
용살대전(龍殺大戰)에서 생환한 영웅들은 그날의 기억을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 댔고, 북부에 머물던 모든 음유시인과 무역상은 저마다 가슴에 이야깃거리를 품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물론, 이 이야기가 단순히 멋진 영웅담으로만 끝나진 않았다.
겔라구스 왕국의 파블로 왕이 정체를 숨긴 용이었다는 사실은 북부를 넘어 대륙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건으로 겔라구스 왕국은 한순간에 왕혈을 잃었고, 왕국의 정통성도 사라졌다.
그동안 왕국의 깃발 아래에서 침묵하던 다양한 북방 부족이 제각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큰 혼란은 없네요.”
“그럴 테지. 주교공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까.”
아우레오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겔라구예비치 왕가가 몰락했지만, 그렇다고 북부에 당장 군웅할거의 시대가 열리지는 않았다. 어중이떠중이가 설치기에는 보론초바 주교공의 그림자가 너무 거대했다.
주교공은 권력의 공백을 순식간에 메꾸며 북부를 장악했다.
도시의 모든 귀족과 성직자가 이미 주교공의 편이었고, 영구동토에서 함께 싸운 병단도 주교공을 지지했다.
중부 대교구에서 보낸 성기사단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고, 주교공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거리에는 벌써 겔라구스의 국호(國呼)를 버리고, 보론초바 공국(公國)을 선언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삼두(三頭)의 시대는 끝났어. 이제는 보론초바의 시대지.
-암, 그렇고말고. 겔라구예비치 왕가는 정체를 숨긴 용이었고, 북부정교회는 사실상 용의 하수인이었잖아?
-북부의 진정한 수호자는 보론초바 가문이야. 그러니 보론초바 주교공 전하께서 북부를 통치하셔야 해!
겔라구스 왕국은 명맥이 끊겼으니, 보론초바 주교공이 대공의 자리에 앉아 북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그리고 주교공 못지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있었다.
-테온 크로우 경은 요즘 무얼 하고 계실까?
-용살기사(龍殺騎士)님은 지난 전투에서 얻은 부상을 치료하고 계신다던데?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건재한 모습을 보여 주면 좋겠군.
내가 교회에 처박혀 몸속에 생긴 내단을 연구하는 동안, 북부에는 나에 대한 소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신의 있는 자에게 선물을
“주교공만 노났군. 근엄한 척 표정 관리하느라 진땀 빼고 있겠어.”
“풉, 전 테온이 더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죠? 온 북부가 테온의 용맹을 칭송하고 있는데.”
아우레오의 말처럼, 내 이름은 북부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교공이 뛰어난 지휘관이자 통치자로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지만,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내용보다 환상적인 영웅담에 사로잡히는 법.
북부병단이 백룡 파블로의 하수인 군단을 상대하는 동안, 홀로 검을 들고 용을 베어 버린 용살기사(龍殺騎士)의 인기는 주교공을 뛰어넘을 지경이었다.
-하늘로 솟구친 테온 크로우 경이 검에 빛을 모아 용의 목을 베어 버렸대!
-크로우 경을 향한 신의 사랑이 어찌나 깊은지, 그가 검을 뽑으면 주변이 광휘로 가득 찬다더군!
도시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심지어 함께 용살대전(龍殺大戰)에 참전했던 병사들까지 그 소문을 거들고 나섰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도 아니었으니까.
전장에서 돌아온 생존자의 증언에 소문은 자꾸만 덩치를 불려 나갔다.
어느새 내 이름 앞에는 용살기사니, 빛의 기사니, 신의 징벌이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가 잔뜩 붙어 있었다.
‘유명세도 이 정도면 슬슬 부담스러운데.’
나는 어차피 떠날 몸이니 세속의 명성이나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다.
물론 명성이나 권력이 여기서 지내는 동안 나를 편하게 만들어 주긴 하지만,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유명세는 오히려 내 운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당장 지금도 나는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교회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알아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강호에서는 그렇게 노력해도 악명만 떨치더니, 여기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영웅이 되는군.’
인생사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 했던가. 과연 옛말에 틀린 게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내 속내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용마주(龍魔珠)의 활용법을 도통 알 수가 없네.’
내 명치 부근에는 아직도 용의 마력이 구슬 형태로 단단하게 망울져 있었다. 백룡혈에서 추출한 마력의 결정체이니, 용마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용마주의 활용법만 알아내면 마르지 않는 내공의 화수분이 되어 줄 것이 분명한데, 무슨 짓거리를 해도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배때기를 갈라 볼 수도 없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아우레오와 함께 교회를 거닐고 있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이, 에릭,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이제 다 나았나 봐?”
“아, 테온…… 크로우 경?”
교회 뒤뜰에서 마주친 에릭이 나를 향해 묵례하고, 옆에서 함께 걷던 토마스도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경은 지랄. 부르던 대로 불러.”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제발 그래 줄래?”
에릭은 좀처럼 나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내가 그저 기억을 잃은 특이한 이방인이던 시절에는 ‘자네’, ‘어이’ 하며 애매한 호칭으로 불러도 무방했지만, 이제 엄연한 기사가 된 마당이었다.
심지어 보통 기사도 아니고, 북부의 구세주인 용살기사였다.
“그럼 예전처럼 이름으로 부를게.”
“넌 경이라고 불러.”
“…….”
냉큼 맞먹으려던 토마스가 주둥이를 삐죽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에릭도 긴장이 풀린 듯 피식 웃었다.
나는 에릭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다 나았네. 자네와 아우레오 사제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이지.”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아우레오한테만 고마워하면 돼.”
겸양 떠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난 아무것도 안 했다.
에릭이 몸을 회복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조치는 아우레오가 나서서 해결했고, 직접적인 병 수발은 토마스가 전담했다.
난 그동안 도시에서 술이나 먹고 귀신 소원이나 들어주며 지냈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에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 말게. 자네와 아우레오 사제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난 정말 불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엉덩이의 상처가 썩기 직전이었으니까. 한데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축하를 먼저 해야 하나? 헷갈리는군.”
“무슨 말이야?”
“부활한 용을 처단해 주어 고맙고, 북부의 영웅이자 용살의 기사가 된 걸 축하해야지.”
에릭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교회에서 와병하며 지냈다지만, 북부를 넘어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용살대전의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
“낯 뜨거우니 그 얘긴 그만하지.”
“하하, 당연한 칭송을 듣고 낯이 뜨겁다니, 자네답군.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러는 너는? 경호 임무도 끝났는데, 이제부터 어쩔 셈이야?”
“글쎄…….”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에릭이 즉답을 피했다. 그의 표정이 어쩐지 어두워 보였다.
토마스를 돌아보니 그 또한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이대로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아 내가 먼저 물었다.
“순례가 끝났으니 아우레오는 중부로 돌아가겠지. 너희도 함께 가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사제님께서 고용 제안을 해 주셨네. 나처럼 무능한 용병에게 다시 한번 경호를 맡겨 주시니 감사한 일이지만…… 거절했어.”
“잉? 왜?”
아우레오의 귀향길은 당연히 에릭과 토마스가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용병 노릇을 그만두기로 했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윈스크에 정착해서 다른 일을 알아볼 생각이야.”
‘……마음이 꺾였군.’
시시콜콜 속마음을 물어보지 않아도, 에릭의 표정에서 그의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중간 지대의 마녀 사냥과 오르샤바의 몬스터 토벌, 타힐 마을의 데스나이트 격퇴까지, 지난 순례에서 겪은 모험은 평범한 은퇴 용병 에릭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난 별 볼 일 없는 촌부야. 자네나 아우레오 사제님처럼 영웅적인 운명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지. 나의 모험은 여기까지네.”
말을 하면 할수록 에릭의 표정이 홀가분해졌다. 어렵게 한 결정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미련도 버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잘 생각했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북부는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곳이잖아? 중부 근처에서 온 네가 윈스크에서 시민들과 섞여 살 수 있겠어?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우선 도시 경비대에 지원해 볼 생각이네. 용살대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어 나간 탓에 병력 충원이 시급하다더군.”
“용병 노릇 하며 실컷 돌아다니던 사람이 틀에 박힌 병사 생활을 견디려면 고생깨나 하겠는걸?”
“하하, 어쩌면 이쪽이 적성에 맞을지도 몰라. 난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거든. 남들보다 늦었지만, 성실히 살다 보면 참한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릴 수도 있겠지.”
나는 에릭의 결정을 존중했다. 모든 사람이 도전자이자 개척자일 필요는 없다. 에릭에게는 도시에 정착해 번듯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토마스, 넌?”
토마스는 윈스크에 남지 않을 것 않았다. 그는 에릭과 달리 출세에 욕심이 있었고, 경비병이 되느니 용병을 택할 인물이었다.
“난 아우레오 사제님을 따라간다. 단, 중부 대교구에 도착할 때까지 모시는 건 아니고, 오르샤바에서 헤어지기로 했어. 난 그곳에서 새 출발을 할 거야.”
“가야르도 백작 밑에서 일해 볼 셈인가?”
“백작은 무슨……. 난 너처럼 거물이 아니야. 가야르도 백작이 나 같은 놈을 기억이나 할까?”
토마스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답했다.
그는 오르샤바에서 대형 용병단에 가입할 계획이었다. 밑바닥부터 실력을 다져 언젠가는 자기 용병단을 이끌고 싶다고 했다.
“테온, 널 보면서 느낀 게 많다. 내가 너처럼 싸울 순 없겠지만,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다 보면 언젠가 날 인정해 주는 고용주를 만날 수 있겠지.”
그동안의 여정이 토마스를 성장시킨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반말을 지껄이는 건 패 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예전만큼 밉지 않았다.
“…….”
나는 잠깐 고민했다. 두 사람과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지만,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너희 둘에게 가르쳐 줄 게 있다. 오늘부터 매일 두 시진씩 내게 수업을 받아라.”
* * *
그날부터 나는 두 사람에게 기초적인 토납법과 삼재보법을 가르쳤다.
중원무림에서는 동네 무관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입문 무공이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인생 역전의 기연이나 다름없을 터다.
“내가 가르쳐 준 호흡법은 매일 두 시진 이상 꾸준히 수행해. 주의 사항은 기억하고 있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절대 임의로 변형하지 말고, 밀실에서 안전하게 수행하라고 했지.”
“그래, 명심해.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며칠 동안의 반복 교육으로 두 사람이 토납과 보법에 적응할 때쯤, 각자에게 어울리는 중급 무공도 하나씩 전수했다.
“토마스에게 가르칠 건 추풍대궁(秋風大弓)이다. 넌 기골이 우람하고 활쏘기에 소질이 있으니 안성맞춤인 무공이지. 오랜 시간 연마하면 눈도 밝아지고 화살은 백발백중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