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of Ice RAW novel - Chapter 9
제1장 수원수구(誰怨誰咎)
1
뿌우웅-!
긴 나팔(喇叭)소리가 성벽 위에서 뻗어 나왔다. 곧이어 성문이 열리더니 금의를 입은 오십 명의 마군(馬軍)이 뛰쳐나와 소리 때문에 모여든 백성을 흩었다. 길이 뚫리자 그들은 다시 전진하며 백성을 길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힘을 다한 나팔 소리는 잠시 후에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완전히 힘을 잃었을 때에 성문으로 종고사(鐘鼓司)의 환관들이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뒤로는 붉은 갑주를 걸친 의장대, 즉 친군지휘부의 무장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삼 열로 줄을 맞춰 나왔고, 곧이어 무장을 한 환관 무리가 거대한 금마차를 호위하며 천천히 의장대를 따랐다.
마차 뒤에는 백여 명의 궁녀들, 그 뒤로는 다시 친군지휘부의 무장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삼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행렬의 마지막은 문무대신과 오백 명의 금의위였다. 붉은 관복을 입은 대신들이 열을 맞춰 마차를 뒤따르고, 금의위 무사들이 언제든지 행렬을 둘러쌀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채 마차를 따라 걸었다.
“참 신기할 따름이오.”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무대신들 사이였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앞서 말을 몰며 행렬을 지휘하던 중년 무장이 속도를 늦추어 따라오는 대신들과 거리를 좁혔다. 친군지휘부의 총독 유장이었다.
유장은 말머리를 더욱 뒤로하여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어깨를 맞췄다.
“무엇이 신기하다는 말씀이시오?”
물음은 얼굴에 정광이 흐르는 노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무안한 표정을 드러냈다. 태사(太師) 정지광(正地光)이었다. 태사가 정1품의 최고 관직이라지만 황제의 동생인 유장에게는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그는 종인부(宗人府) 당혜(黨暳)와의 대화를 들켜서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당혜가 대신 대답했다.
“늙은이들의 대화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하!”
“폐하의 옥체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라 신경 쓸 수밖에 없겠소. 태사께서 신기하다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인지 알아야겠소. 내게 깨달음을 주시오.”
그러면서 노여운 빛이 그의 두 눈에 담겼다.
정지광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뭄과 기근이 이어졌다지만, 이미 겨울로 접어든 마당에 천단에서 기우제를 드린다니 신기하지 않겠습니까.”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이니 좋지 않겠소?”
“하나 추위가 꺾이고 봄이 시작되는, 내년 춘삼월이 적절한 시기이겠지요.”
그 말을 듣고 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소. 하지만 백성을 사랑하시어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진행하는 수밖에 더 있겠소?”
“그 제안을 환관들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정 도사가 오늘이 길일이라 하여 폐하께서도 허락하였다 들었소이다.”
이번에는 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이 길일이기는 합니다만…….”
바람에 흩날리듯 태사 정지광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담긴 듯했다. 표정을 확인한 유장이 엄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사께서도 천문에 밝다고 들었소. 혹시, 이상한 조짐이라도 발견하셨소?”
“괜스레 전하께 심려를 끼친 것 같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말해 보시오.”
더욱 엄해진 유장의 목소리가 정지광의 전신을 칼끝처럼 찔렀다. 정지광은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하여 며칠 전부터 밤하늘을 유심히 살폈더랬습니다. 확실히 겨울자락에서 밝은 기운이 도사리더군요. 하지만 길일과 함께 이상한 조짐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조짐이라니?”
“하늘과 땅의 조화가 깨지는 형상이었지요.”
유장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뜻이오?”
“저도 그런 별자리는 처음이라 뭐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정 도사가 그쪽으로 밝은데도 기우제를 제안했다고 하니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뜻이 아니겠는지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태사께서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구려. 솔직히 말씀해 주시오. 무엇이 문제요?”
하지만 정지광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입방정을 떨어 유장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장은 끈질겼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채근하니 할 수 없이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잠시 후, 유장의 표정이 돌변하더니 차갑게 식었다.
“태사의 말씀 새겨듣겠소.”
그리고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더니 말에서 내려 정지광에게 낮게 말했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살기로 범벅되어 보는 사람이 섬뜩할 정도였다.
“태사께는 지금 제게 하신 말씀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오.”
겁먹은 정지광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장은 못 미더운 눈빛이었다. 한참이나 태사를 노려보더니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
“만약, 지금 말씀을 다른 이에게 했다가는.”
유장은 허리에 걸린 보검을 움켜쥐었다.
“태사 뿐만 아니라 태사와 관련된 모든 이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 같소.”
정지광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소, 태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말에 오른 유장이었다.
‘뭔가 있구나!’
손발이 떨려서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친 정지광의 생각이었다. 그는 마차를 따르는 유장의 뒷모습을 보며 유장이 무서운 일의 중심에 있음을 은연중 느끼게 되었다.
‘이 일을 어찌할꼬. 폐하께 말씀을 드려야 할 터인데.’
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황제를 지키는 호위를 뚫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아무도 모르게 황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정적으로 천단으로 가는 중에 친군지휘부의 무장 한 명이 슬쩍 접근해 무서운 목소리로 따라오라고 해서 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 왜 그러는가?”
“총독의 명입니다. 행렬에서 빠져 조용히 저를 따라오십시오.”
정지광은 시선을 들어 유장을 바라보았다. 살기로 번뜩이는 유장의 눈빛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정지광은 오늘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 ☆
절벽에서 쏟아지는 낙수가 수면을 때리며 거친 소리를 만들었다. 묘하게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어우러지는데, 남으로 흘러가는 폭포수는 점차 붉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사자비는 계곡을 살피고 있었다. 사파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습이었지만 분수령일 뿐, 지금부터는 힘 빠진 정파 고수들이 수세에 몰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 증거로 한쪽으로 기울어졌던 추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압도적이던 정파도 이젠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한 것이다.
“슬슬 소저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도 사파의 고수가 많았으므로 소요요는 전투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대신 거마대주 진궁한이 움직였다. 수세에 몰려 전장을 빠져나오는 공마문(共魔門)을 대신해 그 자리를 메우고자 달려가려는 것이다. 꽤 많은 공마문도가 숲으로 밀리고 있었으므로 구색을 갖추고자 소요요를 호위하던 거령문도 스무 명을 데리고 전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다른 쪽 숲에서도 빈 곳이 생기면 곧바로 대기하던 고수를 투입, 교대하여 정파를 몰아붙이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저보다는 오히려 소협께서 나가시는 게 좋겠군요.”
소요요가 대꾸하며 전장을 가리켰다.
“우리 쪽의 피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이미 예상했던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소.”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구파일방이 저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군요. 우리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인데, 구파일방을 상대로는 전혀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우리가 이길 것 같소만.”
“그래도 피해를 줄여야죠. 당신 같은 고수가 활약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사자비 또한 나설 생각이 없었기에 어깨만 으쓱했다.
“그러고 싶지만 나도 이제 힘이 빠져서.”
“기습이었다면서요?”
“맹주 정도의 고수를 상대하려면 기습이라도 전력을 다해야 하는 법이오. 나는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걸 쏟아 부었으니 이젠 지쳤고, 그러니 쉬어야겠소. 내 할 일 또한 다 했고.”
그러면서 이젠 당신들이 처리하라는 표정, 어찌 되든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전투를 관망하는 그를 향해 소요요가 아미를 좁혔지만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바심이 난 탓이었다. 거령문도가 한둘 씩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그녀 또한 남은 호위를 이끌고 교대를 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돌연히 등장한 사내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멈춰라!”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내공이 실려서 귀를 찢을 듯한 음성은 절벽 위에서 아래를 향해 누르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워낙 큰 소리라 모두 움찔했으나 앞에 적을 둔 판국이라 여전히 무기를 놀리기에 바빴다. 대신 숲에서 대기하던 무리가 절벽으로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거기에 흑룡이 있었다. 오연히 절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왔군!”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소요요는 웃을 수 없었다. 흑룡까지 끼어들면 피해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린 흑룡은 곧장 전장으로 달려들었다.
뛰어내렸다지만 절벽을 밟으며 뛰어내려왔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절벽을 밟을 때마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움푹 팬 발자국을 남기는데, 천근추를 이용했음이 분명했다.
완전히 절벽에서 내려온 다음에는 그대로 전장을 가로질렀다. 황금빛이 몸에서 퍼져 나오며 그를 유성처럼 보이게 했다.
“무식할 정도로 저돌적이군!”
흑룡을 지켜보던 사자비는 그렇게 말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적아가 뒤섞인 난전에서는 친황대처럼 이런 유의 전투에 단련된 단체가 아니면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자칫 동료가 상할 수 있기 때문인데, 흑룡은 전장을 가르면서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러다가는 구파일방과 무림맹의 고수도 피해를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잠깐 뒤 사자비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놀란 듯, 혹은 신기한 듯 흑룡을 살폈다.
무식한 건 사실이었다. 흑룡은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부수고 쓰러뜨렸다. 재고 생각하는 행동 따위가 전혀 없는, 그래서 기계적으로 보이는 동작의 연속. 그런데도 신기하게 구파일방과 무림맹에게는 피해가 없었다. 오히려 득이 되는 듯 보였다.
퍽!
흑룡이 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가슴을 강타당한 무사는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날아갔고 그곳에는 소림승을 상대하는 세 명의 무사가 있었다. 세 무사는 덮쳐오는 동료를 피해 공격을 멈추고 소림승과 거리를 벌렸다. 그때 소림승이 물러서는 무사들을 공격하여 우위를 점했다.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흑룡은 적을 쓰러뜨리면서도 아군을 돕고 있었다. 한두 번이라면 우연으로 치부했겠지만 전장을 완전히 가로지를 때까지 그에게 맞은 무사들이 전부 그런 식으로 뒤엉켰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대단한 놈이군!’
문득 흑룡의 움직임을 본 사자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쳤어야 할 흑룡의 움직임이 전보다 빠르고 훨씬 강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흑룡의 무위에 놀란 소요요도 그 점을 간파하고 소리쳤다.
“상마쌍괴 어르신들을 상대했다더니,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죠?”
사자비도 대답이 궁했다. 그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때마침 흑룡이 다시 반대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가는 방향은 어김없이 길이 트였고, 그렇게 몇 번을 움직이자 지레 겁먹은 사파의 무리가 물러서거나 피하고 있었다. 흡사, 늑대에 내몰린 양떼 같다고나 할까. 그 때문에 점점 약세를 보이던 구파일방과 무림맹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곤란하군!’
순간 사자비의 표정이 굳었다. 수세에 몰리자 숲에서 대기하던 무사들이 전장으로 달려드는데, 그곳을 향해 흑룡이 쌍장을 뻗는 것과 동시였다. 장력을 발출하던 흑룡이 사자비를 힐끔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자비를 불쾌하게 했다.
‘감히!’
사자비도 비틀린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때 폭발하듯 흑룡의 쌍장이 빛을 뿌렸다.
쿠우웅!
금빛으로 반짝이며 주위를 삼킬 듯한 장력은 놀랍게도 전장으로 달려오는 오십 명의 무사를 삼키고 그 뒤에 있는 숲까지 덮어버렸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풍을 만난 것처럼 숲이 요동치는데, 그곳에 대기하던 무사들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장력은 파괴력을 동반한 폭발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최대한 상대가 받을 타격을 줄이고 살생을 피하려는 공격 같았으나 금빛 바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쓰러진 무사들의 형태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듯했다. 겉이 멀쩡한 대도 저런 상태라면 내부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장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상대의 내상을 유도한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리던 사자비는 슬며시 손을 움직여 마라겸을 잡았다. 흑룡이 그의 생각대로 활약해주어 잠시나마 좋았으나, 그 활약이 너무 빛나서 자칫 구파일방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요요 뿐만 아니라 흑룡을 바라보는 사파 대부분이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모습이니……, 이대로 가다가는 정파의 압승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나서야 하나!’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녀석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사파가 포기하고 물러날 수도 있겠다는 위험신호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미 공터에 있는 사파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이 분명한 흑룡의 묘한 미소가 거슬렸던 탓도 있었지만. 흑룡 때문에 정파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스르릉!
낫처럼 생긴 예리한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룡의 활약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나설 생각을 굳힌 소요요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사자비의 행동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직접 나서려고요?”
사자비는 대답 없이 흑룡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맹주를 상대할 때와 같이 굳이 드잡이를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단숨에 날아가 목을 베리라 결심한 한 상태였다. 그러자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순간 마라겸이 강렬한 빛을 머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지만 검신에서 주위에는 얼릴 듯한 냉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소요요가 대경한 얼굴로 낮게 탄성을 질렀다.
“어검술!”
내공의 성질을 깨달아 인간의 틀을 넘어서는 것을 기본바탕으로 깔아야 하는 기술이라면 화경을 도달해야 한다는 뜻. 거기에 신검합일을 이루어 검이 가진 모든 기능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지고무상의 경지가 어검술이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심검(心劍)이니, 자연검(自然劍)이니 하는 따위를 제외한다면 검사에게 있어서 꿈의 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흔치 않은 빙공 계열의 어검술이라 소요요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마라겸이 지금 어검술에 들어간 상태인지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었었으니까. 하지만 소문으로 접했던 대로의 모습인 건 분명했다.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강렬한 기운과 빛, 내공을 주입했다기보다는 검신 자체가 힘을 발하는 것 같은 모습은 분명히 어검술의 일종이었다.
“여, 역시 맹주를 쓰러뜨렸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군요.”
한때나마 멸시하던 시선은 어느덧 경외로 바뀌어 있었다. 사파가 불리해졌다는 상황도 잊은 채 시종 감탄한 눈으로 마라겸만 바라보는데, 동시에 사자비의 몸에서 검신과 같이 강렬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제야 강한 냉기를 느낀 주위의 무인들이 사자비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 흑룡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제 그만!”
장내에 끼어들어 일시에 전장에 있던 사파의 삼 할을 쓰러뜨린 그의 외침은 사자후라도 되는 것처럼 윙윙거려서 일시에 전투를 중단시켰다.
흑룡은 전장 중앙에 서서 사방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했으니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지 말고 이만 물러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전력을 다할 겁니다.”
실컷 두들겨 맞았는데 물러나라니, 물러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흑룡의 무공이 너무 대단해서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고수 하나 때문에 수천의 무리가 허수아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한두 사람이 다시 검을 휘두르자 그들의 마음이 전이된 것처럼 일제히 무기를 고쳐 잡고 상대를 공격한 것이다.
“쯧쯧!”
혀를 찬 흑룡이 발을 움직였다.
쿵-!
발은 정확히 그가 서 있는 바닥을 찍었다.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어수선해진 계곡이 소리 때문에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그 여파는 흑룡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공기를 굴절시켜 사방을 휘몰아치는 힘을 동반하고 있었다. 싸우는 중 밖으로 퍼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에 부딪힌 무인들이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거리고, 균형을 잡고자 다시 동작을 멈췄다. 이때 흑룡의 몸은 거대한 황금빛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황금빛에서 퍼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은 계곡에 있는 모든 무인을 경악시킬 정도였다.
“화, 황금불(黃金佛)!”
소림의 팔대 방장이 창안했다는 황금불은 십 성에 이르면 황금색의 호신강기가 생겨나 시전자를 금불상처럼 보이게 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는 반야밀공(般若密功)이라 했다. 득도한 수도승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팔대 방장 정혜가 만들어냈다는 속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흑룡이 만든 황금불은 승려에게서 나오는 포용보다는 주위를 뜨겁게 달구는 파괴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흑룡의 경고가 허풍이 아님을 짐작한 중인의 표정이 굳었다. 사자비도 짐작했던 바를 훨씬 웃도는 내공을 느끼고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상대의 허점을 찾는 눈은 쉼 없었다. 놀란 마음은 그대로 두고, 매의 눈처럼 예리한 시선이 흑룡의 전신을 훑으며 빈틈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갔다.
기회를 포착한 사자비는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것을 축으로 앞으로 뻗어나가 흑룡의 목을 취할 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움직였다.
쉬익!
직선으로 뻗어가는 사자비의 신형은 늘어진 구름 같았다.
앞으로 뻗은 손, 마라겸을 잡은 손에서는 강렬한 냉기가 뻗어나오고, 냉기는 검신에 전달되어 마라겸을 하얗게 달궈진 부젓가락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데 흑룡의 반응이 생각보다 빨랐다. 섬전 같은 사자비의 접근을 예측했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도리어 마주 달려나오는 것이다. 예측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신속한 대응이었다.
한순간 반야밀공으로 만들어진 흑룡의 황금불이 사자비의 구름처럼 늘어져 유성이 되었다.
사자비는 마주 오며 던진 녀석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네놈은 그냥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느껴지는 녀석의 강렬한 기운.
사자비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마라겸이 불을 뿜어냈다.
콰쾅!
낮은 굉음이 두 번 울렸을 때 사자비는 이미 절벽을 밟고 돌아서서 흑룡을 찾고 있었다. 흑룡은 사자비가 달려나왔던 곳, 정확히 그곳의 나무 위에 있었다. 그 아래 사자비를 발견한 소요요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갑자기 사자비의 신형이 늘어진다고 느끼는 순간 건너편 절벽 아래에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흑룡이 어디론가 번개처럼 뻗어나간다고 생각되는 찰나 굉음이 터져 나왔으니 의문의 시선으로 사라진 그를 찾기 바빴다. 너무 빨라서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던 것이다. 그리고 흑룡을 찾았을 때,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 사자비가 있었다.
중인의 시선을 받은 사자비는 그들의 관심은 상관없는 태도로 흑룡만 노려보고 있었다.
[대단하군!]
사자비가 전음을 보내고, 흑룡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쉽지 않겠는걸. 해 놓은 말이 있어 싹싹 빌게 해주려고 했더니, 맹주님을 쓰러뜨린 실력이 요행이 아니었어.]
사자비가 실소를 흘렸다.
[빈다고 했나? 내가 너에게?]
[정확히 맹주님께라고 해야 옳겠지?]
[재밌는 놈이구나! 과연, 그 정도 실력이 있는지 한 번 볼까?]
말과 함께 사자비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흑룡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가지 충고할까?]
[……!]
[내 능력을 모두 끌어 낼만한 실력이 아니길 기도해라. 만약 네가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나도 봐주면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는 씨익 웃는 흑룡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무공을 펼치면 꽤 비참한 신세가 될 거다.]
사자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기대하지.]
조롱하듯 말하고는 흑룡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흑룡 또한 나무에서 내려와 사자비에게 걸어왔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십 장까지 좁혀졌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췄다. 사자비는 검을 늘어뜨린 상태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거만하게 뒷짐을 진 흑룡은 왼쪽 발을 약간 앞으로 내민 자세를 유지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자 무인들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천천히 물러나 공간을 터 주었다. 사파로서는 골칫거리인 흑룡이 쓰러지면 반가운 일이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사자비가 그의 힘을 빼주길 바랐던 것이다.
정파는 정파대로 흑룡의 실력을 자신했기 때문에 말리 이유가 없었다. 숨을 돌릴 여유까지 찾을 수 있어서 처음처럼 계곡으로 물러나는 행동을 취했다.
자연스럽게 젊은 후기들의 대결로 이어지자 치열했던 계곡은 잠시나마 달콤한 휴전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청년 때문에 계곡은 다시 긴장상태로 돌입했다.
숲을 뚫고 나타난 청년의 목소리는 흑룡을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고생 꽤나 할 줄 알았더니, 어린아이와 장난칠 여유도 있는 모양이구나, 흑룡!”
불쑥 끼어든 청년에게 시선이 몰렸다. 막 숲에서 걸어나온 그를 향해 누구냐는 물음과 대결을 방해한 행동을 질책하는 의미가 더해진 시선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복장과 곧이어 그를 따라온 듯 등장한 흑의 무리 때문에 무인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자, 잔월신교!?”
그들을 알아본 누군가가 탄성처럼 뱉어냈다.
지독한 마기를 숨김없이 뿜어내는 수백 명의 사내. 흑의에 새겨진 잔월신교의 문양. 그 두 가지만으로도 녀석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자비도 그들을 알아보고 표정을 굳혔다. 예상과 달리 흑룡과 진검승부를 내야 할 상황이라 내심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구경거리가 되는 입장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마냥 마교의 등장을 반길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건 계획에서 아주 멀리 벗어난 등장이었다. 다른 무리와 달리 잔월신교가 끼어들면 자신이 생각했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하필…….”
하지만 곤란은 사자비만의 심정이 아니었다. 사파도 마교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구파일방 또한 긴장했다. 흑룡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청년, 환몽영을 알아보고는 인상을 썼고, 마교의 무리가 도착했을 때는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무리에 섞인 전립 노인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난감한 표정까지 보였다.
2
“잔월신교의 고인께서 행차하셨으니 모두 경배하라!”
숲의 한 축을 둘러친 교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정사의 다툼은 이제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였다. 무리를 나누어 양편으로 갈라섰는데, 정파는 여전히 동혈을 지키듯 절벽 아래로 물러났고, 사파도 구파일방과 무림맹, 잔월신교의 돌연한 공격에 대비할 수 있게 진형을 갖추고 숲으로 물러나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잔월신교가 규보의 보물 때문에 구채구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문제는 누가 교도를 지휘하느냐는 것이었다.
교도들은 잔월신교의 고인이 행차했다고 했다. 잔월신교의 고인이라면 교주가 아닐까?
계곡 전체가 바짝 긴장하여 흑의 무리를 살폈다. 순간 흑의 무리가 양편으로 갈라서더니 작은 길을 만들고 그곳을 통하여 전립을 쓴 노인이 걸어나왔다. 그 뒤로 상반된 외모의 두 노인이 앞선 노인을 모시듯 따라나왔다. 키가 큰 노인과 난쟁이 노인이었다.
그들이 오천대마와 귀령대마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림에 발을 담근 자라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교주를 수행하는 노인이라면 팔대장로 밖에 없으므로.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숨죽이는데, 사자비 또한 신기한 듯 잔월신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팔대장로 중 하나인 강혈대마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교주인가?’
마교의 교주라기에 뿔이라도 달린 괴물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한 모습이었다. 소문에 기대어 만들어진 상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랄까!
그런데 지금 그런 하찮은 일을 따질 땐가!
‘이러다가 친황대까지 도착하면 가관이겠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엉뚱한 무리의 등장 때문에 계획의 대미가 어지럽게 뒤엉킨 셈이 된 것이다.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하긴, 흑룡 때문에 이미 조금 틀어진 상황이었지.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강공으로 밀어붙여 동혈을 차지해버리는 건데.’
너무 신중해서 탈이 된 터라 자책할 수밖에 없지만 이미 벌어진 일, 이젠 해결하는데 주력해야 했다. 후회 따위는 던져버리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동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세 무리가 모인 상황이라면 어느 한쪽이 쉽게 물러나지는 못할 테다. 불리해지더라도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 때문에 끝내 분쟁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 분명했다.
사자비는 동혈에 설치된 기관의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혼란한 틈을 타면 몰래 숨어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기관이었다. 기관지식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지만 박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해체할 수는 없었다. 혹시 폭약이 설치되어 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호신강기가 버텨줄까?
그 정도는 버틸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폭발 때문에 지반이 무너져서 동혈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였다.
어떤 고수도 산을 들어 올릴 수는 없다. 그 정도 힘을 부리는 내가 고수가 있다면 능히 천하제일, 고금제일이라 불릴 것이다. 사자비도 그만큼 자신의 무공을 자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저 거대한 절벽이 무너진다면 동혈 안에 있을 자신도 무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저앉는 암벽을 부술 수는 있지만, 부서진 파편과 바윗덩이도 결국 동혈의 일부이기 때문에 암벽과 함께 아래로 떨어진다. 완전히 녹여 없애 버리지 않는 한 납작한 오징어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동혈이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친황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맞춰 친황대가 도착하면 정사마를 전부 제압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모두 내 말 잘 들어라.]
사자비는 급히 주위에 있는 대원들에게 전음을 퍼뜨렸다.
우선 친황대의 도착을 늦춘 후 결과에 따라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명하십시오.]
[모두 흩어져 친황대를 찾아라. 그들을 만나면 다른 신호가 올라올 때까지 대기하라 전하고, 신호를 기다리게 해라. 결코 이곳에 오게 해서는 안 된다. 기회를 봐서 내가 신호를 보낼 테니.]
[혼자 남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전투에는 관심 없다. 결과만 지켜볼 생각이니, 그때까지 친황대가 오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어라.]
[존명!]
대답과 함께 대원 하나가 여분의 신호탄을 몰래 나뭇가지에 숨기고 사자비에게 사실을 알렸다. 나중에 그걸 사용해서 신호를 보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동료와 함께 무리를 조심스럽게 이탈했다.
“영감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오.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셨수?”
조용해진 장내에 톡 쏘아 올린 말투가 튀어나왔다. 계곡을 중심으로 자리를 지키던 무인들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똥 씹은 얼굴을 했다. 흑룡의 목소리였고, 수라천군에게 던진 빈정거림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감히, 수라천군에게 저따위 망발을 하다니!
정파와 사파가 잔뜩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흑룡 때문에 마교도 전체가 지독한 살기를 쏟아냈으니 말이다. 여차하면 휘몰아쳐서 모두 죽일 태세인데 의외로 수라천군은 만면미소를 지었다.
“방자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그 말이 다시 한 번 무인들을 놀라게 했다.
여전하다?
그 의미를 되새긴 것이다.
흑룡과 수라천군이 아는 사이였던가!
구파일방만 아는 사실이라 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아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흑룡과 수라천군이 언제, 또 무슨 이유로 만났을까?
마교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그런 의문에 사로잡힐 때 난쟁이 같은 노인이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거친 목소리에 내공이 실려 계곡이 쩌렁쩌렁 울렸다.
“잔월신교 제삼장로 오천대마라 한다. 이곳은 본교가 접수할 터이니 모두 물러가라.”
땅딸막한 몸에 몸통만큼 큰 철퇴를 등에 걸고 나와서 소리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가소로웠지만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잔월신교의 팔대장로라면 정파의 삼황오제, 사파의 십존과 버금간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드러나지 않은 단체라 실력을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떠도는 풍문만으로도 충분히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외침 뒤로 찾아오는 침묵이 묘하게 산만한 듯했다. 그래서인가, 대부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움직임 또한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마교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모습이지만 물러서기도 싫은, 그래서 고민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 구파일방이 나선다면 호각을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평소의 구파일방이 아니라는 것. 사파와의 교전으로 이미 지친 상태였다. 숫자도 마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결정적으로 마교는 수라천군과 팔대장로가 직접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버티고 서서 지독한 마기를 풍기는 교도들은 잔월신교에서도 가려 뽑은 상층부 고수일 가능성이 컸다. 숫자를 믿고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당하는 건 오히려 이쪽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결국 하나. 은연중 모두 비슷한 생각하고 있었다.
정사가 힘을 합친다면…….
그러나 과연 성질이 전혀 다른 두 부류가 힘을 합할 수 있을까? 어차피 동혈 하나를 차지하고자 벌어진 일인데?
사자비는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명분도 없고, 각자 목적도 다르며, 동혈을 두 개로 나눠 가질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떡해서든 빨리 이 상황이 정리되길 바랐다. 그래야 결단을 내릴 것이 아닌가.
‘우선 몸부터 빼야겠다.’
뒤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니 사파를 위해 굳이 그가 활약할 이유는 없었다.
사자비는 흑룡을 살폈다. 눈치를 보며 슬며시 빠질 생각인데, 다행히 마교에서 멀끔하게 생긴 청년이 걸어나와 흑룡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흑룡!”
준수한 외모에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청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를 향해 흑룡은 헤픈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와 다른 어색한 미소로 보아 꽤 난감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명학!”
청년, 공명학은 비웃음을 흘린 후 시선으로 사자비를 가리켰다.
“허풍이 대단해서 엄청난 거물만 상대할 줄 알았더니, 저런 애송이나 상대하고 있었나?”
잠시 인상을 찡그린 흑룡이 오히려 비웃었다.
“너보단 강하던걸?”
공명학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지만 그를 마주한 흑룡에게서는 위축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맹주님을 한 수에 쓰러뜨린 실력이라면 너보다는 몇 수 위가 아닐까?”
“맹주를 한 수에?”
공명학은 고개를 돌려 사자비를 보았다. 시선에는 불쾌한 빛이 사라지고 흥미가 담겼다. 그러고 보니 복면을 쓴 자에게 맹주가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였다.
그게 저런 애송이었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환몽영이 공명학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저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습이었죠.”
‘과연!’
그러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맹주 정도의 고수가 하수에게 당할 리 만무하다. 실력 차이가 큰 하수라면 설사 생각지 못한 기습을 받더라도 맹주는 당할 위인이 아니다. 공명학은 그걸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얼마나 빠르고 강한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흑룡의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일에 괜한 힘 낭비하지 마라. 저자를 대신해 내가 상대해 주마.”
흑룡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왜 너와 무공을 겨뤄야 하나?”
“팔 년 전 일을 벌써 잊었다고 말하는 건가!”
“물론, 기억은 하는데……. 복수니 뭐니 했던 건 너 혼자의 다짐이었고, 난 싸우겠다고 약속한 기억이 없는걸.”
도발하듯 어깨를 으쓱하는 흑룡을 향해 공명학이 조소를 던졌다.
“헛소리는 여전하구나!”
그리고는 흑룡의 생각은 상관없다는 듯 폭발적인 기운을 끌어올렸다.
흑룡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거 왜 이래. 싸우기 싫다는 소리 못 들었어?”
공명학에게는 통하지 않을 소리였다. 점점 전의를 불사르는 공명학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다급해진 흑룡은 그를 버려두고 사자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의 상대는 사자비인 것이다. 하지만 사자비는 이미 흑룡과 조금씩 거리를 벌리는 중이었다. 그걸 확인한 흑룡이 소리쳤다.
“이봐 어딜 가는 거냐? 대결은 너와 나다.”
이번에는 사자비가 상관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서 흑룡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내가 졌다.”
“뭐?”
“패배를 시인했으니 대결은 이제 끝이라는 뜻이다. 급한 불이나 끄시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야.”
사자비는 억지 부리지 말라는 듯, 혹은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한 번 보여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맹주에게도 진심으로 사과한다. 됐나?”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파의 무리에 섞여버렸다. 몸을 뺄 절호의 기회가 생겼으니 놓치는 건 바보나 할 짓, 불행히도 사자비는 바보가 아니었다.
흑룡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뭐 이런 경우가!”
“넌 날 빠져나갈 수 없다.”
공명학이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그렇게 말했다.
흑룡은 한숨을 쏟아냈다. 수라천군 보다 그 제자들이 더욱 껄끄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팔 년 전, 그가 수라천군의 첫째 제자를 죽였을 때 그 사제들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그 눈빛만 떠오르면 소름이 돋고는 했었다. 무서움보다는 죄책감이 원인이었다.
‘피하고 싶은데…….’
핑계거리가 사라졌으니 피할 이유가 없었다. 흑룡은 사자비를 원망하듯 노려보았다.
“너!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
대답은 공명학이 대신했다.
“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진심으로 상대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흑룡은 눈빛을 달리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안 봐준다. 나중에 바닥에 드러눕고서 야속하다고 날 원망하지 마라. 네가 자초한 일이니.”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
흑룡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당연히 실력이지.”
코웃음으로 대답한 공명학은 몇 걸음 자리를 옮겨 흑룡과 마주 섰다. 흑룡 또한 비슷한 행동으로 공명학을 마주 보았다. 정식으로 실력을 겨루는 비무 형태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때문에 무인들이 잔월신교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대화와 분위기로 공명학의 신분을 짐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구파일방 최고의 후기지수와 잔월신교 최고의 기재 간에 대결이었다. 물론, 훼방꾼이 있었다. 오천대마였다.
“흑룡을 제외한 모두 이곳을 떠나라!”
그의 외침이 잠시 어수선해졌던 분위기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무인들은 다시 잔월신교를 의식했다.
“그럴 필요 없네.”
놀랍게도 공명학이 오천대마를 말렸다.
오천대마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자!”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난 소문을 무서워하는 졸장부가 아니라네.”
내심을 들킨 때문인지 오천대마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공명학의 제안이라도 이번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강호에서 소문만큼 무서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수라천군의 제자는 결코 패배를 몰라야 한다. 적어도 소문은 그렇게 나야 한다. 오늘 이 자리, 수백수천 개의 보는 눈이 있는 이곳에서 공명학이 쓰러진다면 사방팔방으로 소문이 돌 것이고, 그건 잔월신교 개교 이래 가장 큰 오점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공자, 어차피 모두 흩어버려야 할 녀석들입니다. 굳이 공자의 무공을 이들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학이의 뜻대로 놔두시게.”
고요한 울림은 수라천군의 목소리였다. 놀란 오천대마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수라천군은 뒷짐을 진 채 오천대마에게 말을 이었다.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게.”
“교주님!”
“본좌의 제자일세. 한 번 믿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오천대마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공명학의 패배를 확신했던 수라천군이 아닌가.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그때 수라천군이 오천대마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공명학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라면 잔월신교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으리라 믿는다. 마음껏 기량을 발휘해 보아라.”
공명학이 공손히 포권하며 감사의 표시를 보였다.
이번에는 흑룡에게 수라천군이 말했다.
“고생 좀 할 걸세.”
“고생이야 항상 달고 다니는 팔자고. 그보다 내가 이기면 영감을 따르는 광신도들이나 데리고 여기를 떠나슈.”
“철없는 아이의 발상이로군.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어찌 결부시키려는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제자를 보낸 것으로 보아 날 상당히 과소평가한 것 같은데, 오늘 크게 사고 한 번 쳐볼 생각이오. 단단히 각오하시오.”
“협박인가?”
“피하고 싶지만, 피할 길을 모두 막아놨으니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어차피 어느 쪽도 계곡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 물리쳐야지.”
“그럴 만한 자신이 있나보군. 나를 상대로?”
“조만간 알게 될 거요.”
말을 끝으로 흑룡이 두 주먹을 쥐었다. 순간 화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손에서 불길이 일더니 이내 전신을 덮었다.
공명학의 아미가 구겨졌다. 흑룡의 모습이 그의 사형을 쓰러뜨릴 때와 흡사했던 것이다. 자신을 도발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라면 먹혀들었다.
‘피하려고 그렇게 애쓰더니!’
정작 비무를 결심을 하자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오히려 도발을 해오며 격한 비무를 요구하는 듯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공명학도 지지 않고 힘을 주었다. 그의 몸에서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기운이 솟구쳤다.
제2장 서서히 드러나는 흑막
1
새빨간 혈의를 입은 중년사내가 그만큼이나 붉은 옷을 입은 노인에게 다가와 부복했다.
“왕림하셨느냐?”
노인이 먼저 입을 벌렸다. 중년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새벽에 초입을 통과하셨습니다. 지금 북쪽으로 이동 중이십니다.”
혈의 노인, 흑로대군은 덮어쓴 혈의 사이로 미미한 미소를 드러냈다. 그는 주위의 다른 혈의인들에게 물었다.
“주술은?”
혈의인 중 하나가 대답했다.
“곧 완성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시작은 정확히 반 시진 후로 하지.”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혈의인이 사라지고 곧이어 하늘로 푸른 불빛 하나가 솟구쳤다. 불빛은 새끼 치는 듯 시간 차이를 두고 구채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솟아나는 불빛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흑로대군이 이번에는 다른 혈의인에게 질문했다.
“흑시(黑屍)의 배치는 어떠한가?”
“지리에 맞게 적절히 배치해 놨습니다. 주술이 발동되면 지시에 따라 맡은 구역을 정리하고 약속 장소로 모일 겁니다.”
“천령시(天靈屍)는 아껴 쓰도록.”
“알겠습니다.”
흑로대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규보의 무덤을 찾은 녀석들이 있느냐?”
“아직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쉽군. 그들이 찾아준다면 고생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일을 마친 후에 천천히 찾아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우리만 남게 될 테니까요.”
흑로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흑시와 천령시를 깨워라.”
그러자 혈의인들이 주위에 나열된 오십여 개의 관을 열었다. 하나같이 백의를 입은 까만 시체가 누워있는 관이었다.
☆ ☆ ☆
“저, 저게 어찌 된 일이지?”
모두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며 기막혀했다.
퍽!
공명학의 주먹이 흑룡의 복부를 때리고 연이어 안면과 가슴, 어깨와 턱을 가격했다. 일권 일권마다 엄청난 기공이 휘몰아쳐서 저 중 한 대라도 맞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은 위력이 담긴 듯했다. 그 증거로 흑룡이 상당한 타격을 받은 모습으로 맞을 때마다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급기야 마지막으로 뻗어낸 공명학의 장력을 얻어맞고는 숲에 처박혀 버렸다.
나무 몇 개를 부러뜨리고 날아간 흑룡은 사람 열 명 굵기는 족히 되는 고목에 부딪혀서야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살아 있을까요?”
어느새 사자비에게 다가온 소요요의 물음이었다.
참 끈질기게 달라붙는구나, 하는 눈빛을 보낸 사자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럴 것 같군.”
“그런 타격을 몇 번이나 맞았는데요? 호신강기가 절정에 이르지 않고서야, 맨몸으로 그런 공격을 받아낼 수 있다면…….”
그녀는 말을 멈추고 경악한 눈빛을 드러냈다.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튀어나와라, 흑룡. 그 정도로 쓰러질 네가 아님을 안다.”
공명학의 낮은 외침에 대답하려는 것처럼 흑룡이 벌떡 일어서며 숲에서 튀어나왔다. 멀쩡해 보이는 그를 향해 모두 감탄을 쏟아냈다.
“저 정도면 소림의 전설이라는 금강불괴라고 해야겠군요.”
“호신강기가 정점에 올랐다고 해도 되겠소.”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힘입은 것 같았다.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흑룡이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얼마나 성장했나 보려고 몇 대 맞아 주었더니, 고작 그 정도? 간지럽다 못해 시원한걸.”
공명학은 냉철한 얼굴로 비소를 흘렸다.
“다음에도 그런 소리가 나올지 궁금하군.”
동시에 그의 몸이 검푸르게 빛났다. 내공에 의한 빛이나 호신강기의 유형이라기보다는 그냥 뿜어지는 빛, 정말 몸이 빛을 발하는 그런 형태 같았다. 그리고 중얼거림이 있었다.
공명학은 뭐라고 속삭이듯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빛과 중얼거림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빛은 더욱 밝아지고 곧이어 뇌전을 동반했다.
전체적으로 괴이한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공을 보며 무인들이 신기하다는 듯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흑룡은 달랐다.
“그런 무공 같지도 않은 희괴한 걸 뽐내니 마교라 불리지.”
가소롭다는 듯 그대로 공명학에게 돌진하는 것이다.
“주술 따위로 날 상대할 수는 없다.”
자신감 충만, 용기백배. 그리고 뻗어나가는 황금기공의 주먹!
퍽-!
“어라!”
공명학에게 지척까지 접근했던 흑룡의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이번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주먹에 간단히 턱을 내준 것이다.
흑룡의 신형은 가랑잎처럼 비틀거렸다. 그 위로 공명학의 오른발 뒤꿈치가 무겁게 올려졌다.
퍽!
뒤꿈치는 정확히 흑룡의 오른쪽 어깨를 찍었다. 둔탁한 소리 뒤로 충격을 받은 흑룡의 무릎이 땅에 꿇려지고, 이어지는 공명학의 연속 공격이 있었다.
퍽퍽퍽!
타격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개 맞듯 두들겨 맞은 흑룡의 모습이 소리의 결과를 말해주었다. 종내에는 처음처럼 발길질을 당해 다시 절벽에 처박힌 것이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절벽에 튕겨 나온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한 차례 머리를 흔들었다. 꽤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왜, 왜 이러지?”
흑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약하고, 내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짧은 결론을 내린 공명학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땅을 박차고 허공을 배회하는 모습이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데, 정점까지 올랐을 때 그의 품에서 얇고 가는 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순간 검신에 새겨진 문양이 몸을 감싼 빛과 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빛을 파생시켰다.
공명학은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 그 상태로 몸을 돌려 양 발을 움직였다. 하늘을 밀어내는 듯 뻗은 다리가 몸에 반동을 주고, 거기에 힘입어 쏜 활처럼 흑룡에게 뻗어나갔다.
빛살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으스스한 기운을 가진 빛이 그림자처럼 늘어지는 모습은 따스한 햇볕보다는, 악마의 그림자라 불려야 했다.
“너무 얕잡아 보는구나!”
흑룡과 공명학의 대결을 바라보던 수라천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오천대마가 대답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요령대법(妖靈大法)이 만들어낸 빛은 상대의 힘을 순간적으로 흩어버리지만, 상대가 흑룡이라면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의문도 품었다.
“하나, 요령대법을 펼치는 분은 공자님이십니다. 대법이 쉽게 깨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지금 흑룡의 실력이 진짜라고 생각하는가!”
“숨기는 듯 보이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참 잘못 보았다네. 학이도 알고 있을 게야. 지금 흑룡의 상태가 예전보다 못하다는 것을!”
때마침 하늘로 비산했던 공명학이 흑룡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수라천군이 탄성처럼 말했다.
“승부는 지금부터일세.”
과연 흑룡의 몸이 약간 움츠러들더니 이내 힘주어 공명학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크아아앙!”
순간 귀를 찢는 일성이 흑룡의 입을 통해 쏟아져나왔다. 흡사, 호랑이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대부분 무인이 소리가 만들어낸 공기의 떨림에 영향을 받아 몸을 떨 정도였다. 내공이 흩어지는 경험까지 맛보는데, 사자비 정도의 고수조차도 순간적으로 내공의 흐름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해일처럼 공기를 삼키듯 밀려드는 소리와 정면으로 부딪힌 공명학은 어떨까!
결과는 놀라웠다. 공명학을 감쌌던 빛이 흑룡의 외침에 부딪히자 분해되듯 종적을 감춰버렸다. 얇은 검만 흑룡을 향해 뻗어나갈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도중에 회수되었다. 놀란 공명학이 신형을 돌려 물러났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흑룡의 목소리는 움직이는 신형 속에서 귀성처럼 흘러나왔다.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렇게 느껴진 것인데,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다. 공명학도 무슨 소리를 들은 듯했지만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눈 한가득 흑룡의 모습이 확대는 현실에 대응하기에도 벅찬 것이다.
‘이, 이렇게 빨랐나?’
팔 년 전, 그의 사형과 흑룡의 비무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당시 흑룡이 두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를 가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충분히 흑룡의 속도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 몸소 경험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난다는 걸 공명학은 오늘 처음 실감했다. 정면으로 달려오는데도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급히 손을 놀려 아래에서 위로 검신을 빛냈다. 그런데, 거기에 작렬했어야 할 흑룡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피했는지 검이 지나간 자리 앞으로 다가와서 주먹을 뻗고 있었다.
상대와 거리가 멀수록 장병이 유리하고, 짧을수록 단병이 유리하다는 것은 모든 무인들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접근전에서 가장 유리한 무기는 바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권각이었다.
공명학은 찰나지간 자신의 애검을 한 번 휘둘러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흑룡이 검을 휘둘러도 닿지 않을 거리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짧은 고민은 즉시 행동으로 이어졌다. 공명학은 떨친 검을 놓고 수도의 기법으로 흑룡의 정수리를 향해 아래로 갈랐다. 손을 떠난 검은 섬전처럼 날아가 절벽에 꽂히는데, 동시에 흑룡의 주먹이 공명학의 턱에 닿고 있었다.
덜컥!
턱이 흔들리며 그 여파로 신형까지 흔들렸다. 공명학은 단순한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흑룡을 노렸던 손을 들어 헛되이 허공만 갈랐다.
쿵!
흑룡의 무릎이 공명학의 복부를 강하게 눌렀다. 그 반동을 이용하여 약간 거리를 벌리더니, 이번에는 몸을 회전시키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한 번의 회전에 한 번의 가격. 순식간에 관자놀이에 세 번의 타격을 받은 공명학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대는 거리를 벌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거머리처럼 바짝 붙어서 연이어 공격을 퍼붓는데, 잠깐 사이에 공명학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피가 터져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었다. 그렇게 맞는데도 공명학은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프지 않다는 말은 그의 얼굴을 보면, 옷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몸을 보면 결코 하지 못할 텐데, 오히려 입가의 미소가 잘빠진 수묵화처럼 보이는 건 왠가.
흑룡도 그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변태인가?’
맞으면서 웃다니…….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동작이 잠시 느려지고, 때리던 타격의 힘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해와 달리 공명학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 쓰러뜨리는 보람이 있겠지.
그는 흑룡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부딪히는 몸으로, 마음으로, 진정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수라천군처럼 흑룡을 괴물로 포장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녀석을 쓰러뜨리면 평생 얻기 힘든 쾌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런 대단한 상대가 흑룡이었다.
맞으면서 더 분명해졌다. 때리는 힘이 뼛속을 울린다. 결코 강하게만 때리는 하찮은 솜씨가 아니었다. 진정한 고수에게서만 느껴지는, 때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천부적인 싸움꾼의 실력이 살에 닿는 녀석의 주먹과 발끝에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맞으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어 비기를 드러낼 기회조차 없겠다 판단하고 즉시 손을 움직였다. 순간 아직도 그의 전신을 매질하던 흑룡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공명학이 그의 두 팔을 잽싸게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흑룡의 인상이 구겨졌다. 손을 잡혔다는 불쾌감보다, 아직도 웃고 있는 공명학의 얼굴이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좋으면 하루 온종일 때려줄 수 있다. 이 손 놔.”
공명학이 픽 웃고는 흑룡과 마찬가지로 몸에 힘을 주고 바로 섰다.
“대마하강림술(大魔哧降臨術)!”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뭐라 짧게 중얼거렸다.
“뭐?”
흑룡이 생소해서 의문을 품었지만 공명학은 그를 밀친 후, 몇 걸음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행동을 했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팔을 긁어낸 것이다.
스윽!
길게 상처 입은 왼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명학은 그렇게 바닥이 고일 정도로 충분히 피를 흘린 후에 합장하듯 두 손을 맞대고 눈을 감았다. 뒤이어 괴이쩍은 중얼거림이 또렷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근청북방흑살신급래정호호아신형수천입천수지입지(謹請北方黑殺神急來正號好護我身形隨天入天隨地入地)…….”
갑자기 사방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흑룡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주먹을 뻗었다. 공명학이 이상한 주술을 펼친다고 판단해서 발동이 되기 전에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뻗은 주먹을 급히 회수하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주먹에 감긴 공력이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물음에 대한 답은 잔월신교에서 튀어나왔다. 무리에서 귀령대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경악성처럼 입을 연 것이다.
“흑살강림대법(黑殺降臨大法)!”
정확히 흑살강림대법 중에서 대마하강림술이었다.
수라천군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물음과 그 뒤로 따라오는 시선이 두 장로에게 향했다.
교주의 시선을 받은 오천대마와 귀령대마는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흑살강림대법은 오래전 지옥교의 총단을 공격해서 취한 전리품이었다. 당시 수많은 지옥교의 무공서적과 주술서를 얻을 수 있었는데, 흑살강림대법도 그중 하나였으며 금지된 무공으로 정해져 있었다.
잔월신교도 세월의 변화에 발맞춰 무림의 성격이 짙어진 종교인만큼 위험한 무공이 넘쳤고, 그것을 익히고자 하는 교도들 또한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흑살강림대법이 매력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연마를 금지했던 이유는 일회용 무공이라는 점에 기인하고 있었다. 익힌 후에 그 결과로 강해지는 여타 무공과 달리, 한 번 사용 후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흑살신, 즉 지옥의 마신을 불러 자신의 몸속에서 강림시키고, 그 힘을 사용 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니……. 그런 부분은 다른 주술의 기법과 닮아 있었다. 문제는 자신의 몸에 불러들인 흑살신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칫 마성에 빠져 친우와 동료를 알아보지 못하는 살인귀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했고, 한 번 불러들인 흑살신이 좀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흑살신에게 피에 담긴 인간의 영기를 대가로 빼앗기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은 마신이 떠날 때까지 기운을 빼앗겨 끝내 말라죽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금제 된 무공은 금영무고(金永武庫)의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금영무고는 장로들이 돌아가면 책임을 졌으니, 수라천군의 시선은 흑살강림대법의 유출에 대한 질책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저, 저희는 꿈에도 금영의 지하고가 열렸을 줄 몰랐습니다.”
귀령대마가 변명처럼 읊조렸다.
수라천군의 눈빛이 무섭게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대들에 대한 책임은 본교로 복귀한 후에 묻겠네. 그보다!”
그는 다시 공명학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쩌자고 금지된 무공에 익힌 것이냐.’
강한 힘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한계를 노력으로 극복했을 했을 때만 해소된다. 생사를 넘나드는 수련 끝에 지금의 수준에 올라선 수라천군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능소능대(能小能大). 얻은 힘을 제대로 제어하고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마음 같아서는 뛰쳐나가 제자를 말리고 싶었으나 끼어들 여지가 없어 애석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혹시, 공명학이 흑살신을 제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할 정도로 위험한 무공이라 금제를 걸었다. 자연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제자라면, 그리고 평소 냉철했던 공명학이라면 무리수를 두지 않으리란 희망 같은 바람이 가슴에 담겼다. 그 순간 사방에서 경탄성이 나왔다.
수라천군이 소리에 따라 본능적으로 공명학을 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드러났다.
“극복했던가!”
공명학이 쏟아낸 피에서 검푸른 연기가 피어나더니 주문에 따라 공명학을 덮쳤다. 그 후로 공명학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람형상의 검푸른 연기만 제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광채. 아마도 눈이리라!
연기가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입이라 짐작되는 부분에서 공명학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진정한 힘이란 이것이다.”
목소리에 형상이 있다면 공명학의 것은 등불에 흔들리는 촛불이라고 말할 것이다. 힘을 제어하기 어려운 듯 힘겨워하는 느낌이 역력해서 듣는 사람이 몸에 힘을 줄 지경이었다.
수라천군은 몸에 힘을 주지 않았다. 그는 놀란 듯 제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주술에 대한 재능이 남다른 줄은 알았지만, 쉽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흑살신을 제어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과연, 흑룡에게 통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흑룡을 주시했다. 녀석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흑룡! 저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찮은 술법이 아니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 봐라! 아직도 네가 많은 부분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라천군의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흑룡은 몸에 잔뜩 힘을 주다가 귀신같은 공명학의 모습을 몇 번이나 확인하더니 편한 자세를 취했다. 대부분 공명학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데, 그는 긴장을 풀고 수라천군을 마주보는 여우까지 부렸다.
흑룡은 수라천군의 시선을 비웃듯 바라본 뒤 공명학에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는 대꾸하듯 말했다.
“호오 그래? 인간이 인간의 굴레를 벗어버리면 인간이 아니지. 한 가지 알려줄까? 아류는 정통을 이길 수 없다. 진짜 입신의 경지에 이른 자와, 그렇게 보이는 눈속임 정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멀고 크다. 그걸 오늘 내가 가르쳐주지.”
그러면서 허공에 대고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더니 흑룡의 손으로 날아와 잡혔다.
흑룡은 거친 그것을 한 손으로 둥글게 말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끝을 잡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돌리면서도 말아 쥔 손을 끝에서 끝으로 천천히 움직여 밀어내는데, 손바닥에 대패라도 달린 것처럼 나뭇가지가 반듯하게 깎여지고 있었다. 종내에는 손안에서 회전한 나뭇가지가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진 한 개의 장봉으로 변해있었다.
2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흑룡의 모습이 절벽 속으로 사라졌다. 신묘한 기술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공명학의 손에 잡혀 절벽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밀어내는 공명학의 완력이 너무 강해서, 또 속도가 상상을 초월해서 벽에 부딪히는 순간 절벽을 부수고 그 속에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계곡에 모였던 무인들은 한참 전부터 넋을 놓았다. 이젠 감탄도 하지 않았다.
‘저게 인간의 힘인가!’
모든 표정에 그런 의미가 짙게 깔려 있었다.
물론, 인간의 무공이기는 하다. 둘 다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인들이 상상 속에서나 그리던 그런 형태였다. 이런 광경, 절정의 고수들이 펼치는 이런 대결은 좀체 구경하기 힘든 게 사실. 그런데 오늘, 이 구채구에서 연이어 보고 있지 않은가. 흑룡과 상마쌍괴의 대결에 이은 흑룡과 봉황의 대결, 놀랍게도 상마쌍괴를 상대했던 흑룡의 실력은 진짜가 아님이 지금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점은 수라천군의 제자가 상마쌍괴 보다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 다 서른을 약간 넘긴 것으로 알려졌으니, 범인으로 생각할 때는 불가능한 발전이요, 성취였다.
그들의 행동, 손짓, 심지어는 돌아가는 시선 하나라도 놓치기 싫은 듯 모두 집중해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흑룡과 공명학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점차 시간이 흘러 내공 대결로 들어가자 입을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만 보냈다.
두 사람 다 젊어서 그런지 화려하고 파괴력 있는 공방 위주로 대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확실한 눈요깃거리였다. 누가 더 화려한 무위를 뽐내나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두두두두!
부서진 절벽 속으로 파묻힌 흑룡이 급히 무너진 바위를 걷어내며 아직도 그의 얼굴을 절벽 쪽으로 밀어 누르는 공명학의 손을 잡아당겼다. 정확히는 손을 감싼 연기였다. 연기는 흑룡의 주먹과 발이 닿을 때마다 괴성을 질러댔다. 이번에도 흑룡의 손이 닿자 기괴한 비명을 자아내며 공명학을 둘러싼 연기 전체가 뒤틀렸다.
꾸에에에엑!
소름 돋는 소리가 처음부터 거슬렸던 것 같다. 흑룡의 짜증 섞인 외침이 있었다.
“이제 좀 닥쳐!”
외침 뒤로 공명학을 당기고 자신은 그 힘을 이용하여 방향을 바꾸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공명학이 흑룡이 있던 자리에 부딪혔다. 흑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의 가슴에 몇 번의 장력과 권을 날리고 거리를 벌렸다.
반 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절벽 일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특히, 절벽이 가관이었다. 일부가 무너지고 부서져서, 저러다가 동혈에 설치된 기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 흑룡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너진 절벽을 뚫고 걸어나오는 공명학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대단한걸!’
공명학은 전혀 타격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도대체 갑옷처럼 몸을 감싼 저 연기의 정체가 뭐냐!’
때려도 때려도 오히려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다 갈수록 녀석의 힘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들겨 맞았으면 한풀 꺾일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흑룡의 표정이 구겨졌다.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라천군에게서 느꼈던 단단함.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부동심. 상대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쳇!”
아류가 어쩌고 정통이 어쩌고 운운해놨는데…….
“거참, 이렇게 고전해서야 체면이 서질 않아서……, 낯부끄럽구만!”
하지만 그것도 끝이라고 다짐했다. 그가 진짜 상대해야 할 사람은 수라천군이었다. 공명학과의 대결 때문에 잠시 잊었지만, 이번 일은 절벽을 확보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마교가 곱게 물러나지 않는 이상 결국,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렇게 힘을 빼다가는 정작 마교와의 싸움에서 낭패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기든 지든 상처만 남게 될 것이다. 사파도, 잔월신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순간 그가 동혈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한 표정인데, 슬며시 짓는 미소로 보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이제 끝내자.”
그는 손을 들어 공명학에게 이리오라고 까딱거렸다. 그러자 연기 속에서 음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으으으!”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았지만, 흑룡은 경고음으로 들었다. 연기 속에서 빛나는 눈빛이 변하는 것도 보았다. 붉은빛이 푸르게 변하더니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다.
흑룡의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연기에서 풍기는 살기도 달라진 것 같았다. 연기에서 또 다른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오는 모습도 전과 달랐다.
“이, 이봐!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야?”
자신감과 달리 왠지 위축됨을 느낀 흑룡이 다급히 물었지만 공명학의 반응은 여전했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데, 가까워질수록 살을 찌르는 지독한 독기가 흑룡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흑룡의 귀로 귀령대마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교주님, 공자께서 흑살귀를 제어하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수라천군은 대답 없이 굳은 얼굴만 하고 있었다.
흑룡은 수라천군을 보았다. 저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거지?
“영감!”
그를 부르고 뭐라 말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연기가 포효하며 달려들었으므로.
“크아앙!”
놀랍게도 포효는 주인을 따라오지 못했다. 소리가 퍼지기도 전에 연기가 번개처럼 흑룡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소리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력이라니. 흑룡은 깜짝 놀라서 뛰어올랐다. 상대의 공격에 반응한 동작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움직임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판단이었다. 연기의 손이 흑룡이 있던 자리를 쓸며 훑어냈는데, 거기에서 뻗어 나오는 검은 연기가 숲을 덮쳤던 것이다.
콰콰쾅!
굉음 뒤로 숲이 일그러졌다. 힘에 못이긴 나무와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고 그곳에서 대결을 관전하던 무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본 흑룡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족히 수십 명은 죽은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남 걱정을 할 땐가!
표적을 잃은 손, 연기의 손이 진로를 바꿔 흑룡을 향해 뻗어왔다.
흑룡은 다시 본능에 의거하여 움직였다. 궁신탄영의 수법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 순간 하늘을 뒤덮을 거대한 회오리가 솟구쳤다. 흑룡의 움직임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공기를 찢으며 하늘을 뒤흔드는 검은 회오리에 휘말렸을 것이었다.
진땀이 뻘뻘 나왔지만 그마저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연기는 공격을 쉬지 않았다. 거칠고 투박해서 저잣거리의 주먹질 같은 움직일 뿐이었지만, 그 속도와 힘이 대단해서 흑룡은 몇 번이나 회피동작만 보였다. 그런 중에도 연기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기세가 사방으로 뻗어 나와 주변을 파괴했다.
콰쾅-!
흑룡이 피한 자리를 지나간 장력이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무인들을 덮쳤다. 피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으로 몇 명의 무인들이 잔인하게 죽어버렸다. 벌써 네 번째 희생자 무리였다.
그제야 흑룡이 이를 갈았다.
“놈!”
벽력같이 소리치고 이번에는 상대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마주 일권을 뻗었다. 그가 피하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구파일방의 도사와 승려도 일부 있어서 흑룡의 가슴에 숨겨졌던 분노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얼마나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냐!”
주먹과 주먹, 주먹을 감싼 연기와 주먹을 감싼 황금강기가 부딪혔다.
쿵!
흑룡이 뒤로 물러서고, 연기도 신형을 뒤틀며 몇 걸음 물러났다. 주먹과 주먹이 정통으로 마주친 것이다.
흑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연기 또한 마찬가지. 순간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거대한 소리가 십여 번 이어졌다. 흑룡과 연기에 휩싸인 공명학이 뒤엉켜 공방을 주고받는 소리였다.
“어마어마하군!”
용과 봉황의 대결을 지켜보던 사자비의 중얼거림이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요요가 대꾸했다.
“정말, 저런 건 처음 봐요. 수많은 무림괴사를 들어봤지만, 저런 무공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인간이 어떻게 저런 파괴력을 낼 수 있죠?”
사자비는 코웃음을 쳤다. 소요요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잘못 말했나요?”
“대상이 잘못됐소.”
“네?”
“내가 대단하다는 건 괴상한 주술 따위로 힘을 빌린 녀석이 아니오.”
“그럼, 흑룡?”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흑룡이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후기지수 중에 저런 고수를 찾으라면 무림 전체를 뒤져도 없으리라 확신이 들 정도였다. 아니, 후기를 포함한 전 중원의 고수를 뒤져도 저만한 고수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그런 흑룡도 지금 힘겨워하고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연방 물러서는데, 표정에서 긴장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한 대라도 맞았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상대의 주먹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니 그럴 만도 했다.
사자비는 대답 대신 손바닥을 펴서 그녀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어느새 검게 그을려 있었다. 검은색 속에 숨겨진 피부가 일그러진 것으로 보아 화상을 입었음이 분명했다.
“언제…….”
“저 녀석이 쏟아낸 장력의 파편이 이쪽으로 날아오기에 잡아냈지.”
“맨손으로요?”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요요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왜 잡으셨죠?”
피해도 되는 것이다. 물론, 사자비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내공의 그것과는 느낌이 달라서 어떤 힘이 실려 있는지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검은 장력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연기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 상대의 내공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신강기로 손을 보호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알만하지.”
“당연하지 않나요?”
사자비는 조소를 머금었다.
“내 호신강기가 좀 대단하잖소. 웬만해서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지.”
어검술을 펼치는 사자비를 보았으니 수긍할 수밖에 없는 소요요였다. 하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만큼 수라천군의 제자가 강하다는 것 아닌가요?”
“지금 흑룡이 저 괴상한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게 안 보이시오. 그것도 상처하나 남기지 않고?”
“그러고 보니…….”
“겉으로 보면 밀리는 것 같지만, 기회를 찾고 있소.”
“기회요?”
“폭발할 기회지.”
☆ ☆ ☆
쉭! 쉭!
바람 소리가 귀를 멍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설지하는 부대의 명령에 의해 은밀히 달리면서도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친황대를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아라.]
갑자기 귓가로 감겨드는 전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달리는 중에도 앞서가는 홍면노를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속도가 늦춰지던 것을 전음으로 일깨워주려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속력을 맞추어 홍면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홍면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 옆에 있는 흑봉천인도 마찬가지였다.
설지하는 다시 혼란해졌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갈천 대주의 발언도 믿기지 않았지만, 나찰귀로의 행동은 더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저주했던 총감이었지만, 훈련이 끝난 후부터는 진심으로 따르지 않았던가. 그간 쌓인 정도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한순간에 그의 숙청을 돕고자 나설 줄을 몰랐다. 특히, 광혈귀행의 결정은 충격이었다. 아직도 광기 섞인 행동 때문에 나찰귀로에서는 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총감의 말이라면 군소리 없이 따랐던 그가 아닌가. 한데, 그도 고민 한 번 없이 이번 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홍면노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총감의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모두 같은 결정을 내렸다. 거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방관자 입장으로 작전에 빠지리라 생각했던 설지하로서는 당연한 혼란이었다.
‘그리고 난 왜 거절하지 않고 따라가는 거지?’
아마도 군중심리일 것이다. 어쩌면 아직 발견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마음을 담았을 수도 있다.
[정말 총감께서 반역을 했다고 생각하나요?]
달리는 중에 홍면노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홍면노가 그녀를 힐끔 보았다. 여전히 그는 심중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글쎄! 누가 반역을 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친황대 전체가 총감을 따돌리고, 뒤로 그를 잡을 계획을 세웠다면…….]
홍면노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붉은 제복을 입은 동창 대원도 따라오고 있었다.
[동창까지 끼어들었으니, 반역이다 아니다, 의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설지하의 표정이 구겨졌다.
[대세를 따르겠다는 건가요?]
[대세?]
홍면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담겼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렸으면 각자 추구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대로 흔들림 없이 이행하면 그뿐이겠지. 너도 작전에 참여하기로 한 이상 다른 생각하지 말거라. 오늘 네 표정은 마음에 담긴 생각이 모두 드러나는 것 같으니.]
설지하는 처음으로 홍면노에게 실망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조차 같은 결정을 했으니 남을 욕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들은 빠르게 북쪽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급류를 동반한 좁은 계곡을 지날 때, 하늘에서 몇 개의 불빛이 신호처럼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신호를 기점으로 앞서 달리던 갈천의 목소리가 강압적으로 들려왔다.
“속력을 배로 더한다.”
제3장 원한
1
사자비도 불빛을 보았다. 신호였다. 하지만 이곳 구채구에서 저런 형식의 신호는 수시로 올라오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물론, 각각의 불빛마다 문파가 가진 특징과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 사자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황실, 즉 친황대에서 쓰는 신호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자신의 예상은 적중해서 그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흑룡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흑룡이 공명학의 두 팔을 잡은 후의 일이었다.
공명학은 맹수의 포효를 지르며 흑룡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흑룡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땀을 흘리며 몸에 힘만 주고 있었다. 급기야 공명학이 몸을 들어 흑룡의 가슴에 두 다리를 붙이고 밀어내려 했다. 굽혀진 다리가 쉼 없이 떨리며 흑룡을 밀치려 하는데, 나중에는 한 발씩 교차하며 때리기 시작했다. 그때 흑룡의 몸에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두두두둑!
뼈가 뒤틀리는 이상한 소리가 낮게 흘렀다. 동시에 흑룡의 두 눈이 화기로 들끓고, 이내 불똥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변했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갑자기 신체가 커지는 것 같았다.
흑룡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공명학의 발이 끊임없이 그의 가슴을 가격하고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신체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고통이 분명해 보였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모습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저게 뭐죠?”
소요요가 놀라서 소리쳤다. 공명학이 흑룡에게 잡혀 요동치는 모습이 무의미한 저항으로 비칠 뿐, 흑룡은 꼼짝도 하지 않고 신체의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찌지직!
몸이 변하는 건 옷이 찢어지는 것으로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허벅지를 가린 바지가 찢어지는 순간, 결코 흑룡의 신체와 맞지 않은 굵은 다리가 드러나는 순간 분명해졌다. 놀라운 점은 굵은 허벅지가 계속 떨리며 커진다는 것이었다. 핏대가 울퉁불퉁 솟아나더니, 종내에는 가슴 부위가 찢어지고 상체가 모두 드러났다. 이제 그의 옷은 걸레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머리. 머리가 바늘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칼날 같이 뻗은 긴 머리카락 때문에 고슴도치처럼 보일 지경. 얼굴의 변화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광대뼈가 크게 튀어나오더니, 꽉 다문 입술이 벌어지면서 드러난 송곳니가 빛을 뿌리며 맹수의 이빨처럼 변하고 있었다. 이마에도 핏대가 솟고, 코에서도 뜨거움 바람이 쏟아져서 연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크르르릉!”
다물린 송곳니 사이에서 성난 곰의 그것 같은 괴음이 흘러나왔다.
사자비도 놀랐다.
‘저게 뭐지?’
신체의 변화도 놀랍지만 녀석과의 거리가 꽤 있음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더욱 놀랐다. 덩치가 원래의 세 배는 커진 것 같은데, 기운이 더해지자 열 배는 커진 느낌이었다. 흑룡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괴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저런 무공이 있었나?”
무공이 맞기는 한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경악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부서진 절벽을 피해 한쪽으로 물러나 있는 무리였다. 그중에서도 민대머리 승려, 소림사 무승의 목소리였다.
“금강역골경(金剛易骨經!)!”
젊은 승려가 외치고 옆에 있던 중년승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소림사상 가장 뛰어난 무승, 혜능의 숨겨진 비기가 모습을 드러내서였다. 실제로 이 비기는 방장 허락 없이는 익히지 못하도록 했다. 이마제마(以魔制魔), 즉 마(魔)로 마를 제압한다는 뜻을 품고서 혜능이 창시했던 무공인데, 자비를 가르치는 승려에게는 마공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익히고 싶어도 익힐 수 없기도 했다. 그간 방장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많은 무승이 허락을 얻어 시도했건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불심이 깨져 심마에 빠져든 무승도 있었다.
“결국, 그걸 이뤘구나!”
수라천군도 놀라워했다. 오래전, 그에게 호되게 당한 흑룡이 떠나면서 언급했던 그것, 금강역골경을 익힌 모습이 아닌가.
“무서운 놈!”
말과 달리 수라천군은 웃었다.
‘내게 당했던 사실이 그렇게 억울했더냐!’
그도 금강역골경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얼마나 익히기 어려운 것인지도 소림승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수라천군은 슬며시 끌어올렸던 내공을 갈무리했다. 여차하면 마성에 사로잡힌 제자를 구하고자 했는데, 흑룡이 잘 마무리 할 것 같았다. 다만, 흑룡이 실수로 그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학이의 대법이 깨어지고, 흑살귀가 사라지면 비무를 중지시키게.”
수라천군이 두 장로에게 조용히 명했다. 흑룡의 몸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기공을 느꼈는지 두 장로가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저희가 저 괴물 같은 녀석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막을 필요는 없을 걸세. 학이와 달리 이성을 잘 제어하고 있는 것 같군. 제어할 수 없었다면 굳이 이런 자리에서 금강역골경을 사용할 녀석이 아닐세. 그저 녀석의 앞을 가로막기만하면 알아서 물러날 게야.”
하지만 지금 흑룡의 모습은 이성이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공명학과 똑같이 괴성을 지르는데, 잠시 후 두 손에 잡힌 공명학을 집어던졌다.
쿵!
동혈 바로 아래에 부딪힌 공명학이 수면에 떨어지며 물에 잠겼다. 그 위로 부서진 절벽 일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확실히 수라천군의 생각은 맞았다. 흑룡은 끓어오르는 살심을 잘 제어하고 있었다. 말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제 끝내자!”
말하는 것도 힘이 드는 모양, 몸이 떨리듯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그라나 움직임은 결코 떨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땅을 치고 뛰어오르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곰을 연상시킬 정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오히려 변하기 전보다 더욱 빨라진 느낌이었다.
팡!
순간 수면이 터지더니 잠시 원형의 바닥이 드러났다. 검은 연기, 공명학이 기공으로 흩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흑룡은 정확히 그 원 안으로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었다. 수라천군의 예상대로 이성이 있는 것처럼 금강역골경으로 다져진 몸을 이용하여 황금불을 펼치고 있었다.
쿠아앙!
주먹질 한 번에 하늘을 가를 것 같은 기세가 파공음을 떨쳐냈다. 소리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금빛을 동반해서 계곡 전체를 밝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공명학도 만만치 않았다. 마주 뻗은 주먹에서 분노로 다져진 지독한 독기를 동반해서 연기처럼 뻗어냈다.
쾅쾅쾅-!
연이어 지축을 때리는 굉음이 주변을 흔들고 두 괴물의 비무는 점점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등한 것 같지만, 무공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흑룡이 압도적이라고 판단할 만큼 기울어진 비무였다. 흑룡은 공명학과 싸우는 중에도 상대가 날리는 모든 공격을 받아내어 주변에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콰앙-!
팽팽하던 접전이 흑룡의 일격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졌다.
얼굴을 얻어맞은 공명학, 검은 연기가 신형을 꿈틀대며 몇 걸음 물러서자 거리를 주지 않고 흑룡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연속적인 공격을 퍼부어 연기의 전신을 노렸다. 순간 연기의 입에서 귀를 거슬리는 괴성이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흑룡은 끝을 볼 생각인 듯 주저하지 않았다. 공격에 또 공격을 퍼붓다가 연기의 목을 두 손으로 틀어쥐더니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몸이 돌아가면서 손에 잡힌 연기괴물도 같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기가 지면과 평행이 되어 풍차처럼 되었을 때, 어느 순간 두 사람을 지탱하던 흑룡의 손이 풀렸다. 원심력에 의해 검은 그림자가 절벽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쾅!
검은 그림자는 공교롭게도 아가리를 벌린 동혈의 입구에 부딪혔다. 정확히 밖으로 드러난 입구의 천장에 부딪혔다. 그 때문에 비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동혈 입구의 일부가 무너졌던 것이다. 다행히 동혈에 설치된 기관에는 충격이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문제는 흑룡의 다음 행동인데, 때마침 검은 그림자가 벌떡 일어서서 포효하자 갑자기 동혈로 달려들었다.
순간 비무를 관전하던 무인들이 동요했다.
세상에 다시보기 힘들 두 괴력의 소유자가 좁은 동혈에서 싸운다? 최악의 경우에는 규보의 비급은 구경도 못하고 절벽 속에 묻힐 수 있게 된다.
“저, 저런!”
비무에 쏠린 관심을 접고 당황한 빛을 드러냈다. 그중 소림승 하나가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듯 흑룡에게 소리쳤다.
“흑룡, 동혈에서는 안 된다.”
그 말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흑룡은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체구에서 나오는 속력에 더해진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절벽을 수직으로 밟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벽을 밟을 때 발자국이 찍힌다기보다는 거의 부수면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끝내 참지 못했던 사람은 수라천군이었다. 흑룡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상황, 차라리 아무도 규보의 보물을 차지할 수 없게 동혈을 주저앉히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정파도, 사파도, 잔월신교도 싸워야 할 목적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처음부터 저걸 노렸던가!’
과연 그렇게 되면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얻을 것 하나 없이 피해만 봐야 하는 싸움을 누가 하나.
‘제법 머리를 썼구나!’
흑룡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 뒤를 구파일방의 고수가 받친다고 해도, 무림맹이 그들을 돕고 있다 해도, 사파와 잔월신교 전체를 상대할 수 없다는 계산을 했겠지. 그래도 자신과의 싸움을 하려 할 것이다. 아마도 동혈을 파괴하려는 의도에 그런 영향도 미친 듯했다. 동혈을 확보해야 한다는 부담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누가 이기고 지든 상관없는 순수한 대결, 승패의 결과와 상관없이 대결이 끝나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그런 부담없는 상황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도대로 그 상태가 되면 팔 년 전에 꺾였던 자존심을 한 번 만회해보고자 도전장을 내밀 것이다. 상황도 그때와 비슷했다. 다수의 세력이 모여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의 제자가 꺾이고, 다음으로 수라천군이 나서는 상황!
수라천군은 미소를 보였다. 처음부터 규보의 무공에는 욕심이 없던 그였다. 단지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애초 목적. 운 좋게 얻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동혈을 없애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지.”
보물을 차지할 확신이 있는 상황에서 그걸 놓칠 바보는 여기에 없었다. 규보의 물건을 차지할 가장 유력한 수라천군인데, 뻔해 보이는 흑룡의 행동을 왜 지켜봐야 하는가. 그런 생각으로 움직이려 할 때, 그보다 먼저 동혈로 날아오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림자의 속도가 대단한 것을 느끼고 잠시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자세히 보니 복면을 쓰고 있는 젊은이였다.
사자비의 행동은 빨랐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평소 그가 가진 방식과 맞지 않아 신속하게 움직인 것이다. 흑룡의 행동과 거기에 숨겨진 의미는 분명했다. 되도록 소림사의 장경각에 보관하고 싶겠지만, 최악에는 아무도 가질 수 없게 묻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일 테다. 흑룡은 후자를 택한 것 같았다.
그걸 가만 놔두면 바보지. 그래서 사자비는 어쩔 수 없이 행동을 취하기로 마음먹고 움직였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수라천군이 나섰으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라천군이 어떤 마음으로 교도를 데리고 동혈로 왔는지, 흑룡과 어떤 관계인지, 규보의 보물을 어느 정도 가치로 생각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막연히 흑룡을 막아줄 거라 확신하고 기다릴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수라천군이 흑룡의 의도를 알고나 있을까? 그런 의문투성이의 무리수를 짊어지고 동혈이 무너지는 사태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우선 동혈을 파괴하는 것만 막자는 심산으로 움직인 사자비였지만 달리는 중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막은 후에는 어쩔 것인가, 그게 관건이었다.
그냥 막기만 해서는 주목만 받게 된다. 복면을 썼으니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만 주목을 받으면 이후 행동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탁!
순식간에 절벽에 도착해서 왼발을 벽에 붙이고 차올렸다.
몸이 바람을 가르듯 튀어 올라 동혈로 도약했다. 그리고 계산을 마쳤다. 우선 동혈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두 괴물을 밀어내고 동혈을 지킨다. 이후 승부가 갈리면 승자를 기습, 제압함으로써 정파와 마교의 힘을 꺾는다. 그 결과로 사파는 힘을 얻고 사기가 높아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정사마의 싸움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그러자면 한 가지 더 귀찮은 일이 동반되어야 했다. 두 괴물뿐만 아니라 수라천군을 그가 직접 상대할 것처럼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파는 죽어도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충 공방을 주고받은 후 세 무리가 뒤섞이면 몸을 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파가 나서면 구파일방과 무림맹도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정파와 사파가 힘을 합쳐 마교를 우선 상대할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마교의 힘이 압도적이었으니까.
문제는 수라천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인데, 그의 실력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사자비는 그것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설마 맹주보다 한참 위는 아니겠지. 당연히 진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만약 맹주보다도 훨씬 위의 고수라면 몸을 빼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뿐이었다. 혹, 주술 따위를 사용하려는 것 같으면? 사용할 여유를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어쩌면 맹주처럼 방심을 유도하여 일검에 죽일 수 있을지도.
생각을 마쳤을 때 그의 몸은 이미 동혈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동혈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흑룡이 있고, 그 앞에 검은 연기 괴물이 동혈이 만들어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자비는 정점에 떠오른 후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까지 흑룡은 공명학에게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사자비가 그의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하긴, 정당한 비무에 끼어들 비겁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런 방심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퍽!
떨어지는 속력에 힘이 더해진 다리, 원을 그리며 아래로 찍어 내리는 사자비의 뒤꿈치가 흑룡의 안면에 작렬했다. 타격이 되는 순간 내공을 돌린 탓에 발꿈치에서 엄청난 냉기가 뻗어 나왔다.
날벼락이랄까! 막 공명학에게 달려들려던 흑룡은 얼떨결에 맞은 한수에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꽤 충격이 있는 듯, 떨어지면서 코에서 피를 뿌리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무인들의 표정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비겁? 그런 것도 조금 있기는 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의미가 더 많았고, 놀라움도 더해져 있었다. 어쨌든 바람이 가장 짙은 듯했다. 어서 공명학까지 끌어내어 동혈을 안전하게 지키라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약간의 고마움도 있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해야 했지만 도무지 저 두 괴물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지켜만 보고 있었으니.
그때 검은 연기, 공명학이 괴성을 지르며 사자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흑룡과 달리 공명학은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태도였고, 그래서 더 저돌적이었다. 상대를 알아볼 이성조차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흑룡보다 더 지쳤다는 건 녀석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보다 훨씬 둔해진 속도였다. 그것도 위협적이긴 했지만.
휙!
사자비는 뻗어오는 주먹을 비스듬히 흘리며 녀석의 옆을 돌아 동혈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녀석을 동혈에서 밀어내기 위해 유리한 지점을 확보한 셈이다. 그런데 녀석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랐다. 금세 뒤돌아 다시 주먹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주먹에서 날아오는 엄청난 기세가 먼저 사자비에게 덮치는 듯했다.
사자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걸 피할 수는 있겠는데, 그랬다가는 주먹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장풍처첨 뻗어나와 동혈 내부를 파괴할 것만 같았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빌어먹을!’
사자비도 마주 주먹을 뻗었다. 마라겸을 뽑을 여유조차 없었다.
쾅-!
동혈이 흔들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동혈이 비명을 질렀다. 몇 부분의 천장에서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뜨리는 비명이었다.
사자비는 후회했다.
‘이걸 흑룡은 계속 막고, 때리고, 맞았나?’
단지 주먹이 부딪혔을 뿐인데, 하마터면 어깨가 빠질 뻔했다. 다행히 몸에 탄력을 주어 충격을 흡수했고, 덕분에 뒤로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하는 꼴사나운 짓을 경험해야 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상대를 찾았다. 녀석도 충격을 받은 듯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제야 마라겸을 뽑았다. 그리고 잠깐의 여유를 두고 내공을 완전히 끌어냈다. 물론, 몸속으로 눌러놓은 내공, 언제든지 폭발시킬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만들었다. 밖으로 뻗어냈다가는 동혈에 충격을 줄 것 같았으므로.
“크아아앙!”
공명학의 괴성을 신호로 사자비는 앞으로 달렸다. 공명학도 달려왔다.
다시 부딪힐 찰라, 사자비는 몸을 웅크려 녀석의 휘두르는 주먹을 피했다. 동시에 마라겸을 쥔 오른손을 뒤로 빼고,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합을 질렀다.
“얍!”
순간 왼손에서 백팔백룡장이 작렬했다. 목표를 잃은 공명학의 손에서도 강렬한 연기를 쏟아냈다.
콰쾅!
연기는 동혈의 옆 벽을 때렸다. 당연하게도 동혈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사자비의 장력은 정확히 공명학의 가슴에 터졌다. 동혈 한쪽이 무너지는 그때에 공명학도 사자비에게 받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연방 밀려가고 있었다. 그걸 놓치지 않고 사자비가 마라겸을 휘둘렀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마라겸이 균형을 잡으려는 공명학의 목을 쳤다.
캉!
예상했지만 연기는 가공할 방어력을 가진 듯했다. 무엇이든 두부처럼 잘라버리는 어검술이 오늘은 목표물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흡사, 쇠를 두드린 느낌이랄까! 오히려 마라겸을 쥔 손이 아플 지경이라니!
아무러면 어떤가.
몸을 아래로 숙이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후, 하체를 들어 올렸다.
투타타타탁!
공명학의 가슴에 두 발이 교대로 오가며 콩 볶는 소리를 자아고, 소리가 이어질수록 공명학도 계속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입구 언저리까지 녀석을 몰고 갔을 때, 몸을 띄워 녀석의 머리를 돌려찼다.
팡!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흑룡을 떨어지고 동혈로 들어간 잠깐 사이에 폭음과 함께 공명학까지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으니, 사람들의 탄성도 당연했다. 물론, 지친 두 사람을 기습하다시피 공격한 결과였지만 누가 저런 일을 해낼까.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동혈 입구에 선 사자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자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목을 받는다는 건 이미 예견한 일이므로 상관없다. 그런데 두 괴물이 상대를 바꿨다. 아래에서 다툴 생각은 않고 동시에 동혈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사자비를 적으로 두고 상대하려는 것 같았다.
저돌적으로 절벽을 타고 달리는 두 괴물을 보며 사자비는 실소를 흘렸다.
둘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동혈 위로 뛰어올랐다. 두 괴물도 마찬가지. 동혈까지 동시에 도착해서 사자비를 향해 도약했다. 순간 아주 짧은 추격전이 벌어졌다. 닭을 잡고자 두 곰이 뒤쫓는 추격전이었다. 그런데 그 닭이 보통 닭이 아니다.
닭, 쫓기던 사자비의 몸이 갑자기 밝게 빛을 뿌렸다. 부젓가락처럼 새하얀 빛인데, 빛은 이내 안개처럼 변해 버렸다.
안갯속에서 뇌전이 흘러나왔다. 주위를 얼릴 듯한 냉기 속에서 뜨거운 뇌전이 번쩍거리니 기괴해 보였지만, 사람들은 경악할 뿐이었다. 이미 내공덩어리로 짐작되는 운무에 가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운무를 뒤쫓는 두 괴물에게는 두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생소해하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운무를 향해 각자 주먹을 뻗을 뿐이다. 사자비 또한 허공을 차고 두 괴물을 향해 마라겸을 휘둘렀다. 흑룡의 주먹은 감당하기 어려울 공력이 들어 있어서 몸을 틀어 피하고, 그 반동을 이용하여 회전한 후 공명학에게 백색으로 불타오르는 마라겸을 찍었다.
주먹과 예리한 마라겸의 끝이 부딪히자 연기가 비명을 질렀다. 사자비도 무사하지 못했다. 충격을 받고 옆으로 퉁겼는데, 그 뒤를 흑룡이 바짝 따라붙었다.
흑룡의 주먹이 높게 치켜 들렸다. 어떡해서든 피하려 했지만 사자비는 피할 수 없었다.
쿵!
어깨를 얻어맞고 무서운 속도로 아래로 떨어져 숲에 처박혔다. 흑룡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허공을 밟으며 내려왔다. 그때 숲이 갈라지며 수직으로 반월형의 강기가 흑룡을 덮쳤다. 사자비가 날린 강기였다.
강기는 땅을 파괴하며 그대로 흑룡과 부딪혔다. 하지만 맞은 것처럼 보였을 뿐, 놀랍게도 흑룡은 강기를 두 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강기를 잡은 두 손이 얼어붙으며 어깨까지 굳었지만, 이내 힘으로 깨어 흩어버리고 괴성을 질렀다. 그 빈틈을 사자비가 파고들었다.
쉬익!
섬전처럼 달려와 두 팔을 벌리는 것으로 피부를 얼린 얼음덩이를 떨치는 흑룡의 가슴을 노렸다.
팡!
마라겸이 피부에 부딪히는 즉시 금빛으로 빛나는 흑룡이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마라겸의 겸면이 녀석의 뺨을 매질하듯 훑고, 가슴과 복부를 차례로 때렸다. 처음처럼 마라겸에 부딪힐 때마다 피부가 금빛으로 빛나서 번쩍거리는데, 호신강기 같았다.
‘어검술을 막아내는 호신강기?’
공명학이야 주술로 인해 만들어진 연기가 막아준다지만, 흑룡은 순수한 내공으로 어검술을 이겨내고 있었다.
사자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녀석이 아닌가!
힘이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면 대결을 펼쳤다면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실력의 우위는 상관없었다. 꺾기만 하면 된다. 지금의 흑룡이라면 충분히 자신 있었다.
마라겸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다지만, 타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사자비도 힘을 다해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흑룡이 괴로워하며 두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마라겸을 잡으려는 행동이었다.
사자비는 끝내 잡히지 않고 계속 매질을 했다. 때리다가 지칠 정도로. 그러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흑룡이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저 움직임 속에는 계산된 초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기습을 노리는 공격도 있어서 한시도 집중력을 흐릴 수 없었다. 한 대라도 맞았다가는 충격이 클 터였다. 그런데 위기가 닥쳤다. 흑룡에게 너무 집중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공명학이 달려들고 있었다. 때리면서 피하기도 바쁜 터라 옆으로 끼어든 공명학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퍽!
검은 연기가 사자비를 때렸다. 운무까지 뚫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기공이 들어 있는 듯한데, 호신강기까지 깨뜨리고 타격을 주었다.
사자비의 입에서 피가 터지며 옆으로 한참을 굴러다녔다.
“젠장!”
이상하게 오기가 생긴다고나 할까!
땅을 주먹으로 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흑룡과 공명학이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공명학은 바람처럼 미끄러지듯, 흑룡은 땅에 발자국을 남기며 요란하고 빠르게.
“좋다, 끝장을 보자!”
2
콰콰콰쾅!
사자비를 중심으로 내공이 폭발하더니 그 여파가 사방을 집어삼켰다. 천령강기였다. 동혈에 전해질 충격을 줄이고자 한정된 지역에서 내공을 터뜨린 것이지만 내공을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파괴력은 컸다. 사자비의 지척까지 달려들었던 두 괴물, 흑룡과 공명학이 그 폭발에 무방비 상태로 휩쓸렸다.
“저, 저런 고수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군요.”
귀령대마의 감탄이었다. 폭발 후 들끓는 연기와 사방으로 비산하는 파편을 쳐내던 오천대마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공이 요사한 것이 정파의 인물은 아닌 듯한데, 저런 고수라면 맹주가 당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놀랍군요.”
환몽영이 기습에 의한 결과라고 귀띔을 해주었지만 수라천군을 비롯하여 두 장로는 고개를 저었다. 기습이 아니었더라도 맹주는 당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라천군이 재밌다는 표정을 했다.
“그녀까지 여기 있었다면 볼만 했겠네.”
그녀, 얼마 전 그에게 혼쭐이 난 설혼마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를 상상한 두 장로도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과연, 그녀 또한 상상할 수 없는 고수였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내공을 소유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 과연 이곳에 데려다 놓아도 저 세 괴물과 좋은 적수를 이뤘을 것 같았다.
문득, 귀령대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걱정이로군요. 아직, 공자께서는 저 두 사람의 적수가 아닙니다. 흑살신의 힘을 빌렸다지만, 그것도 제어할 수 없는 형편이라 실력이라고 말하기 힘들겠지요.”
수라천군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지나면 학이는 한층 성장할 걸세. 십 년 후에는 결코 저들에게 뒤지지 않는 고수가 될 테니 격정 마시게. 본좌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 너희도 저들의 움직임을 머리에 새겨두어라. 특히, 저 복면 쓴 자의 초식을 모범으로 삼도록 해라.”
마지막은 남은 제자를 향한 조언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사형의 승리를 바라던 환몽영과 귀공 헌원혁, 그리고 영주에서 막내가 죽은 덕분에 막내가 되어버린 다섯째 동일룡(東日龍)이 수라천군을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선이었다.
수라천군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맞았을 때,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자다. 흑룡은 초식의 응용력이 천부적인데 반해 실리가 없어서 손발이 고생하는 식이지. 구파일방의 공명정대함이 초식에까지 섞여 있어서 그럴 게다. 재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경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지극히 실리적이구나.”
대화중에 폭발의 여운이 가시고 들끓던 연기가 가라앉았다. 장내의 모습이 확연해졌다.
사자비는 폭발의 가운데 꼿꼿이 서 있었다. 주변에 공명학이 넘어졌다가 일어서고 있고, 흑룡은 두 손을 교차해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보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폭발의 현장에는 얼음덩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수라천군은 공명학을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한계에 돌입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진즉에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몰랐다. 더 놔두다가는 흑살신에게 영기까지 빼앗길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흑룡과 복면인, 둘 중 하나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수라천군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제자를 저 난잡한 싸움에서 빼낼 생각이었다.
사자비의 표정이 구겨졌다. 웬만해서는 타격을 받아야 하는데, 아니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 멀쩡한 두 녀석을 보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정말 금강불괴라도 되는 건가!
그럴 리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호신무공도 완벽한 것은 없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흑룡이 무릎을 펴고 천천히 일어섰다. 과연 잠시 비틀거렸다. 공명학도 달려오려다 휘청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내 중심을 잡고 처음처럼 무섭게 달려온다.
사자비는 양팔을 벌리고 하 하고 웃었다. 계산 착오였다. 이런 무지막지한 녀석들이 있을 줄이야. 질리면 실소가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무림은 넓고 깊다.
그 말이 새삼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승패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수라천군을 묶어두려면 여분의 힘을 남겨야 했지만, 그건 두 괴물을 제압한 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었다. 저 괴물들을 상대로 여유 따위를 부리다가는 자신이 먼저 쓰러질 것이다.
그는 마라겸을 고쳐세우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이 튀어나왔다. 여유는 마음뿐인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여유를 두었다는 생각과 달리 녀석들을 상대하며 사용한 내공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전력을 다하고자 내공을 전부 올렸는데도 전만 못한 느낌이었다. 이 상태로 두 녀석 다 상대하자니 마음이 벅찼다.
눈 깜빡할 사이에 두 괴물이 거리를 절반으로 좁혔다. 먼저 도착할 녀석은 흑룡인데, 녀석의 속도가 늦춰졌다. 그도 사자비를 혼자 상대하기는 벅차다고 생각한 모양, 공명학과 협공하는 쪽을 택한 듯했다.
[부담을 덜어주지.]
갑자기 옆을 찌르는 전음. 몸을 스치는 미풍, 그리고 공간을 확보하는 인형이 있었다. 사자비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언제?’
지금 모든 신경이 흑룡과 공명학에게 집중되었다지만,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신법이라니……. 말 그대로 그냥 나타났다는 표현이 맞을 수라천군이 옆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주고 있었다.
[흑룡을 얕보지 말게. 저 모습이 진짜는 아닐 걸세.]
‘저게 진짜가 아니라고?’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사자비는 그 말을 무시했다. 저 이상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 순간 흑룡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놀랍게도 수라천군은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이미 공명학의 목을 틀어쥐고 한 바퀴 돌리더니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르는 중이었다.
사자비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무리 힘이 빠진 상태라지만, 흑룡과 그에게 많은 타격을 받았다지만 저렇게 쉽게 제압될 괴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라천군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눈앞에서 제압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분명 앞으로 튀어나갈 때 수라천군이 중얼거렸던 괴이한 주문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아무튼 다행이다. 이제는 한 녀석만 상대하면 된다. 분기탱천, 그는 마라겸을 휘두르며 지척까지 다가온 흑룡을 향해 짧은 거리를 쇄도해 나갔다. 곧이어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계곡을 쥐어짰다.
수라천군은 요동치는 공명학을 힘겹게 누르고 품에서 빼든 부적을 등에 붙였다. 처음보다 약해졌지만 그래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학아! 정신 차려라.”
그러나 제자는 여전히 괴성을 지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수라천군의 표정이 굳었다. 부적과 주문 때문에 힘이 빠진다고 느낀 것도 잠시, 공명학은 다시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파악한 오천대마와 귀령대마가 급히 달려왔다. 오천대마는 수라천군에게 눈빛을 보낸 후, 재빨리 한쪽 무릎으로 공명학의 등을 눌렀다. 두 손은 한쪽 어깨를 꺾어 잡고, 한쪽 다리는 머리를 눌렀다. 귀령대마는 공명학의 다리를 제압해 눌렀다. 두 노인이 금방이라도 튕겨나갈 듯 들썩거렸다. 무림의 삼황오제와 어깨를 견준다는 그들이 온 힘을 다했는데도, 진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다.
그사이 수라천군이 부적 몇 개를 더 꺼낸 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손톱으로 살짝 베어 거기에서 나온 피로 이상한 문장을 바닥에 크게 그려 놓았다.
잠시 후 공명학은 거기로 옮겨졌다. 옮기는 중에도 녀석이 휘두르는 주먹에 오천대마가 턱을 얻어맞고, 귀령대마는 다리에 채여 놓칠 뻔했지만 간신히 문양 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제야 공명학의 힘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회오리치듯 빠르게 요동치던 연기도 힘을 잃더니 색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수라천군은 공명학의 머리 위에 손을 짚고 연신 주문을 외웠다. 오천대마와 귀령대마도 비슷한 형태의 주문을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공명학을 눌러댔다.
그 시간, 사자비는 흑룡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었다. 흑룡의 힘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런 만큼 사자비의 내공도 줄어서 처음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사자비는 다람쥐처럼 약삭빠르게 움직여 상대의 전신을 채찍질하고, 흑룡은 간간이 크고 강한 동작으로 기습을 노려 사자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접전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저건!’
흑룡과 대적하는 중에도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빛이 사자비의 시선에 걸렸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흘려 넘겼지만, 눈에 익숙한 빛이라 재차 확인 작업을 거쳤다. 가느다란 불빛과 함께 하늘로 솟는 연기, 구채구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여느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사자비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신호였다. 그것도 친황대가 사용하는 신호였다. 그걸 확인하는 대가로 흑룡의 각법에 한 대 얻어맞아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투두두둑!
흘려 맞았을 뿐인데도 직선으로 뻗어나간 후 숲을 뚫고 고목에 부딪혔다. 근처에서 구경하던 무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사자비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결국, 흑룡이 이긴 건가.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침묵을 뚫고 많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사자비는 죽지도, 의식을 잃지도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흑룡에게 받은 충격은 견딜 수 있지만 혼란한 머리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빛이 올라왔던 장소는 북서쪽이었다. 동혈이 있는 위치를 계산해보면 애초 천통달의 안내를 받아 가려고 했던 부근이 분명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필 지금 불빛을 쏘아 올린 이유가 무엇일까?
거리를 생각한다면 며칠 전에 도착해서 신호를 올렸어야 했다.
도중에 다른 무림인을 만나 혈전이라도 벌인 걸까?
그도 아니면 시간이 지연될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건가?
그게 지금 사자비를 고민 속으로 빠뜨린 이유였다.
신호를 올리기 위한 목적은 규보의 무덤을 발견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럼, 여기에 있는 동혈은 뭐지?’
기관까지 설치되었다고 해서 정보를 접했을 때 가졌던 약간의 의심을 억누르고 기대까지 품지 않았나. 한데 다른 대원이 진짜를 발견했다면 여긴 가짜라는 뜻? 그간의 고생은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하하하!”
얕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쥐죽은 듯 가만히 엎어져 있다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으니, 지켜보던 시선들이 괴이하다는 빛을 드러냈다.
사자비는 그들의 시선에는 상관하지 않고 슬며시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 앉았다.
흑룡이 사자비의 상태를 주시하다가 인상을 구겼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인데 인상까지 쓰자 못 봐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충격이 심해서 미쳐나?”
금강역골경 때문에 힘겨운 티가 역력한 흑룡이었다. 목소리가 거칠고 떨리는데, 말투와 달리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농담 같았다. 농담할 여유가 있나! 하긴, 사자비를 이겼으니 약간의 여유는 승리의 보상으로 생각해도 될 터였다. 그런데 사자비가 여전히 웃고 있다. 처음처럼 소리를 내진 않지만 비실비실 웃고 있는 모습이 살짝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정말 이상해진 건가?’
경황 중이라 그리 강하게 때리지 못했는데…….
흑룡은 왠지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기분 또한 나빠져 버렸다.
마지막 일격으로 상대의 기세를 꺾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는 그였다. 공명학이 자신의 행동에 동조해준 덕분에 사자비를 혼내려 했던 계획이 이뤄졌는데, 그 과정에서 숱하게 얻어맞았던 것이다. 그것도 가축처럼. 이제부터 진정 자신을 때린 분노를 풀고, 맹주님의 몫으로 몇 대 더 패주어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한 대에 나자빠지다니…….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저렇게 정신 나간 놈을 더 때릴 수도 없고, 때린다 한들 알아먹지도 못할 것 같고. 모든 걸 무시한 채 가르침을 주자니 수없이 많은 시선이 시켜보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평생, 맞아서 정신 나간 녀석을 계속 때린 극악무도한 놈이란 소문이 강호전역에 퍼져 장식처럼 그를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거기다 복면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녀석의 얼굴이 더욱 그를 주저하게 했다. 여자의 그것처럼 여린 얼굴이라니……. 때릴 맛이 더욱 들지 않았다. 물론, 생긴 것과 달리 전혀 연약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조심해.”
고른 끝에 결국 흑룡이 내놓은 말이었다. 멋들어지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아야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자비가 무슨 큰 잘못을 했나, 싶기도 했다. 간단한 그 한 마디를 하려고 그 난리를 쳤던가. 그것도 수없이 매질 당하면서.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잊으려는 듯 몸을 돌렸다. 후회는 빨리 떨쳐버릴수록 좋다. 진짜 실력발휘를 해야 할 상대가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라천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공명학은 예전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연기는 흔적조차 사라진 상태였고 정신을 잃어 젊은 마교도에 의해 무리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수라천군도 흑룡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 늙은이를 이길 수 있을까!’
팔 년 전, 그는 수라천군의 진짜 실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비참하게 당해버렸다.
“흥!”
절로 콧소리를 낸 후,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질 리 없지.’
그렇게 확신한 것이다. 지금의 금강역골경은 흉내 내기에 불과할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정작 금강역골경의 탈퇴환골은 이런 게 아니라 완벽해진 몸을 추구했다. 지금은 그저 부풀려진 덩치와 덩치만큼 내공과 힘이 늘었을 뿐이었다. 이 덩치 때문에 속도가 빨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하기 전보다 오히려 느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마지막 완성단계로 탈퇴환골하면 무공을 펼치기에는 최상의 몸 상태로 변한다. 그걸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서 수라천군과의 승부는 한순간에 끝내야 한다. 금강역골경의 완벽해진 몸으로 펼치는 최고의 절기를 이용하여 상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전에 절벽을…….’
금강역골경의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면 수라천군은 쓰러뜨릴 수 있어도 흑룡 또한 무사할 수 없었다. 우선 엄청난 내공소모가 생기기 때문에 그도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 사이 사파와 마교가 달려들면 뒤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마교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적어도 그들을 수라천군이 이끌지만 않았어도 이런 걱정은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한편으론 동혈을 힐끔거렸다. 계획대로 우선 동혈을 부순 후에 수라천군을 상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 될 걸세.”
흑룡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들면 눈치가 빨라진다더니……!
수라천군이 그의 속을 훤히 꿰뚫은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는지, 곁에 있던 두 노인이 순식간에 절벽으로 이동해서 동혈을 지킬 것처럼 행동을 취했다.
흑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수정. 순서는 바뀌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힘이 떨어지기 전에 수라천군을 쓰러뜨리고 동혈까지 파괴해 버리면 문제 될 일이 뭔가. 혹은 둘을 동시에 해도 된다. 그게 가능한 금강역골경이었다. 그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라천군이 강하지 않다는 전제가 붙어야 했지만.
“각오하시오, 영감! 오늘 무림사에 길이 남을 자웅을 펼칠 테니. 그리고 내가 승자로 기록될 거요.”
금강역골경으로 들끓는 내공을 이겨내고 멋지게 한 마디 했다고 생각한 흑룡이 잠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수라천군이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면 더욱 좋았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싸울 마음이 없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의문이 표정에 깔린 듯도 하다.
흑룡이 채근했다. 실전에서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완전한 금강역골경이라 약간 흥분한 상태였던 것이다.
“자세를 잡아요. 누구처럼 비겁하게 이겼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수라천군은 여전히 싸울 마음이 없는 태도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끌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흑룡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거기 뭐 볼 게 있냐는 물음의 시선으로 흑룡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볼게 있다는 걸 알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신발, 강한 힘으로 무게를 실어 내리찍는 사자비의 신발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저게 뭔가 했다. 무엇인지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퍽!
오늘 두 번째로 사자비의 발에 찍힌 흑룡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코피를 흘린 흑룡이었다. 뒤꿈치는 정확히 그의 코를 노렸다. 차라리 고개를 들지 않았으면 머리에 혹 하나 다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이런 씨!’
아무 생각 없이 받은 타격이라 흑룡은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넘어가는 중에도 코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코피가 나는 중에도 원망스러운 듯 수라천군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수라천군이 끌었던 말을 이었다.
“조심하시게.”
이어 안 됐다는 듯 말을 맺었다.
“늦었군!”
쿵!
마지막 말은 흑룡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때문에 묻혀 버렸다.
“역시 실력에 비해 경험이 없는 것이 탈이네. 확실하게 쓰러지지 않은 상대에게 등을 보여 어쩌자는 건가.”
수라천군이 조언인지 약 올리는지 모를 소리를 해서 흑룡의 속을 긁어놓았지만, 흑룡은 소리칠 여유도 정신도 없었다. 사자비의 공격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무방비 상태에서 큰 일격을 당했는데, 연이어 달려드는 주먹과 발길질이 기가 막힐 정도로 급소만 노리는 것 같았다.
비겁한 녀석은 끝까지 비겁한가 보다. 사정을 봐준 상대가 이렇게 무자비하게 나오니 화가 치밀기 전에 어이가 없었다.
넘어진 흑룡은 부단히도 두들겨 맞더니 다시 쓰러질 때야 비로소 매질이 멈춰졌다. 무공도 무엇도 아닌, 그저 때리는 행위. 복날 개 잡듯 때리고 밟는 행위가 멈춰진 것이다.
보는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자비는 완전히 뻗은 흑룡을 두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후!”
그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걸렸다.
“그나마 속이 풀리는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꼬이고 꼬여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불편함이 약간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의혹은 남아 있었다. 첫 번째는 동혈에 기관이 설치되었다는 것, 그리고 소문이 신기할 정도로 빨리 퍼져 주변에 있는 무인세력을 상당수 끌어들였다는 것. 두 번째는 천통달을 따라갔던 대원들이 신호를 늦게 올렸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모종의 음모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규보의 보물이 숨겨진 장소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일부러 기관을 설치했다는 것이니까. 어쩌면 경쟁자의 관심을 이곳에 집중시켜놓고, 진짜 규보의 장소로 짐작되는 곳을 누군가가 열심히 파헤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관없다. 천통달과 함께 했던 대원들이 신호를 쏘았다면 그곳이 진짜일 테니까.
‘혹시, 기관을 설치한 모종의 세력과 천통달 일행이 부딪친 건가!’
신호를 빨리 올리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진짜를 차지하고자 다퉜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도 있고. 아무튼 신호가 올라왔던 곳을 찾아가 사정을 들어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막 계곡을 벗어나려는데, 어이없는 듯 그를 지켜보던 수라천군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대단한 젊은이로군. 자네 같은 신진고수가 나왔으니 무림의 앞날이 밝을 것 같네만, 자네를 배출한 사문을 알 수 있겠는가!”
사자비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쳤다. 이제는 관심도 없고, 적어도 구채구에서는 다시 볼일 없는 노인이었다. 무엇보다 한판의 광대놀음에 주역이 된 것 같아 불쾌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대답 없이 그대로 북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이 움직이는 순간 그는 이미 멀어져 점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동혈을 위해 그렇게 활약했던 청년이 미련 없이 떠나버리니 황당할 수밖에.
이제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그에게 시선을 거둔 수라천군이 사파의 무리를 훑었다. 사자비의 행동을 수라천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출신이 여전히 궁금했던 것이다.
“저 젊은 고수를 아는 자 없는가?”
사파의 무리에 동료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이지만, 놀랍게도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누군가가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대항군림대라는 용병집단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믿을 수 없지만.”
저런 고수가 용병 따위를 할 리 없다는 의미였다. 수라천군도 수긍했다. 그때, 잔월신교의 무리에서 한 사내가 수라천군에게 다가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교주님!”
“말해 보아라.”
“저자를 본 적 있습니다.”
“언제였는가?”
“얼마 전 있었던 영주의 무림대회에서 보았습니다.”
수라천군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여섯째 공자와 강혈 장로를 해친 원흉입니다.”
사내는 영주 무림대회에서 운 좋게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수라천군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는 것을 확인한 사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했다.
“처음에는 복면을 써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용서를!”
“음!”
묘한 의미가 담긴 침음이었다. 수라천군은 다시 사자비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도 구사일생으로 영주를 빠져나온 몇몇 교도들에게 사정을 보고받은 바 있었다. 어이없는 제자의 죽음과 강혈대마의 죽음으로 잠시 분노를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상대는 황실이라고 했다. 사실을 접한 뒤에는 마음에 묵혀두어야 했다. 무림에서 독보적인 잔월신교라 해도 나라를 상대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런 시도는 잔월신교의 멸망만 불러올 것이므로. 그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유달리 괴팍한 여섯째의 성격과 그른 판단에 따른 인과응보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시리기는 여전한데, 설사 사자비의 신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복수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황실이 규보의 무공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가!’
여섯째를 죽었으니 원흉에 대해서 조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얻은 정보로 황실에도 엄청난 고수가 있고, 그가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동창의 고위관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 녀석이 구채구에 혼자 왔을 리는 없다.
수라천군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규보의 무공을 확보하고 싶던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흑룡의 판단이 옳겠군.’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이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 애초 목적대로라면 그냥 동혈을 파괴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저 동혈에 규보의 보물이 있기는 한가. 그것도 의심스럽다. 정보력이라면 개방보다 뛰어난 황실이고, 동창이 아닌가. 무림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걸 알았을 테니, 아마도 많은 고수가 구채구에 투입되었을 테고, 사방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사자비가 미련 없이 떠난 것도 어쩌면 진짜 보물의 장소를 발견해낸 때문인지도 몰랐다.
문득, 흑룡을 보았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추스르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알고 있었느냐?”
사자비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 것이지만, 수라천군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 알았다면 그렇게 달려들지 못했겠지. 자칫 구파일방이 황실의 적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고개를 몇 번 흔들던 흑룡이 되물었다.
“뭘 말이오?”
수라천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자넨 운이 좋은 사람 같군.”
“평생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살아왔으니, 운이라기보다는 복이라 해야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오?”
“자네가 상대했던 자. 그가 황실의 고수였네.”
흑룡이 대경해서 외쳤다.
“황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동창의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보고받은 것 같군. 이름이……, 사자비라고 했던가!”
순간 흑룡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지, 지금 사자비라고 했소?”
“아는 자인가?”
표정이 일그러진 흑룡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벌떡 일어선 그가 무서운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녀석, 어디로 갔소?”
흑룡의 표정을 읽고 무슨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한 수라천군은 시선을 돌려 숲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흑룡을 보며 이유를 물어보려 했는데, 거기에 없었다. 벌써 시선을 방향 삼아 튀어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구파일방과 무림맹 고수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흑룡이 지금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 상황이 아닌가. 그가 사라지면 수라천군을 누가 막을 것이며,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사파는 또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고 떠나버린 흑룡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물론, 바라본다고 볼 수 있지는 않았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으므로.
이젠 머릿수만 많을 뿐 고수라고는 없는 사파와 흑룡을 잃어버린 정파, 온전히 힘을 보전한 잔월신교만 계곡을 지킬 뿐이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잔월신교가 동혈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라천군이 교도들에게 지시하여 폭약을 설치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동혈에다가 폭약을 설치하게 해서 무인들을 대경하게 했다. 사자비, 흑룡에 이어 이번에는 수라천군이 전혀 예측 못 할 행동을 한 셈이었다.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잔월신교를 막지도 않았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동혈에 폭약이 설치되는 과정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 그 행동은 혈의를 입은 무리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4장 죽은 자들의 시간
1
우르릉!
갑자기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묵천문의 비응대주 백상상은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그를 따르던 일백 명의 대원도, 도야당의 장 장로와 그의 당도들도 같은 행동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채구 저 끝 너머로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도야당(刀倻堂)의 쾌수일랑(快手一郞) 장문위(長文蔿) 장로가 입술을 달싹거려 흘러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여름도 아닌데, 폭우가 들이칠 모양이로군.”
옆에 있던 백상상이 대꾸했다.
“가뭄이 오랜 시간 이어졌으니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장 선배께선 그리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요.”
“이런 산행에 폭우라면 반가울 리 없지 않겠소.”
구름은 놀랍도록 빠르게 구채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만간 하늘을 뒤덮을 것 같았다.
백상상은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 장문위가 다른 정파라도 설득하고자 진땀을 뺐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모두 거절당했던 모양, 진채를 뽑고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다시 찾아와서 함께 가자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 후로 이틀 동안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다.
“미련은 빨리 털어버릴수록 좋은 법입니다. 행여 다른 곳에 진짜 규보의 보물이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십시오.”
장문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련은 계곡을 떠나올 때 이미 두고 왔소. 속 좁게 보지 마시오.”
말과 달리, 어젯밤 야영을 할 때 다른 길로 둘러가자고 제안했던 장문위였다. 그 심중을 파악한 백상상이 매몰차게 거절했고, 그 후로 더욱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백상상은 더 이상 대화를 잇지 않고 뒤를 향해 명했다.
“서둘러야겠다.”
구름을 보니 잠깐 스쳐가는 소나기는 아닌 듯싶다. 구채구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백상상이 먼저 경공술을 펼쳤다. 뒤이어 비응대원과 장문위를 비롯한 도야당의 당도들이 속력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 리를 가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주 오는 한 떼의 무리를 발견해서였다.
처음에는 다른 무림세력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꽤 특이한 녀석들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사이를 좁혔을 때 그들이, 아니 그것이 무엇인 줄 알았다.
백상상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과 같이 멈춰선 무리를 노려보았다. 붉은 혈의를 입은 오십 명이 음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뒤로 검게 탄 피부와 어울리지 않은 백의를 걸친 인간이 있었다.
피부색이 검은 게 아니라, 피부가 죽고 말라서 그렇게 보이는 인간이었다. 죽었지만 살이 있는 물건, 바로 강시(殭屍)였다.
백상상도 젊은 적에 딱 한 번 강시를 본 적 있었다. 약재로 시체를 썩지 않게 제조한 후, 주술를 통해 인간의 본능을 살리는 작업을 마치면 시술자의 명대로 움직이는 시체가 된다고 들었다. 그걸 천태교라는 종교에 몸담았던 떠돌이 도사를 통해 보았다.
신기했다. 시체가 움직인다니…….
다음은 불쾌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건 그 사람에 대한 모욕이었으니까. 마교도나 할법한 극악무도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쾌한 마음은 시체가 움직인다는 신기한 눈요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다. 두렵기도 했고.
오늘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로를 가로막듯 벌려선 녀석들의 행동 때문일 수도, 강시가 모두 열다섯 구여서일지도 몰랐다. 저 많은 시체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허락은 받고 손을 덴 건가. 아니, 죽기 전에 시체 당사자에게 허락을 받기는 한 건가. 백상상은 강시가 자신의 가족이 아닌데도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들을 데리고 다니는 혈의인들은 혐오스러웠다.
“길을 막은 걸 보면 목적이 있겠지?”
시퍼런 검이 뽑혔다. 백상상은 검끝으로 녀석들을 겨누었다.
“그 목적이 우리와 관련되어 있나?”
혈의인 중 하나가 두 걸음 걸어나왔다. 혈의를 덮어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또렷했다.
미소가 움직였다. 미소를 뚫고 분위기만큼이나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겠지. 구채구를 걸어 다니는 모든 놈에게 볼일이 있으니 말이다. 아예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겠구나.”
백상상을 실소를 흘렸다. 구채구에 있는 모든 무림인을 상대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황당할 수밖에. 그는 가소롭다는 의미가 다분한 눈빛을 보여주고는 장문위에게 말했다.
“다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우선 우리가 먼저 나서죠.”
그리고는 비응대 일백 명을 이끌고 혈의인들을 덮쳤다. 반대로 혈의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강시 열세 구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표정 때문에 의미 없는 행동처럼 보였다.
백상상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그들에게 안식을 주고자 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행동이 그의 심경을 말해주었다.
무림의 대문파, 묵천문의 비응대주를 차지하려면 그만한 실력과 경력, 업적을 쌓아야 하는데, 지금 그는 자신이 왜 비응대의 수장이 되었는지 증명할 생각인 듯했다.
쉬이익!
검신에 경기가 날을 세우고, 푸르게 빛을 뿜었다. 강렬한 빛은 정면에 있는 강시의 목을 노리며 쇄도했다. 그 앞을 막는 것은 모조리 뚫겠다는 무서운 기세였다.
“저, 저럴 수가!”
장문위는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팔십 평생 오늘 같은 광경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열세 구의 시체가 살아있는 일백 명의 사람을 죽이는 광경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강시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다. 보통 사람보다 힘이 세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동작은 굼떠서 성인 한 명을 상대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본 강시는 풍문에 의해 만들어진 녀석들과 달랐다.
다른 종류일까!
비응대를 한순간에 괴멸시키는 강시라니…….
비응대가 묵천문에서도 가리고 가려뽑은 고수로 조직되었음을 장문위는 잘 알고 있었다. 집단전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 뛰어난 실력과 조직력을 겸비해서 묵천문의 위상을 높인 일등공신이라 할만 했다. 그걸 강시 열세 구가 처리해 버렸다. 그것도 한순간에.
장문위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시선으로 강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 고수보다 빠른 강시라면 강시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이었다. 내공의 고수보다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강시는 도대체 어떤 강시인가!
그의 두 눈에 평생 담아보지 못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건 공포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미지의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공포였다. 그런 감정은 그를 따르는 당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망연한 시선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비응대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혈의인의 음침한 목소리가 감겨들었다.
“흑시는 생각보다는 시간을 꽤 잡아먹는군! 천령시는 어떨까?”
‘흑시? 천령시?’
강시의 종류라고 생각한 장문위는 비응대를 쓰러뜨린 녀석들이 흑시임을 알았다. 그럼 천령시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쉬고 있던 두 구의 시체가 걸어나왔다. 흑시와 비슷한 생김이지만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 때문에 구별할 수 있었다. 눈에 생기가 돌고 파랗게 빛나는 것이다.
장문위는 꿀꺽 침을 삼켰다. 두 구로 도야당의 고수 오십 명을 상대하려는 행위가 가소로워야 하는데, 그런 여유로운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녀석들이 거리를 좁혀올수록 힘이 빠지고 두려움만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순간 이렇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즉시 입을 통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흩어져 지금 본 것을 알려라!”
하지만 천령시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흑시보다 강하리라 생각했던 예상은 맞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선 속도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도야당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이미 절반의 숫자가 천령시의 주먹에 찢어지고 뚫려서 피를 뿌리고 있었다. 남은 절반도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 오 장도 달아나지 못하고 녀석들에게 뒤통수를 내준 것이다. 그 속에 장문위도 섞여 있었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배를 보았다. 등이 뻐근하다는 감각이 뇌를 강타하더니 어느 순간 배를 뚫고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말라비틀어진 검은 손이었다.
놀란 가운데 또다시 음침한 혈의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역시 다르군. 이백 마리의 천령시가 구채구를 누빈다고 생각하니 소름 돋을 지경이 아닌가!”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릿해지는 중에도 장문위는 경악했다.
‘저런 괴물이 이백 구나 있다고?’
흑시는 그보다 몇 배, 혹은 그 이상이라 생각하니 암담할 뿐이었다. 물론, 이제는 그와 상관없는 일었지만!
그는 서서히 눈을 감고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지탱해주던 천령시의 손이 그의 등을 빠져나갔으므로.
“첫 개시로는 제법 성과가 크군요.”
혈의인이 말하고 또 다른 혈의인이 대답했다.
“앞으로 더 많은 먹이를 찾아야 하니 서둘러라. 다른 조에 비해 실적이 뒤처질 수는 없지.”
☆ ☆ ☆
사자비는 일 각 전부터 나무 아래에 편히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계곡에서의 활약 덕분에 체력과 내공소모가 심한 탓 때문이었지만, 결정적으로는 흑룡의 영향이 컸다. 언제부턴가 녀석이 꼬리에 따라붙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다 거리까지 점점 좁혀지는 듯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저만한 속력을 내는 녀석이라니……. 그보다, 내공의 회복력만큼은 혀를 내두를 만했다.
어쨌건 좋은 의도로 쫓아오는 건 아닐 터. 그렇다면 더욱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떨어진 체력과 내공으로는 녀석을 상대해봐야 손해만 볼 테니까. 이겨도 얻을 것이 하나 없을뿐더러 시간만 소비될 테니까. 결국, 녀석의 시야에 발각되지 않도록 나무 아래로 내려가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빽빽이 들어찬 나무와 바위 때문에 속력이 급격히 줄어드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나, 그런 손해로는 녀석을 따돌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점점 더 거리를 좁히는 듯했다.
‘끈질긴 녀석!’
그렇게 해서 사자비는 나무 아래서 잠시 쉬기로 결정을 내렸다. 녀석을 따돌릴 겸, 그런 김에 운기조식으로 내공도 회복할 겸, 쥐죽은 듯 앉아서 명상에 빠져들었다.
“흠!”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얕은 한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터인가 인근을 배회하던 녀석의 기척이 멀어지더니 이젠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엉망이 된 체력을 조금 더 보충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이 각을 더 보낸 후에야 일어나서 나무 위로 올라섰다.
주위를 둘러보자 거친 구채구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형은 북쪽으로 갈수록 거칠고, 고도 또한 높아지는 듯했다.
탁!
나뭇가지를 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내공과 체력이 회복되었다는 증거. 그는 그 속도 그대로 신호가 올라온 방향으로 내달렸다. 앞으로도 한참을 더 가야하고 도중에 또 쉬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속력을 줄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목적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해도 이미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계곡을 떠난 후 세 시진 정도를 소비한 것 같은데, 도중에 두 번이나 쉰 덕분이었다.
‘분명히 이쯤 어디일 텐데…….’
사자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호탄을 쏘아 올린 대략적인 위치는 어찌어찌 찾아왔다. 문제는 대원들이 어디에서 대기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천통달은 아침 햇살을 받으면 반사되어 금색으로 빛나는 바위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새벽녘이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아쉬운 듯 하늘을 보았지만 새벽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이 주위에 넘친다는 점도 장애로 작용했다.
‘이렇게 되면 이 주변을 모두 뒤지는 수밖에.’
그러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었다. 반 시진 만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뭘 하는가?”
바위와 나무가 자리한 사이, 그곳에 몸을 웅크린 채 어딘가를 주시하는 천통달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소리에 놀란 천통달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사자비는 왜 저렇게 놀라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어찌 된 일인가? 얼굴은 또 왜 그렇고?”
천통달은 사자비를 보자 놀란 표정을 추스르고 다행의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십시오.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요.”
“왜?”
순간 천통달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사자비와 헤어진 후, 하루 만에 이곳에 도착하여 야영을 했다. 다음날 새벽이 오길 기다려 금빛 바위산을 찾고자 해서다. 그리고 찾았다. 다른 무리와 함께.
“그래서?”
“동혈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놈들을 처리할 거라고 했습죠.”
“동혈이 있었나?”
“바위산 틈에 자란 숲에 교묘하게 숨겨진 동굴이 있었습죠. 그런데 녀석들도 그걸 발견하는 바람에…….”
천통달은 녀석들의 실력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 중 엄청난 고수도 있어서 대원들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고 했다. 물론, 천통달을 비롯해서 대원 두 명은 살아남았지만 붙잡히는 신세는 면할 수 없었다.
“하동강이라는 분을 아시죠? 왜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위사님이요.”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통달과 함께 보냈던 친황대의 대원이었다.
“그분이 이틀간 고생해서 제 몸을 묶은 밧줄을 입으로 끊어내셨죠.”
“그래서 도망쳤다?”
“네. 도중에 짐도 찾았습죠.”
“대원들은 어디 있나?”
천통달은 다시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모르겠습니다요. 저야 무공을 모르는 안내자인 걸 알아서 쫓아오지 않더라고요.”
“신호는 자네가 쐈나?”
“네. 도망치기 전에 하 위사님이 당부했기 때문에 아침에 모두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죠.”
하지만 사자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고수이기에 친황대를 제압했을까?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웬만해서는 당할 녀석들이 아닌데. 그에 대한 물음에 천통달은 백 명은 족히 넘는 무리라고 대답했다.
“고수의 실력은?”
“어마어마하게 강했다니까요.”
‘흑룡이나 맹주 같은 고수들이 또 있는 건가!’
하긴, 무림에서 뛰고 나는 녀석들이 몰려들었으니 그런 고수 몇 명 더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곳이 우리가 찾는 곳이 맞았나?”
“그건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며칠 동안 동혈을 수색한다고 난리를 피우기는 했습죠. 몇몇 녀석들이 속삭이는 걸 들었는데, 동혈 안쪽에 뭔가가 막고 있는 것 같기도 했습지요.”
바위에 편히 앉아 이야기를 듣던 사자비가 몸을 일으켰다.
천통달이 같이 일어서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안내하게.”
천통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요. 혼자서는 무리입니다요.”
“그곳이 진짜라면 지체할 시간이 없다.”
사자비의 무서운 시선이 천통달의 두 눈을 찔렀다. 찔끔한 천통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장서야 했다.
2
천통달을 따라 도착한 곳은 거대한 바위산이 겹겹이 둘러친, 분지와 흡사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저기 큰 바위산 보이시죠? 중간쯤에 숲이 있는 곳이요.”
천통달이 손을 들어 바위산 하나를 가리켰다. 과연 저녁노을 때문에 꼭대기가 붉게 물든 바위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아직 노을까지는 미치지 못한 때문이었다.
“숲을 돌아가면 넓은 들판이 있는데, 놈들은 거기에 있습니다요. 동혈은 거기에서 직선으로 바위산을 오르면 보이고요.”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을 고했다.
“자넨 이만 가보게.”
“예?”
“구채구를 나가서 기다리라는 뜻이다. 나중에 약속한 금액을 보낼 테니.”
하지만 천통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 혼자서 무림인이 득실대는 이곳을 나가라고요?”
말도 안 된다는 듯 천통달이 도리질을 쳤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굳은 의지가 얼굴에 담긴 얼굴이었다. 천통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사자비는 허락의 뜻을 보여주고 바위산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잠시 후, 숲을 가로지르자 마른풀이 넓게 펼쳐진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사자비는 들판을 시선으로 훑고 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야 할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쩐 일이지?’
“그래서 가지 말라고 했잖은가.”
안력을 올려 지세를 세심히 살피는데 뒤에서 천통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슬리는 말투 때문에 사자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그러나 천통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천통달은 있는데 예전의 천통달은 없었다.
음흉한 미소, 미소에 짙게 깔린 살기, 푸르게 일렁이는 빛. 모든 것이 그가 알던 천통달이 아니었다. 그 증거는 천통달이 뻗은 장심으로 확인되었다.
팡!
가슴에 붙은 그의 손이 뜨거워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엄청난 타격이 사자비의 심장을 때렸다.
“크윽!”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끌어안고 십여 장이나 튕겨나간 사자비는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어이없다는 얼굴로 천통달만 바라보았다.
천통달이 웃으며 말했다.
“소개하지. 본좌는 지옥교의 혈야대군일세!”
“혈야대군? 지옥교?”
사자비의 두 눈이 번뜩였다. 지옥교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자취를 감춘 지옥교가 왜 구채구에 있으며, 또 무슨 이유로 자신을 공격했는가.
그 이유를 천통달이라는 가명을 가진 혈야대군이 음충맞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조 태인을 너무 쉽게 봤더구나, 애송이.”
“조 태인?”
사자비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조정례?”
혈야대군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분 뒤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넨 진즉에 알아냈어야 했네.”
절로 실소를 흘러나왔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장부에 기록된 친황대의 지단은 모두 열아홉 개. 그 중 열여덟 개만 지단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남은 하나는 기록에만 있을 뿐 그 외에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조정례가 지단을 만들려다가 포기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의심 없이 흘려 넘기지 않았나.
‘그게 지옥교였나?’
황실의 지단이 아니라 조정례 자신의 개인지단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황보윤 등 태감들에게조차 비밀로 했을 것이다. 황실의 자금으로 개인 사병을 만드는 일이 발각되면 난처해질 테니까. 장부에 없다는 것만 봐도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홍규에게까지 비밀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수단으로 써먹으려고.
“하하하하하!”
크고 긴 웃음이 사자비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장력에 의한 충격 때문에 쓰러졌다지만, 오히려 그 상태로 편하게 누워 하늘을 보고 한참이나 그렇게 웃어버렸다. 두 시진 전부터 몰려오던 먹장구름은 이제 구채구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붉은 석양도 가려져서 온통 어두웠다.
신기하게도 사물을 확인할 정도의 시야는 확보할 수 있었다. 먹장구름이 은은한 빛을 뿌리는 것만 같았다.
웃음이 거슬렸던 모양, 혈야대군의 음침한 미소가 사라졌다.
“때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웃음이 나는 법이지.”
혈야대군이 그렇게 조롱했으나 사자비는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과연 그럴까!”
그러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한다는 짓이 수하의 배신을 참지 못해 뒤를 노리는 자객 따위를 고용했으니 웃지 않을 수 없군.”
“뒤를 노린다?”
이번에는 혈야대군이 코웃음 쳤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지옥교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단체가 아니다. 넌 단지 덤일 뿐.”
‘덤이라…….’
사자비는 완전히 몸을 일으켜 혈야대군을 마주 보았다.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은 했었지.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전국 곳곳의 무인들이 모여들었거든. 그렇게 떠벌릴 비밀이 아닌데도 참 많은 놈에게 정보가 흘러들어 갔구나 생각했다는 말이다. 단지, 우연이라고 넘겨버렸지만 인제 보니 네놈들의 의도적인 계획이었단 말이군.”
그렇다면 지옥교의 목적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처리가 덤일 뿐이라면 무림인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스르릉!
마라겸이 뽑혔다.
“무림일통! 충분히 달콤한 단어다. 여기 있는 모든 무림인을 처리할 수만 있다면 확실히 무림의 힘이 꺾일 테니까.”
사자비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과연,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네놈들에게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
곧이어 강렬히 타오르는 마라겸이었다. 그러나 사자비는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조정례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함정이라면 항주에서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두 번이나 실수를 저지를 조정례가 아니므로. 자신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인원과 실력자를 이곳에 모아놨음이 분명했다. 혈야대군의 여유 있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곡에서 너무 많은 내공을 소비한 상태였다.
‘일검에 죽이고 이곳을 벗어난다.’
죽일 수 없더라도 타격을 주거나 도주할 시간은 벌어야 한다. 하지만 혈야대군이 그의 마음을 모두 읽은 듯했다.
“행여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자비는 표정을 구긴 채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산 아래로 복면을 쓴 서른 명의 괴한이 일렬로 넓게 포진한 채 내려오고 있었다.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 봐, 괴이한 기운을 뭉글뭉글 풍겨대는 녀석들이었다.
“지옥접이다.”
혈야대군이 그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도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전신을 휘감은 혈의에 피풍의를 덮어쓴 사람,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체형과 면사 안으로 드러난 얼굴형태가 여인의 그것과 흡사함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혈야대군이 공손히 그녀에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면사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혈야대군이 다시 사자비를 보며 말했다.
“지옥교의 소교주님이시다.”
사자비는 조소를 머금었다.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자는 건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 설명하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주변을 살피는 여유는 얻을 수 있었다. 혈야대군까지 지옥교도는 모두 서른둘. 그것도 앞뒤로 막아선 형태. 양옆은 비어 있었다.
사자비는 눈빛으로 오른쪽으로 힐끔거렸다. 그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지만, 기만행위일 뿐이었다. 그렇게 보임으로써 막상 그가 움직이려 할 때 가까이 있는 혈야대군이나 소교주가 그 방향을 막아서게 하려는 의도였다. 막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방심은 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 방심을 노릴 생각이었다. 목표는 소교주. 여의치 않으면 혈야대군. 둘 중 한 명에게는 꼭 치명상을 입혀야 도주하는데 용의할 것 같았다. 둘 다 지옥교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다치기라도 하면 모두 쫓아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의미 없을 짓을 하는구나!”
혈야대군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바보라고 생각하나? 이렇게 넓은 공터에 앞뒤만 막아설 리 없지 않으냐?”
짜증이 솟구쳤다.
‘더 있다는 건가?’
생각과 달리 사자비는 미소를 보였다.
“꽤 준비를 많이 했구나.”
“우리만 있어도 상관없을 텐데, 네 죽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분들이 계셨다.”
그때 멀리서 내공이 가득 실린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인사 올립니다. 갈천입니다.”
사자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급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이었다. 거기에서 나무를 밟으며 숲을 가르는 이백여 명의 무리가 있었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무리가 접근해 왔다. 그 선두에는 장검을 빼든 소천룡 대주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사자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친황대가 조정례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권력에 밀려난 일개 죄인의 명을 친황대가 따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건 반역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어떤 녀석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냐?”
대답은 대원들과 함께 막 외쪽 퇴로를 확보한 소천룡이 했다.
“주동자는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황실의 부대. 상부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상부의 명령?”
“그렇습니다.”
사자비는 한참이나 실소를 흘린 후 비꼬며 물었다.
“언제 조정례가 친황대로 복직했었나.”
“아마도 지금쯤이면 관직을 회복하셨을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의미가 묘했다.
“그렇습니다.”
대답과 함께 소천룡이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오늘, 정확히 오전에 유장경 전하께서 폐하께 옥새를 물려받으셨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장경 따위에게 황제가 자리를 넘겨주지는 않을 터.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소천룡을 비롯한 친황대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천룡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나흘 전에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용좌가 바뀌기 전이라 성도에 알려야 했지만, 거리가 있어서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거로군.”
“그 사실을 전달받으며 총감의 처리도 함께 지시받았으니까요.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이 그 결과입니다.”
사자비는 쓰게 웃고 말았다. 이제 그의 편은 아무도 없는 셈이었다.
‘황제가 언짢아하더라도 죽였어야 했는데…….’
새삼 조정례를 죽이지 않았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이번에는 갈천이 입을 열었다.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겠다면 고통 없게 마무리해 드리겠습니다.”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구나!”
“이곳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구채구에 투입된 동창까지 인근을 지키고 있으니 도주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목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사자비는 조소를 흘렸다.
“난 죽을 생각도 없고, 죽지도 않겠지만, 만에 하나 죽어야 한다면 혼자 죽지는 않아.”
팟!
순간 사자비의 몸에서 얼음장 같은 기운이 뻗어나와 주변 공기를 때렸다. 냉기는 삽시간에 뇌전을 일으키고 운무를 피워올리더니 거대한 구름덩어리를 형성했다. 지옥교는 물론이요, 친황대에서도 나찰귀로를 제외하면 사자비의 진짜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사자비의 가공할 위력을 확인하고는 두려운 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반응도 잠시, 곧이어 무덤덤한 얼굴로 동서남북을 막아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구성했다. 퇴로확보, 친황대의 역할은 그것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고수한 후 사자비를 지켜만 보는데, 지옥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지옥접이라는 서른 명의 괴한들이 원을 그리듯 사자비를 포위하는 것이다.
사자비는 기다릴 생각 따윈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서 지옥접이 채 포위진을 구성하기 전에 정면으로 돌진했다. 순간 혈야대군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렸다는 듯 마라겸이 불을 뿜으며 공간을 찢어놓았다.
치이익-!
사자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대가 운무를 뚫고 들어오더니 마라겸을 맨손으로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두 손이 어검술로 타오르는 검신에 닿자 어깨까지 얼어붙었지만 혈야대군은 물러설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상당한 고통을 느꼈을 텐데 끝내 붙잡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였는가?”
고통스러운 티가 역력한 얼굴로 혈야대군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두 손이 날아가고도 그런 소리를 할지 두고 보지.”
말과 함께 사자비가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마라겸이 검명을 흘리며 요동쳤다. 검신이 폭발하듯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자비는 그대로 마라겸을 밀어냈다. 꽉 다물린 상대의 입술로 보아 힘겨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촥!
순간 손이 찢어졌다. 아니, 두 팔목이 찢어졌다. 결국, 어검술의 위력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혈야대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처참하게 뜯긴 팔목에서 피분수가 쏟아지는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자비였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선 혈야대군이 말했다.
“본좌의 별호가 왜 혈야대군인지 알고 있느냐?”
놀랍게도 혈야대군의 팔목에서 피가 뭉쳐 나오더니 꾸물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뭉쳐진 핏덩이가 본래의 그것처럼 모양을 형성했다.
‘피로 재생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또 잘라버리면 되는 것을. 그런 생각으로 다시 마라겸을 휘두르려 할 때 갑자기 팔이 무거워졌다.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마라겸을 쥔 손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팔을 내려다본 사자비는 놀랐다. 처음 쏟아낸 혈야대군의 피가 검신에 묻어 있는데, 마치 생명이 있는 듯 검신을 타고 내려와 그의 피부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백옥 같은 피부가 붉게 물들고 핏대가 선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사자비는 내공으로 그것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팔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혈야대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좌의 신체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천통달의 모습이 흐물흐물거리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구 척 장신의 붉은 형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형체도 없는, 그저 인간의 형상을 한 붉은 액체덩어리였다.
액체덩어리가 말했다.
“본좌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그분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분!’
그자가 누구인지는 당장 궁금하지 않았다.
“재밌군!”
사자비도 비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피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상대에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일. 급히 왼손으로 마라겸을 바꿔 쥐고 휘둘렀다. 처음보다 훨씬 신속하고 강한 공격이었다.
촤악!
기습에 대응하지 못한 혈야대군의 몸이 아래위로 갈라졌다. 하지만 전혀 타격이 없는 것처럼 갈라진 몸은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액체라도 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지옥접이 포위망을 완전히 형성하여 원을 그렸다.
사자비는 다급해졌다. 서른 명의 지옥접에서 괴이한 기운이 흘러나와 압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무언가가 무겁게 짓누르는 듯, 혹은 내공을 뺏어가는 듯 묘한 기분을 받았다.
‘이것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
생각과 함께 무거운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얼음처럼 차가운 장력을 혈야대군에게 쏟아냈다. 대단한 자신감을 가진 듯 혈야대군은 장력을 피하지 않았다.
쩌저적!
순식간에 흐물거리던 혈야대군의 모습이 얼어붙었다. 기회다 싶어 거기에다 마라겸을 찔러넣었지만 몸에 닿기도 전에 얼었던 형체가 녹아내렸다.
마라겸은 혈야대군의 몸을 완전히 뚫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사자비는 흡사 물속에 검을 담근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예리한 겸검이 몸을 통과했는데 고통스럽지도 않은 모양, 혈야대군은 사자비의 팔을 잡았다.
“생각은 좋았다만!”
혈야대군의 무릎이 사자비의 복부로 빠르게 찔러왔다.
퍽!
사자비는 몸을 웅크렸다. 고통을 받은 중에도 잡힌 두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혈야대군의 두 손이 그의 팔과 연결이라도 된 듯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잡힌 것이 아니라 흡수된 듯했다.
“그 정도로는 본좌를 굳게 하지 못한다.”
이어 머리에 충격이 전해졌다. 혈야대군이 머리로 들이받은 것이다. 타격 순간만큼은 쇳덩이라도 된 듯한 혈야대군의 머리였다.
사자비는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충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옥접이 주절대는 주문의 영향이 컸다. 주술로 인해 점점 무기력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빌어먹을!’
전혀 생소한 상대의 무공에 대응을 할 수 없어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목구멍까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이없군!”
갈천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친황대에서 사자비의 실력을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사자비가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음이 분명한 것 같았다. 말처럼 너무 어이없이 당하고 있어서 실소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반면, 사자비를 아이처럼 다루는 지옥교에 대한 놀라움도 커졌다.
– 저희가 처리할 테니, 대인께서는 혹시 모를 녀석의 도주에 대비해 퇴로만 확보해 주십시오.
혈야대군이 그렇게 부탁했을 때 갈천은 속으로 비웃었다. 물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신 있으니 그런 장담을 했겠지. 자신감과 달리 총감에게 당할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최소한 힘은 빼줄 거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친황대에게는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그래서 허락한 것인데, 정말 말대로 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저대로 두다가는 정말 사자비가 곧 죽을 것 같지 않은가. 제힘을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삽시간에 전신을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되었고, 되어가는 중이었다.
갈천뿐만 아니라 사자비를 잘 아는 대원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무서운 놈들이군요.”
대원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갈천이 말했다.
“과거 무림을 공포에 몰아넣었다더니 과장은 아닌 것 같군. 하나, 강하다기보다는 특이한 힘을 가졌다고 봐야 옳겠지. 단지, 강한 것뿐이라면 대응을 할 수 있겠지만, 워낙 특이한 능력이라서 상대하려면 꽤 애를 먹을 녀석들이다.”
“지옥교의 교도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이 끝난 후에 계속 주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갈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친황대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지옥교가 집단전에서 친황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녀석들의 능력 또한 친황대 입장에서는 껄끄럽게 작용할 것이다. 특히, 혈야대군 같은 상층부의 고수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사자비조차 아이 다루듯 하고 있으니…….
“그런데…….”
대원이 의문을 품은 시선으로 떠듬거렸다.
“조금 전 말이 사실입니까?”
“뭔가?”
“둘째 전하께서 옥체를 물려받으신다는.”
아직 갈천 등 지휘관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 대원들은 전달받지 못했다. 대원들은 상부의 지시라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갈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혹시, 실패를 할 가능성도…….”
“실패?”
갈천이 웃었다. 대원의 말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황제를 바꾸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라면 수십 번도 더 바뀌었을 테니까. 그러나 역모의 결정적인 실패 원인은 언제나 사전발각이고 발각되는 순간 거의 실패라고 봐야 하는데, 이번은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태감들이 주최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황제의 아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때론 반란에 성공하고도 주모자의 신분이 발목을 붙잡아 제이 제삼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유장경은 형제들까지 모두 죽이고 옥좌에 앉을 거라고 했다. 그간 있어왔던 찬탈의 공식처럼 명분을 확고히 할 거라고 들었다. 첫째부터 막내 황자까지 죽이는 일이었다.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뒤를 도모할 싹까지 제거하고자 공주들까지 처리하기로 결정되었다고 전달받았다.
“실패는 없다.”
갈천은 확신하는 것처럼 말했다.
“혹 실패하더라도…….”
가능성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갈등의 빛이 드러났다.
“지금의 일은 황실과 상관없다.”
작전 수행 중 사자비가 불의의 사고로 무림인에게 죽었다고 보고하면 그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대원들에게 하지 않았다. 황실에 몸담은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 보고를 해야 자신들에게도 뒤탈이 없다는 것을 대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퍽퍽!
타격음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자장가처럼 느껴질 지경. 갈천은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사자비는 이리 맞고 저리 터져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패대기쳐지는데 몇 번이나 오뚝이같이 일어나서 혈야대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집착, 어쩌면 아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군. 지옥접이라고 했나?’
갈천은 저들이 만든 진법이 사자비의 내공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다.
“허무하게 끝나는군!”
서서히 구채구를 향해 몰려오던 먹장구름이 이제는 완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저 구름 또한 지옥교에서 펼친 주술임을 갈천을 잘 알고 있었다. 사자비 뿐만 아니라 지옥교와 관련되지 않은 모든 무인은 구채구를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 ☆ ☆
우르릉! 쾅-!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했지만, 이런 상태는 한참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흑룡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절로 탄성을 흘렸다. 사자비를 쫓던 중 갑자기 녀석의 기척이 사라지는 바람에 한참을 헤매지 않았나. 그러다 녀석의 진로가 북쪽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에 곧장 비슷한 방향을 목적지로 삼아 무작정 달려온 그였다. 그리고 지금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도망치듯 가버리더니 이상한 녀석들에게 포위당해 곤죽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사자비의 실력을 한 번 확인해 봤던 흑룡으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그보다 죽을 자리로 도망쳐왔던 사자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딱 보아도 우연히 마주친 것 같지 않았다. 놈들은 작정하고 사자비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사자비도 이곳을 목적지로 여겼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철저히 포위망이 구성되고, 그사이 도망치지 못할 사자비가 아니었다.
동생의 복수 때문에 격해진 감정은 사자비를 쫓던 중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이성을 찾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사자비를 발견하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남의 손을 빌려 원한을 갚을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원수가 늙어 죽기를 바라는 것과 지금이 뭐가 다른가. 자신의 손으로 하지 못할 복수는 복수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와줘야 할 텐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저놈의 어디가 예뻐서 도와준단 말인가.
이래저래 고민만 가득해지는데, 그때 사람 같지도 않은 붉은 인형에게 맞아 날아가는 사자비를 보았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형성된 모양이었다. 날아가던 사자비가 무언가에 부딪히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아마도 원을 형성한 서른 명의 괴한과 관련 있는 것 같았다.
‘저런 건 주술로만 가능할 텐데……, 잔월신교인가!’
흑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월신교는 지금 계곡에 있었다. 분명한 건 잔월신교의 그것과 녀석들의 분위기가 또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까마득하게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계곡에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걱정을 떨쳐버렸다. 잔월신교가 구파일방을 위협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잔월신교와 구파일방의 전면전을 뜻했고 수라천군도 그건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입을 막아야 할 텐데, 그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흑룡 자신이 이미 그곳을 빠져나와 버렸으니까. 흑룡이 결정적인 증인이 된 셈이었다.
무엇보다 수라천군의 성품을 그는 믿고 있었다. 수라천군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인자한 얼굴 이면에 아주 냉철하고 계산적인 면모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이미 차지할 수 있는 동혈을 두고 무리하게 사람들을 핍박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수라천군에게는 있었다. 굳이 잔월신교를 향해 비수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그냥 보내줄 것이다.
‘그래도 가서 확인은 해 봐야지.’
아쉽지만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몸을 돌리려는 그 사이 공교롭게도 녀석과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흑룡은 움찔했다. 괜히 내심을 들킨 기분이랄까!
‘어!’
표정도 구겨졌다. 붉은 인형에 목줄을 잡힌 녀석이 웃고 있지 않은가. 입가에 한줄기 미소, 그건 비웃음? 혹은 조롱?
남의 위기를 보고도 도망치는 그런 놈이라고, 정파니 뭐니 해도 별수 없는 놈이라고, 자신에게 비겁하다고 소리쳤지만 너도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저놈이 누구한테!”
들리지도 않을 텐데 흑룡은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꿀꺽 침을 삼켰다. 사자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런다고 도와줄 줄 알고?’
생각과 달리 몸이 앞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흑룡도 알 수 없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는 이유는?
그런 상태로 황금신공이 쌍장에서 발휘되는 이유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금강역골경으로 몸에 변화를 주는 이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흑룡이 소리쳤다.
“넌 내 손에 죽어야 돼.”
변명처럼 소리친 후에 그의 쌍장이 빛을 발했다. 곧이어 강렬한 황금빛 장력이 서른 명의 지옥접을 덮쳤다. 보고 피할 여유도 없는 쾌속한 공격이었고 그 때문에 잠시 혼란해진 틈이 생겼다. 흑룡은 그 즉시 금강역골경으로 몸을 변화시켰다. 은연중 지옥교에 대한 기세를 느꼈기에 단번에 황금역골경의 완성체로 변화를 시도했다.
제5장 악인은 무겁다
1
콰쾅!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금빛 장력이 폭발을 일으키며 잠깐이나마 주위를 대낮처럼 밝혀 주었다.
갈천과 소천룡의 표정이 구겨졌다. 지옥접의 주술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이 언짢은 것은 아니다. 정작 그들을 기분을 상하게 했던 이유는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거기다 불청객의 실력이 놀랍도록 뛰어났다. 눈으로 쫓지 못할 속력을 가졌고 가공할 위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쏴악!
불청객의 손짓 한 번에 혈야대군의 몸이 두 개로 갈라질 줄은 몰랐다. 혈야대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신체의 변화는 없을 듯했다. 갈라진 몸이 끈적끈적한 꿀처럼 다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둘 줄 알았겠지?”
불청객, 흑룡이 그렇게 말했다. 불같이 타오르는 눈, 황금빛을 옷처럼 입고 있는 표정이 흡사 화마(火魔)와 같아서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도 수십 번씩 들끓어 오르고 죽어버리는 기운은 혈야대군까지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흑룡이 끓어오를 때 심장이 같이 끓는 느낌을 받고, 죽어버릴 때도 함께 식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 반복이 너무 빨라서 혈야대군은 호흡까지 곤란한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놈은!’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흑룡의 두 손이 그의 양쪽 가슴을 후벼 팠다. 혈야대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뜨거운 열기를 느꼈기 때문. 액체로 구성된 몸이 심장에서부터 전해지는 불타는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비명이 터져 나온 후 그의 가슴은 흑룡의 두 손에 의해 완전히 찢겨졌다. 뒤이어 흑룡의 몸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불길은 그 힘을 증명하듯 주위 오 장여를 단숨에 삼키려 했다.
불길을 피해 물러서려던 혈야대군이었지만 찢겨진 몸으로는 이동이 용의하지 않았다. 채 몇 걸음 물러서기도 전에 붉게 흐물거리던 신형이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녹기 시작했다.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이 잔상처럼 남았지만 그마저도 곧 사라져버렸다.
흑룡은 거짓말처럼 혈야대군을 제압해 버리고 몸을 돌렸다. 혈야대군을 상대하는 사이 다시 구성된 지옥접의 주술을 감지한 것이다. 이제 여섯 명이 사라진 지옥접의 주술은 처음보다 힘을 잃은 것 같았다. 남은 이들도 장력의 폭발에 의해 대부분 타격을 받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주술을 파괴해야 했다. 직접 주술 속에 들어와 있으니 확실히 사자비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공이 계속 빠져나가는 현상이 확연히 느껴지고 몸도 천근처럼 무거웠다. 무기력함도 느껴지는 듯했다.
쉬익!
간단하고 편한 동작처럼 그의 손이 비스듬히 허공을 갈랐다. 보기에는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거기에서 쏟아지는 기운은 단순하게 볼 수 없었다. 허공을 그리는 그의 손끝에서 이글거리는 금빛 불길이 늘어지더니 채찍처럼 하늘을 휘감았던 것이다. 둥글게 감긴 불길은 이내 펴져서 공간을 때렸다.
치치칙-!
순간 뻗어가던 불길이 무언가에 막힌 듯 튕겨 나와 흩어졌다. 그 결과 주술의 정체가 드러났다. 불길에 부딪히는 순간 막이 뇌전을 일으키며 잠깐 그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주술은 지면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검은 막이었다. 반구형의 모습이 지옥접이 위치한 원을 경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악한 기운이군!”
흑룡은 다시 한 번 손을 저었다. 같은 불길이 전보다 더욱 강렬한 힘을 발휘해 허공을 때렸다. 또다시 뇌전이 일어나더니 반구형의 검은 막이 모습을 비췄다가 사라졌다. 그사이 지옥접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낮게 주문을 중얼거리는 모습도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흑룡은 다시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지옥접이 몇 걸음 물러섰고, 몇몇은 입가로 선혈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지옥접 사이를 뚫고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그림자는 거침없이 흑룡에게 달려들었다.
흑룡은 막을 때리던 동작을 잠시 멈추고 접근하는 그림자를 확인했다. 면사를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좋은 의도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를 향해 주먹을 뻗고 있었으니까.
연이어 내공이 빠져나가는 느낌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막을 파괴해야 했지만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괴한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 여전히 강기를 쏟아내며 막을 부수고, 다른 손을 움직여 마주 주먹을 뻗었다.
쾅!
드디어 막에 금이 가고 지옥접 몇 명이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흑룡의 주먹과 괴한의 주먹이 부딪혔다.
흑룡은 깜짝 놀랐다. 주먹으로 전달되는 충격 때문만은 아니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팔에 전해지는 느낌 때문이었다.
‘의수?’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괴한의 팔목이 부서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기이한 문자가 촘촘히 새겨진 쇠로 만든 의수였다. 바닥에 부서진 팔목이 떨어지면서 쇳소리도 흘러나왔다.
‘쇠를 의수로 달고 있는 녀석이라!’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팔목이 떨어져 나간 부위에서 예리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칼날은 무섭게 흑룡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생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사람을 살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의수가 분명했다.
흑룡은 급히 막을 한 번 더 때리고 손을 내려 의수를 잡아냈다. 이미 금이 간 막은 이어지는 흑룡의 화기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남아 있던 지옥접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넘어지는 것과 동시였다.
칼날을 잡은 흑룡의 손이 반 바퀴 돌았다. 그 방향으로 칼날이 구부러지고, 잡은 손아귀에 날이 선 몸통이 비명을 지르며 우그러졌다. 그 상태 그대로 흑룡의 발이 움직였다.
퍽!
괴한의 복부에 그의 발이 꽂혔다. 연이어 가슴과 얼굴에 충격이 가해졌다.
괴한은 타격을 받아 물러서려 했지만 흑룡이 여전히 의수에 연결된 칼날을 쥐고 있어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흑룡 쪽으로 당겨져서 다시 주먹을 맞았다.
팡!
화끈한 통증이 아마도 얼굴 전체에 전해졌을 것이다. 얼굴을 가렸던 면사조차 불타는 주먹의 의해 재가 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아플까. 그러나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흑룡이었다. 그는 이번에 정말 놀랐다. 재가 되어 꽃잎처럼 흩날리는 면사 뒤로 드러난 얼굴이 여인의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여인의 얼굴도 아니다. 반쪽이 의수와 마찬가지로 싸늘한 쇠로 만들어진 얼굴이었다. 흑룡의 주먹 때문에 구겨진 흔적이 남겨진 얼굴이었다.
재차 주먹을 날리려던 흑룡이 멈칫했다.
고통이 없는 듯 그때를 노린 여인의 주먹이 흑룡의 가슴을 때렸다.
흑룡은 일격을 맞고 멍한 표정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생각보다 여인의 주먹이 강해서 가슴이 아려왔지만, 그보다 미안한 마음을 느끼는 터였다.
‘찌그러진 부위를 피려면 꽤 고생할 텐데.’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짜증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자식. 주저하지 말고 죽여.”
사자비였다. 주술이 깨진 덕분에 약간의 기력을 회복한 그였지만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흑룡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래도 여잔데…….”
사자비는 일고의 여지도 없었다.
“죽여!”
하지만 흑룡은 주저하다가 다시 여인의 주먹에 맞았다.
휘청대며 쓰러지는 그를 보며 사자비는 힘을 쥐어짰다. 저대로 두다가는 몇 대 더 맞을 분위기가 아닌가. 지금 그에게는 흑룡이 이곳을 벗어날 마지막 수단이었다. 녀석이 당하도록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정말 멍청한 놈이군!’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섬전처럼 날아간 그가 여인, 소교주를 향해 마라겸을 휘둘렀다. 소교주는 손을 들어 검로를 막았다.
캉!
쇳소리로 보아 남은 팔도 의수인 모양, 그러나 어검술을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팔목이 기이할 정도로 꺾였다. 그 팔이 사자비의 멱살을 잡았다.
사자비는 일변 물러서고 일변 발을 놀려 소교주의 가슴을 때렸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도 다른 의수로 사자비의 복부를 찍고 있었다. 흑룡에 의해 구겨진 칼날이 달린 의수였다.
“크윽!”
화끈한 통증이 복부에 전해지더니 곧이어 피가 넘쳐흘렀다. 그때 멱살을 놓은 손이 사자비의 얼굴을 강타했다.
퍽!
사자비는 피를 뿌리며 뒤로 넘어갔다. 얼굴을 때리는 중에 입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는 것도 느껴졌다.
‘뭐지? 독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는 넘어지면서 마지막 저항으로 소교주의 가슴을 걷어차 거리를 벌리는데 성공했다. 꽤 강한 타격이었는데도 그녀의 얼굴에선 고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위협은 되었는지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약간의 여유를 가진 사자비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멍한 얼굴의 흑룡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소교주를 보고 있었다.
“내, 내가 왜?”
“그럼, 혼자 저 녀석들을 전부 상대하겠다는 거냐?”
그는 주위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친황대를 가리켰다.
흑룡이 코웃음 치며 일어났다.
“못할 것도 없지.”
사자비도 코웃음 쳤다.
“지금 그 상태를 이 각 이상 유지할 수 없다면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왜?”
“저들은 황실의 고수, 강호를 굴러먹은 여타 무인과는 다르다. 군사 훈련을 받아서 정면으로 널 상대하지 않는다에 만 냥을 걸 수도 있다. 끊임없이 괴롭히며 네 힘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겠지. 그걸 버틸 자신 있나?”
흑룡이 뜨끔하더니 더욱 표정을 구겼다. 황금역골경의 최대 단점은 내공이 모두 사라지면 저절로 풀린다는 것이었다. 또한 황금역골경의 완성된 상태를 반 각 이상 유지한 적 없는 그였다. 일대일 상황에서는 무적이 되지만 다수를 상대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진다면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완성체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 내에 모두 제압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역골경이 풀리면 몇 시진 동안 내공을 쓰지도 못한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황실의 고수? 흠!”
“병법, 진법을 제대로 훈련받은 녀석들이지. 실력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사자비는 말을 하면서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설득조차 시간 아까웠다. 하지만 흑룡의 얼굴에 자존심 상한 표정이 담겨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혈야대군에게 맞았던 충격과 독기운이 지금에야 몰려오는지 정신이 점점 흐릿해지는데, 흑룡은 여전히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한심한 녀석, 곧 죽어도 무림인이라 이거냐!
그래도 정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자비는 일부러 조바심을 보이지 않고 기다렸다.
과연, 계산을 마친 흑룡이 사자비를 어깨에 걸쳐 멨다.
그냥 떠나기는 아쉬웠던 모양, 흑룡이 무섭다는 듯 말했다.
“널 도와주려는 건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 마라. 단지, 무슨 사정으로 내 동생을 죽였는지 그 이유를 듣고 난 후에 혼내주겠다는 뜻이다.”
‘동생을 죽여?’
사자비로서는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흑룡의 몸이 잔뜩 웅크려졌다. 그렇게 한 발 앞으로 내디뎠을 때, 바람을 가르듯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도중에 친황대 몇 명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옆으로 살짝 비켜나가는 행동으로 간단하게 피해버리고 단숨에 포위망을 뚫었다. 그제야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친황대가 흑룡의 뒤를 추격했다.
모두 떠난 자리엔 지옥교만 남아 있었다. 지옥접들은 급히 소교주에게 달려와 상태를 살폈다. 두 팔은 이미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고 얼굴과 몸도 부서져서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소교주는 무덤덤한 얼굴로 멀어지는 친황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지옥접 하나가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교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듯 그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힘을 다하지 않으셨는지요?”
처음으로 소교주의 입이 움직였다. 외모와 달리 맑고 깨끗한 음성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보였느냐?”
“소교주님이라면 결코 이렇게 당하지는…….”
그녀가 내공을 이용하지도, 주술을 사용하지도 않았음을 지옥접은 알고 있었다. 순수한 기계의 힘으로 흑룡과 사자비를 상대했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게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소교주는 한동안 말없이 지옥접을 바라보았다.
지옥접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나선 것이다.
“저희가 무능하여 소교주님까지 손을 쓰게 했습니다. 용서를!”
“그보다 혈야대군을 치료해라.”
그때 땅이 흔들리며 붉은 물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체는 곧이어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혈야대군으로 변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억눌린 목소리가 그의 심경을 말해주는 듯했다.
소교주가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충격이 컸을 텐데?”
“애송이에게 당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인데, 어찌 치료까지 받으라 하십니까. 염려 마십시오. 곧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그분께서 구채구로 들어오셨다니 본대와 합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대는?”
혈야대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다.”
“알고 있습니다. 무림에 그만한 능력을 가진 고수가 수라천군 외에 또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지요. 그러나 노부도 방심하지 않는다면 쉽게 당하진 않을 겁니다.”
소교주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본대와 합류하여 그분의 허락을 받아라. 난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혈야대군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달리 근심이라도 있으신지!”
소교주는 말없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듯 혈야대군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자신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왔다. 소교주를 호위해야 할 지옥접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소교주도 심각한 상태. 몸은 본대와 합류한 후에 교체하면 그만이지만 내상은 당장 치료해야 할 것 같았다.
“천환단(天換團)을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소문은 부풀려진 것이지만 원기를 회복하고 내상을 치료하는 면에선 세상 어떤 것보다 뛰어나 약제가 천환단이다. 천금의 가치를 지닌 그것을 소교주는 교주에게 선물 받았고,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혈야대군은 알고 있었다.
‘저 상태로 어찌 버티시려고.’
그러나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소교주 앞이라 호기를 부렸으나 그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혈야대군은 침음을 흘렸다. 가슴에서부터 엄습하는 고통이 전신을 찌르는 듯했다.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단 한 녀석에게 지옥접의 주술이 깨지고 본좌까지 꺾이다니…….’
조용히 걷던 그는 이를 갈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맹수의 신음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교도와 소교주가 보는 앞에서 꺾인 자존심이라 더욱 그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었다.
“제길!”
달리는 중에도 흑룡은 몇 번이나 짜증을 냈다. 황궁무사가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지 알 수는 없지만 금강역골경의 완성상태라면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 각? 우스웠다. 그들을 처리하는데 반 각도 필요치 않을 자신 있다. 물론, 그건 녀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때의 얘기고, 사자비의 말처럼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비겁한 놈들이라면 낭패를 볼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적어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결론은 도망쳐야 한다는데 기울어져 있었다. 그게 기분이 나쁜 것이다. 정확히 금강역골경을 반 각밖에 유지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에 짜증이 솟구쳤다.
괴한들을 상대하면서 지체했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는 것도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니 금강역골경이 풀리기 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젠장, 내가 왜 이런 놈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하지?’
어깨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사자비를 보자니 또 짜증이 솟구친다.
그는 속력을 더해 빛살 같이 달렸다. 이렇게 경공술을 펼치면 달리는 흑룡조차 앞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시야가 좁아지지만 그 때문에 친황대를 일찌감치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따돌려야 하는 놈들이 친황대만은 아닌 것 같았다.
“멈춰라!”
흑룡은 소리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저 앞 나무숲을 뚫고 붉은 인형 몇 개가 솟구쳐 올라왔다.
‘저건 또 뭐냐?’
그들이 동창 위사라는 사실을 흑룡은 알지 못했지만 황궁과 관련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졌다. 그는 그대로 돌진해서 한 녀석의 턱을 걷어찼다.
위사는 이미 흑룡의 동작을 짐작한 얼굴이었는데도 달려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턱을 얻어맞고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흑룡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다른 위사가 급히 신호탄을 터뜨리고 남은 녀석들은 암기를 던졌으나 놀랍게도 흑룡은 암기보다 빨랐다.
위사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는 중에도 흑룡은 멀어져서 점이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위사들과의 거리를 십 리로 벌린 흑룡의 속도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검게 굳어 있었다. 혈도가 역류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 예고 없이 금강역골경이 풀려 버린다. 바위산에서 출발한 지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지경이라면 사자비의 충고를 잘 들은 것 같았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풀릴 것 같지 않은가. 친황대를 상대했다면 아마도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추격자들을 따돌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속도를 더욱 늦춘 흑룡은 내공이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금강역골경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내공이 소진된 상태였다. 금강역골경을 풀기 무섭게 급격히 속력가 늦춰지더니 거기에 적응 못한 흑룡은 발을 헛디뎠다.
콰당!
달리를 상태로 나무에 다리가 걸려 결국 바닥에 떨어졌다. 덕분에 사자비가 잠깐 정신을 차렸지만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렸다.
“이, 이봐. 괜찮아?”
급히 다가온 흑룡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맞아서 기혈이 뒤틀리고 오장육부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끓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열이 나는 것도 문제였다. 외상은 더 심했다. 전신이 상처와 멍으로 도배되었는데, 처음보다 더욱 부어올라서 건드리기만 해도 아플 것 같았다.
흑룡은 재미삼아 한 번 건드려 보고 사자비가 신음을 흘리자 자신이 아픈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안!”
신음하는 중에도 사자비가 낮게 중얼거렸다.
“물. 물을…….”
“물?”
흑룡은 인상을 찡그렸다. 추격자들을 따돌렸지만 아직 안전하지 않았다. 그도 달리는 중에 몇 번의 신호탄을 보았다. 추격자들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분명하다. 그건 자신이 어디로 도주했는지 녀석들도 방향을 짐작했다는 뜻이었다.
“물을…….”
흑룡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어디서 물을 구하란 말이냐!”
그리고는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껴서 어두컴컴했다. 간간이 번개가 섞여 번쩍거리는 모습이 폭우라도 쏟아낼 듯하지만, 폭우는 고사하고 이슬비도 내리지 않았다.
“젠장, 기다려!”
그는 사자비를 풀숲에 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계곡과 호수가 많은 구채구라 주위를 살펴볼 심산이었다.
2
사자비는 몽롱한 중에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었다.
‘세 명인가!’
홀로 된 지 이 각이 훌쩍 지났지만 와야 할 흑룡은 오지 않았다.
‘바보 같은 놈, 더 멀리 달아났어야지.’
아니라면 도주 중에 방향을 한 번은 바꿨어야 했다. 너무 정직하게 한 곳으로만 도망치지 않았나. 도대체 무공이 강한 것 빼고 무엇 하나 믿을만한 구석이 없는 녀석이었다. 어쩌면 무림의 경험이 없는 녀석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곤란한 지경에 빠져버렸다.
많은 무림인이 구채구에 들어와 있으니 아직 접근하는 녀석들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리는 계속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다행히 놈들은 그가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녀석들이 만약 친황대나 동창이라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흔적을 찾는 데는 귀신같은 녀석들이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천운이었다. 근처에 흑룡이 만들어놓은 흔적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사자비는 한참이나 쥐죽은 듯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려왔다.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도 속이 뒤틀리는 고통 때문에 욕지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이대로 자리를 지킬 수만은 없었다. 흑룡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곳에서 좀 더 멀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녀석들이 다시 되돌아올 가능성도 있고, 그때도 발각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조금씩 흔적을 지우면서 이동하는데 몸이 불편하니 한 걸음 옮기 것조차 힘이 들었다. 비틀거리며 나무를 짚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그런 흔적을 지우며 이동하는 시간도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런 속도라면 제발 녀석들이 친황대가 아니길, 그곳을 다시 지나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과 죽음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고통을 선택해야 하므로.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물소리가 들렸다. 거친 소리로 보아 인근에 급류가 형성된 계곡이 있는 듯했다.
사자비는 표정을 구겼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물이 있는데, 흑룡은 어디로 간 건가. 생각할수록 한심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흑룡도 바보처럼 주변만 헤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사자비보다 더욱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는 몸을 숨긴 채 한동안 숨어 있어야 했다. 이유는 괴물의 등장 때문이었다. 괴물은 무시무시했다. 단 한 녀석이 오십 명의 무사들을 도살하는 모습, 혹은 학살에 가까운 형식으로 죽이는 모습은 전율이었다. 상대가 대부분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수임에도 괴물에게는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쉽고 간단하게 목숨을 빼앗기고 있었다.
‘도, 도대체 저게 뭐야?’
흑룡은 숨죽인 상태에서 입만 벌렸다. 검게 죽은 피부에 삐쩍 마른 몸. 흡사 말라비틀어진 시체 같은 녀석이었다. 두 눈에 파란 안광을 뿌리며 사납게 날뛰는 모습이 꿈에라도 나타날까 무섭다. 몸도 강철 같았다. 혼전 중에 몇 번이나 검에 맞았는데, 깨지거나 튕겨 나올 뿐이었다. 놀랍게도 녀석의 피부는 흠집조차 없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가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리였다. 금강역골경 때문에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라 시체만 한 구 늘려주게 될 것이다.
삽시간에 오십 구의 시체가 바닥을 메우고 괴물은 먹잇감이 더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흑룡은 더욱 숨을 죽였다.
잠시 후 그곳으로 검붉은 혈의인들이 몰려왔다. 무리에는 괴물과 흡사한 녀석들이 더 섞여 있었다. 흑룡은 혈의인들이 사자비를 죽이려 했던 무리와 한통속임을 알아보았다. 복장도 같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잔월신교는 분명히 아니야. 근처에 규보의 보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처음 괴물을 목격할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원한 때문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괴물이 갑자기 나타났고, 나타날 때처럼 갑자기 무사들을 공격했으니까.
그때 혈의인들이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흑룡은 귀를 쫑긋 세웠다.
“벌써 두 번째군요.”
“움직인 시간을 것을 고려하면 그리 많은 횟수는 아니지. 서둘러야겠다. 열흘 안에 구채구를 완전히 정리해야 하니.”
그러자 혈의인 몇 명이 괴물 한두 마리씩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머지는 그 자리에 쉬면서 대기하려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괴물이 숲을 뒤지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바로 처리하고, 그 사이 쉬고 있는 녀석들이 연락을 받고 그곳으로 달려가는 방식 같았다. 괴물이 처리하지 못하면 그들이 처리를 하기 위해서.
어쨌건 흑룡으로서는 놀라운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저들이 누구이건 간에 구채구에 있는 무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규보에 대한 정보가 미끼일지도 모르겠어. 무림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어지자 계곡에 두고 온 승려와 도사들이 걱정되었다.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녀석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은데, 자칫 기척을 노출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빌어먹을. 내공만 돌아왔어도 저런 녀석들은 문제가 아닌데.’
괜스레 사자비가 원망스러웠다. 그와 얽힌 후로 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녀석은 잘 숨어 있으려나!’
사자비는 잘 숨어 있지 못했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숲이 끝나는 경계지점에서 동작을 멈추고 굳은 듯 서 있었다. 무기라고는 품속에 있는 몇 개의 암기와 비수가 전부. 앞에는 길이 끊어진 절벽이었고 그 아래에서 바람과 함께 급류의 거친 물살이 거센 소리를 내며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건너편으로 날아갈 수 없을 듯했다. 결국 피할 곳이 없는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그런데 한 놈은 어디 있는 거요?”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정확히 나무 위였다. 거기에 세 명의 동창 위사가 살기에 물든 눈을 드러낸 채 있었다.
사자비는 녀석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춘 이유도 그들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녀석들을 살폈다.
“알고 있었나?”
위사가 비소를 머금었다.
“흔적을 놓칠 우리가 아니지. 단지, 총감께서 녀석과 함께 있는지 파악하려 했던 거요. 그래서 그냥 지나쳤지. 녀석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거든.”
스르릉!
세 개의 칼날이 드러났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진 상태인데, 녀석들의 검은 푸르게 빛나는 듯했다.
사자비는 절벽을 힐끔 보았다. 위사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 몸으로 저길 뛰어 넘으시려고?”
다른 위사가 말을 받았다.
“넘을 수 있다고 해도 멀리 가지는 못할 거요. 이미 신호를 쏘았으니까. 조만간 이곳으로 동창과 친황대 전부가 몰려올 거요.”
“그래도 시도는 한 번 해보고 싶군.”
말과 함께 사자비가 몸을 날렸다. 전신에서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위사들이 움찔하더니 사자비를 쫓아 달렸다. 그러나 사자비의 행동은 속임수였다.
그는 위사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암기를 날렸다. 과연 동창의 위사답게 대처가 빨랐다. 간단하게 암기를 피하고 사자비의 양옆으로 두 명이 이동했다. 남은 한 명은 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쉬이익!
예리한 검끝은 사자비의 복부를 노리고 있었다.
사자비는 피하지 않았다.
푹!
차가운 쇳덩이가 몸속을 파고드는 느낌이 몸을 경직시킨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의도한 대로 몸에 힘을 주고 왼손으로 검이 빠지지 않게 단단히 검신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품에서 꺼낸 비수를 움직여 녀석의 목을 향해 찔러넣었다.
무림인이었다면 열 중 여덟아홉은 당했을 것이다. 무기는 그들의 생명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검을 놓으면 수치로 여겨야하므로. 그러나 상대는 동창의 위사였고, 그런 자존심 따위는 애초에 없는 녀석이었다. 위사는 급히 검을 놓고 물러섰다. 자연히 비수는 허공만 갈랐다.
물러난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달려들었다. 잠깐 사이에 그의 손이 사자비의 가슴을 때리고 뒤이어 턱을 향해 발을 올려쳤다.
사자비는 충격에 몸을 싣고 삼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넘어졌다.
아찔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가슴뼈가 부러지고, 턱이 망가졌을 것이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이번은 치명타 같았다.
때를 노린 두 명의 위사가 사자비의 가슴을 밟고 팔을 제압했다. 남은 녀석은 복부에 틀어박힌 검을 뽑아낸 후 그것으로 목을 겨누었다. 울컥 북부에서 피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며 위사가 말했다.
“너무 원망 마시오. 우리는 명령에 죽고 사는 졸자일 뿐이니.”
사자비는 신음하는 중에도 조소를 흘렸다. 사실 녀석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억울한 마음이 치솟고, 다음으로 분노가 끓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자 그렇게 고생을 했던가. 조정례 보다, 지옥교 보다, 친황대 보다, 지금 그의 몸을 망가뜨린 동창 위사들 보다 자신에게 화가 났다.
가물가물한 시선을 들어 목에 겨눠진 검을 보았다.
바늘 끝처럼 예리한 검날이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게 보인다.
검끝이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사자비는 계속 웃었다. 그때 아련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뭘 하나?”
막 사자비의 목을 뚫으려던 검이 멈췄다.
위사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거기에 막 도착한 세 명의 동창이 있었다. 팔품의 위령과 두 명의 위사였다.
“너희가 신호를 올렸나?”
“그렇습니다.”
“총감은?”
“여기…….”
위령이 다가와서 사자비를 내려다보았다.
“운이 좋았군. 친황대보다 먼저 찾을 수 있어서.”
검을 겨누고 있던 위사가 음침한 미소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결국, 동창의 공이 되는 셈이죠.”
“자네들의 공이라고 봐야겠지. 수고 했네.”
“감사합니다.”
그러자 위령이 검을 뽑았다. 위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직접 하실 생각입니까?”
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을 옮겨 사자비의 가슴에 대더니 갑자기 옆으로 휘둘렀다. 순간 검망을 뿌리던 검이 위령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크윽!”
짧은 비명 세 개가 터져 나오고 비명을 지른 세 위사가 목이 잘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눈빛도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죽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위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위령은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 증거를 없애면 누가 알겠나.”
그러면서 사자비를 살폈다.
“이봐. 정신 차려. 이봐.”
아무리 흔들어도 사자비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때 위사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누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서 정리를.”
말과 함께 두 위사가 먼저 몸을 움직여 죽은 세 동료를 옮기기 시작했다.
위령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자비를 안전한 곳에 숨겨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그는 급히 사자비를 들쳐메고 절벽으로 움직였다.
‘이 상태로 떨어지면 살아나기 힘들 텐데…….’
잠시 주저하는 사이 뒤에서 위사가 재촉했다.
“어서요.”
위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젠 네 운에 맡길 수밖에.”
그는 망설임 없이 사자비를 아래로 던졌다. 거친 물살은 사자비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삼켜버렸다.
“총감은?”
갈천은 인사를 생략하고 먼저 도착한 위사들을 향해 물었다.
상급자인 듯한 젊은 청년이 앞으로 다가와 포권했다.
“저희도 신호를 받고 왔습니다만, 이미 대원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놓쳤다는 말인가?”
갈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다만,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시신은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갈천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총감의 죽음을 확신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발견했을 당시 부상이 심한 상태였고, 제 검에 몸이 꿰뚫렸습니다. 급소였으니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란 소린가!”
이번에는 청년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총감을 잡는 과정에서 동료를 셋이나 잃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일부러 총감을 놓아주기라도 했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실수했다고 판단한 모양, 갈천의 표정이 풀렸다. 같은 동창 소속이라지만 엄연히 부서가 다른 것이다. 대영반 홍규의 지휘를 받는 녀석들이라 함부로 추궁할 수는 없었다.
“오해 말게. 시신을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다는 뜻이네.”
청년의 표정도 누그러지더니 다시 공손한 태도가 되었다.
“물길을 따라 수색하면 시신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네. 동창은 그쪽 일을 맡아달라고 장 당두께 전해주게.”
“그럼, 친황대는…….”
“따로 받은 지시가 있으니 그 일을 맡아야 하네. 당두께 그리 전하면 알걸세.”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이름과 직책은?”
“소정동. 직책은 위령입니다.”
“기억해두지.”
말과 함께 갈천 등 친황대는 대원들이 모두 도착하길 기다려 작전회의를 하더니 곧장 그곳을 떠났다. 그들을 보며 소정동은 실소를 흘렸다. 그는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규보의 비급을 얻는 일이었다. 사자비의 처리와는 별개로 애초 임무는 이행하려는 것이다. 그건 하나의 안전장치와 같았다. 친황대도 무식하게 싸움만 잘하는 녀석들은 아닌 것이다.
소정동도 황실에 대한 보고를 한 시진 전에 장 당두에게 들어 알았다. 그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자비에게 귀띔해줬을 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장 당두는 황제의 위가 바뀔 가능성이 구 할이라고 했다. 때문에 친황대와 마찬가지로 사자비의 척결에 동참할 것이라 했다. 예상대로 황제가 바뀐 후라면 내려진 지시를 이행해야 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테니까. 하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애초 명령대로 규보의 비급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즉, 사자비는 척결하되 황실의 일과는 무관하게 본연의 목적도 충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황제의 자리를 지키든 못 지키든, 권력이 바뀌든 안 바뀌든 동창이 책임질만한 여지는 조금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황실과 수천 리 떨어진 곳이니, 모반이 실패하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노라고 주장하면 되는 것이다. 그 증거로 규보의 비급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비급은 모반과 동창이 상관없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물론, 동창 대원 전원이 함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런 일은 동창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성공하면 둘째 황자에게 사자비의 척결을 완수했다고 보고하면 된다. 그 경우에는 동창이 조정례에게 큰 상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일인자는 바뀌어도 그 밑의 권력자는 바뀌지 않아. 항상 그랬지.’
소정동은 씁쓸하게 웃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는 항상 바뀌어 왔다. 그러고 보면 사자비가 왜 이인자 자리를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다행이기는 했다. 그가 먼저 사자비를 발견할 수 있어서. 또한 사자비와의 관계를 아직 발설하지 않았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발각 되었으면 소정동은 이번 작전에 낄 수 없었을 뿐더러, 어쩌면 그조차 은밀하게 처리되었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죽림에서 사자비를 만나 공치사하던 때였다. 당시 사자비가 친황대를 장악한 직후여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는 심정에서 공치사했다. 그러나 사자비는 아직 때가 이르다며 잘라버렸다. 참고 기다리라고, 나중에 시기를 봐서 뒤를 봐주겠다고 그렇게 그를 달랬을 뿐이었다. 그때는 내심 사자비가 야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이 이런 행운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설마, 이런 일을 예견한 건가!’
소정동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무슨 수를 쓰든 수색작업을 늦춰야 해.’
그는 사자비가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 상태로 떨어졌으니 하늘이 구해주지 않는 이상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체가 되었다면 동창의 수색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흔적을 찾는 데는 귀신들이었으니까.
☆ ☆ ☆
뼛속까지 감겨드는 차가움이란 어떤 것일까!
사자비는 정신을 차렸다. 너무 아파서, 심장까지 얼어붙는 차가움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깐 정신을 차리고, 재밌게도 그 고통 때문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것 같았다.
물살이 거센 게 다행이었다. 이리저리 바위에 부딪히며 흘러가는데도 물에 잠기질 않았다. 숨은 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호흡을 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머리가 떠오를 때보다 가라앉아 있을 때가 더 많았으므로. 마음 같아서는 팔을 움직여 머리를 물 밖으로 빼내고 싶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빠르게 물살을 타다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후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물속에 있었다. 숨이 막혀서 절로 깨어난 것 같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보았다. 부어서 그런지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움직이지 않았지만 반 각을 노력 끝에 간신히 한쪽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점점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하반신은 이미 마비된 듯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독 때문이거나 검에 찔린 상처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일 것이다. 거기다 차가운 물속에 오랜 시간 잠겨 있었으니 정신이 몽롱한 것도 당연했다. 이제 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 자다가 깨어났더니 천당이더라, 라는 그런 이야기 속에나 나올법한 일이 그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
위험한 중에도 사자비는 미소 같은 것을 떠올렸다.
‘나 같은 놈은 지옥이 어울리겠지.’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잠깐 물 밖으로 떠올랐을 때 한쪽 눈으로 펼쳐진 시야에 큰 위기가 달려오고 있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죽은 후의 일이고, 지금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직은 살아 있으니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 멀리 노도처럼 흐르는 수로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그 끝의 수면이 불쑥 올라와 있었다. 폭포였다.
폭포의 크기는 입이 공포감을 줄 정도로 컸다. 수면에 부딪치는 낙수의 엄청난 소리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폭포는 엄청난 회오리를 동반하게 되어 있다. 자칫 낙수와 만나는 수중에 감겨서 평생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수가 생기기도 한다. 낙수가 만들어낸 수중 회오리 속에 갇혀 영원히 회전하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더라도 사자비가 숨을 참을 수 없을 시간 동안 물속에 갇힐 가능성이 있었다.
팔을 움직여 보았다. 어떡해서든 낙수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아니, 휘말려도 빠져나올 정도의 움직임만 있으면 된다. 그 준비를 하려는 것이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만 급하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끊어진 수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십 장, 오 장, 삼 장, 종내에는 물살 끝에서 몸이 살짝 솟구쳤다가 낙수를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면서 시야에 걸린 수면이 성난 호랑이처럼 보였다. 저 속에 빠졌다가는 헤어나오지 못할 것처럼 무서운 소리를 자아내며 뿌연 물안개를 형성하고 있었다.
윙!
수면에 부딪히기 무섭게 멍해졌다. 귀가 멍해진 탓이고 정신도 멍해진 상태였다. 수면에 부딪힌 충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상관없었다. 우려한 대로 수중에서 회오리에 말려 맴도는 중이었으니까. 덕분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몸에서 공기를 달라고 아우성인데 한줌의 호흡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은 터질 듯하고 오금까지 저려오는 듯했다.
사자비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막힌 호흡 때문에 엄습해온 고통이 어느 순간 사라지더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이럴 때는 죽음이 찾아오곤 한다. 처한 상황과 전혀 상반된 감정이 느껴질 때는 죽는 경우다.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 물귀신이 그의 몸을 아래로 잡아끄는 느낌을 받으며 그렇게 그는 정신을 놓았다. 그런 중에도 잠깐 지옥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 있었던 내용, 선한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혼이 가벼워진다는 글이었다. 반대로 악인은 무거워진다고 했던가. 물속임에도 몸이 천 근 쇳덩이 같을 걸 보니 아무래도 지옥에 갈 모양이다.
제6장 온고지신(溫故知新)
1
수라천군은 계곡을 등진 채 이동하고 있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것에 실려 교도들의 의해 이동하고 있었다.
교도들은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제자들도, 귀령대마와 오천대마도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믿음이 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라천군은 결코 패배라는 두 글자를 몰라야 한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오늘 그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져버렸다. 그것도 한 시진 전, 아주 철저하게 패배를 가슴에 새겼다. 순전히 놈 때문이었다.
환몽영은 파리하게 죽어버린 사부의 안색을 살피며 그때를 떠올렸다.
☆ ☆ ☆
“예상은 했다만, 역시 우리 손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놈들이로구나!”
비웃음이 분명한 목소리가 계곡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혈의를 덮어쓴 자였다. 혼자도 아니다. 비슷한 복장의 혈의인이 일백 명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 수만큼이나 많은 시체가 주위에 있었다. 걸어다니는 시체라니!
수라천군의 표정이 굳었다. 두 장로를 비롯한 잔월신교의 교도 또한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주술과 술법에 조예가 깊은 그들이 강시를 모를 리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강시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강시를 부릴 수 있는 이가 잔월신교 이외의 무리라면 의미가 조금 달랐다. 혈의인이 종교적인 단체, 잔월신교처럼 주술과 술법 등 사이한 대법을 연구하고 익히는 단체라면 가볍게 흘려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무림에는 그런 단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소수로 강시를 이끌고 와서 수많은 무림고수를 상대하겠다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흑시와 천령시로군!”
수라천군이 탄성을 흘리듯 말했다.
다섯째 제자 동일룡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가 알고, 그간 지켜보아왔던 강시는 대체로 동작이 굼뜨고 움직임이 뻣뻣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연구와 실패, 성공을 거듭하며 제작해왔지만 실전에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고수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시와 천령시는 기존의 강시와 달랐다. 강시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꿈의 존재, 전설로 내려오는 강시지존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강시의 최종단계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만들기 어렵고 성공한 사례도 없었다. 잔월신교조차 그것을 재현하고자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으나 실패만 거듭한 상황이었다.
“흑시와 천령시를 만들 수 있는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했다.
옆에 있던 오천대마가 설명했다.
“교주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살아 있는 사람처럼 저렇게 움직임이 자연스러울 리 없지요.”
“도대체 저들이 누구이기에…….”
대답처럼 수라천군이 무거운 숨을 골랐다. 주위에 있던 오천대마와 귀령대마 역시 침음을 흘렸다. 귀령대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주님, 저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수라천군이 수긍의 뜻을 보였다.
“흑시와 천령시를 만들 수 있는 자라면 그들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들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들에게서 입수했던 자료를 토대로 저희도 실험해 보았으나 실패하지 않았던가요.”
수라천군은 고개를 저었다. 귀령대마의 말대로 자료는 입수할 수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다.
“그들이라면 파기된 자료를 다시 복구하거나, 우리도 모르는 또 다른 복사본을 몰래 숨겨놓았을 가능성이 있네.”
그리고 그 자료 안에 언급되었던, 강시지존을 만드는 방법도 어쩌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위험하군요. 저것들이 정말 흑시와 천령시라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귀령대마가 걱정스럽게 말하고, 수라천군이 대답했다.
“저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들이라면 강시는 문제가 아닐세.”
“무슨 말씀이신지…….”
“언젠가 자네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아네만. 요우후의 혈육에 대한 이야기를.”
귀령대마와 오천대마가 동시에 경악했다.
“설마!”
오천대마는 불신이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수라대천성을 십이 성까지 익힐 수는 없습니다. 요우후도 십 성이 고작이었지 않습니까.”
그 십 성만으로도 요우후가 수라천군과 호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간과해버렸다. 하지만 오천대마의 말은 맞았다. 아수라대천성 자체는 불안전한 무공이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 혈의인 하나가 대답했다. 수라천군과 잔월신교를 알아보고 대화를 엿들은 듯했다.
“그분께서도 십 성밖에 완성할 수 없었다.”
오천대마가 험악하게 인상을 쓴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 말은 네놈들이…….”
“짐작한 대로.”
음침한 웃음을 흘린 혈의인이 크게 외쳤다.
“오늘부로 무림사는 우리 지옥교 아래 새로 쓰이게 될 것이다. 너희 피로 제사를 지낸 후에 말이지.”
“지옥교?”
여기저기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지옥교, 그 의미가 가진 공포를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선배나 사부에게 그들의 무서움을 전해 들은 사람도 있고, 소수이지만 당시 무림에 활동했던 자도 있었다.
그들의 반응에는 관심 없는 듯 혈의인은 수라천군을 주시했다.
“그렇다고 그분이 전대교주님과 같으리라 생각 마시오. 지옥교도 그때의 지옥교가 아니라오.”
“알고 있네. 자신이 없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겠지. 하나, 잔월신교도 그리 녹록지 않을 걸세.”
“그럼, 직접 확인시켜 드려야지. 치욕과 오욕의 세월이 본교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대를 비롯한 잔월신교가 얼마나 하찮은 무리인지.”
말과 함께 혈의인이 지시하듯 손을 뻗었다.
“풀어라!”
순간 백여 구의 강시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런 지옥교의 대규모 학살 계획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 말고도 규보의 무덤으로 위장한 장소가 몇 개 있었고, 그곳에도 많은 무림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다툼을 벌이는 중인 것이다. 지금쯤이면 그곳에도 지옥교도와 강시들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강시들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처음에는 사파의 고수들이 막아섰다. 강시가 그쪽으로 먼저 달려들었던 탓이 컸지만 다수를 믿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드러났다. 한순간에 녀석들이 수십 명의 고수를 제치고 중앙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녀석들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증거로 비천십팔방의 책임자, 동북사룡당의 당주 동도백을 들 수 있었다. 호남 원릉에서 알아주는 고수로 통하는 그가 강시의 주먹질 한 번에 검이 부러지고 얼굴이 터져나간 것이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치고 겁을 집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 진형이 무너지고 깨진 항아리에 물이 쏟아지듯 무리가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때를 노린 혈의인들의 일부가 다시 격전지로 끼어들었다. 이건 학살에 가까운 일반적인 행위였다.
수라천군은 뒷짐을 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환몽영이 급히 외쳤다. 상상했던 것보다 강시의 능력이 대단하자 조바심이 든 탓이었다.
“사부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가는 각개격파 당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 구파일방이 때마침 개입했다. 무림맹의 고수 또한 끼어들었다.
그들의 가세로 기울어졌던 전황은 다시 평행선을 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판도는 다시 뒤바뀌었다. 그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광기 서린 파란빛을 흘리는 열다섯 구의 시체들, 천령시였다.
그들의 존재는 혼란한 전장을 단박에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구파일방의 승려와 도사조차 그들에게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추풍낙엽처럼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이리저리 내몰리는 모습은 좀체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수라천군도 그제야 놀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제자의 말처럼 각개격파 당할 것 같지 않은가. 무림맹의 장로, 전윤옥조차 천령시 하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수라천군은 전윤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의 화경에 근접한 고수로 무림맹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일설에는 맹주 다음 가는 고수라고도 하는데, 사파와의 교전으로 힘이 빠진 상태임을 감안하더라도 천령시와의 실력차이는 커 보였다. 조만간 천령시에게 당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삼 장로, 오 장로.”
두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묵마환귀(墨魔還鬼)와 야랑대(夜狼隊)를 하나씩 이끌어 양옆을 밀고 들어가게.”
“존명!”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천대마와 귀령대마가 움직였다. 그들을 따라 묵마환귀 일백 명과 야랑대 일백 명이 지독한 마기를 풍기며 갈라졌다.
이번에는 남은 두 제자였다.
“너희는 귀음대(鬼音隊) 이끌고 내 뒤를 받치거라.”
그러자 환몽영과 동일룡이 경악했다.
“사부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수라천군이 평소와 달리 엄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하찮은 싸움이 아니다. 자칫 지옥교에 먹힐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라.”
말과 함께 수라천군의 신형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강시 다섯 마리가 무인들을 뚫고 수라천군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수라천군은 손을 들어 좌에서 우로 선을 가볍게 그었다. 순간 용암처럼 시뻘건 불기운이 늘어지더니 공간을 삼켰다. 화기는 순식간에 허공을 점하더니 바위까지 파괴하며 덮어버렸다. 그 속으로 달려든 꼴이 된 강시 역시 화기를 이기지 못하고 번쩍이며 녹아내렸다. 그러나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라천군은 들끓는 불길 속에서 화염보다 더욱 파랗게 타오르는 두 개의 빛을 보았다. 빛은 불길을 뚫고 점점 가까워지는데, 그건 눈이었다.
눈의 주인은 천령시. 흑시를 일시에 분해해 버린 화염 속에서 조금의 화상조차 입지 않은 녀석을 확인한 수라천군은 이채를 띠었다. 주위에 전해질 피해를 줄이고자 화혼장(火魂掌)의 범위를 제약한 그였지만 내공까지 줄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정된 범위 안에서 타오르는 화혼장의 파괴력은 더욱 컸을 터였다. 그걸 시체나 다름없는 강시 따위가 이겨낸 것이다.
쉬이익!
녀석이 뻗어내는 주먹에서 경기가 흐르더니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쏟아냈다. 수라천군도 무시 못할 가공할 속도와 힘이 담긴 일권이었다. 저 주먹 때문에 수십 명의 고수가 단숨에 부러지고 찢겨졌다는 것을 수라천군은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오른손을 들어 녀석의 주먹을 맨손으로 잡아내더니 개의치 않고 손을 아래로 꺾어 내렸다.
뚜둑!
천령시의 손목이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아주 쉽게 부러졌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 과연 녀석은 죽은 시체인 모양이다. 신음 한번 내지 않고 반대 손을 이용해 수라천군의 얼굴을 치려했다.
수라천군은 고개를 옆으로 틀어 주먹을 흘려 넘긴 후 두 손을 움직여 녀석의 복부에 가져다 대었다. 장심에서 뇌전이 쏟아지며 괴음을 동반했다.
치지지직-!
뇌전은 천령시의 전신을 덮어버렸다. 녀석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다. 몸을 감쌌던 백의까지 검게 타서 양물이 드러날 정도. 그러나 부동의 자세는 잠깐뿐이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뇌전에 익숙해진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수라천군을 향해 권각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라천군은 인상을 쓰며 물러섰다. 그 정도 충격을 받았다면 힘이 떨어져야 하는데 녀석에게는 그런 기미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파괴적이고 빠른 속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관망하던 혈의인이 조소를 흘렸다.
“그 정도로 천령시를 제압할 수는 없지.”
옆에 있던 다른 혈의인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역시 수라천군이군요. 천령시를 저렇게 쉽게 다루는 사람은 본적이 없습니다.”
“흥! 그분에 비하면 어차피 어린아이 수준일 뿐이다. 그분을 제외하고 천령시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혈의인의 예상은 빗나갔다. 잠깐 지체되기는 했으나 수라천군의 손에 의해 천령시가 완전히 갈라졌다. 천령시의 복부를 두 손으로 뚫은 수라천군이 그곳을 양손으로 잡아 아래위로 찢어낸 것이었다.
혈의인이 놀란 빛을 드러냈으나 이내 웃었다.
“강시의 무서움은 그게 아니다.”
그의 말대로 천령시는 몸이 완전히 분리되었는데도 수라천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상체는 두 손을 이용하여 수라천군의 한쪽 팔에 거머리처럼 붙어서 어깨를 물어뜯으려 했고, 하체는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확히 낭심과 복부를 찾아 공격하고 있었다.
저 멀리 구채구를 덮어오던 먹구름이 어느새 하늘 뒤덮고 있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번쩍이니 사위를 스산했다.
혈의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조만간 진법이 완성되겠군.”
그리고 진법이 완성된 후에는 누구도 구채구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결계가 구성되기 때문이었다.
결계에는 또 다른 목적도 섞여 있었다. 강시들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다. 구름은 반구형으로 구채구를 완전히 감싸게 되는데, 그 안에서의 강시는 지금보다 더욱 광란한 몸짓을 보이게 될 것이다.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지.’
수라천군이 천령시 하나를 완전히 분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갈기갈기 찢는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녀석의 잘린 팔다리는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주위에 다른 고수가 없었다면 조금 더 시간을 절약했을 텐데, 이런 난전에서는 수라천군도 내공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진바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월신교의 개입으로 지옥교가 서서히 밀리는 형태였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여전히 강시는 많았고 지옥교의 고수들도 무시할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특히, 천령시는 오천대마와 귀령대마 조차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각 한 마리씩을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다.
우선 천령시부터 제압하면 계곡에 있는 지옥교는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오천대마와 공방을 주고받는 천령시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그런데 그가 나타났다.
처음에 그것은 하나의 점이었다. 점은 순식간에 나무 위를 질주하더니 곧이어 남여(藍輿)의 모습을 한 가마로 바뀌었다. 앞뒤 두 명씩, 네 명이 들고 이동하니 사인교(四人轎)라 해야 할 것이다.
치열한 격전 중에 그것을 눈여겨 본 사람은 없었다. 사인교가 계곡에 도착했을 때도 관심을 준 사람이 없었다. 사인교를 덮은 큰 상자 안의 인물도 그들의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했다. 무심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사인교 안에서 흘러나왔다.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닌가!”
혈의인 하나가 급히 다가와 사인교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잔월신교가 있다고 들었다.”
의미를 알아들은 혈의인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라천군이 그들을 이끌고 있더군요.”
“수라천군이라…….”
“아직 보고받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수라천군이 직접 교도들을 이끌고 구채구로 들어왔습니다.”
순간 교자를 덮고 있던 큰 상자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인교에는 황금색 의자가 있고,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앉아 있었다.
괴한은 붉은 삼각모에 피보다 더욱 붉은 옷을 두르고 있었다. 모자고 옷이고 수백수천의 끔찍한 아수라가 은색으로 촘촘히 새겨져 마치 빛을 뿌리는 것 같았다. 얼굴은 삼각모에서 연결된 붉은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그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이 푸른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그리고 눈과 눈 사이의 피부, 주름지고 말라서 흡사 강시의 그것과 같은 피부가 괴한을 특이하게 보이도록 했다. 불에 그슬린 것처럼 검은 것이다.
의자에 몸을 맡겼던 괴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는 행동만큼 허공에 떠있던 상자가 더욱 올라갔다.
괴한의 눈은 전장을 훑고 있었다.
옆에 있던 혈의인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중앙에 있습니다.”
과연 그곳에 수라천군이 또 다른 천령시 하나를 파괴하고 있었다.
괴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저렇게 약했던가!”
“주위에 미칠 피해를 줄이고자 내공을 조절하는 듯합니다. 실제로는 다를 테니 염려 마시길!”
“확인해 보면 알 일!”
괴한이 천천히 손을 들어 검지로 수라천군을 가리켰다. 그러자 손끝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는 이내 작고 푸른빛으로 변했다. 이슬처럼 작아서 반딧불 같은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앞으로 이동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반딧불이 수라천군과 거리를 좁힐수록 덩치를 더하더니 덩치만큼 계곡을 가로지르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집채만 한 크기로 돌변했을 때, 계곡 전체가 찢어지는 대성이 쏟아졌다.
☆ ☆ ☆
“빌어먹을!”
환몽영은 잠시 교도들을 멈춘 후에 수라천군의 상태를 살폈다. 외상은 별것 없지만 내상이 꽤 심한 듯했다.
‘단순한 장력 한 번에 이렇게 되시다니…….’
하지만 그때 보았던 원형의 빛, 달빛처럼 큰 내공덩어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음을 환몽영은 잘 알고 있었다. 수라천군이었으니 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라천군과 함께 있던 천령강시 하나가 그 빛에 휘말려 순식간에 녹아버렸다는 사실로도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 여파로 일대에 있던 무림인 다수가 천령시와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도 증거였다.
방심했다지만 빛을 정면으로 맞을 때 수라천군이 급히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는 모습을 환몽영은 보았다. 수라천군의 호신강기는 외벽과 내벽을 쇠처럼 단단하게 하는데, 그 밖으로도 자하신공에 기반을 둔 강력한 보호막이 몇 겹으로 형성된다. 누구도 그 방어벽을 완벽히 뚫을 수는 없었다. 급히 만들어낸 호신강기라 칠 할의 내공도 사용 못 했겠지만, 그 정도라도 무림에서 방어벽을 뚫을 사람이 없다는 게 환몽영의 평소 생각이었다. 있다면 잔월신교의 수석장로 묵천대마(默天大魔) 위문(威紊) 정도였다.
그러나 달빛은 몇 겹의 방어벽을 순식간에 휩쓸고, 외벽까지 파괴했다. 다행히 내부를 보호하는 호신강기가 온전했던 덕분에 무사했지만, 환몽영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수라 상을 전신에 새긴 혈의인,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그만한 내공덩어리를 손가락 하나만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연이어 세 번씩이나 쓰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교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 고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나마 수라천군이 그곳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라천군이 피해를 줄이고자 계곡 위로 뛰어오른 덕분에 많은 무인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작 수라천군은 남은 두 개를 막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수라천군은 세 번이나 호신강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한 내공을 소모했고, 마지막에는 전력을 다했는데도 막아내지 못했다. 환몽영이 급히 그를 구해 달아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수라천군은 뼈를 묻었을 것이었다.
계곡의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환몽영이 달아나면서 교도들도 적을 버리고 그를 따라 움직였고, 그 뒤로 계곡에 남았던 정파와 사파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라천군을 손가락 하나로 이렇게 만든 괴물을 누가 감당할 할 수 있을까. 화경의 고수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천령시도 열 구가 넘게 남아 있었는데.
“빌어먹을!”
그는 다시 욕설을 뱉었다. 언제나 거대한 산악 같았던 사부가 초라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심정을 자극하는 듯했다. 복수를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도 원인이었다.
“그리 위중하지는 않으시니 곧 깨어나실 겁니다.”
오천대마가 가까이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불쾌감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오천대마를 보았다. 오천대마의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괴한이 만들어낸 첫 폭발 때 그도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수라천군이 충격을 정면으로 받아낸 덕분에 주위에 미치는 여파가 덜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오천대마는 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 고수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계곡에서 보니 사부님과 자네들이 그자를 알고 있는 듯했는데, 누군가? 요우후에 대한 이야기는 또 뭐고. 그와 관련 있는 자인가?”
오천대마는 한숨을 쉬었다.
“짐작이지만 요우후의 혈육일 겁니다.”
“혈육?”
고개를 끄덕인 오천대마가 이야기를 풀어놓다. 잔월신교가 지옥교 총단을 공격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설명을 듣던 환몽영이 물었다.
“십 성의 아수라대천성을 익힌 지옥교주도 사부님에게 꺾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의 혈육이 어떻게……. 십이 성을 익혔다는 건가?”
“지옥교도의 이야기로 보아 그도 십 성 이상을 넘기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신체의 변화를 겪은 것 같습니다.”
“신체의 변화?”
“혹시, 강시지존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요?”
환몽영이 경악했다. 오천대마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역시 짐작입니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강시지존은 살아 있는 인간을 강시로 만드는 것으로 압니다. 강시인데도 무공을 사용할 수 있고, 인간이 아니기에 내공에 제약이 없습니다. 불로불사의 존재가 된다는 뜻이지요.”
“본교에서도 숱한 실험을 했으나 흑시도 만들어내지 못했잖은가.”
“원래 지옥교 총단을 털었을 때 얻은 자료를 토대로 한 실험이었습니다. 중요한 부분이 상당수 소실된 상태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걸 저들은 가지고 있었다는 뜻?”
“당시 지옥교 총단을 지키던 녀석들이 거의 전멸한 상태였는지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 강시지존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고, 놈이 그 상태가 되었다면 구채구에서는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십 성의 아수라대천성을 익힌 강시지존이니까요.”
환몽영이 인상을 썼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지금은 공자께서 지휘를 하셔야 합니다.”
환몽영의 표정이 굳었다. 무공만 익혀왔지 단체를 이끄는 일에는 아직 문외한이었다. 그 점을 간파한 귀령대마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놈들의 최종 목표는 무림통일일 겁니다. 그 첫 번째 계획이 구채구에 있는 무인들을 처리하는 일이겠지요.”
그는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뇌전을 동반한 먹구름이 온통 가득한데, 간간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 것 같군요. 저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결계입니다. 지금 구채구는 결계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오천대마가 말을 이었다.
“구채구에 있는 무인들을 절대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뜻일 겁니다. 우선, 교주님을 보호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 어떨는지요?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으니 회복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때 일행과 떨어졌던 교도가 날아와 보고했다. 도주 중에 남겨 지옥교의 추격을 파악하게 했던 무리 중 하나였다.
“놈들이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몇 명인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정찰조인 것 같습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우리 위치만 발각될 것 같아 그냥 두었습니다.”
환몽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노인을 보았다.
“구채구에 안전한 곳이 있을까?”
귀령대마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 교도 몇 명을 붙여주십시오. 책임지고 추격을 따돌리겠습니다.”
환몽영이 말렸으나 오천대마가 귀령대마의 편을 들어주었다.
“오장로의 말대로 하십시오. 결계는 강하면 강할수록 수명이 짧습니다. 결계의 원인을 파악해서 부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 그걸 찾기란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계가 힘을 잃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이 정도 규모의 결계라면 길어도 열흘 이상은 지속되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은신하여 교주님의 회복을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놈들에 대한 대처는 그다음이 낫지 않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환몽영이 걱정이 담긴 시선을 귀령대마에게 보냈다.
“조심하게.”
귀령대마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맡겨 주십시오.”
2
똑! 똑!
물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 같았다. 비가 오는 건가. 눈을 떠 보았지만 세상은 온통 까맸다.
‘사후가 원래 이런 건가!’
죽어 본 적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눈을 떴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육의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으니까. 단지 눈을 뜨겠다는 의지만 있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고통이 밀려왔다. 사자비는 한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고통은 아직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므로 한 번쯤 웃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아픈 중에도 자신의 상태를 짐작해 보았다.
우선 몸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몸의 절반은 물에 잠겨 있는 듯했다. 하체 쪽인 것 같았다. 복부에는 두 개의 치명상. 뼈마디도 몇 군데 부러져 있었다. 아마도 전신에 심한 타박상을 입어 피부도 검게 죽어 있으리라!
등도 딱딱한 것 같다. 바닥이 딱딱한 건지도. 차가운 바람도 거칠게 불어온다.
‘여기가 어디지?’
그보다 어떻게 그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았을까. 분명 물속으로 가라앉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 또한 이상했다. 회오리에 휘말렸다면 한동안 물속을 배회했어야 한다. 사자비는 무언가가 밑으로 잡아당기는 느낌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서 호흡도 불가능하지 않았나!
똑! 똑!
여전히 물소리가 귀를 거슬렸다. 몸을 움직여 보았다. 꼼짝도 할 수 없다. 역시 어두웠던 것은 눈을 감은 탓이었나 보다. 오랜 시간의 사투 끝에 눈꺼풀을 들어 올려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빤짝 빤짝 별이 빛나는 하늘이 있었다. 잠깐은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빛나는 별이 천장에 맺힌 물방울임을 알 수 있었다. 반쯤 언 물방울이 빛을 반사하는 것이다.
‘어?!’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물방울이 빛을 반사한다? 그건 어딘가에서 빛이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빛을 보려 했다. 아직은 눈꺼풀을 움직이는 정도가 고작. 빛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실은 파악했다. 천장이 있고 어두우며 바람이 불어오고 있으니 이곳은 천연의 동굴일 것이다. 정작 중요한 점은 천장에 얼어 있는 물방울이었다. 이런 겨울의 동혈은 온도가 높기 마련이라 천장이 얼 이유가 없었다. 저렇게 얼려면 얼마나 온도가 낮아야 할까? 그런데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고 보니 전신을 타고 흐르는 고통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내부가 안정된 느낌이었다. 약간의 내공도 돌아온 것 같았다.
사자비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한 달 정도 지났나. 그 정도 시간이라면 망가졌던 몸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줌의 내공도 없는 상태로 그 시간까지 버틸 수는 없다. 아니, 내공이 있어도 버틸 수 없다. 허기와 목마름이 사람을 서서히 죽이기 때문이다. 사자비는 그 이유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어서였지만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또 정신을 잃었다.
사자비가 다시 깨어났을 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났다는 짐작만 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회복된 기력으로 판단했다. 약간이지만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된 것이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는데,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몸을 움직여 애초에 가졌던 의문을 풀었다.
빛은 동혈 저 끝에서 희미하게 밀려들고 있었다. 사자비는 우선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은 덕분에 기어갈 수밖에 없었고 반 시진이나 걸려야 했다.
빛을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 한층 밝게 빛나는 듯했다. 그 끝에 걸린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있었다. 입구라지만 밖은 아닌 것 같았다. 사자비는 거기까지 기어가 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뭐지?’
거대한 석실이었다. 맞은편 끝에 삼 장 높이의 큰 석상이 있고 그 위에 가부좌를 튼 시체가 있는 석실이었다. 빛은 석실 중앙의 작은 단상이 원인이었다. 금으로 만든 단상인 것이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야광주의 빛을 반사해서 동혈을 밝히는 것 같았다.
사자비는 실소를 흘렸다. 거대한 금덩어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시체를 보고 그 아래 석상에 새겨진 글귀를 주시하고 있었다.
–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이젠 죽음만 남았도다. 세월 외에 누가 본좌를 죽음에 이르게 하랴!
건방지다 못해 광오한 내용이 아닌가.
“웃긴 놈!”
하지만 사자비는 웃지 않았다. 시체, 절벽처럼 큰 석상 위를 홀로 지키는 저 시체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였나?’
사자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급류에 휩쓸려 폭포에 휘말렸던 걸 생각하면 무덤의 입구는 물속에 존재했던 모양이었다. 이러니 그 많은 무인이 구채구를 뒤져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재수가 좋은 건가, 더럽게 나쁜 건가!’
자칫 죽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재수가 없고, 그런 중에도 살아났으니 재수가 좋았다. 덤으로 규보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지 않은가. 이건 횡재였다. 물론, 무덤에서 무엇을 건지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역시 재수가 없는 경우다. 지금 상태론 밖에 나갈 수도 없지만, 나간다 하더라도 동창과 친황대의 수색에 걸려 목숨을 잃을 테니까. 그들을 피해 동혈에 숨어 있어도 문제였다. 역시 굶어 죽을 것이다. 기력은 회복했으되 아직 복부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다른 상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살이 썩어 그를 죽게 할 것이다.
그는 석실을 찬찬히 살폈다.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그는 입구에서 굴러 떨어지는 아픔을 감소하고 석상 쪽으로 기었다. 오만한 글귀 옆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였다. 가까이 가보니 과연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려운 글씨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건 규보의 일대기였다. 스스로 쓴 것답게 과장에 과장을 섞은 내용이 오색찬란해서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믿고 싶지도 않았다. 자연 흘려 읽을 수밖에.
‘빌어먹을!’
건질 게 없으니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독고영에 대한 이야기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만남에서부터 십여 번의 비무까지 규보와 그의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초식을 주고받은 동작 하나하나 기억해서 전부 적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고, 사자비도 저런 기억력은 불가능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놈이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규보에 대한 믿음이 갔다. 사자비는 비무에 대한 기록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았다. 처음에는 규보가 압도적이었던 것 같았다. 내공부터 격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시간을 더할수록 독고영이 우위를 점하더니 종내에는 둘 다 지쳐 비무를 중단하는 사태가 비무 때마다 반복되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독고영의 초식이었다. 내공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초식이라니……. 물론, 독고영의 내공이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화경을 뛰어넘어 탈반경에 이른 내가고수였던 것 같았다. 문제는 규보가 그보다 몇 수 위였다는 것이다.
그 정도 내공의 격차라면 기습이 아닌 이상 상대를 압도하기 힘들다. 그러나 독고영은 해냈다. 사자비의 기준으로 그의 초식은 철저히 실리적이었다. 사자비와 친황대의 대부분이 그런 방식의 초식을 익혔지만 독고영에 비하면 세 발의 피라할 만큼 아주 단순하면서 지극히 실리적이고, 검이 상태의 피부에 닿는 순간까지 내공을 폭발시키지 않는 영악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내공소모가 적을 수밖에 없고,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되게 된다. 그럼, 그의 내공 대부분은 어디에 사용할까. 규보의 장기인 장풍과 강기 부류 무공을 피하고 흘려 막는 데 쏟고 있었다.
– 녀석은 결코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다. 한 번의 비무에 수천 초식을 주고받지만 결코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장력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법도 없다. 대부분 피하기만 할 뿐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은 흘려 넘겨 충격을 줄여낸다. 난 녀석을 저주한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 녀석을 원망한다.
사자비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규보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서였다. 저런 상대라면 자신도 짜증스러울 것 같았다.
‘저런 초식은 절대로 검법에 담겨 있지 않지.’
그는 확신했다. 독고영은 초식을 수련했다기보다 많은 비무를 통해 실력을 키웠음이 분명했다. 저렇게 초식이 몸에 베일 정도면 얼마나 많은 비무를 했을까. 그런 면에서 사자비는 그간 몸에 익혔던 초식이 진정한 무극단혜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독고영의 무극단혜와 비교하자면 발치에도 닿지 않을 것이다.
‘몸에 익힌다고 되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실전에 저런 초식을 사용할 수는 없지.’
그는 눈을 감고 독고영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규보를 상대하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제삼자가 되어 구경하는 방식이었다.
때론 수련보다 고수들의 비무가 더욱 큰 발전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자비는 독고영의 움직임이 약간은 이해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독고영과 자신을 대입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때 나라면 어땠을까? 어떤 방법으로 막을까?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대조하고 비교하자 독고영의 초식이 더욱 거대하게 다가왔다.
사자비는 가상의 독고영을 만들어 그와 싸우기로 했다.
잠시 후, 몇 번의 탄식을 쏟아냈다.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고수라 꽤 많은 포장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어이없이 당했기 때문이었다. 상상의 독고영을 상대로는 삼십 초를 넘길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급소를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쪽은 물론 사자비였고,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주고받는 초식이 비무를 거듭할수록 줄더니 마지막 대결에서는 삼 초를 간신히 주고받고, 역시 사자비의 패배로 끝났다.
사자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불쾌했다. 저런 상대라면 그는 이길 수 없다. 다행히 불쾌감만큼 깨달은바 또한 커서 찝찝한 마음을 털어낼 수 있었다. 오히려 당장 일어나서 무공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졌다. 깨달은 바가 얼마나 초식에 섞였는지 파악해보고 싶은 충동이 강렬해지고 있었다. 분명히 전과 다른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당장 확인할 수 없는 몸이라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는 다시 비무 내용을 확인했다. 독고영에게서 초식에 대한 혜안을 넓혔다면 규보에게는 내공에 대한 혜안을 넓힐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내공이 고강하면 탈반경의 고수가 피해만 다닐까. 얼마나 내공이 충만하면 수천 번의 공방을 주고받을 때까지 연이어 강기를 뽑아낼 수 있을까.
사자비도 마음먹으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단지, 파괴력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없을 뿐이다.
규보는 탈반경의 고수를 상대로 살인적인 내공을 사용했다. 그 정도 파괴력이라면 사자비는 열 번도 채 쓰지 못하고 내공이 바닥날지도 몰랐다. 아니, 그만한 파괴력을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저만한 내공을 받아낸 놈도 대단하지만, 그걸 수천 번씩 쏟아내는 녀석도 대단하지.’
규보가 더욱 대단하다고 느낀 이유는 또 있었다. 기록을 보면 그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우천대사(雨天大師)라는 신선이 우화등선하며 남긴 한백지서(寒白之書)를 우연히 얻어 단박에 강해졌다고 했다. 물론 무공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고, 한백지서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많은 무공서를 독파했다고 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체계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무공비급을 읽는다고 달라지지는 않는다. 독고영과의 비무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규보는 그저 강기만 뿌리고 내공을 기반으로 빠른 속도만 자랑했다. 그것만으로 초식의 대가이자 탈반경의 고수를 상대한 것이다.
사자비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기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거기엔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독고영의 초식을 기억하여 쓴 무극단혜였다. 수련장에서 보았던 무극단혜와 같은데, 따로 규보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
– 녀석의 초식은 익히려 해도 할 수 없다. 편법으로 그와 비슷한 검법서를 구하고자 사방을 뒤졌으나 이 또한 세상엔 존재하지 않으니, 기억을 더듬어 녀석의 초식을 파악하고 그 근본을 추려 기록하노라. 본좌는 이것을 무극단혜라 명명한다.
무극단혜를 다시 읽었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지금 보니 새삼 달랐다. 확실히 무극단혜의 원조인 독고영의 움직임을 파악한 후라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무극단혜를 파악한 후에는 남은 내용도 자세히 살폈다. 그건 백일홍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부터 사자비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규보는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바꾸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또한 독고영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은데, 어설프게 초식을 익히기보다는 무극단혜로 독고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가 막을 수 없는 압도적인 내공을 확보하려는 방편이라 했다. 그게 백일홍이었다. 한빙지체, 내공의 조화로 완전한 신선의 길로 들기보다는 한 가지만 파는 방법, 그래서 더욱 빨리 내공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규보는 그것을 ‘결국 하나로 통할지니 어떤 길을 가도 상관없다.’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마지막은 모두 같다는 건가!’
사자비는 그렇게 이해했다. 무공에도 그런 말이 있다. 도, 검, 창, 봉 등 다양한 무기도 하나라는 뜻이다. 각자 특기에 맞게 무기를 골라 익히지만 정점에 도달하면 결국 모두 버린다는 이론이었다. 달리 해석하면 하나만 통달하면 어떤 무기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끝은 무기조차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이 경지를 무인들은 심검을 사용할 수 있는 단계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곤 했다.
“아!”
순간 머리가 번쩍했다. 백일홍의 마지막에 기록된 음양의 조화, 당시에는 무공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이젠 이해가 되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자비는 단상으로 기어갔다. 금을 깎아 만든 금덩어리가 탐이 나서는 아니었다. 석상에는 단상에 백일홍이 기록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단상 앞에서 두 팔을 짚은 채 상체를 일으켰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서 몇 번이나 쓰러졌지만 노력 끝에 올라설 수 있었다. 거의 단상 위에 쓰러지듯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명대로 백일홍의 내용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마도 황실에 있는 원본은 여기에 먹을 묻혀 찍어낸 듯했다. 물론, 그는 원본을 본 적이 없었지만 거대한 종이에 나열된 비급이라는 소리는 들었다.
사자비의 눈빛이 죽어가는 몸과 달리 생기를 되찾았다. 거기에 소실된 사 단계가 모두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 단계도 수련장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내용이 더 있었다.
– 마음은 몸보다 빠르며 머리보다 강하다. 백일홍은 그것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다.
사라진 오 단계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럴듯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돌아가 일 단계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 단계로 넘어왔을 때 정녕 놀랐다.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그는 지금까지 반쪽짜리 백일홍을 익힌 셈이었다. 그것도 탈혼진공이라는 편법을 이용한 가짜 백일홍이었다.
‘이럴 수가!’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실소도 흘러나왔다. 이걸 익히려면, 그리고 완벽한 한빙지체가 되려면 정말 남성을 잃어야 했다. 그래야만 양기를 끌어들여 음양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백일홍에서 말하는 양기란 탈혼진공으로 가둔 인위적인 기운이 아니라 자연의 양기였다. 한 톨의 양기도 없는 신체가 되면 양기가 절로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그것을 음기와 조화시켜 한빙지체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때야 오 단계에서 말하는 반로환동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죽었던 남성이 살아나고, 팔이 없다면 그것도 재생되어 태초의 몸으로 변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몸에 있는 나쁜 기운조차 완벽히 사라지는 무(無)의 상태가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털썩!
사자비는 백일홍 위에 누웠다. 그가 익히기에는 파격적이었다. 한빙지체가 될 기회를 제공하지만, 실패할 경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긴, 이대로도 있어도 죽을 가능성이 큰데…….’
그래도 갈등은 여전했다. 정말 한빙지체가 되면 사라졌던 남성이 살아날까? 지금의 상처도 모두 치유될 수 있을까? 오히려 죽음을 더 재촉하는 건 아닐까?
“음!”
잠시 침음을 흘린 후 몸을 뒤집었다. 그는 사 단계를 다시 읽었다. 환골탈태는 이미 경험한 상태라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익힐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성을 잃어야 함은 필연이었다. 남성을 파기시킨 후 탈혼진공으로 가두었던 양기를 모두 배출하고, 그 외에 몸에 있는 다른 기운까지 모조리 없애야만 진짜 백일홍을 익힐 준비가 된다.
“음!”
다시 침음을 흘렸다.
제7장 살인구역
1
팟!
“크윽!”
비명을 쏟아낸 후에 붉은 선혈이 하체를 적셨다. 결정을 내린 후 지체 없이 남성을 파괴해서였다. 반응은 곧장 나타났다. 탈혼진공까지 푼 상태에서 남성을 상실하니 몸에 있던 양기란 양기는 모두 방출되는 것 같았다. 그 과정이 사자비를 더욱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았다. 이대로 혼절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입술까지 꽉 깨물어 정신을 차리고, 단상에 기대어 가부좌를 틀었다. 이때쯤 몸에 있는 양기는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이젠 다른 기운까지 뺄 차례. 그것까지 성공하면 백일홍을 익힐 수 있다. 가능성에 대한 불안함이 그를 위축시켰지만 이미 벌인 일이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계획한 대로 내공수련을 시행했다. 제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성공? 그건 머나먼 여정처럼 길고 험했다. 사자비는 자신이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포기하고 싶은 마음만 강렬한데,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것처럼 길고 멀게만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지속해야 하나! 그 생각만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나마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은 억겁 같았다. 몸에 있는 음기를 완벽한 한기로 바꾸는 작업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공을 방출하고, 그 여파로 단전의 공백이 요동치는 느낌. 치가 떨렸다. 온 몸이 저리고 아팠다. 단전은 내공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외부의 기운을 빨아들여 다시 채우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때는 백일홍의 방법 그대로 외부의 한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과정도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의 고통이 가장 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역시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기만 했다. 단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 멈추면 죽을 것 같아서였다. 내공의 용틀임, 거기에 따라오는 내상, 파괴된 남성, 과다출혈, 이 모든 것을 내공수련이란 고도의 집중력으로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다행히 고통이 점점 줄어드는 듯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처음보다는 나았으므로 견딜 만해졌다. 그때부터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또다시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났다. 사자비는 이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공이 모두 한기로 바뀐 느낌 때문이었다. 처음 익히는 백일홍이라면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했을 텐데, 이미 그의 몸 상당수가 한기에 치우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순수한 한기만 가진 상태라면 자연스럽게 양기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성공하면 음양의 조화가 시작된다. 그때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다고 했다. 그리고 환골탈태를 겪게 된다고 백일홍에서는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이미 환골탈태를 겪었으므로 특별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사자비가 진정 원하는 바는 다음 단계, 반로환동이었다.
“으으으!”
갑자기 몸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참기 힘든 고통이 다가올 것 같은 기분이 공포와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견딜 수 있을까!
의문을 뒤로하고 사 단계에 적힌 대로 양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몸이 양기를 원한다고 그냥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건 치명적인 내상을 부르고 종내에는 주화입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서서히, 아주 조금씩, 새로 받을 양기와 몸속의 음기를 융합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음양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을 더할수록 심해지는 고통 때문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버텨야 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이유로 내공이 돌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 그 양이 미약한 상태, 내상까지 입어서 단전에 있는 내공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만 조화시키면 내공의 성질이 변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지만 견딜 수 있는 만큼은 견뎌야 했다.
사자비는 견뎠다. 그 적은 내공을 양기와 융합시키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으나 결국 버텨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롭던 고통도 어느 정도 줄더니 안정도 찾을 수 있었다.
“후!”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아니라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면서 생긴 불순한 기운을 골라내는 작업이었지만 다행의 의미도 섞인 호흡이었다. 곧이어 눈을 떠 보았다. 백일홍에서는 이 부분에서 환골탈태를 말하고 있었다. 무림에 알려진 일반적인 활골탈태와는 조금 다른 의미라고 했다. 그러나 사자비는 그리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썩어가는 상처도 그대로요, 파기된 남성도 여전했다. 전보다 나았지만 미약한 내공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백일홍을 익힌 후로 언제나 몸이 무겁고 어딘가 당기는 찌뿌듯한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한쪽 성질로만 치우친 내공 때문에 몸이 받던 영향이 모두 없어진 느낌이었다.
“이젠 이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환골탈태 후에는 백일홍의 이 단계를 통해 음양의 조화를 다시 깨트려야 했다. 몸에 있는 모든 기운을 한기로 바꾸어 내공 증진을 이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한의 성질이 되면 그때서야 그가 원하는 반로환동을 할 수 있었다.
반로환동 후에는 삼 단계 방법으로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그때 다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고통은 급격한 내공증진의 결과물이므로. 그리고 몸속의 기운이 완벽한 냉의 성질을 가지게 되면 한빙지체가 이뤄지게 되므로. 물론, 반로환동이 진짜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사자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절반은 성공했으니 남은 절반을 위해 달려야 했다.
☆ ☆ ☆
쩌억!
목이 몸통에서 분리된 강시 하나가 바닥에 무너졌다. 흑룡은 천령시 하나를 완벽하게 제압해냈다. 팔을 떼어냈으며 다리도 뜯어냈다. 수십 번의 장과 권을 가격하여 뼈란 뼈는 모두 부숴놓았다. 그렇게 천령시 하나를 파괴했는데도 쉴 수가 없었다. 또 다른 강시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주위에는 그가 제압해야 할 강시가 많이 있었다.
녀석들이 강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웬만한 호신강기는 화기에 들끓는 그의 주먹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공교롭게도 녀석들은 강시였다. 그것도 고수의 호신강기보다 더욱 단단한 피부와 강력한 뼈를 가진 강시였다. 특히,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시 저항할 수 없게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걸 위해서 지금처럼 근접전을 펼쳐야 했다. 흑시는 몰라도 천령시는 무조건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붙어서 직접 토막 내야 하는 것이다.
천령시는 팔을 부수고 떼어냈는데도 무서울 정도로 공격에 집착하고 있었다. 완전체의 흑룡이라도 녀석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신체 일부를 떼어내기 위해 두 손을 이용하여 녀석의 몸을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다. 천령시의 무시무시한 주먹에도 흑룡의 호신강기는 끄떡없었으니까. 그러나 약간의 충격은 어쩔 수 없다.
천령시 하나를 완벽히 파괴하는데 열 번은 맞은 것 같았다. 아프지는 않지만 몸이 진동하는 충격 때문에 약간의 어지럼증이 있었다.
녀석을 쓰러뜨리자 흑시 두 구가 뒤에서 달려들었다. 흑룡은 간단하게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뻗었다. 주먹에서 공기까지 태워버릴 강렬한 권강이 쏟아지더니 흑시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남은 흑시가 그의 다리를 잡으려 했지만 그조차 피한 후 턱을 걷어찼다. 흑시는 지금 상태의 흑룡을 감당하지 못했다. 턱뼈가 부러지고 얼굴까지 새까맣게 타서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때 또 다른 천령시가 그를 향해 쇄도했다.
흑시보다 몇 배나 빠른 녀석의 공격은 피하기가 어렵다. 흑룡은 그 역시 피해냈다. 그리고 녀석의 양쪽 어깨를 잡아 가슴 방향으로 구부렸다. 녀석이 바동거리며 주먹을 날리는 걸 몸으로, 호신강기로 받아내며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빠드득!
천령시의 몸에서 뼈가 뒤틀리는 괴소성이 흘러나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천령시의 뼈는 만년한철이라도 되는 듯 부러지지 않았다. 결국 몇 대를 더 맞으며 그나마 약한 녀석의 어깨뼈를 잡아 뽑아냈다. 천령시가 무섭게 포효하고 동작 또한 거칠어졌다. 흑룡은 애써 녀석의 팔을 양손으로 펼쳐 잡아 무릎을 이용하여 부러뜨렸다. 세 번이나 힘을 주어서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역시 몇 대를 더 맞아야 했다. 사방으로 달려드는 다른 강시들도 움직임에 방해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흑룡의 신형은 수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빨랐다. 두려움도 주저도 없는 녀석들의 공격을 막고 피하며 천령시를 제압하는데, 기계처럼 정확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이 할 일을 착실히 해 나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혈의인 하나가 기가 막힌 듯, 혹은 믿을 수 없는 듯 혀를 내둘렀다. 반 각도 지나기 전에 흑시 열 구와 천령시 두 구가 분해되어 바닥에서 꿈틀대는 것이다.
“어, 어떻게 저런 놈이!”
옆에 있던 혈의인도 탄성을 흘렸다.
“저런 고수가 무림에 존재한다는 게 놀랍군. 그간 우리 정보에 왜 파악되지 않았지? 저 정도라면 수라천군, 아니 내공만 따지면 그보다 위인 것 같군.”
처음의 혈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평정심을 찾은 목소리였다.
“인간이 낼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다. 특별한 방법을 쓴 듯한데……, 저런 격천지공(擊天之功)이라면 시간은 우리 편이지.”
“그때까지 강시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의 말대로 바닥을 구르는 흑시가 두 구 더 늘어난 상태였다. 이제 흑시 세 구와 천령시 하나만 남았을 뿐이었다.
“우리까지 나서야겠다.”
순간 이십 명의 혈의인들이 흑룡을 포위하려는 듯 자리를 이동했다. 흑룡의 가공할 위력을 보고도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때 흑룡도 움직임에 변화를 주었다. 민감하게 혈의인의 의도를 파악한 그는 세 번째로 무너지는 천령시를 발판삼아 도약했다. 금강역골경이 언제 풀릴지 모르기 때문인데, 포위당하기 전에 도주하려는 행동이었다.
도주는 신속하고 빨랐다. 혈의인들이 미처 대처하기 전에 황금빛을 뿌리며 달아난 흑룡이었다.
그의 목적지는 구파일방이 있는 곳이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그들을 발견한 흑룡은 속도를 줄여 바닥에 내려섰다. 구파일방도 이동을 멈췄다.
“잘 빠져나와서 다행이구나. 다친 곳은 없느냐?”
혜각이 먼저 다가와 흑룡의 상태를 물었다.
흑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라비틀어진 목내이(木乃伊)에게 당해서야 쓰겠습니까. 가뿐히 처리하고 왔죠.”
문제없다는 듯했지만 혜각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계곡에서 흑룡과 헤어진 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흑룡의 낯빛은 형편없었다. 사흘 동안 다섯 번이나 마주쳤던 혈의인과 그들이 부리는 강시를 상대하느라 지친 기색이 완연해 보였다.
혜각도 금강역골경의 완전한 상태가 어떤 것인 줄 잘 알고 있었다. 수를 헤아리지 못할 장경각의 무공서를 읽었으니 무공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 남달랐다. 그의 판단으로는 흑룡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완전한 금강역골경은 상상조차 못할 내공의 증폭을 부르지만, 풀리는 즉시 단전에 있던 내공이 모두 빠져나가고 엄청난 체력소모까지 동반한다. 놀랍게도 흑룡은 그걸 다섯 번이나 사용했다. 도중에 쉬기는 했지만 이런 거친 숲을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은 흑룡에게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이 상태로 몇 번 더 금강역골경을 사용한다면 회복하기 어려운 내상을 입을지도 몰랐다.
“왜 도살장 끌려가는 소 보듯 하십니까? 배고프세요?”
혜각이 표정을 구기고 다시 폈지만 여전히 근심은 얼굴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너 때문에 그간 별 피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만 더는 부담을 주기 어렵구나.”
“무슨 말씀인지…….”
“네가 보기엔 지금 구채구가 어떨 것 같으냐?”
“글쎄요……. 이 상태로 며칠만 더 지나면 구채구에 있는 무인들은 씨가 마르지 않겠습니까? 곳곳에서 놈들이 활개를 치는 듯했으니까요.”
혜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럼, 이 난관은 어찌 헤쳐나가야겠느냐?”
“무림의 힘이 너무 분산되어 있으니 뭉치면 좀 낫지 않을까 합니다만?”
이번에도 혜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이 말을 이어 반문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을 왜 물으십니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이 넓은 구채구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무림인을 어떻게 규합합니까? 안 그래도 지옥교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마당에.”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에 흑룡만큼이나 지친 구파일방의 승려와 도사들, 그리고 수가 절반이나 꺾인 맹의 고수들이 있었다.
“우리도 꽁지 빠지라 도망 중이잖아요.”
“결계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사라지길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흑룡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림인들을 어떻게 한곳에 모이게 한다는 걸까?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그가 물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이미 맹주님과 상의했다.”
“맹주께서 깨어나셨습니까?”
혜각이 대답하기도 전에 저만치 맹주가 걸어오고 있었다. 부상이 아직 완치되지 않은 듯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간 수고가 많았네.”
맹주는 간단히 흑룡의 노고를 위로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서쪽으로 오십 리를 가면 남쪽으로 흐르는 큰 계곡이 있다고 들었네. 계곡을 건너면 험악한 산이 이어지는데 그 속에 넓은 평지가 있다더군.”
“혹시, 그곳으로 놈들을 끌어들이자는 말씀입니까?”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지로 끌어들일 생각이네만, 그전에 좁은 산길을 타야 하니 기습이 용의하지 않겠는고? 그곳을 찾은 놈들의 전력을 좁은 길목마다 매복시켜둔 기습조로 줄이고 마지막에 평지로 끌어들여 상대할 생각이라네.”
“그런데 우리가 한데 뭉치면 놈들도 그렇게 뭉치게 되지 않습니까. 그 수가 만만찮을 텐데요?”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결국 우리는 각개격파당할 뿐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데 뭉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네. 저들은 우릴 추격하는 중일세. 한데, 흩어진 무리가 한 곳으로 모이게 되면 저들도 모일 수밖에 없겠지. 그 방향이 아마도 여러 갈래일 텐데, 그렇게 되면 먼저 뭉치게 될 우리가 오히려 저들을 각개격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럴 듯하다는 표정으로 흑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흩어진 무인들은 어떻게 모읍니까?”
“혜각 대사와 상의한 결과 이인 일 개조로 마흔 개 조를 뽑아 구채구를 돌아다니게 할 계획일세, 그렇게 움직이다가 무인들을 만나면 소식을 전달해야겠지.”
흑룡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시체가 돌아다니는 곳을 누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다 들키면요?”
“그래서 두 명을 한 조로 구성하지 않았겠는가. 소수로 움직이면 발각될 가능성은 조금 줄어들 테니 말일세. 그리고 뚜렷한 목적지가 없어서 발각되어도 도주하기는 좋을 걸세. 지금부터 정찰조는 사흘 동안 무인들을 찾아 소식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게야. 유사시에는 두 명도 따로 나뉘어 활동해도 무방하다네.”
“놈들이 우리를 찾는 만큼 무인들도 꼭꼭 숨어서 어딘가로 도주하고 있을 텐데, 정찰조도 그들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혜각이 두 손을 모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부처님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아미타불!”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흑룡이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거들죠.”
그러자 맹주와 혜각이 동시에 말렸다.
“자넨 우리와 함께 해야 하네.”
“너는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
흑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법에는 자신 있는데요.”
“자넬 두고 그걸 염려하는 하겠는가. 혜각 대사에게 들은 바로는 계곡을 장악했던 녀석들의 우두머리가 엄청난 고수라지?”
흑룡이 ‘아!’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도 일행과 합류한 뒤로 계곡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터였다.
“수라천군도 한 방에 골로 보냈다는 그 괴물이요?”
맹주가 인상을 찌푸리고, 혜각이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상상조차 못할 고수가 분명한 것 같더구나.”
맹주가 말을 받아 이었다.
“어쨌건 자넨 최후 전투에서 활약을 해야 하네. 만약 그가 그곳에 나타나면 그 또한 자네가 상대해야 하니 지금부터는 몸 상태를 최고로 만드는 데 주력하시게. 그나마 그를 제압할 가능성은 자네밖에 없는 것 같으니.”
흑룡은 믿어 달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수라천군과 저는 다르니까요. 하하하하!”
☆ ☆ ☆
사자비는 음양의 조화를 깨뜨리는 과정을 통해 몸속의 내공을 대부분 한의 성질로 바꿀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완벽히 바뀔 듯한데,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굳이 찾자면 편안해진 마음 정도? 어느새 조바심은 사라지고 죽지 않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애착조차 가슴속 저편의 어둠에 가려진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안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한 시진이 지났을 때 평온했던 감정은 처음으로 돌아왔다.
음양의 조화는 완벽히 깨뜨렸다. 성공이었다. 이제 한의 성질만 있는 상태, 백일홍에서 말하는 그 단계라 할 수 있었다. 미약하지만 단전에서 꿈틀대는 강렬한 요동도 느껴졌다. 그런데 이건 뭔가. 첫 변화라고 생각하고 잔뜩 기대했던 마음은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요동치던 기운이 점차 줄더니 꺼져가는 불빛처럼 희미해지는 것이다. 그것을 붙잡고자 애써 보았지만 줄어드는 불씨는 잡을 방법이 없었다.
‘왜 이러지?’
다시 조바심이 생겼다. 실패하면 끝이다. 생명력이 점점 꺼져가는 몸으로 남성까지 파기하여 심한 출혈이 있지 않았나. 이렇게 내공까지 사라지면 버틸 기력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잘못된 건가! 어디서부터?’
어떡해서든 사라지는 내공을 지키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방법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탈혼진공을 사용해볼까?
강렬한 욕구는 곧바로 뿌리쳤다. 순수한 백일홍의 수련에 다른 심법을 더해서는 안 된다. 더욱 큰 실패를 부를 수도 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종내에는 정신까지 혼미해지더니 어지럼증까지 동반했다. 몸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순간 구토증상이 나타났다. 한동안 제대로 먹은 것이라고는 없는데 욕지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간지러움. 몸에 수천 마리의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온몸이 가려워 생각조차 방해할 정도의 괴로움이 몰려왔다.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생소한 고통에 신음하며 한 시진을 버티다가 끝내 정신을 놓았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나! 역시 알 수 없다. 죽음을 생각한 후로는 여전히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그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신체에 놀라운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사자비는 경악했다.
“이게 뭐야?”
그는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석실이 무너질 듯한 큰 소리였다. 몸은 나아 있었다. 놀랍게도 벌어진 상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파괴된 양물까지 처음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피부 또한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덕지덕지 말라붙은 피딱지가 몸을 일으키자 피부껍질과 함께 우수수 떨어지더니 백옥 같은 피부가 수줍게 얼굴을 비췄다. 옷고름까지 풀어 확인해 보았지만 예전에 있던 상흔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양물도 확인해 보았다. 낫으로 찍었던 상처도 없었다. 전신 구석구석 확인해본 사자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내공을 확인하고는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다시 소리쳤다. 내공이 없다. 한줌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처럼 여겨졌다. 반로환동은 분명히 겪었는데, 내공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도 기운은 있다. 진원지기라는 것인데, 생명을 지탱해주는 기운이다. 사자비는 그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건 심각한 일이었다. 내공이 느껴져야 내공수련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상태로는 일주천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자비는 털썩 주저앉았다. 모욕처럼 여겨졌다. 속았다는 치욕도 느껴졌다. 그는 석상 위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썩은 시체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시체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단상에 편히 몸을 기대자 한숨이 흘러나온다.
목숨은 건졌지 않은가!
그걸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하루살이 목숨이었으므로 큰 위안거리는 아니었다. 이 상태로 동혈을 나갔다가는 친황대나 동창에 걸려 죽을 테니까. 그 외 지옥교 또한 그를 발견하면 죽이려들 것이다. 이래저래 느는 건 한숨인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한숨은 웃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종내에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다가 야광주가 박힌 천장을 보았다.
공허함 뒤에 찾아오는 웃음은 허탈해서일 것이다. 당장은 걱정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2
금빛 단상을 침상 삼아 한숨 자고나니 그나마 몸이 개운해진 것 같았다. 눈을 비비고 일어났지만 정신은 몽롱했다. 더 잘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몸을 일으킨 이유는 허기였다. 밥을 달라고 배가 요동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 석실을 둘러보았다. 고민도 없고 걱정도 없었다.
그는 단상에서 내려와 처음 깨어났던 통로를 찾았다. 어둠을 더듬어 도착한 곳에는 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선 입을 적셔서 갈증을 해소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욕구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그때 ‘부르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웅덩이 중앙이 흔들리더니 수면이 불쑥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한참 후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제야 사자비는 자신에 어떻게 동혈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았다. 저 웅덩이 속에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통로는 폭포의 낙수 아래로 연결돼 있을 것이다.
여전히 동혈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에 의해 낙수에 연결된 통로가 규칙적으로 물을 빨아들인 것 같았다. 물에 빠진 사자비는 요행히 그 힘에 끌려 통로로 빨려들었을 것이고.
그는 웅덩이로 들어가서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넓은 통로가 있었다.
‘여기로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
문제는 나가서 무엇 하나, 하는 것이었다. 밖은 사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깊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잠수하듯 수면에 잠겨 들었다. 이조차 아무런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 그저 허기를 채워야겠다는 단순한 마음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이나 호흡을 멈추고 더는 숨을 참기 어렵겠다고 여겨질 즘에 사자비는 통로를 나올 수 있었다. 곧장 물 위로 떠오르자 애초에 그가 빠졌던 폭포수가 눈에 들어왔다. 거친 수중회오리가 몸을 당겼지만 이젠 그런 정도는 쉽게 벗어날 상태다. 가볍게 헤엄쳐서 물가로 걸어 나와 하늘을 보았다.
어두웠다. 먹구름이 잔뜩 끼여서 햇빛 한 점 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건가!’
부상당했던 때와 사위가 별반 다르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점점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상태는 더욱 짙어져서 반 시진 후에는 완벽한 무념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그저 운 좋게 잡은 토끼 한 마리를 불에 구워 허겁지겁 먹는 데만 신경을 집중했다. 누가 그곳을 지나가도 관심조차 두지 않을 멍한 상태였다.
☆ ☆ ☆
구채구 서남쪽으로 달리던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이동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폭발할 것 같은 괴로움이 전신을 옥죄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바짝 뒤를 쫓아오는 괴물이 있었으므로…….
살막의 부막주 막거희는 머리가 복잡했다. 후회가 천 근의 무게처럼 달려드는 것 같았다. 지옥교의 의도를 일찍 알아보지 못한 후회, 그들이 결계를 치기 전에 구채구를 나가지 않은 후회였다.
처음에 살막은 녀석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마도 구채구에서 가장 먼저 지옥교를 알아봤을 것이다. 살막의 정보력은 그만큼 뛰어난 부분이 있었다. 문제는 지옥교가 규보의 비급 때문에 구채구를 찾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실수였다. 정보 조에 의해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지만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또한 큰 실수였다.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고 학(鶴) 총관은 결계일지 모른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남쪽 초입을 건넜으나 놀랍게도 구채구를 나갈 수 없었다. 물론, 희망은 남아 있었다. 당시 북쪽은 먹구름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속도가 관건인데, 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살수라도 하늘을 덮는 구름보다 빠를 수는 없다. 살막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중도포기하고 적당한 곳을 찾아 숨어야 했다. 그리고 그곳 주위로 진법과 요술을 가미한 죽음의 길을 만들어 놓았다. 결계가 걷힐 때까지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
탁-!
막거희는 달리던 속력을 줄이고 앞을 가로막은 바위를 밟아 다시 방향을 틀었다. 경공에는 자신 있었지만 녀석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장애물이 많은 숲 속으로 도주하는 게 나을 것이다. 숲으로 숨는 중에 뒤를 힐끔 보았다.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생각보다 더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그녀는 죽일 듯 녀석을 노려보고 급히 숲으로 파고들었다. 저놈 때문에 살막의 장기, 죽음의 길이 완벽하게 깨졌다. 사람도 시체도 아닌 괴물 여덟 마리 때문에 일 각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의 길이 깨졌다.
황 총관은 녀석들을 강시라고 했다. 강시 중에서도 아마 흑시일거라고 했다.
그녀도 강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강시 몇 구 때문에 죽음의 길이 부서질 줄은 몰랐다. 살막의 고수 절반이 거기서 뼈를 묻을 줄도 몰랐다. 그게 엿새 전 일이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시를 버리고 열 개 조로 나누어 사방으로 흩어진 지 벌써 엿새나 지난 셈이다. 그리고 이 각 전에 또 녀석들에게 발각되었다. 은둔술에는 누구보다 강한 살막인데, 어떻게 숨은 장소를 찾아냈을까. 당시 그녀의 호위는 고작 네 명. 그녀가 도주할 시간을 벌고자 목숨까지 바쳤는데 약간의 시간도 벌지 못한 듯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애초에 구채구에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헉!”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녀석이 숲으로 파고드는 소리였다. 거리를 좁히며 만들어내는 녀석의 소리, 나무에 부딪히고 풀숲을 가로지르는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이다. 소리를 들으며 도주하자니 조급함이 밀려왔다. 꼬리처럼 따라 붙는 추격자의 소리가 그녀를 압박하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커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도약하여 나무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녀석의 소리가 줄어들었으나 잠깐 사이에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잠시 후면 뒤를 잡힐지도 모른다. 이젠 내공과 체력도 떨어진 상태. 이 상태로는 결국 녀석에게 잡혀 사지가 찢겨질지 모른다. 그런 공포에 치를 떨다가 거대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콰콰콰콰콰!
인근에 폭포가 있는 건가. 그녀는 최후의 격전지로 그곳을 선택했다. 당장 녀석과 사달을 내도 상관없지만, 오히려 힘이 남아 있는 지금 싸우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좀 더 목숨을 부지하고픈 욕망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어쩌면 폭포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 도망칠지 모른다. 그러나 폭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폭포에서 싸워야 한다. 한 명보다는 두 사람이 나을 테니까.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가에 앉아 고기를 굽는 사내는 원주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내의 신분은 하나, 무림인이다. 물가에 앉아 한가롭게 고기를 굽는 모습이 왠지 지옥 같은 구채구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도움은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구채구의 무인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지옥교의 척살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혹, 강시를 상대할 수 없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혼자 죽는 것보다 둘이 죽는 게 그나마 위안될 것이므로.
“이봐요!”
그녀의 심경을 대변하듯 단내를 풍기는 목소리가 쏜살처럼 사내를 향해 달려나갔다. 강시는 이미 그녀에게 십 장 거리까지 따라붙은 상태였다.
“이봐요!”
두 번이나 불렀으면 쳐다보기라도 해야 할 텐데, 혹시 귀머거리?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세 번째로 소리치자 사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아!’
막거희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일면식이 있는 자였다. 구채구로 오는 길목에서 보았던 자, 요사한 기운을 풍기는 무리 중 한 명, 기도 하나로 살막을 향해 무언의 압력을 주었던 자였다. 과연 진짜 실력도 기도만큼의 고수일까?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순간적으로 회의가 들었다. 당시 녀석들은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혼자 있는 걸까. 혹시, 모두 지옥교에 당한 건 아닐까? 지옥교에 당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강시를 감당 못할 수 있다.
생각과 달리 그녀는 아주 정중하고 다급하게 경고했다.
“녀석이 쫓아와요.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사내 옆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거의 지척까지 거리를 좁힌 강시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막거희는 신형을 돌려 사내 옆으로 빙글 반 바퀴 돌았다. 강시의 손이 목표를 놓치고 허공을 갈랐지만 금세 방향을 틀어 그녀를 쫓았다. 그녀는 다시 두 걸음 이동해 사내를 방패 삼았다. 강시 또한 벌어진 거리만큼 이동하고, 그녀도 좁혀진 거리만큼 다시 이동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자연 사내를 중앙에 두고 막거희와 강시가 빙글빙글 도는 형국이 되었다.
“왜!”
손만 뻗으면 갈기갈기 찢을 수 있는 사내를 앞에 두고 왜 자신만 괴롭히는지 물을 수 없었다. 한 마디 외칠 힘으로 신법을 밟는 데 주력해야 했던 것이다.
‘혹시! 도망치는 녀석에게 더 끌리는 걸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역시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멈췄다간 솜털을 건드릴 것처럼 달려드는 녀석의 손톱에 목이 날아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 다다르고 있었다. 다급해지니 짜증도 났다. 강시보다 넋 놓고 사태를 관망하는 사내를 향한 짜증이었다.
“도와 달라고, 이 자식아!”
사내는 아직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막거희는 괜히 소리쳤다고 생각했다. 호흡이 흐트러졌고 덕분에 발을 꼬이지 않았나. 순간 몸이 기울어졌다. 발을 내밀어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었다. 어차피 죽을 것 같았다.
“나 다음엔 너란 말이야!”
넘어지는 그녀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무방비로 적에게 완전히 뒤를 내준 셈이었다. 이제 곧 강시의 손에 뒷덜미가 찢기겠지. 그런 생각으로 두 눈을 찔끔 감았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없었다.
‘어?’
의아했지만 죽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아무런 고통도 없고 뒤만 간지러울 뿐 아닌가.
막거희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다행히 목이 돌아간다. 이건 아직 자신이 무사하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시야를 밝혔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녀석의 손톱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손톱은 고개를 돌린 그녀의 코끝에 걸려 있었다.
막거희는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멈춰진 강시의 손을 살폈다.
“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놀라웠다. 강시의 손목을 사내가 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왼손 하나만으로 무시무시한 괴력의 손을 완벽히 고정하고 있었다.
얕은 한숨 뒤로 그녀가 급히 경고했다.
“생각보다 강한 녀석이니 조심…….”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시가 다른 손을 이용해 사내의 목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놀라게 했던 것은 사내의 행동이었다. 왼손을 풀어 강시의 손을 놓아주고 쇄도하는 반대 팔을 향해 동선을 그리더니 손목을 튕기듯 살짝 놀리는 것이다. 사내의 행동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단순하고 여유로운 동작이 날아오는 녀석의 손을 크게 요동치게 했다.
잠시 후 사내의 손에 부딪힌 강시의 손이 튕겨나갔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해 신형까지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녀는 경악한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무심한 표정이 처음의 그대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백치 같은 얼굴이었다.
막거희는 다시 경고의 필요성을 느꼈다. 녀석의 공격을 한 번 막았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강시는 공격이 막힐수록,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발광하는 괴물이었다. 갈수록 움직임이 거칠어질 테고 앞뒤 재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공격에 공격만 하는 괴물,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질리도록 공격하는 괴물이 강시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강시가 말보다 빨랐던 것이다. 녀석은 경고를 하기도 전에 이미 거칠고 빠른 움직임으로 사내를 향해 권각을 날리고 있었다.
법칙도 틀도 없는 마구잡이 공격이었다. 무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무식한 방법과 방향으로 날라 오는 녀석들의 권각은 그녀를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저 빠른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입이 쩍 벌렸다. 사내가 막고 있었다. 그것도 왼손 하나로……. 막을 수 없는 건 몸을 약간씩 틀어 움직이는 정도로 사내는 완벽히 피해내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사내의 왼손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권각을 막아내는 찰나에 잠깐씩 동작이 멈춰지는데 그때만 흐릿한 형체가 드러날 뿐이었다. 그 때문에 잔상이 남아 팔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는데, 점점 벌어지는 그녀의 입에서 결국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한 손으로 강시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놀랍지만 막아내는 힘이 상상보다 더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공격하는 강시의 팔다리가 흔들리다니!
종내에는 녀석의 한쪽 팔이 부러졌다. 공격하는 녀석의 권각이 막아내는 사내의 단단함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녀석은 개의치 않고 기이하게 꺾인 팔을 움직여 끊임없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러진 팔은 너덜너덜해질 뿐이었다. 다른 팔도 신세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뚜둑!
괴음과 함께 사내를 걷어차던 강시의 다리가 부러졌다. 사내의 왼손이 살짝 무릎을 막았을 뿐인데, 관절이 완전히 꺾인 기이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상당한 아픔이 있었을 것이지만 녀석은 여전히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때리는 쪽이 만신창이가 되는 기이한 상황에서도 울부짖으며 사내를 향해 지겹도록 공격해대고 있었다.
막거희는 부릅뜬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거기에 처음으로 감정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지루한 걸까?’
하품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 표정, 그 얼굴이 그녀에게 향했다. 일순 사내와 막거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막거희는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손에 눈이라도 달린 듯 사내는 보지도 않고 들어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주 쉽게, 간단하게, 여유 있게. 흡사, 어른이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모습이었다.
“뭐냐 이건?”
불쑥 사내가 던진 물음이었다.
막거희는 벌렸던 입을 급히 다물고 떠듬거렸다.
“가, 강시요.”
“강시라고?”
사내는 신기한 듯 광분하는 녀석을 힐끔 보고 다시 막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시가 얼마나 강한 거냐?”
“네?”
“이 녀석이 어느 정도이기에 내게 위협이 안 되느냐는 뜻이다.”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걸 왜 묻느냐는 노골적인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사내의 얼굴을 보니 정말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의아함, 의문이 그대로 표정에 나타나 있었다.
‘도대체 저자의 정체가 뭐지?’
막거희는 사내보다 더 큰 의문에 휩싸였다. 흑시를 저렇게 간단하게 다루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아마도 흑룡이나 수라천군 정도의 고수라면 가능할 것이다. 사내가 그 정도의 고라는 뜻일까? 저런 고수가 개방과 맞먹는다는 살막의 정보력에 왜 걸리지 않았지?
의문을 품은 눈으로 그녀는 사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제8장 몸보다 머리보다 마음
1
갑자기 나타난 여인 때문에 사자비는 귀찮은 일에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극히 단순한 감정밖에 없는데, 생각하기 귀찮으니 신경을 꺼야지. 당장은 배를 채우고 싶으니까. 그러나 여인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여인은 쫓기는 것 같았다. 상당한 실력자 같지만 그런 고수를 쫓는 녀석은 얼마나 더 대단할까? 호기심, 혹은 궁금증 때문에 추격자도 살폈다. 놀랍게도 녀석은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외모였다.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다. 물론, 관심 없다.
오히려 사자비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릇노릇 구워진 토끼고기를 먹으면서 싸움 구경이라니……, 금상첨화 아닌가. 그런데 여인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공교롭게 녀석도 그녀를 잡고자 끼어들었다. 곧이어 그를 중심으로 두 연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런!’
그는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도중에 여인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역시 관심 없다. 그는 오로지 한 가지 불만만 가득한 상태였다. 이래서야 느긋하게 앉아 고기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그는 내공 한줌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충분히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고, 최선은 도망쳐야 옳았다. 그런데 두 고수를 보아도 이상하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꼭 남의 일처럼 전혀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코앞에 벌어지는 일이 꿈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깨어난 후로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무념은 더욱 깊어만 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심기를 건드린 일이 벌어졌다.
여인을 쫓던 녀석이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중요한 건 멍한 상태로 몸이 흔들리니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무심결 놓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걸린 고기를 보았다. 이미 바닥을 굴러서 양념처럼 더러운 흙 알갱이가 잔뜩 발라진 고기가 되어 있었다.
쉬익!
무심결 손을 뻗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저 혼내줘야 한다는 본능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녀석의 팔목이 손에 잡혔다. 놀라운 점은 강해보이던 녀석의 팔이 손에 잡히는 순간 정지되었다는 것이다. 무심한 표정과 달리 사자비도 꽤 놀랐다. 설마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움직임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녀석이 약한 건가? 시험할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손을 잡힌 녀석이 분노한 몸짓으로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자비는 역시 본능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싸우고자 마음먹는 순간 녀석의 움직임이 갑자기 굼떠진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느려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순전히 느낌이었다. 흐르는 공기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느낌만으로 충분했다. 녀석의 움직임이 훤히 눈에 보였으니까.
녀석이 오른손을 뻗는다. 그렇다면 방어를 해야지. 생각과 함께 방어를 위해 손을 들어 올린다.
너무 빨리 손을 들어 올린 것 같다. 사자비는 더욱 놀랐다. 분명히 녀석이 손을 뻗는 것을 보고 팔을 들어 올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녀석의 손은 그의 팔에 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보다 한 박자 늦은 후에야 녀석의 손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방어를 위해 급히 움직이는 손이 무색할 지경. 그가 빠른 건가, 상대가 느린 건가.
사자비는 상대가 굼뜨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했을 때 지겹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대가 조금 더 빨랐으면 좋겠다는 어이없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녀석의 상태를 보니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방어하던 그의 손에 막혀 팔다리가 점점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이다. 결국,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꺾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사이 녀석의 정체를 여인에게 들었다.
‘강시?’
그게 얼마나 강한지는 궁금했다. 그것을 알아야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여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걸까! 강해진 건가?’
의문은 점점 더 커졌다. 내공도 없는 몸이 강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참이나 멍해진 머리를 굴리느라 고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순간 한 가지 글귀가 떠올랐다.
마음은 몸보다 빠르다! 머리보다 강하다!
분명히 백일홍은 그것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라 했었다.
‘아!’
사자비는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몸보다 빠르다. 머리보다 강하다. 그게 마음이라고 했다.
내공과 몸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내공 또한 몸을 구성하는 일부분이기 때문인데, 사람이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가지는 또 다른 기운이라 할 수 있다. 무인은 그것을 극대화 시키면서부터 그걸 이용하려고 한다. 머리로 지시하고, 지시대로 내공이 움직여 큰 힘을 발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몸과 내공이 하나라는 것을 망각한 행위다.
마음은 몸보다 빠르며 머리보다 강하다. 그 의미가 이젠 확실해졌다. 젓가락을 놀리고자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밥을 먹어야겠다는 마음만으로 몸이 절로 움직이게 된다. 내공도 그와 같은 것 아닐까!
사자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까지 둔했던 머리가 생기를 찾은 느낌이었다. 전처럼 생각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 머리가 맑아졌을 뿐이다. 새하얀 백지처럼 맑은 상태, 공허하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였다.
팡!
왼손을 떨쳐서 강시의 남은 팔을 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팔을 아래로 꺾었다.
두두둑!
팔목이 부러지며 완전히 안쪽으로 접혔다.
퍽!
녀석의 복부를 걷어차자 십 장이나 날아가 절벽에 부딪혔다. 온전한 건 다리 하나밖에 없는데, 무식한 건 알아줘야 할 것 같다. 벌떡 일어서더니 무작정 달려와서 또 공격을 시작하지 않는가. 사자비는 간단한 회피 동작으로 녀석의 공격을 흘린 후 이번에는 목을 잡아 비틀었다. 또다시 뼈가 뒤틀리는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녀석의 목이 덜렁거렸다. 그 상태로 녀석을 물속으로 집어던졌다.
팡!
녀석이 수면을 때리며 파동을 일으켰다.
순간 사자비의 눈빛이 번뜩였다. 바야흐로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할 때였다. 그는 수면에 가라앉는 녀석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백팔백룡장의 내공 운용법을 머리에 그리면서였다.
아주 단순한 행동이었다. 내공을 운용한다고 단전의 기운을 움직이는 차례를 무시하고 그저 생각만 했다. 그런데 결과는 기가 막혔다.
파파파파파팡!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거대한 빛이 형성되더니 이내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장심에서부터 떨어져나온 빛 덩어리가 순식간에 수면을 향해 뻗어나갔다. 예전의 사자비라도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 파괴력과 속도, 그리고 장력의 숫자에서 차원이 달랐다. 일시에 굉음을 자아내며 쏟아진 장력이 백여덟 개라니!
예전이었다면 이름만 백팔백룡장이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백팔백룡장은 지금이었다.
쏟아진 백여덟 개의 백룡은 수면 전체를 점하듯 덮쳤다.
콰콰쾅!
순식간에 일대를 쥐어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자비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백팔백룡장의 진정한 파괴력을 실감했다. 장력이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 물 폭탄을 일으키더니 사방을 얼려 놓은 것이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수면은 요동치고 비산하여 흡사 고슴도치처럼 보였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만 개의 물방울도 마찬가지. 얼어서 우박처럼 흩어지는데, 그중 일부는 바위처럼 크게 덩어리를 형성하여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백팔백룡장을 한 번 쏟아냈을 뿐인데 폭포 주변이 난장판이 된 것이다.
사자비는 수면을 보았다. 아니, 장력의 여파를 이기지 못한 수백 개의 물기둥을 보았다. 사방으로 솟구쳐서 조각상처럼 언 물기둥이었다.
정말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아닌가!
그 속에 검은 물체가 섞여 있었다. 삐쭉 튀어나온 물기둥 하나에 섞여서 얼어 있는 검은 그림자, 바로 강시였다.
사자비는 검지로 강시를 가리켰다. 백로잔음도 마음만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 실험할 생각이었다.
핑!
낮은 소리와 함께 빛을 발하는 둥근 액체가 섬전처럼 뻗어나갔다. 하나가 튀어나가고, 곧이어 수십 개가 연이어 손가락을 벗어나 콩 볶는 소리를 만들었다.
얼음 기둥을 뚫은 구멍은 정확히 콩 볶는 소리의 숫자만큼 흔적을 남겨 놓았다. 흔적의 방향은 강시. 너덜너덜해진 얼음덩이와 마찬가지로 강시 또한 전신에 수십 개의 구멍이 남아 있었다.
“흠!”
잠시 침음을 흘린 사자비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생각만 하면 무공이 실현된다!
내공을 돌리고 운용할 시간 따위는 이제 필요 없다는 뜻이다. 비슷한 고수와의 싸움이라면 이런 기술은 큰 장점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 그의 내공을 받아낼 수 있는 고수가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장점은 또 있었다. 백일홍으로 따라오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공을 느낄 수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앞으로는 무공을 펼치는 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한빙지체인가!”
놀라웠다. 힘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느끼지 못한 것일 뿐,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내공이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몸과 기운이 동화되었다는 뜻일까?
그때 넋 나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빙지체?”
막거희였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물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폭포수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 외에는 모든 게 정지되어 있으니 기겁할 수밖에. 수면은 폭발의 여파를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처럼 힘을 받은 방향으로 뻗어가며 얼어 있는데, 장관이라면 이런 걸 두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한 폭의 풍경화 같지 않은가. 수십 마리의 백룡이 뒤엉켜 꿈틀대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력으로 저런 걸 만들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사내의 시선을 보았다.
그녀는 사내를 마주 보다가 흠칫 놀랐다. 처음의 맹한 표정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영악한 사람의 표본 같은 표정만 얼굴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사내는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강시를 제압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자비롭지 않았다. 무식하게,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강시를 파괴해 버리지 않았나. 얼음에 갇혀 전신에 구멍이 난 강시가 불쌍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사내의 행동은 그녀의 생각을 한쪽으로 몰아넣었다. 그건 잔인성이었다. 사내는 약자를 철저히 파괴하는 잔인함을 가졌다. 눈빛도 잔인함과 영악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같았다.
‘날 왜 보는 거지?’
들개를 피하려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기분이 이럴까! 마주하는 눈빛도 좋은 의도 같지는 않았다.
“다, 당신은 누구죠?”
“사자비.”
의외로 상대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기는 했다. 그래서 신분을 짐작할 다른 질문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사내가 되물었다.
“넌 뭐냐?”
“마, 막거희라고 해요.”
“이름 따위는 관심 없다. 어디 소속이냐는 거다.”
“사, 살막이요.”
“살막? 무림의 그 백정 집단?”
“백정이 아니라 살수 단체인데요.”
항변하는 투였지만 사자비라는 이상한 이름의 사내는 코웃음만 쳤다. 그것이 거슬렸으나 막거희는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질문은 계속 되었다.
“얼마나 지났지?”
“네?”
“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 날부터 얼마나 지났냐는 뜻이다.”
막거희는 의아한 듯 먹장구름을 보았다.
‘그간 구채구에 없었나?’
하지만 얼마 전 구채구 밖에서 일행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럼,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던 걸까!
상대의 눈을 보고 그녀는 생각을 떨쳐냈다. 빨리 대답하라는 강요의 눈빛을 상대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엿새요. 엿새가 지났어요.”
“그렇다면 저 강시는 뭐지? 강시는 부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누구냐?”
막거희는 이제야 확신했다. 상대는 구채구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
생각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처음 일면식이 있던 날 사내와 일행은 구채구로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구채구 밖에서 대기하다가 도중에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는 뜻인데, 결계를 지나올 수 있었다면 반대로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결계에 틈이 있었나요?”
“질문은 나만 한다.”
막거희는 움찔한 후 애초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옥교에서 부리는 괴물이죠.”
“지옥교?”
“저 구름도 지옥교에서 만든 결계예요. 아무도 구채구를 나갈 수 없게 해놨죠.”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설명을 시작했다. 그간 지옥교의 움직임과 구채구에 벌어진 일에 관해서였다.
“그랬단 말이지?”
설명이 끝난 후 사자비는 묘한 미소를 보였다. 엿새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웠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지옥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지옥교의 의도는 혈야대군과의 조우에서 이미 알았다. 그러나 무인들의 반응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넌 왜 그곳에 가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나?”
막거희는 물기둥 속에 굳은 강시를 가리켰다.
“저런 녀석이 얼마나 많이 구채구에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게다가 저건 약과죠. 비슷한 생김이지만 눈이 빛나는 녀석들은 정말 무시무시해요. 아무리 무인들이 합심한다 해도 지옥교를 제압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판단했어요.”
“이렇게 숨어다니다가 녀석들에게 발각되는 것보다는 힘을 합치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무인들이 한곳으로 이동하는 덕분에 지옥교도 그곳으로 집중되지 않겠어요? 오히려 표적이 되는 셈이죠.”
“그러니까, 그 느슨해진 틈을 노려 오히려 반대 반향으로 빠져나가시겠다?”
“네.”
사자비는 조소를 흘렸다.
“그런데 꼴이 왜 그 모양이냐?”
막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시들은 신기할 정도로 숨은 곳을 잘 찾아냈다. 선견지명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자비의 말 대로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강시에게 걸려서 모두 죽지 않았었나. 이제 구채구에서의 살막은 그녀밖에 없는 셈이었다. 규보의 비급도 이젠 관심 밖의 일이 되어 있었다. 어떡해서든 빨리 총단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 그래서 눈치를 살피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어떻게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었나요?”
“결계를 뚫어?”
“네.”
“난 계속 여기에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막거희의 표정.
“그런데 구채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고요? 그러지 말고 가르쳐주세요. 절 여기에서 나가게 해주면 은자 만 냥을 드리겠어요. 아니, 이만 냥을 드리죠.”
하지만 상대는 관심 없는 투였다. 은자 이만 냥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
“고작 이만 냥?”
사자비가 가소롭다는 웃자 막거희는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상대의 신분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이만 냥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까?
하긴, 저만한 고수라면 돈에 연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막거희는 제안을 덧붙였다.
“한 가지를 더 붙여 드리죠. 죽이고 싶은 사람 한 명만 말하세요.”
사자비는 이번에도 웃어주었다. 막거희도 따라 웃었다.
“무공이 뛰어나다고 자신하지 마세요. 죽일 능력이 안돼서 살수에게 의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죽일 수 있어도 얼굴이 드러날까 봐, 혹은 원한을 가진 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또는 차마 얼굴을 보고 죽일 수 없어서 의뢰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죠. 저희 정보력과 살인능력은 무림 최고랍니다.”
이번에도 웃음!
막거희는 잔뜩 기분이 상한 표정이 되었다. 도대체 뭘 해줘야 이곳에서 내보내 줄까. 십만 냥을 부를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십만 냥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 물론, 막주가 딸의 목숨 값으로 십만 냥을 내놓을 리 없다. 돈을 주는 것보다 죽이는 쪽이 훨씬 쉬울 테니까. 하지만 저만한 고수를 죽이려면 살막도 그만한 피해를 계산해야 한다.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때 상대가 기겁할 말을 했다.
“다 필요 없고, 네가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면 된다.”
막거희는 하! 하고 입을 벌렸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사지로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원한은 갚아야지.”
“원한? 혹시, 구채구에 있는 고수 중에 있나요? 그럼, 가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요.”
“다 죽어? 구채구에 있는 무림인 따위가 내게 원한을 질만 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하나?”
막거희의 입이 더욱 벌어졌다.
“그럼, 지옥교?”
그녀는 자기가 말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말도 안 돼요. 혼자서 어떻게 그들을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그거야 가보면 알 일. 넌 안내만 하면 돼. 살막이니 이곳 지리는 웬만큼 파악하고 있겠지?”
물론 그렇다.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무인들이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는 알고 있었다.
막거희는 다급해졌다. 원한이야 갚든 말든 관심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왜 사지로 들어가야 하나? 죽을 곳을 알고 찾아가는 바보는 없을 테고,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십만 냥!”
결국 모험을 하기로 했다. 막주가 십만 냥을 녀석에게 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건 그때 가서 보면 될 일이었다. 당장은 무슨 수를 쓰든 살고 싶었으므로. 설마, 십만 냥을 거절하지는 못하겠지.
“십만 냥?”
“네!”
그녀는 주겠다는 약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돌연히 등장한 한 떼의 무리 때문에 말을 삼켰다.
그들은 막거희가 구채구에서 본 여러 부류와는 또 달랐다. 평범한 무복을 입었지만, 통일되지 않아서 여러 무리가 섞인 모습이었다. 인원은 백여 명 정도. 은근히 드러나는 기도가 범상치 않은데, 그들은 낙수가 떨어지는 절벽 옆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놀랐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막거희는 살수의 본능을 살려 그들에게서 풍기는 한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저들은 이쪽에 좋은 의도가 없다.
“누, 누구죠?”
사자비와 안면이 있는 것 같아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 없는 표정으로 사내만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 대인께서 무사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무탈하시리라고는…….”
선두에 있는 넓적한 얼굴의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자비가 대꾸했다.
“그래서 아쉬운가, 홍면노?”
‘홍면노?’
막거희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 의아해했다. 살막이 무림의 모든 정보를 알지는 못하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은 있다. 특히, 직업의 특성상 고수에 관한 정보가 뛰어난데, 홍면노라는 이름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런 고수들을 데리고 다니는 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어야 정상인데…….
그녀는 사자비를 보았다.
홍면노라는 노인은 그에게 대인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그건 이 젊은 애송이가 훨씬 윗줄에 놓인 상관이라는 뜻이다. 분위기도 같은 세력에 몸담은 듯하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여차하면 빠져나가겠다는 의도였다. 하극상이든 무엇이든 이들 사이에 그녀가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사자비가 돌아보며 경고해서 그녀를 굳게 했다.
“도망치는 건 좋지만, 도중에 내게 잡히면 껍질을 벗겨 놓을 줄 알아.”
그리고는 다시 무리를 바라보았다.
막거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경공에 자신 있지만 지금의 체력과 내공이라면 멀리 가지 못한다. 하물며 상대가 그녀의 도주를 예상하고 있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지 구경하는 밖에. 그녀는 그들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설지하는 심정의 격동을 느꼈다. 정말 나찰귀로는 총감을 상대하려는 걸까? 꼭 그래야만 하나? 아니, 과연 제압할 수는 있을까? 예전이라면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사자비를 만난 후로는 나찰귀로도 체계적인 집단전을 훈련을 받았다. 강한 소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찰귀로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총감을 제압하고자 대부분 목숨을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죽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아니, 가능성은 그쪽이 더 크겠지.
촹-!
그녀는 소매에서 호조의 칼날을 빼냈다. 나찰귀로의 임시 책임자는 홍면노. 고민하면 괴로우니 잡념을 버리고 그의 명에만 따를 생각이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때 사자비와 눈이 마주쳤다. 설지하는 움찔했다. 미움만큼 정도 들었는데……. 어쩌면 상관으로서의 믿음이 컸는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이뤄줄 것 같은, 불가능이란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믿음이었다. 그만 따르면 평생 패배라는 두 글자는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믿음!
“잘 있었나?”
사자비가 비웃듯 말을 붙였으나 그녀는 시선을 피해 홍면노를 주시했다. 명만 내리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지독한 배신을 느꼈다. 나찰귀로가 갈천의 지시를 받든 때보다 몇 곱절 더 큰 배신감이었다. 우선 홍면노의 행동이 거슬렸다. 홍면노는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사자비에게 공손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소인들이 대인의 암살에 동참했던 이유는 혹,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짐작한 행동이었으니 용서하십시오.”
설지하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총감의 무위를 고려한 임기응변일까? 하지만 태도로 보아 진심인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찰귀로의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홍면노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
설지하는 실소를 흘렸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데, 배신당했다는 감정 때문에 불쾌했다. 갑자기 홍면노의 조언이 떠올랐다.
–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렸으면 각자 추구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대로 흔들림 없이 이행하면 그뿐이겠지.
‘그게 그 말이었어?’
그렇다면 언급을 했어야지. 아니면 사자비가 함정에 걸렸을 때 도왔어야 했던가. 그때는 모른 척하다가 이제 와서 무슨 추태인가! 과연, 총감이 홍면노를 믿어 줄까?
놀랍게도 총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지하는 ‘하!’ 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사자비가 홍면노와 나찰귀로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의 등장이 다행이었지.”
그 녀석이라면 갑자기 나타나서 사자비를 구했던 젊은 고수일 것이다.
홍면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저희가 끼어들었겠지만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나찰귀로만 덤으로 희생되었겠지.”
“맞습니다. 그런데 그 고수는 누구입니까? 대인을 구해줄 정도면 친분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만.”
의외로 사자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그리고는 물었다.
“그보다 친황대는 어쩌고 너희만 왔나?”
“친황대는 지금 규보의 무덤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임무를 맡고 있었지요.”
“이곳 수색을 맡았던 건 우연이 아니었겠지?”
홍면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자비는 자신이 떠내려 온 방향을 나찰귀로가 일부러 담당구역으로 정했다고 확신했다. 그들을 믿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홍면노의 물음에 사자비가 다시 물었다.
“자네들은 어쩔 생각인가?”
“대인을 따를 생각입니다.”
“하하, 나를 따라서 뭘 하게?”
“사실, 대인이 없는 친황대라면 따를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주최가 바뀌면 애초 우리가 내걸었던 요구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난 들어주리라 생각하나? 아니, 내가 다시 친황대를 접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홍면노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랫사람을 실망시킨 적은 없었지요.”
“실망?”
“모든 면에서. 대인께서는 알지 모르겠으나, 제가 지켜본 바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따르는 수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강한 적에게만 강한, 그런 분이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자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하관계를 넘어서 인간적으로 다가오려는 나찰귀로가 어색하고 싫었다.
“믿음이라…….”
그는 조롱의 웃음을 흘렸다.
“역시 황실에 몸을 담았어도 뿌리는 무림인이군. 하지만 난 아니다. 믿음, 의리. 그런 걸 내게 기대하지는 마라. 물론, 날 위해 일한다면 충분한 대가는 있을 거다.”
“그게 편하면 그리 생각하십시오.”
사자비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뀐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친황대는 지금 흩어져 있겠군.”
“저희도 얼마 전에 들은 사실입니다만, 구채구에 드러난 대부분은 지옥교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일 뿐이고, 실제 규보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총 열두 군데인데 모두 지옥교가 파악하고 있더군요. 지금 친황대는 그곳에 배치되어 무덤을 찾고 있습니다.”
“이곳도 그중 하나인가?”
“네. 그래서 나찰귀로가 수색을 맡기로 했습니다.”
“지옥교와 황실은 어떤 관계인가. 내 생각처럼 친황대의 지단인가?”
“그렇습니다. 대주급들의 대화로 보아 구채구를 정리한 후, 황실은 지옥교를 통해 무림을 정벌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재밌군.”
“대인께서는 이제 어찌 대처할 계획이십니까?”
“자넨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우선 이곳을 빠져나간 뒤에 황실의 정황을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그거야말로 바보짓이 아닌가!”
홍면노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사자비가 설명했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기는 쉽겠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황실 전체와 등을 져야 한다. 동창과 친황대가 우리를 반역자로 공포할 테니까. 그럼 우리는 표적이 되어 도망자가 되거나 황실 전체와 싸워야 한다. 어떤 단체도 황실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지.”
“그럼…….”
“우리가 친황대를 접수하여 정당성을 확보한다.”
모두 놀란 눈빛이 되었다.
“친황대를 장악하고 나서는 황실로 간다. 어차피 우리와 역모는 관련 없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 후에 치열한 아귀다툼이겠지?”
사자비의 얼굴에 음침한 기운이 깔렸다. 그러나 홍면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뜻은 알겠습니다만, 과연 우리만으로 친황대를 장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요. 그들만 상대해도 피해가 클 텐데, 지금 구채구에서는 지옥교가 친황대를 돕고 있습니다. 겪어보셨겠지만 그들도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다. 어차피 복수는 해야 하니까. 친황대도 마찬가지. 날 따르지 않겠다면 모두 처리한다.”
사자비는 확신의 눈빛을 보였다. 그 표정을 살핀 홍면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비라면 방법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따르겠습니다. 하명 하십시오.”
“친황대와 연락이 용이하겠지?”
“그렇습니다.”
사자비는 막거희가 언급했던 장소를 설명한 후 명했다.
“모두 모아 그곳으로 데려와라. 내가 살아남아 그곳으로 도망갔다고 하면 따라올 거다.”
“하나씩 제압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친황대와 동창이 한데 뭉치면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습니다. 거기다 무림인 때문에 지옥교까지 모인다면…….”
“언제 이 넓은 구채구를 돌아다니며 하나씩 제압하나. 한 번에 끝낸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려 막거희에게 말했다.
“안내해.”
그때 누군가 홍면노처럼 절벽에서 내려왔다. 그는 사자비 앞에 무릎을 꿇으며 떠받치듯 두 손을 내밀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
광혈귀행의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그의 손에는 마라겸이 올려져 있었다.
사자비는 얕은 미소를 흘리며 마라겸을 받아들었다.
스릉!
반 치쯤 뽑아내자 검신이 빛을 뿌렸다.
“고맙군!”
그리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막거희도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따랐다.
홍면노의 지시에 따라 친황대를 부르는 신호를 올린 요천검귀가 다가와 물었다.
“홍노. 도대체 대인은 무슨 생각인 것 같소? 친황대와 동창, 지옥교를 모두 상대할 수는 없을 텐데.”
“난들 알겠는가. 하지만 절대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분이시지.”
요천검귀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홍면노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사자비가 한 짓이 분명한 강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하지만,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단 말이야!”
2
막거희는 달리면서도 머릿속이 간지러웠다. 사자비와 놈들의 대화에서 그들의 정체가 황실의 무력부대라는 사실은 눈치 챘다. 그것도 최근 황실의 권력을 휘어잡은 동창과 그 내부의 친황대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대화를 들어보니 친황대와 동창 다수가 구채구로 들어온 것 같았다. 황실이 규보의 무덤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러나 지옥교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보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꼭 빠져나가 들은 바를 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면노는 분명히 지옥교에 의한 무림일통을 황실이 지원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곳 구채구에서 벌어지는 지옥교의 학살행위에도 황실이 깊이 개입되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살막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림 전체의 중차대한 일이었다. 무조건 알려서 대책을 간구해야 한다.
그녀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사자비가 바짝 뒤따라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머리가 간지럽지?
모든 내막을 알겠는데 이상하게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게 무엇일까? 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 느낌이 이럴까?
그녀는 폭포에서 보았던 친황대를 떠올렸다.
황실이 무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건 오래전 일이니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친황대와 적대하려는 걸까? 보아하니 같은 친황대 소속 같은데 말이다. 뒤따라오는 사자비라는 녀석은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던 걸까? 단순한 황실의 권력투쟁?
순간 머릿속이 밝아졌다. 그녀를 괴롭히던 원인을 찾아낸 것이다.
“앗!”
단발의 비명을 지른 막거희는 경공을 멈추고 사자비를 돌아보았다.
“맞죠?”
뭐가 맞다는지 모를 일이지만 덕분에 사자비도 경공을 멈춰야 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막거희를 바라보았다.
막거희가 외치듯 말했다.
“광혈귀행!”
오래전 살막에 의뢰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에게 동문과 사형제를 잃었던 무림인의 의뢰였다. 갑자기 사라진 덕분에 일을 시작도 못했지만 그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의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용모파기와 인상착의가 폭포에서 보았던 녀석과 같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 외에 또 있었다. 요천검귀. 그자도 한때 무림을 떨쳐 울렸던 흉적이었고, 협봉도 서원문도 무리에서 본 것 같았다. 가장 눈에 튀었던 자, 보기 흉한 꼽추에 말라비틀어진 녀석은 루마일 것이다.
‘그래. 용모와 특징이 내 머릿속에 있었던 거야. 그래서 면면을 보며 답답했던 거야.’
그녀는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무림의 흉적들이 한때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모두 황실에 초빙되었던 게 이유였던 것 같았다.
아는 자도 있지만 모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무리를 구성하는 대부분 무림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공적이거나 은거고수다. 대부분 어울리지 못하고 전혀 다른 기운을 풍겼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맞죠?”
그제야 사자비가 대답했다.
“확실히 살수로군. 외모만 보고 사람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을 텐데.”
“무림의 유명한 고수라면 용모파기와 특징을 기록한 자료가 총단에 보관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수시로 파악하고 외우죠.”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황실이 그런 일류고수를 백여 명이나 초빙해서 숨겨 놓았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혈리금도문의 재앙도 지금은 이해가 되었다. 저런 고수집단이 달려들었다면 아무리 명문이라 자부하는 문파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살막에서 파악하는 요천검귀와 광혈귀행은 화경에 근접한 절정고수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고수들이 저 무리에 얼마나 더 섞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절반 이상이 그런 고수일 가능성이 있고, 화경의 벽을 뚫은 고수가 몇 명 섞여있을지도 몰랐다.
‘최근 들어 황실 고수의 실력이 부쩍 높아졌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야.’
생각과 함께 그녀가 물었다.
“친황대가 모두 그런 부류인가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경악한 눈이 되었다. 또 다른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친황대. 젊은 고수. 높은 직위. 이름은 사자비!
모든 것을 합치자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에 맴돌았다. 황실의 권력을 휘어잡았던 관리. 그리고 항주무림에서 분란을 일으켰던 부도어사였다.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사자비의 유심히 뜯어보았다.
“설마, 당신이 설혼마녀와 호각을 이뤘다는 그분인가요?”
사자비는 대답 없이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시답잖은 질문 그만하고 계속 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막거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경공을 멈춘 이유는 생각을 방해하는 괴로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체력의 한계를 느낀 탓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요. 정말 지쳤어요.”
사자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넌 쓸모없어. 난 쓸모없는 인간은 곁에 두질 않지.”
그러면서 마라겸을 쓰다듬었다.
막거희는 핼쑥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 알겠어요.”
그녀는 다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얼마 되지 않은 내공이었다. 이런 상태로 무리하게 내공을 이용하면 자칫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쁜 놈!’
원망을 담은 눈으로 사자비를 한번 노려본 후,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구원의 손길이 그녀를 도와주었다. 물론, 사자비에게서 그녀를 구원하는 손길은 아니었다. 단지 잠깐이나마 그녀에게 휴식을 주는 정도였다.
“잠깐.”
사자비가 먼저 상대의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막거희는 반가운 얼굴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죠?”
“누가 접근한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녀에게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기척이었다.
“누, 누굴까요? 지옥교? 강시?”
“아니, 여자다.”
“여자?”
기척만으로 성별을 확인할 능력이 있는 걸까!
막거희는 놀랐다. 홍의를 입은 묘령의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죠?”
“도약하는 발걸음의 무게를 들으면 알 수 있지.”
‘말도 안 돼. 그걸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접근자가 여인이지 않은가. 막거희는 기가 막혀서 말문을 닫고 상대를 살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배, 백궁?!”
구채구에서는 놀랄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번에도 사자비의 정체만큼이나 놀랐다. 여인은 백궁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몰골처럼 보이는데, 움직임에서 대충 어떤 일을 당했는지 짐작 가능했다. 구채구에서는 이런 경우가 단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많은 무인이 겪었거나 겪고 있을 일이었다.
‘백궁까지 당했다고?’
구채구로 궁주가 직접 고수를 이끌고 들어왔다는 건 오래전 초입에서 확인한 막거희였다. 그런데 궁녀 하나가 일행과 떨어진 채 도망치듯 달려온다면 뻔한 상황. 막거희는 그 점이 놀라웠다. 백궁의 궁주라면 설혼마녀밖에 없다. 그녀를 두고 혼자 도망친다는 건 지옥교, 혹은 그들이 부리는 강시에게 모두 당했다는 뜻이었다.
막거희는 사자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사자비도 백궁을 알고 있어야 한다. 과연 사자비의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아니, 귀찮은 일에 봉착할지도 모른다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냐?”
무뚝뚝한 사자비의 물음 뒤로 백궁 여인이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분위기로 보아 그녀도 사자비를 알아본 듯했다.
“도와주세요.”
“……?”
눈물로 얼룩진 여인의 얼굴에 다시 두 줄기 눈물자국이 생겼다.
“궁주님이…… 궁주님이……. 흑흑!”
“궁주도 왔었나!”
사자비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자부심이 강한 고수일수록 다른 무공을 탐하지 않는다. 그가 알고 있는 설혼마녀가 그랬다.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제갈세가와 거래를 했어요.”
그제야 사정을 짐작하고 실소를 흘렸다. 같은 세력권 안에서 무섭게 성장하는 백궁의 발걸음을 멈추고자 제갈세가가 쓴 수임이 틀림없었다. 계획과 달리 백궁이 무사히 규보의 비급을 얻어도 좋다는 계산일 터였다. 아마도 모든 계획이 제갈진의 머리에서 나왔겠지. 사자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래조건은 당연히 돈이겠지?’
사자비는 매정하게 대답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이용당한 꼴이군. 인과응보랄까!”
비꼬는 의미가 분명했지만 여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도와달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듯 시종 애걸하고 있었다.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대인께서는 궁주님과 동맹을 맺으셨잖아요.”
“동맹? 하하, 그게 언제 적 일인가.”
사자비는 비웃었다. 그러나 표정과 달리 내심 의문도 품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설혼마녀가 위험해진 건가. 도움을 주겠다는 의미보다는 그런 궁금증 때문에 물었다.
“그 녀석들은 누구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이상한 괴물이었어요. 도와주세요.”
“괴물?”
막거희가 끼어들었다.
“강시겠죠?”
이번에도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붉은 괴물이었어요. 궁주님이 아무리 공격해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괴물이요.”
“붉은 괴물?”
순간 사자비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혈야대군이라고 하지 않더냐?”
“마,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번쩍이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막거희가 물었다.
“아는 자인가요?”
사자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설혼마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혈야대군에게 당하지 않았던가. 평범한 고수라면 대응하기 어려운 능력을 놈은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흑룡에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구사일생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 정도 타격은 목숨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던가.
길게 늘어져서 한쪽이 올라간 사자비의 입가가 왠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디냐?”
사자비의 물음에 여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고 사자비와 막거희를 안내했다.
여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산 중턱 들판이었다. 거기에 격전의 증거가 남아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겨울잡초가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려는 듯 몸을 꺾었고, 그 사이사이로 백궁의 궁녀가 시체처럼 쓰러져있었다. 잔인한 그들의 형태로 보아 강시에게 당했음이 분명했다. 백궁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 당한 듯 강시도 몇 구 파괴되어 꿈틀거리는데, 지옥교도 또한 십여 명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궁주는?”
시체 중에 설혼마녀가 없는 것을 확인한 사자비의 물음이었다. 동료의 시체를 보며 슬픔에 잠긴 홍의여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자비의 말처럼 궁주의 시체가 없다면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홍의여인이 부리나케 그곳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사자비가 더 빨랐다. 언제 어떻게 앞질렀는지 그녀를 가로막더니 막거희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데려와라.”
그리고는 나는 듯 소리를 쫓았다.
기회다 싶어 도망치려 했던 막거희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도망칠 생각 없었어요.”
홍의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녀는 사자비의 말을 착실히 따르려는 것 같았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막거희의 혈도를 제압하더니 둘러업고 사자비를 따라 달리는 것이다. 막거희는 울상이 되었다.
“도망칠 생각 없었다니까……!”
설혼마녀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일어서려는 듯하지만 생각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내상을 입은 듯 입가로 피를 흘리고 어깨도 다친 모습이었다. 그 앞을 사자비와 동행했던 홍의여인과 복장이 같아서 쌍둥이 느낌이 드는 여인이 지키고 있었다. 설혼마녀를 보호하려는 듯 지옥교도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데, 역시 부상당한 모습이었다. 그냥 두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사자비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붉은 물체. 사람 형상이지만 흡사, 액체 같아서 흐물거리는 녀석, 바로 혈야대군의 뒷모습이 눈에 크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폭포에서 보았던 것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강시 하나와 지옥교도 다섯이 퇴로를 확보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홍의여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왜 도망가지 않고?”
때마침 사자비를 따라온 홍의여인을 발견한 외침이었다.
사자비 옆에 선 홍의여인이 쌍둥이에게 시선을 돌려 설혼마녀에게 떠듬거렸다.
“죄, 죄송해요 궁주님! 저 혼자 빠져나가기가……. 하지만 도와줄 분을 데려왔어요.”
일순 장내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동시에 혈야대군과 사자비가 눈을 마주쳤다.
붉게 일렁이는 혈야대군의 얼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놀란 표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테지. 놀람 뒤에는 비웃음이었다. 음산한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이런, 살아 있었더냐?”
조롱하는 투였다. 혹은 신기하다는 투였다.
사자비 역시 비웃음으로 응대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로군.”
“말했지 않았느냐. 그분을 제외한 누구도 본좌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느니라.”
사자비는 나무에서 떨어져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혈야대군의 얼굴이 다시 흔들렸다.
“놀랍구나. 치명상을 몇 군데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었던가?”
“난 운이 좋은 놈이니까.”
혈야대군은 끌끌 혀를 차며 웃었다.
“운이 좋다? 평생 경험하지 못할 기연을 얻지 않고서야 그 상태로 살아남을 수는 없지. 하나…….”
혈야대군은 말끝을 흐리며 교도들을 보았다. 그러자 눈을 마주친 교도 한 명이 강시를 향해 이상한 소리로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강시를 부리는 방법인 모양이다.
과연 강시가 눈에서 파란 불똥을 뚝뚝 떨어뜨리며 사자비를 돌아보았다.
혈야대군이 말했다.
“차라리 숨어 있었다면 목숨은 부지했을 것을. 이렇게 되었으니 두 번 다시 걸어 다니지 못할 게다.”
사자비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스스로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모양이구나. 고작 사이비 종교로 양민의 등골이나 빼먹는 작자의 하수인치고는 말이다.”
“……!”
침묵 뒤로 혈야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신호인 모양, 갑자기 강시가 거친 괴성을 지르며 사자비에게 달려들었다. 미친개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이 제법 사나워 보이기는 했다. 폭포에서 보았던 강시보다 몇 배는 빠르고 거칠기도 했다.
쿠아앙!
강시의 주먹이 허공을 찢으며 사자비의 얼굴을 노렸다. 막거희가 경고처럼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요. 녀석은 다른 종류에요.”
그녀는 혈도를 제압당한 중에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자비의 패배는 여기에 있는 백궁과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물론, 사자비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대단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흑시와 저놈은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사자비가 강시를 너무 쉽게 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가만히 서서 달려드는 녀석을 지켜보는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막거희의 입이 벌어졌다. 흑시를 간단히 제압했을 때 사자비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평가였다. 사자비가 흑시보다 월등히 강했기 때문에 더욱 강해 보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데, 사자비가 녀석까지 간단히 상대하고 있었다. 화경의 고수라도 쉽게 제압할 수 없을 무시무시한 녀석을 흑시와 별반 다르지 않게 다루는 것이다.
고개를 살짝 꺾어 주먹을 피하고, 왼손으로 녀석의 뻗은 팔목을 낚아챈다. 이어 잡힌 녀석의 손을 당기고 오른손을 움직인다. 끌려오는 녀석의 복부를 찌르려는 행동이었다.
뚜두둑!
막거희는 분명히 들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마도 갈비뼈 몇 개가 부러졌을 소리였다.
검기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는 피부, 강철보다도 더욱 단단한 뼈를 가진 녀석을 일권에 무력화시키는 공격이라니!
그녀는 유심히 사자비의 동작을 살폈다. 사실, 너무 빨라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히 볼 수도 없었다. 단지, 강시의 움직임으로 대충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강시의 몸이 팽이처럼 돌았다. 녀석의 팔을 잡았던 왼손을 옆으로 떨쳤을 것이다. 그래야 강시가 돌게 되니까.
강시는 그 자리에서 몇 바퀴나 돌았다. 때마침 사자비의 오른쪽 팔꿈치가 녀석의 턱을 향해 날아갔다. 그건 보였다. 날아가는 건 보지 못했고, 녀석의 턱에 팔꿈치가 부딪히는 장면만 포착할 수 있었다.
강시가 오른쪽으로 돌고 있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쇄도하는 공격이라면?
못해도 가격하는 힘이 몇 배는 늘어날 것이다.
털컥!
놀랍게도 강시의 아래턱이 완전히 돌아갔다. 턱뼈가 빠져서 돌아간 모습을 보고 막거희는 경악했다. 곧이어 강시가 튕겨나갔다. 사자비의 발에 걷어차인 모양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시가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녀는 다시 사자비를 찾았다.
사자비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넘어진 강시에게 다가가 발로 가슴을 밟아 고정하고 있었다.
뚜두두둑!
강시가 울부짖으며 사지를 놀렸지만 소용없었다. 사자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의미한 공격만 가할 뿐, 가슴뼈가 발에 밟혀 기형적으로 함몰되는 변화를 막지는 못했다.
막거희는 처음 보았다. 강시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사자비의 다리를 밀치고 때리지만 힘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촤악-!
녀석의 몸부림이 짜증이 났던 건가. 사자비의 손이 녀석의 목을 잡더니 몸통에서 단번에 때어냈다. 곧이어 양팔이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저, 저게 말이 돼?’
막거희의 생각이었지만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설혼마녀였다. 항주에서만 해도 비등한 실력, 아니 오히려 자신이 사자비보다 조금 우위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세상에 자신을 상대할 적수가 없다고 자만했었다. 그러나 그녀조차 천령시 하나를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그간 두 번의 지옥교를 만났고 그들이 부리는 천령시를 상대하느라 많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재수 없게 혈야대군이라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녀석과 그가 이끄는 무리와 만났다. 전에 만났던 놈들과 달리 천령시도 두 마리나 데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천령시 두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 마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도주했는데, 이 꼴이 된 것이다. 다리를 다쳐 녀석들을 따돌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참하게 쓰러져서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처지였다.
설혼마녀는 너무 쉽게, 흡사 잔인한 장난꾸러기에게 당한 곤충처럼 사자가 떨어져 나간 강시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 항주에서 만났던 때가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 저렇게 강해질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과 달리 그녀는 사자비의 움직임,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히 보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직접 사자비를 상대하라면 자신 없었다. 눈으로 움직임을 쫓을 수는 있어도, 몸은 그 속도에 맞춰 반응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수 조차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완벽하게 꺾여버린 강시를 두고 사자비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작 이런 녀석 때문에 애를 먹었나?”
설혼마녀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지만 자존심을 내세울 상황도, 정신도 아니었다. 그만큼 사자비가 보여준 가공할 속도와 힘은 절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아직 여유를 잃지 않은 혈야대군이었다. 불사의 몸을 가지면 어떤 강자 앞이라도 이런 여유가 생기는 모양이다.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느긋하게 입을 놀렸다.
“정녕 기연이라도 얻은 모양이구나. 하나, 본좌를 상대할 수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으면 나을 뻔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자비 때문에 혈야대군은 말도 잇지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물러섰다.
확대된 사자비의 입이 움직였다.
“다행이란 말이지.”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실험을 해보고 싶었는데, 너라면 가능할 것 같다.”
혈야대군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사이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무인이라면, 그리고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있다면 이 지독한 살기가 온몸으로 느껴질 텐데 사자비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그는 혈야대군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게 최대한 버티길 바라마.”
“감히!”
혈야대군은 자신을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사자비를 향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순간 흐물거리는 그의 붉은 팔이 사자비의 가슴을 노리고 뻗어왔다.
제9장 겨울 사나이
1
누구도 내게 죽음을 줄 수 없다.
혈야대군은 혈류육성마경(血流肉成魔經)을 익힌 이래 삼십 년간 그런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오로지 혈류육성마경의 약점을 간파한 지옥교주만이 그에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을 뿐. 그래서 지옥교주를 제외한 어떤 고수 앞에서도 당당한 그였다. 오죽하면 영혼까지 불태울 화기를 안겨준 녀석을 다시 찾아다녔겠는가. 팔십 평생 처음으로 그에게 타격을 주었던 장본인, 그가 무림 최고의 기재 흑룡이라는 사실은 아직 알지 못했으나 녀석의 강렬한 화기에도 살아남은 혈야대군이었다. 다시 만나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양패구상할 자신은 있었다.
양패구상은 곧 그의 승리를 뜻한다. 그는 죽지 않으므로.
그래서 그놈을 꼭 찾아 직접 손을 봐줘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돌연히 등장한 이놈. 죽었어야 할 녀석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름이 사자비라고 했던가. 황실의 권력을 틀어쥐었던 녀석이라 들었다. 탄반경의 고수라는 게 놀랍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것 같지만 그조차 상관없었다. 어차피 녀석도 평범한 무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천령시를 그렇게 완벽하게 제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지만 역시 의미 없다. 혈야대군에게는 그저 강한 고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본좌를 죽이지 못하는 이상 결국 넌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혈야대군은 상대의 눈빛을 보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뻗은 손을 회수하고 싶을 지경인데, 이미 내지른 상태. 그는 마음을 다잡고 사자비의 가슴을 향해 붉은 손을 그대로 뻗었다.
푹!
녀석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혈야대군은 그것으로 족했다. 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피부에서 스며 나온 액체가 상대의 몸에 묻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후에 상대는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무게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 약간의 액체가 천만 근이 되지는 않지만 심리적인 작용을 이끌어낸다.
인간의 정신은 의외로 강하고, 또 의외로 약해서 무언가를 믿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기도,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액체는 상대의 뇌를 자극하여 무게를 느끼는 신경을 건드리게 되어 있다. 자신의 몸이 몇십 몇백 배 무겁게 느껴지도록 유도하기 때문인데, 이건 인간의 강한 정신력을 이용한 수법이었다. 한번 믿기 시작하면 거짓도 진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느려지고 제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건 나약한 인간의 정신력을 이용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상대, 사자비가 웃고 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거슬렸다. 불길했다.
혈야대군은 여전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가 드러났다.
쉬익!
녀석의 주먹이 달려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빠르다. 만 근의 바위를 들 수 있는 인간도 자신의 몸이 만근이 되면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녀석은 아닌가 보다. 주먹이 너무 빨라서 피할 수가 없었다.
팡-!
혈야대군은 신형을 비틀거렸다. 주먹은 정확히 그의 얼굴을 때렸다. 인상을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주먹에 흩어지고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곧 그의 장기가 발휘되었다. 주먹에 맞아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얼굴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그때 가슴으로 또 다른 주먹이 달려들었다.
퍽!
녀석의 왼손은 그의 가슴을 뚫었다. 곧이어 오른손이 뒤를 잇고, 발과 무릎, 팔꿈치가 사정없이 전신을 때리기 시작했다.
팡팡팡팡팡-!
몇 대를 맞았을까!
혈야대군은 셀 수 없었다. 잠깐이었을 뿐인데 족히 수백 대는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결과, 어떤 물리적인 타격도 물처럼 포용하고 흘려낼 수 있던 그가 십 장이나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의 몸이 타격의 여파를 이기지 못해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변한 후였다.
“크윽!”
욕지기가 올라왔다. 막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뭐 이런 놈이!’
그때 결정적인 일격이 가해졌다.
혈야대군은 사자비의 장심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빛이 일렁인다고 생각되는 순간 폭발하듯 번쩍였는데, 폭음 뒤로 그는 몸이 굳는 경험을 했다. 전에도 사자비와의 대결에서 이런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내부까지 굳어서 회복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몸이 녹기도 전에 뒤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굳어진 몸으로 받은 충격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혈류육성마경을 익힌 후 물리적인 충격으로 이런 고통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의 몸을 보고 경악했다. 원래의 신체에서 부피가 구 할은 사라진 모습이었다. 너덜너덜해서 이젠 인간의 형상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불사라더니, 초라해 보이는군!”
어느새 다가온 사자비의 음성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
“놈-!”
혈야대군은 노성을 터뜨리며 앙상해진 팔을 뻗었다. 사자비의 피부에 흡수되어 그의 몸을 잠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노했던 감정은 사자비의 무심한 눈빛을 받아 사그라지고, 노도 같은 일격도 간단히 저지당해 힘을 잃어버렸다.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두려움이었다. 혹시, 놈이라면 자신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이래서야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힘들겠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 봐라. 회복할 시간도 주랴?”
무심한 눈빛만큼이나 무심한 목소리가 오히려 혈야대군을 위축시켰다. 혈류육성마공 외에도 수많은 비기가 있지만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혈야대군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리고 웃었다.
“보여주마.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것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신체가 늘어났다. 이미 걸레조각이라고 불러야 할 인간의 형체를 미련 없이 버리고 종잇장처럼 길고 넓게 펼쳐지더니 이내 사자비를 덮쳤다. 아니, 감쌌다는 표현이 옳았다. 삽시간에 사자비의 형체가 혈야대군처럼 되었다. 붉은 액체를 뒤집어썼으니 당연했다. 심지어는 허리에 차고 있던 마라겸까지 덮어서 애초 사자비의 외모 그대로였다. 붉은 것만 빼면 말이다.
“클클클.”
혈야대군의 목소리가 음산한 웃음과 함께 붉은 피부에서 흘러나왔다.
“서서히 숨통이 끊어지는 고통을 경험해 보아라.”
“과연 그럴까?”
이번에는 붉은 피부 속에서 사자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윽!”
혈야대군의 신음이었다. 작은 틈 하나 없이 전신을 감싸버리면 호흡이 끊어지는 게 정상이다. 거기에 독기까지 스며들어 폐부의 호흡조차 방해하기 때문에 결국 죽는다. 일 각 후면 살까지 썩어서 일 년은 방치한 시체처럼 변하게 된다. 그 시기를 앞당기려면 몸을 조여 압력을 가해야 하는데, 피부에 달라붙은 그의 붉은 신체가 밀려나고 있었다. 피부에서 그를 떨쳐내려는 듯 강렬한 무형의 힘이 밖으로 뿜어지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붉은 피부가 끓는 물처럼 울퉁불퉁, 사방으로 공기주머니를 만들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내공이 쏟아져 나오는 피부조직을 완벽히 막았는데 이 정도까지 저항할 줄은 몰랐다.
혈야대군은 더욱 힘을 주었다. 사자비의 조소가 들려왔다.
“제법이구나!”
“허풍 치지 마라. 네놈은 얼마 버티지 못해.”
하지만 혈야대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말이 허풍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자비는 아직도 진짜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걸 갑자기 쏟아지는 지독한 냉기로 알아차렸다. 도대체 인간의 내공으로서는 낼 수 없는 이 강렬한 차가움은 어디서 기인하는 건가.
“크으윽!”
더욱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더니 결국 소리조차 굳어버렸다.
쩌저적!
사자비를 덮었던 붉은 액체가 순식간에 얼었다.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 피부는 곧이어 거북이 등처럼 금이 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혈야대군은 정말 놀랐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굳은 몸을 녹이고 사자비에게 달라붙었다.
다시 사자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흡사, 즐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천령강기라는 거다.”
‘천령강기?’
순간 사자비가 몸을 아래로 웅크렸다. 두 다리를 구부려 땅에 붙을 듯 앉고, 두 팔은 무릎을 짚었다. 이 또한 혈야대군을 놀라게 했다. 지금껏 그가 껍질처럼 감싼 사람은 둘을 넘지 않았다. 그 모두가 무시무시한 고수들이었고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사자비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움직임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할 테니 버텨 보려무나. 버티면 그 후에는 또 다른 걸 실험할 생각이다. 그때까지 버티면 살려주지.”
‘도대체 무슨 짓을!’
의문을 품기도 전에 웅크렸던 사자비의 몸이 활짝 펴졌다.
펑-!
바닥에 북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혈야대군은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사자비가 땅을 박찬 모양이다. 족히 이십 장은 뛰어오른 것 같은데, 피부를 때리는 바람의 강도로 보아 아직 정점에 도달하려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예상은 맞았다. 구채구의 숲이 까마득하게 보일 높이까지 올라간 것이다.
“무슨 짓이냐?”
사자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을 하려는 것이지.”
그리고는 몸을 거꾸로 세우더니 그 상태로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양패구상할 생각이냐?”
그렇다면 혈야대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길 일이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하나. 물론 그는 상관없었다. 한동안 운신이 어렵겠지만 그만한 충격을 견딜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자비가 천근추를 사용한 모양으로 떨어지는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 중간쯤 내려왔을 때는 처음의 속도보다 몇 곱절은 올라가 있었다. 아마도 바닥에 닿을 즘에는 상상도 못할 속력이 붙어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혈야대군은 사자비에게 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속도라면 천하제일의 경공을 가진 사람도 낼 수 없는 속도다. 그런 자가 단거리에서 최고의 경공을 발휘하며 바위에 부딪힌다면? 엄청날 것이다. 지금은 그 열 배, 혹은 그 이상의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바위가 나을 것이다. 지금 대상은 대지였다. 흙의 응집력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해서 절정의 호신강기를 자랑하는 고수라도 무사할 수 없다.
생각과 함께 혈야대군은 사자비를 감쌌던 피부를 느슨하게 풀었다.
“어딜!”
순간 사자비가 자신의 몸을 양팔로 감싸 고정하더니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냉기를 쏟아낸 것이다. 자연 혈야대군의 몸이 사자비를 감싼 채로 굳어버렸다.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곧 있으면 땅에 닿을 듯한데, 사자비의 몸속 깊은 곳에서 어지러운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령강기에 섞인 호신강기, 그리고 그것을 밀치고 뻗어나가려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 성질이 섞이면 폭발이 일어나고, 그 폭발력이 땅에 부딪히면서 더욱 큰 파괴력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혈야대군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지만 짐작은 했다. 상상조차 못할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이었다.
막거희는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를 먼저 들었다.
혈야대군처럼 변해버린 사자비가 하늘로 올라갔을 때만 해도 왜 저러나 싶었다. 도약하는 높이가 생각을 넘어 계속 올라가자 인간이 저렇게 높이 뛸 수도 있나 싶었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아마도 새가 날아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은 저렇게 높이 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자비 때문에 경악할 일을 너무 많이 겪은 탓이었다.
올라갔으면 당연히 자연의 이치대로 떨어져야 했다. 사자비도 그 범주를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도 떨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빛을 뿌리더니 유성이 되었다. 너무 빨라서 잔상을 꼬리처럼 달고 떨어지는 유성, 별똥별이었다.
쾅!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는 대지의 진동을 동반했다. 땅이 흔들리고 곧이어 빛이 번쩍거리며 달려들더니 저 멀리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 하나가 떨어졌을 뿐인데, 도대체 저 거대한 연기가 왜 올라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쪽에 쓰러져 있던 백궁의 궁주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비명 같은 외침으로!
“피해.”
막거희는 순간 멍했다. 도망을 쳐? 왜? 그런 눈으로 설혼마녀를 보는데, 그녀를 모시는 쌍둥이 여인은 습관인 듯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녀들은 지체 없이 설혼마녀를 들고 연기가 올라온 곳과 반대방향으로 훌쩍 몸을 날리고 있었다. 다섯 지옥교도도 마찬가지였다.
막거희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연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처음의 굉음은 지금에 비하면 장난 같았다.
쿠우우웅-!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소리만큼이나 큰 연기가 희뿌연 색을 발하며 숲을 휩쓸어오고 있었다. 사자비가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퍼져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궁주의 말을 이해한 막거희는 급히 몸을 돌려 달렸으나 내공과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십여 장을 달아나기도 전에 밀려오는 폭풍에 휩쓸려버렸다. 거리가 있어서 땅을 타고 달려드는 폭풍의 힘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으나 그녀는 앞으로 넘어지고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연기가 지독히 차갑다는 것과 사자비에게 직격당한 주변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리란 생각을 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얼음폭풍은 한참 후에야 가라앉았다. 다행히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그녀는 몸을 일으키다가 깜짝 놀랐다. 온몸에 서리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풍의 중심부를 보고는 더욱 놀랐다. 그곳은 서리가 앉은 정도가 아니라 숲 자체가 얼어 있었다. 불과 이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얼어 있는데, 저 지점에서 휩쓸렸다면 그녀도 얼음 동상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막거희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신기한 듯 숲을 바라보았다. 공기 중에 섞인 수분이 바위며 나무에 달라붙어 꽁꽁 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백궁의 두 여인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어느새 돌아와서 멍히 숲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무슨 조화일까?”
쌍둥이 여인이 말하고, 다른 여인이 받았다.
“저런 무공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처음 여인이 다시 말했다.
“그 사람은 죽었겠지?”
“저런 폭발에서 살아남는다면 사람이 아닐 거야.”
“아니, 그전에 죽지 않았을까? 떨어지는 속도가 엄청나던걸!”
그녀들은 대화를 멈췄다. 놀란 토끼 눈이 딱 그녀들의 눈일 것이다.
막거희는 망연히 그들을 보다가 두 쌍의 눈이 한곳에 고정된 것을 보고, 뒤이어 경악에 물든 것을 보고 함께 시선을 돌렸다.
“악!”
곧이어 막거희 또한 경악한 눈이 되었다. 벌렸던 입을 닫지 못하고 한참이나 숲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 사자비를 보았다. 설혼마녀도, 혈야대군과 사자비가 죽었으리라 생각한 다섯 지옥교도도 그랬다. 혈야대군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자리를 지켰던 그들이 여기에서 가장 놀란 듯했다. 불사의 혈야대군이 죽었는데, 놈은 살아나오다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자비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먼저 움직인 사람은 막거희였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지 못했다. 하얗게 얼어버린 숲에서 걸어나오는 사자비가 신비해 보여서, 혹은 세상을 달관한 듯한 신인의 기운이 느껴져서일지도 몰랐다.
“수, 수고하셨어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말이라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와 사자비가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입이 절로 움직인다.
“괜찮으세요?”
사자비는 대꾸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힘을 파악하기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막거희는 이 어마어마한 폭발을 그도 예상치 못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힘도 모르는 고수라니!’
다소 황당한 기분이었는데, 오래가지 않았다. 뒤에서 짧은 외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심해요.”
쌍둥이 여인이었다. 그녀들은 지옥교도들의 움직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지옥교도는 비틀거리는 사자비를 보고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막거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였다. 사자비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망각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 그러나 그녀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사자비의 팔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까지 직접 상대하려는 것이다.
‘괜찮을까!’
비틀거리는 모습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저 몸으로 지옥교도를 상대할 수 있을까?
그녀가 지금까지 경험한 지옥교도는 강시만큼이나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부상을 당한 상태로 다섯을 모두 제압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검부터 뽑아들었다. 그런데, 지옥교도들은 그녀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했다.
핑핑핑-!
연이여 낮은 소리가 울리고, 사자비의 검지가 시작점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소리 뒤로 반딧불 같은 작은 물건이 쏟아지는 걸 보았는데, 정확히 다섯 개.
막거희는 평생 벌릴 입을 오늘 원 없이 입을 벌렸다.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지옥교도 다섯이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으니 놀라울 뿐이었다. 힘들어하는 티가 역력한데 그런 상태로도 지옥교의 고수를 한 번에 쓰러뜨리다니. 정상일 때는 얼마나 대단할까!
그때 사자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금 쉬어야겠다. 두 시진 후에 출발하지.”
순간 막거희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기회였다. 무슨 기회? 당연히 도망칠 기회다. 하지만 사자비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나무에 기대어 그녀도 쉬었다. 그녀는 이제야 사자비를 향한 마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건 경외였다. 이런 고수의 무공을 언제 한번 구경할 수 있을까. 사자비라면 수천의 고수가 달려들어도 끄떡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평생 오지 않을 기회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본업은 살수지만 그녀도 무인인 것이다. 전설에서나 들어본 무공고수의 실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무림인처럼 강렬했다. 수천의 지옥교도와 강시들을 헤치는 모습만 생각하면 희열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물론, 안전에 대한 확신도 한몫 거들었다. 사자비와 함께 있으면 누구도 위협이 되지 않으리란 확신이었다.
☆ ☆ ☆
갑작스러운 호출 때문에 흑로대군은 불쾌한 얼굴로 신호를 따라왔다. 거기에 무웅대군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창 바쁜 시간에 무슨 일이오?”
“인근에 있는 본교의 교도와 강시들을 내일 아침까지 모아주시오.”
흑로대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계획을 포기하라는 뜻이오?”
“아니, 그 반대요.”
“반대라니?”
“느끼지 못하셨소?”
의문에 잠긴 얼굴을 향해 무웅대군이 설명했다.
“구채구를 활보하는 녀석들 일부가 며칠 전부터 한곳으로 집중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많아지는 것 같소.”
“우연의 일치겠지.”
무웅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몇 시진 전, 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에서 녀석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소.”
“그 말은 놈들이 작당했다는 뜻?”
“그런 것 같소.”
흑로대군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뭉치면 달라진다고 생각한 건가!”
“그랬겠지. 하지만 본교로서도 무시할 숫자는 아니오.”
“얼마나 모였기에 그러오?”
“지금 보고에 의하면 삼천 명.”
흑로대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생각과 달리 놈들이 의외로 잘 숨어다녔다는 뜻이오.”
“그분께서도 알고 계시오?”
“이번 호출은 그분의 뜻이었소. 그분께서는 오히려 이번이 기회라고 하셨소. 한 번에 놈들을 소탕할 기회지!”
흑로대군은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인근 백 리 안에 있는 교도들을 모두 모아 서북쪽 숲에 집결시키고, 나머지도 일행에 섞인 흑시와 천령시 일부를 보내라고 전달하시오. 그 외에는 원래대로 숨어 있는 놈들을 계속 찾아 처리토록 하면 되오. 공격은 내일 미시가 될 듯하오.”
“그분께서는?”
“우리 쪽 피해를 줄이고자 그분께서도 참여할 거라 하셨소. 놈들이 숨은 장소는 산으로 둘러싸인 거친 지형이나, 그 안에 넓은 벌판이 형성되어 있소. 들어가는 길목은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양옆으로 빠져나가는 길밖에 없어서 지키기 쉽고, 반대로 그 두 길만 틀어막고 진입한다면 전원 소탕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오. 아마 그대와 뇌형대군(雷形大君)은 남쪽 진입로를 맡게 될 거요.”
흑로대군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서렸다.
“즉시 이행하도록 하겠소.”
그는 신형을 날려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2
낮에는 먹구름 때문에 어두침침한 구채구지만 밤이 찾아오면 칠흑 같으면서도 구름 속에 줄을 긋는 번개 때문에 사위를 구별할 수 있었다. 흑룡은 어둠의 저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듣고 몸을 돌렸다.
흑룡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묘한 의미와 미소가 뒤섞였다.
“죽마고우가 따로 없네요. 설마, 서로 연모하셨습니까?”
물음 앞에 두 노인이 서 있었다. 사파의 지존 수라천군과 정파의 지주 무림맹주였다. 이틀 전 잔월신교가 이곳에 합류한 뒤로 두 노인이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누더니, 그 후부터 붙어 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흑룡은 그걸 재밌게 생각하고 있었다.
맹주는 놀림을 받는데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라천군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흑룡의 행동에 흥미를 느낀 듯 맹주가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었는고?”
흑룡은 ‘재미없는 노인들!’ 이라는 분명한 의미를 표정에 담아 하늘을 가리켰다.
“번개가 몇 번 치나 세고 있었죠.”
맹주와 수라천군이 동시에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번에도 맹주가 물었다. 여전히 흥미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쳤는가?”
흑룡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한 식경 동안 천육백스물셋까지 세었는데, 두 분 때문에 다음은 못 셌습니다.”
맹주가 입을 ‘헤’ 벌리는데 옆에 있던 수라천군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수라천군이 말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네. 그런 면에서 자넨 불가에서 말하는 득도를 한 셈이로군. 한가하게 그걸 세고 있다니!”
“득도까지는 모르겠고, 머리 굴리는 게 체질에 안 맞아서 고민은 안 하는 겁니다. 그보다 이곳을 나간 후가 걱정되긴 하죠.”
“이곳을 나가는데 왜 걱정인가?”
“좀 친해졌다고 영감이 살갑게 굴까봐요.”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는 듯 흑룡이 몸을 잘게 떨었다.
수라천군은 여전히 만면미소만 짓고 있었다. 대신 저 멀리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송곳처럼 찔러왔다.
“채신머리없이 함부로 주둥아리 놀리지 마라!”
어둠에 가린 그림자가 가까이 드리워지더니 번개 때문에 모습이 드러났다. 환몽영이었다. 그는 맹주에게 다가와 예를 표시하고 수라천군에게 보고했다.
“사형이 깨어났습니다. 타박상이 좀 있는 편이지만 내상은 어느 정도 완치된 것 같습니다.”
“다행이로구나. 맹주께서는 어떻소?”
맹주는 아직도 몸에 감긴 붕대를 쓰다듬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의 애도는 언제든지 들 수 있지 않겠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염려 마시구려.”
그리고는 또 다른 흥미를 보이며 흑룡을 보았다.
“그가 죽었다고 했던가!”
흑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죠. 물을 구해 갔더니 이미 거기에 없지 뭡니까. 십중팔구 죽었겠죠.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흐음!”
맹주의 한숨에 무게가 실린 것을 느낀 수라천군이 물었다.
“걱정이라도 있으시오?”
“그가 황실의 관리였던 걸 아시오?”
수라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그, 사자비의 신분을 알아차린 무리가 잔월신교였다. 맹주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흑룡의 말로는 그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 황실의 고수라 했소.”
“그렇다고 들었소.”
“이상한 점은……. 그들이 지옥교와 비슷한 무리와 함께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오.”
이건 처음 듣는 모양, 수라천군이 흑룡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말인가?”
흑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여타 마교 무리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지옥교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수라천군의 표정도 맹주와 같이 어두워졌다.
“만에 하나, 지옥교가 황실의 힘을 빌리고 있다면 구채구를 벗어난들 여전히 강호에 큰 분란이 일어나겠구려.”
맹주가 동의하며 말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난 후 정사가 손을 잡는 것이 어떻겠소? 무림맹과 잔월신교가 앞장선다면 다른 문파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리라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건 싫은 듯했다. 수라천군은 면전에서 직접 거절하는 대신 원론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한 일이지요.”
그러면서 환몽영에게 물었다.
“적들의 낌새는 어떠하더냐?”
“오늘은 놈들이 이 근방에 얼씬도 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곳을 찾는 무인을 쫓던 지옥교의 무리를 세 번이나 발견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옥교가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했다고 봐야겠지. 조만간 일전이 벌어지겠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 어둠에서 큰 불빛이 올라왔다. 네 사람이 의아해서 그곳을 바라보는데, 잠시 후 무림맹의 무사가 급히 달려왔다.
“산불이라도 났는가?”
맹주의 물음에 무사는 지체 없이 고개를 저으며 놀라운 보고를 올렸다.
“아닙니다. 저건 놈들이 진영을 갖추고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진영을?”
“네. 이곳으로 들어오는 남쪽 입구를 틀어막고 거기에 진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놈들이 북쪽 입구를 막고 거기에 진채를 세웠습니다.”
맹주는 실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적의 반응이 빨랐다.
“각 문파의 대표들을 모아주시게. 조만간 놈들이 들이닥칠 테니 대책을 세워야겠네.”
“존명!”
무사는 나는 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대책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죽도록 싸우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무리를 나누어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모색해야 했다. 가능하면 이쪽은 많이 살아남고 적은 전멸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짜야 했다. 물론, 그걸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이번 작전을 세운 몇몇 사람밖에 없었다. 그들도 가능성만 둘 뿐 실패의 확률을 더 높게 잡고 있었다. 나머지는 마지못해서, 그나마 이렇게 연합을 이루어 대항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에 모여든 것뿐이었다. 그러니 날이 밝을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해 대부분 퀭한 얼굴이었다. 진채를 세우자마자 달려들 것 같던 적들이 쥐죽은 듯 조용하니 불안함이 더욱 커져서 낯빛마저 죽은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싸우기도 전에 지친 것이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벌써 새벽이 지나고 먹구름이 희뿌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소요요는 그간의 경험으로 지금이 아침을 훌쩍 넘어 점심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놈들이 어젯밤에 분지 앞뒤를 틀어막았으니 꼬빡 반나절이 지난 셈이었다.
지겨워 죽겠다. 아니, 불안함이 너무 길어져서 그게 지겨웠다. 빨리 일이 벌어져서 놈들이 죽든, 자신이 죽든 결판이 났으면 좋겠다는 게 지금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만큼 구채구는 지옥 같았다. 지옥교의 강시에게 걸려 죽어가던 동료를 버리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이곳으로 왔더니……, 여기도 두렵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주위에 수많은 무인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별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지옥교의 표적만 된 셈이었다. 이제는 정말 요행을 노릴 수 없는 처지. 운 좋게 들키지 않고 숨었다가 결계가 걷힐 때 빠져나갈 기회조차 사라져버렸다.
옆으로 거마대주 진궁한이 다가왔다. 수많은 거령문도는 이미 구채구의 넋이 되었고 살아남은 거령문도는 그녀와 진궁한, 그리고 호위라고 달랑 살아 돌아온 세 명의 거마대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작전회의 때는 끼지도 못했고 금화문(金花門)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정파에 협조하는 식으로 섞인 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한참이나 곁에 머무르던 진궁한이 물었다. 살았지만 무사하지 않은 몸, 한쪽 팔이 강시에게 뜯겨나간 진궁한의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도망쳤다는 게 신기할 정도인데, 그 때문에 소요요는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냥 빨리 끝났으면 했죠.”
“곧 그렇게 되겠죠.”
“승산이 있을까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아니, 객관적으로 말해보세요.”
진궁한이 희미하게 웃었다.
“태어났으면 죽는 것도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남들보다 빨리 간다고 해서 억울해할 일은 아닙니다. 어차피 무림에 몸을 담은 이상은 그렇게 생각해야겠지요.”
소요요는 실소를 흘렸다.
“그럴 거면 차라리 자결을 하지.”
“아가씨는 달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뇨.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만, 혼자 죽기 억울하다는 것뿐. 그래서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 거예요.”
“아가씨다운 생각이로군요.”
소요요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나 진궁한을 볼 수 없었다. 초라한 그의 몸 때문은 아니었다. 신호 때문이었다. 진입로에서 매복했던 복병이 놈들을 공격했다는 신호였다. 놈들이 강시를 앞세우고 전진한 모양이었다.
계획은 이랬다. 복병이 들어오는 길목에서 적들을 기습하여 기세를 꺾고, 그다음은 신속한 도주다. 이유는 놈들을 들판으로 들어오는 특별(?)장소로 유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거기서 놈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의외로 구채구로 들어온 무인들은 폭약, 즉 무림에서 말하는 벽력탄을 많이 가지고 왔는데, 무덤을 파헤치는 용도로 사용하고자 해서였다. 그걸 지금 모아서 바닥에 심어놓은 상태였다. 놈들이 그곳으로 들어오면 일시에 터뜨리겠다는 계획이었다. 다음에는 정신없는 놈들에게 집중 공격을 시작한다.
북쪽을 맡은 곳도 같은 계획이었다. 다만 그곳에는 지옥교도가 그리 많지 않아 남쪽보다 지키는 무인들이 적었다.
북쪽과 남쪽 사이에는 소수의 구조대가 대기. 거기에 수라천군을 위시한 잔월신교와 흑룡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쪽이 건 불리해지는 곳으로 지원 가는 역할을 담당했다.
“시작됐습니다. 어서 가시죠.”
진궁한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소요요도 마찬가지 표정으로 진궁한을 따라 금화문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금화문과 합류해 작전지역에 도착한 소요요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졌다.
“어, 어떡하죠?”
그녀를 곁에 두었던 금화문의 총관, 혁무조(革武鳥)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작전은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약속된 위치로 놈들을 끌어들여야 할 매복조가 절반이나 줄어 있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생각보다 적의 추격이 빨라서 매복조와 뒤섞인 채 이곳으로 달려온다는 것이었다. 저래서는 폭약을 터뜨릴 수 없다. 아군도 폭약에 휩쓸릴 것이 뻔한 도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주 중에도 쫓아오는 강시에게 붙들려 사자가 찢긴 사람도 다수 보였다.
“빌어먹을!”
욕설을 탄식처럼 뱉어낸 혁무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 문파의 대표들이 지휘를 위해 그들이 이끄는 무리 앞에 나와있는데, 그들 또한 어그러진 작전을 보며 난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들도 모르겠다는 의미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정말 큰 문제가 불어닥쳤다.
소요요는 심장이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매복조를 쫓아오는 놈들은 지옥교의 일부였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모랫바람을 일으키며 강시 수백 구가 달려오고, 그 뒤로 혈의를 입은 지옥교도가 있었다. 앞선 추격자들과 합치면 얼추 이천 명은 될 듯한데, 어젯밤 정찰조에 의해 파악했던 것보다 두 배는 많은 수였다. 남쪽을 지키고자 투입된 무인이 이천 명이 조금 안 되니 머릿수로는 대등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놈들이 더 많을지도 몰랐다. 이쪽이 열 배는 많아도 제압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이런 비율이라면 백전백패였다.
실망과 두려움, 공포, 좌절이 무인들의 얼굴에 짙게 깔렸다.
북쪽으로 들어오는 지옥교도 이만큼 많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할 때 혁무조가 거대한 장도를 뽑으며 외쳤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그러면서 무림의 노장답게 마주 오는 강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모든 무인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아내며 그를 따라 달렸다. 일시에 이천 대 이천이라는, 하지만 승패는 싸우기 전부터 정해진 전투가 시작되었다. 땅이 울리고 요란한 기합성이 사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합성은 이내 비명으로 변했다. 죽음의 비명이었다.
☆ ☆ ☆
“여기가 맞아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으로 거친 숲이 형성되어 있죠. 그곳으로 들어가다 보면 벌판이 나올 거라고 했어요.”
막거희는 손을 들어 방향까지 가리켜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물론, 사자비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졸졸 따라오는 쌍둥이 여인이 신경 쓰였다. 등에 달라붙은 거머리 같다고나 할까. 굳이 말이 없었던 건 특별히 방해되지 않아서였다.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로 만든 판자를 든 그녀들을 향해 사자비가 몸을 돌렸다. 판자 위에는 설혼마녀가 편한 자세로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참이냐?”
그동안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물으니 두 여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그런 눈빛이었다.
사자비가 다시 말했다.
“이젠 나와 상관없을 텐데, 서로 갈 길 가지?”
그런데 여인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판자 앞쪽 부위를 들고 있던 여인이 처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다. 꼭 순진무구한 토끼가 사냥꾼에게 잡혔을 때의 눈빛을 하고, 다음은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저희를 버리실 건가요?”
사자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뒤를 들고 있던 여인이 곧이어 말을 이었다.
“매정한 분이셨군요.”
그리고 둘이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외쳤다.
“연약한 여인을 산속에 버리시면 못써요.”
사자비는 잠시 멍했다가 가소롭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연약? 사자비는 저 두 여인이 친황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무공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흑궁이라는 단체가 원래 그렇고, 잠재되어 있지만 느껴지는 기도에서도 나는 충분히 고수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를 쓰고 그를 따라오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쌍둥이 여인이 아무리 고수라도 고작 두 명뿐이다. 거기다 설혼마녀는 부상 중. 그 상태로 돌아다니다 재수 없게 지옥교 무리를 다시 만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니 고수 옆에 붙어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는 계산이겠지. 그 고수가 사자비 자신일 것이고.
사자비는 다시 코웃음을 친 후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났을 때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곧장 몸을 웅크린 후 활짝 폈다. 그 순간 그는 땅을 밀치며 오십 장을 한 번에 건너뛴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돌연한 반응에 놀란 막거희와 쌍둥이 여인이 허겁지겁 그를 쫓으며 외쳤다.
“우릴 버리지 말아요.”
하지만 이제 사자비는 막거희에게도 볼일이 없는 터였다. 따라오든 말든!
스륵!
벌판이 시작되는 나무 위에 가볍게 올라선 사자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전투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예상대로 지옥교가 압도적인 전투였다.
“지옥교!”
사자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특이한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놈은 정말 특이해 보였다. 아니, 혈야대군처럼 특이한 능력이 있어보였다. 뇌전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다. 신체 주위에 뇌전이 끊임없이 번뜩이는데, 공격하는 무인들이 감전되어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놈은 가만히 있는데도 말이다.
‘우선 저놈부터.’
오만하게 뒷짐을 지고 전장 한가운데서 전투를 구경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는 단순한 이유가 먼저였다. 물론, 벌판에 있는 지옥교는 모두 그의 사냥감이었지만, 먼저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드는 녀석이었다. 무엇보다 강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녀석도 혈혈단신으로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보고 비웃음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자비는 나무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 ☆ ☆
“젠장.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흑룡은 혼자 소리치고 짜증을 부렸다. 남북에서 동시에 구조신호가 올라온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양쪽 모두 이런 신호를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지옥교의 힘이 강하다는 증거였다.
어딜 먼저 가야 하나!
그는 수라천군에게 그 결정을 넘기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라천군도 난감한 듯했다. 하지만 곧 선택을 정할 결정적인 보고자가 달려왔다. 북쪽에서였다.
맹의 무사가 마교의 수장에게 고개를 숙이는 기이한 행동을 무시한 수라천군이 물었다.
“직접 온 저의가 무엇인가?”
“맹주님이 직접 설명 드리고 어르신과 흑룡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하나, 남쪽 전투에서도 위급하다는 신호가 올라왔네.”
“그곳은 나머지를 보내시고 어르신과 흑룡은 꼭 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던가?”
“그가 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대와 떨어져 북쪽 진입로로 호위 명명을 데리고 오는 것을 정찰조가 발견했답니다.”
“그?”
그가 누구인지 수라천군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과연 맹주가 자신과 흑룡을 찾는 이유를 알겠다. 그는 기필코 꺾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가 지옥교의 중심이었으므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불리해진 상황에 약간의 변수를 기대할 수 있었다.
수라천군은 환몽영을 보았다.
“네가 교도를 이끌고 남쪽을 돕도록 하거라.”
환몽영이 꿀꺽 침을 삼키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걸고!”
그리고는 교도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흑룡도 구파일방의 고수에게 같은 부탁을 한 후 수라천군을 보았다.
“영감을 한 방에 보냈다는 그놈 면상을 이제야 볼 수 있겠소.”
수라천군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나 또한 자네의 그 무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군.”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흑룡은 불쾌해진 얼굴로 한마디 내뱉고는 힁허케 북으로 달려나갔다.
“내 발목이나 붙잡지 마슈.”
제10장 무종(無終)
1
뇌형대군은 더 이상 미소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를 피해 흩어지는 무인들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비규환인 이 전장에 어디서 그런 여유가 있는지 나무 위에 올라선 애송이 하나를 발견해서였다. 물론, 처음에는 웃었다. 가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녀석이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생각을 달리했다. 지옥교도 하나가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한 걸음 물러서는 동작으로 매서운 공격을 아주 간단히 피하더니 앞으로 쏟아지는 검을 잡아 부러뜨릴 때였다.
검기가 충만한 검을 맨손으로 잡고 부러뜨린다?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계속 다가왔다. 흑시 하나가 또 놈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에 대한 평가가 제법에서 물건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뻗어오는 손을 맞잡아 꺾어버리는데, 한 번에 강철 같은 흑시의 팔이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부러지는 것이다.
녀석은 계속 걸어왔다. 도중에 몇 번의 교전을 겪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어쩌면 자신을 얕보고 있을 그 미소를 유지한 채 달려드는 모든 것을 꺾고 찢고 부러뜨리며 오고 있었다. 그리고 열 걸음으로 좁혀졌을 때 뇌형대군은 미소를 잃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에서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졌다.
쿵! 쿵!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그의 귀에는 또렷했다. 녀석의 발걸음이 무시무시한 협박이 되어 육박해오는 것이다.
뇌형대군은 주먹을 쥐었다.
놈은 제법에서 물건으로, 이제는 일생의 위협이 될 만한 녀석이 되어 있었다.
치치치직-!
자신의 능력인데도 몸서리 처지는 이 찌릿한 기분. 그의 전신이 뇌전에 휩싸였다. 사방에 머리가 뻗치고 옷이 부풀며, 그가 여태껏 숨겨왔던 내공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순간 그를 중심으로 오 장여가 강렬한 뇌전으로 들끓었다. 그 속에서 상대를 죽이고, 죽어가는 녀석들이 동작을 멈추고 뇌전을 피해 물러서기 바빴다. 미처 물러나지 못한 놈들은 바르르 몸을 떨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흑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공간 안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뇌형대군는 다가오는 애송이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려 한 것이다.
미소가 사라진 뇌형대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의문으로 자신을 상대할만한 실력이 있는지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한 것이데, 녀석은 뇌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했다.
뇌전. 이 힘은 놀라운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웬만한 고수와의 상대에서는 초식을 사용해본 기억이 없었다. 그의 몸에 뇌전이 흐르면 그 자체가 공격이 되고 방어가 되기 때문이다. 공격해오는 놈은 오라고 해라. 공격하는 순간, 그의 몸에 흐르는 뇌전에 병장기가 닿는 순간, 주먹이 닿는 순간 동작을 멈추고 몸을 떨다가 결국 타죽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와보니 과대평가한 것 같군.”
놈이, 애송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뇌형대군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들끓는 뇌전 속에서 태평한 모습이니 강하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어떤 고수도 그를 쉽게 생각할 수 없다.
“믿지 못하는 눈이로군.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나?”
뇌형대군은 어이가 없어서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 놈이로구나!”
“그 관에 누가 들어갈지 두고 보지.”
순간 녀석의 신형이 사라졌다. 뇌형대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가!
녀석이 그의 코앞에 붙어 있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어서 녀석을 제압해야 한다는 본능에 의거하여 두 손을 교차하여 떨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이 교차하는 순간 녀석의 팔이 진로를 방해했던 것이다. 그의 손에는 엄청난 뇌전이 흐르는데 그걸 맨손으로 막고 아래로 내려 상체를 무방비상태로 만들다니…….
감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퍽!
복부로 꽂히는 녀석의 주먹이 만 근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꼼짝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이런 것임을 뇌형대군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고 녀석의 오른손. 그 손이 천천히, 비스듬히 돌리며 다가와 그의 오른쪽 볼을 움켜쥐었다. 그때까지 뇌형대군은 고통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움직였을 때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녀석의 손에 의해서였다. 녀석이 그의 얼굴을 아래로 누른 것이다.
뇌형대군은 아래로 떨어지는 눈으로 녀석의 무릎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릎은 정확히 그의 왼쪽 볼을 가격했다.
퍽-!
“큭!”
아찔한 기분. 이어지는 가물가물 해지는 정신.
턱뼈와 광대뼈가 산산이 부서졌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옥교를 떠받치는 뇌형대군이 단 두 수에 죽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타격에 얼굴이 완전히 박살 나고 뇌수까지 흘리면서 비참한 모습으로 절명해 버렸다. 그 증거로 주위를 뒤덮은 뇌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뇌형대군의 부서진 모습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뇌전 때문에 피하기 바쁜 탓도 있었지만 무시무시했던 지옥교도 한 명을 주먹과 무릎으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 놀란 것이다.
소요요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애초 목적과 달리 한 놈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목을 내주게 되어 자신의 무공이 한참 떨어진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던 때에 뇌전 때문에 특이해 보이던 지옥교도 한 명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장면은 경악할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살폈다. 이곳 무인 중에 저런 고수가 있었나. 혹시, 흑룡인가. 그러나 지원군에는 수라천군과 흑룡이 없었다. 전투 중에도 그 소식을 접한 그녀가 얼마나 실망했던가.
도대체 누구지?
그녀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악성을 흘렸다.
“다, 당신은…….”
그녀는 말을 급히 멈추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옆에서 강시가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흑시가 아닌 천령시였다.
팡!
땅이 움푹 폐이며 그녀가 있었던 자리에 강시의 단단한 주먹이 파고들었다. 놀랍게도 팔꿈치까지 박혀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팔에 그녀의 복부도 걸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촥!
강시의 팔이 땅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팔이 다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르고 거친 동작이라 그녀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쉬익!
코끝에서 경기가 일며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저 주먹에 얼굴을 맞았다가는 조금 전에 보았던 지옥교도처럼 뇌수가 흘러나올 끔찍한 상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주먹은 그녀의 코끝에서 멈췄다.
그녀는 눈을 뜨고 벌벌 떨면서 검게 말라비틀어진 천령시의 주먹을 보았다. 분명히 멈춰져 있었다. 왜 그럴까. 꿀꺽 침을 삼킨 후 그 이유를 찾았다.
소요요는 입을 크게 벌리고 토악질을 시작했다. 강시의 벌어진 입을 뚫고 또 다른 주먹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다. 그 주먹이 사자비의 주먹이란 것은 한참 후에 알았다.
“명줄 한번 길구나.”
사자비의 조롱에도 그녀는 대답 없이 계속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뒤통수를 뚫고 앞으로 튀어나온 이 기막힌 장면을 도저히 머리로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시라지만 인간이었던 녀석이 입이 꿰뚫린 채 바동거리는 모습이란!
그때 사자비가 주먹을 빼내고 녀석의 몸을 돌려 가슴을 때렸다. 일권에 녀석의 가슴뼈가 기형적으로 함몰되었다. 두 번째에 목뼈가 부러지고, 세 번째 타격에서는 놈의 몸이 완전히 얼었다.
쿵!
큰 돌사자가 넘어지는 소리처럼 천령시가 떨어지더니 이내 사자비의 발에 밟혀 부서졌다. 전신을 바스러뜨리려는 듯 사자비는 계속 녀석의 몸을 밟고 있었다.
소요요는 그만하라는 소리를 지르려다 옆으로 달려드는 흑시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사자비의 한 팔에 휘둘려 목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고 몸이 굳은 것이었다. 곧이어 또 다른 녀석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지옥교도였다. 사자비의 뒤를 노린 것이지만 보지 않아도 알아차린 듯 그는 몸을 돌려 녀석의 목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잡은 그 손을 살짝 비틀자 ‘뚝!’ 거리는 소라와 함께 지옥교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천령시, 흑시, 지옥교도를 차례로 제압한 일련의 행위는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고 지극히 단순 간단해서 소요요조차 자신도 저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시도조차 할 수 없겠지만, 보기만 해서는 정말 쉬운 것처럼 느껴졌다.
“고, 고마워요.”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소요요는 사자비가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사자비가 예의 기분 나쁜 미소를 흘렸다.
“너희 따위를 돕고자 한 것이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 없다.”
“네?”
“난 내 볼일 보겠다는 거다. 너흰 너희 볼일 봐라.”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진정 놀랐다. 사자비가 인중(人中)을 헤치는 모습, 그가 지나간 자리에 강시며 지옥교도가 예외 없이 얼고 깨지는 모습, 그 시간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데 순식간에 오십 명을 무너뜨리는 민첩함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그녀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범접할 수 없는 고수의 무위에 놀라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순간 강호에 남았지만 감히 누구를 짚어 말할 수 없는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천하제일인!’
그녀는 확신했다. 현 강호에서 누구도 천하제일을 단언할 수 없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인정하리라 생각했다.
팡-!
주먹 한 번에 한 놈씩이었다. 지옥교도는 절명하고, 운이 좋은 녀석도 그 자리에 쓰러져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자비는 녀석들을 죽이기보다는 힘을 빼놓는 정도로 제압하기만 했다. 녀석들을 완전히 파괴하려면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니까. 그저 머리만 쳐서 목을 날리는 정도, 혹은 팔이나 어깨를 파괴하는 정도로 넘기고 다른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힘이 꺾인 녀석들은 다른 무인들이 처리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자비는 점점 자신의 행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저 적을 발견하면 때린다는 단순한 행동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너무 많아서 수를 세기도 귀찮아 보이는 족족 접근해서 파괴해 나가는데, 종내에는 주위에서 녀석들을 찾을 수 없었다. 녀석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무인들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정을 살폈다.
지옥교의 강시는 이미 꿈틀거리며 무인들에게 제압되어 있었다. 강시와 달리 이성이 있는 지옥교도는 사자비에게 몰리고 몰려서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자비를 중심으로 이십 장 안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모두 물러나서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꼭 귀신 보는 듯한 눈으로 사자비만 주시했다. 피를 뒤집어쓴 귀신이었다.
단 일 각 만에 지옥교의 전력 칠 할을 맨손으로 꺾어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온몸에 피와 인간의 살점이 묻어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두려움에 질렸을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막 공터로 진입하는 수백 명의 무리, 그 선두에 있는 면면이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안겨주었다. 친황대였던 것이다.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로지 사자비를 잡는데 신경이 곤두선 친황대는 달리던 중에 갑자기 멈춰 섰다. 그들은 주위에 널린 시체와 강시를 보며 굳은 표정이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사자비를 발견한 갈천은 말끝을 흐렸다. 악귀 같은 형상을 보며 흠칫 몸도 떨었다. 소천룡도, 다른 대주들도, 나찰귀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사자비와 주변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잠시 후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엉망인 사태가 사자비의 작품이라는 것을 친황대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런 의미가 눈빛에 깔리더니 이내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대주들의 머리에서 들릴 지경이었다.
사자비가 그들을 돌아보며 양팔을 벌렸다. 이때쯤에 이미 전투가 중단된 상태였다. 지옥교도들은 한쪽으로 물러나서 구원자가 될지도 모르는 친황대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했다. 무림인도 섣불리 그런 그들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물러서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사자비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조용해진 벌판을 흔들었다.
“하하하! 며칠 전에 봤지만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갑구나!”
그의 시선을 받은 갈천 등은 대꾸 없이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사자비 또한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소천룡이 앞으로 나서서 떠듬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널브러진 지옥교도들을 한번 훑으며 말을 이었다.
“대인의 결정은 무엇입니까?”
“내 결정?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건가?”
소천룡은 고개를 저었다.
“결정에 따라 저희도 결정할 생각입니다.”
“너희가 모두 죽기를 원한다면?”
소천룡은 굳을 표정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사자비는 강자의 여유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게 전멸을 뜻하는데도?”
“저희는 상부의 명에 따를 뿐, 목숨을 아까워하는 소인배가 아닙니다.”
“상부의 명령이라…….”
사자비는 히죽 웃었다.
“그렇다면 결론이 났군.”
그러면서 한쪽에 몰려있는 지옥교도를 가리켰다.
“상관으로서 명한다. 저들은 역도와 결탁한 무리니 그에 합당한 벌을 내려 모두 척살하고자 한다. 시행하라.”
친황대의 시선이 지옥교도에게 옮겨갔다.
소천룡이 다시 물었다.
“그 말씀은?”
“구채구를 정리 후 황도로 가서 친황대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물론, 자네들이 날 도와줘야겠지.”
소천룡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사자비의 뜻은 지금까지의 일을 친황대의 알력다툼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한 쪽에 붙는 것이 낫겠지. 조정례와 사자비, 둘 중 누가 마지막 승자가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 소천룡은 완전히 한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는 결심한 듯 다른 대주들을 돌아보았다.
대주들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친황대의 향방은 결정 났다.
“쳐라!”
소천룡이 외치고 먼저 장검을 빼들었다. 뒤이어 수백 명의 친황대가 동시에 같은 행동을 취하더니 지옥교를 향해 거센 호랑이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의 거침없는 행동을 보며 무인들은 다시 한번 넋을 놓았다. 언제나 깔보던 황실의 고수가 지옥교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압도적인 숫자의 탓도 있겠지만, 지금 친황대의 움직임은 그걸 무시해도 좋을 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친황대원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절정의 고수와 같았다. 무엇보다 그 속에 무공을 뽐내는 대여섯 정도는 화경의 고수가 분명해 보였다.
지옥교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시간, 소천룡과 갈천이 전장에서 몸을 빼 사자비에게 다가왔다.
갈천이 무안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희롱의 말을 흘린 죄, 충심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사자비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소천룡이 의문을 드러냈다.
“저들에 대한 원한이 깊으신 건 알겠지만 굳이 저렇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잘만 이용하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녀석들입니다.”
“힘? 저런 종교 집단을 끌어들여서 무슨 득을 본단 말인가. 내 장담하지만, 조정례도 저들과 끝까지 갈 생각은 없을 거다. 토사구팽이란 말이지. 하지만 당장은 큰 전력이 되기는 한다. 난 그걸 꺾어 무력 부분에서 조정례의 손발을 잘라내고자 하는 거다.”
소천룡과 갈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소천룡과 갈천의 시선을 받은 소요요는 움찔 몸을 떨다가 사자비의 시선까지 받자 고개를 푹 숙였다. 갈천이 대신해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소요요는 잔뜩 긴장한 몸짓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떠듬거렸다.
“지, 지옥교가 저곳으로 가면 더 있어요.”
“얼마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천 명 정도는…….”
“상당한 숫자군. 어떻게 할까요?”
“이곳을 정리하는 대로 와라. 난 먼저 가 있지.”
“알겠습니다. 곧 따라가지요.”
순간 사자비의 신형이 사라졌다. 달린다기보다는 날아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소천룡과 갈천은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저런 수준이라면 이제 친황대 전체가 달려들어도 안 되겠습니다. 도대체 백일홍으로 저렇게 될 수 있는 겁니까?”
소천룡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일홍에서 말하는 한빙지체가 된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말을 하던 갈천이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규보의 비급을 발견하지 않고는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될 수 있겠나? 아무튼 빨리 처리하고 따라가세.”
그들은 다시 전투에 끼어들었다.
☆ ☆ ☆
쿵!
“이런 제길!”
흑룡은 바위에 부딪히고 땅에 떨어지며 욕설부터 뱉었다. 이제 힘이 완전히 빠졌다. 금강역골경의 상태에서 이렇게 내공이 바닥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풀숲을 보았다. 거기에 대단했던, 보고도 그만큼 강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수라천군이 이미 꿈나라에 한 다리 걸치고 있었다. 물론, 이 급박한 상황에 졸려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저 무식하게 강한 녀석에게 장력을 몇 번 얻어맞더니 절로 정신을 놓은 것이었다.
쾅!
흑룡은 분한 듯 땅을 때리고 벌떡 일어났다. 금강역골경의 완성체로도 상대가 안 될 고수라니……. 그간 수라천군을 ‘한방천군’ 이라고 내심 조롱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저렇게 무식한 괴물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 괴물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다시 욕설을 쏟아내고 수라천군을 향해 소리쳤다.
“기절한 척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요. 나 혼자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소귀에 경 읽기라고 해야 할까. 수라천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흑룡은 어쩔 수 없이 훌쩍 물러나 들판에 솟아난 바위산을 옆에 끼고 숲과 경계를 이루는 나무 울타리를 병풍 삼아 돌아섰다. 입을 꽉 깨문 채 결연한 표정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괴물을 노려보았다.
“그래, 인생은 어차피 혼자야.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무의미한 것이지.”
그리고는 손을 뻗으며 외쳤다.
“우리 대화로 해결하면 어떨까?”
괴물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기회를 틈탄 흑룡이 지체 없이 장력을 뿌렸다.
콰쾅!
내공이 상당히 줄어든 터라 파괴력은 떨어졌지만 정통으로 녀석을 맞췄다.
흑룡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모래먼지가 걷히고 그곳에 오연히 서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는, 그 눈에 불 같은 화기가 들끓는 것을 확인하고는 핼쑥해져버렸다.
“지, 지금 건 화해하자는 차원으로……!”
괴물의 몸에서 살기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흑룡이 다시 소리쳤다. 수라천군을 향해서였다.
“좀 도와 달라니까.”
바람이 이뤄진 것일까? 수라천군이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흑룡의 표정이 잠시나마 환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수라천군이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큭!”
괴물의 손에 목이 잡힌 흑룡은 녀석의 팔을 떨치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로 가슴을 차고 낭심을 걷어찼는데도 떨쳐낼 수 없었다.
퍽!
“윽!”
복부에 괴물의 주먹이 들어왔다. 전신에 힘이란 힘은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몸이 날아가는 것을 느끼는가 싶었는데 더 큰 고통이 몰려왔다.
쾅!
바위산에 부딪힌 흑룡은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벽면에 박혀버렸다. 금강역골경이 아니었다면 곤죽이 되었을 충격이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또다시 복부에 깊은 타격이 있었다. 괴물이 어느새 벽면에 붙어서 한 손으로 그의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흐으윽!”
뒤로 물러설 수도 없으니 주먹이 주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흑룡은 울먹였다.
“비, 비겁한 놈. 때린 곳을 또…….”
놈이 다시 주먹을 들었다. 흑룡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때리는 동작이 주는 공포를 느끼느니 차라리 맞는 고통만 느끼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질리도록 맞았다. 괴물은 잔인하게도 그를 때려서 죽일 작정을 한 것처럼 쉬지 않고 주먹을 놀려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제는 너무 많이 맞아서 고통도 사라질 때쯤 괴물의 행위가 멈췄다.
흑룡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바위에 박혀 든 채로 온몸에서 피를 쏟고, 두 눈은 부어서 뜬 건지 감은 건지 분간도 가지 않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꼴좋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
환청치고는 너무 또렷하지 않나?
그는 감은 눈으로, 실제로는 뜬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감긴 그의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여전히 감은 모습이겠지만, 그는 확실히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너!”
너무 맞아서인지 갑자기 사자비라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사자비가 비웃듯 입을 벌렸다.
“내가 아는 놈들은 죄다 이 꼴이군.”
“다, 닥쳐. 지금 내가 상대하는…….”
흑룡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던 괴물이 없다.
괴물은 곧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녀석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덮쳐오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한 거냐?”
“잠시 멀리 던졌지.”
“바보 같은 놈. 던지면 어떡해?”
“그럼?”
“뒤를 노려서 목을 잘랐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타격이라도 주던가.”
“비겁한 짓이 아닌가?”
흑룡의 얼굴이 술을 마신 것처럼 붉어졌다.
“지금 그걸 따질 때냐?”
그 사이 괴물은 이미 바닥을 차서 뛰어오르고 있었다. 흑룡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좀 해봐.”
사자비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의 충고가 뒤따랐다.
“정면으로 상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미 사자비는 아래로 뛰어내려 녀석의 전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멍청한 놈!”
또 자신과 수라천군 같은 놈이 하나 늘겠구나, 라는 생각에 그는 한숨부터 쉬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쾅!
사자비의 주먹에 괴물이 머리를 얻어맞고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흑룡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물론 처음과 별반 차이 없는 크기였지만, 그는 고꾸라지는 괴물을 보고, 다음은 넓은 벌판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무리를 보고 놀랐다. 지옥교가 아니라 무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들과 섞여 있는 무리는 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사자비를 죽이려 했던 황실의 무리가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수를 보아하니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지옥교와 강시를 제압한 모습이라 의문에 휩싸인 흑룡이었다. 하지만 당장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했다. 그는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노인을 향해 외쳤다.
“날 좀 내려주십시오.”
맹주가 그를 알아보고 훌쩍 몸을 날렸다.
“넌 누구냐?”
괴물, 맹주의 설명으로는 지옥교의 교주 요마가 비틀 물러서며 굵고 무뚝뚝한 음성을 흘렸다. 사자비는 녀석의 신체를 보고 강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맹주는 그가 불사지체를 이루는 반강시라고 했다.
살아 있는 인간이 강시가 된다?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그 힘이 다른 강시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것도 방금 이뤄진 잠깐의 공방에서 느꼈다.
“조정례를 알고 있겠지?”
요마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사자비는 놓치지 않았다. 그와 관련 있느냐는 물음도 들끓는 눈빛에 담겨 있었다.
사자비의 눈은 요마와 반대로 차갑게 식었다. 그것으로 대답은 끝났다는 의미였다.
요마의 무뚝뚝한 음성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죽여야 할 놈이었군.”
2
“그걸 맨손으로 막으면 어쩌냐?”
흑룡은 사자비와 요마의 대결을 지켜보며 마치 자기가 싸우는 것처럼 열을 냈다. 요마가 뻗는 주먹을 맨손으로 막은 사자비가 바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요마의 가공할 완력은 금강역골경의 완성체로도 감당할 수 없지 않았던가. 과연, 뻗은 주먹을 손으로 잡아낸 사자비의 신형이 흔들렸다. 빠르고 강력한 주먹을 잡았다는 자체가 가상한 일이었지만 흑룡은 혀를 찼다.
쿵!
사자비의 한쪽 무릎이 꺾이더니 이내 땅에 닿았다. 주먹은 여전히 사자비를 향해 압력을 가하는데, 그걸 막고자 사자비 또한 힘으로 상대의 손을 밀어내는 형국이었다.
흑룡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쳤다.
“내 말 들었어야지.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다니까.”
그런데 갑자기 사자비가 벌떡 일어섰다. 그 힘을 더해 팔까지 밀어올리자 이번에는 요마의 신형이 흔들렸다.
흑룡의 입이 벌어졌다. 옆에 있던 수라천군이 초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자코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을!”
흑룡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이어진 사자비와 요마의 움직임을 보고는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완력싸움은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무공을 겨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흑룡이 생각했던 수준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요마는 흑룡과 수라천군 둘을 상대하고도 진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흑룡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초라해졌지.’
괜히 감상에 젖은 그였으나 이내 다시 입을 벌렸다. 괴물, 요마가 사자비에게 맞고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평범한 타격에, 평범하게 날아가는 형태가 아니어서 더욱 놀랐다. 때리는 쪽도, 맞는 쪽도 무섭게 느껴지는 공방이었다.
펑!
사자비는 있는 힘을 다해 상대의 가슴을 때렸다. 타격이 되는 순간 주먹에서 백팔백룡장의 힘을 약간 폭발시켜 파괴력을 더한 일격이었다.
요마가 힘을 이기지 못한 채 뒤로 날아갔다. 아니, 쏜 활처럼 공간을 갈랐다. 일직선으로 오십 장이나 뻗어간 것이다. 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나무였다.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흡사 콩 볶는 것과 비슷한데, 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지고, 마지막으로 사자비와 오십 장 떨어진 고목이 천천히 몸을 뉘었다.
쿵!
고목이 넘어지는 소리는 날아갈 때보다 몇 배는 빨리 달려와서 사자비를 걷어찬 요마의 타격음과 맞물렸다. 이번에는 사자비가 뻗어나갔다. 나무도 없고, 다른 장애물도 없으니 한참을 가서야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후에도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사자비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충격이 심하지 않은가. 방심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기분이 그를 긴장시켰다. 때마침 요마가 접근하고 있었다. 사자비의 눈빛이 붉게 빛을 발했다. 동시에 천령강기를 떠올리며 주먹을 놀려 땅을 때렸다.
콰콰콰쾅!
지축을 울리는 소리는 땅을 흔들고, 곧이어 반구형의 흙먼지를 생성했다. 사방으로 지독한 냉기가 퍼져 나왔다. 혈야대군을 처리했을 때의 그 방법이었다. 반구형의 구름은 이내 하늘로 말려 올라가더니 버섯 모양을 수놓았지만 구경하던 무인들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쏟아지는 거대한 바람과 피부를 얼릴 것 같은 지독한 냉기에 모두 몸을 숙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굉음이 솟구치고, 대기가 흔들리는 충격파가 몇 번이나 그들을 덮쳤다.
“이게 도대체 인간의 무공이 맞나?”
흑룡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
그는 절로 탄성을 흘렸다. 그의 눈에는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럴 때는 부은 눈이 이점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평소라면 눈에 날아오는 모래먼지가 잔뜩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어쨌건 잠깐 지났을 뿐인데, 사자비와 요마는 이미 다른 장소에서 싸우고 있었다. 언제 저만치 자리를 옮겼는지 모를 일이지만 두 고수의 움직임을 보면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빨랐다.
번쩍번쩍 빛이 먼저 달려들고, 폭발음과 충격의 여파는 그다음으로 몰려왔다. 저 먼 곳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행동을 반복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듯했다.
흑룡은 이 모든 것이 헛것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무공이라는 수단 자체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이해불가한 일이지만 저 두 놈은 또 달랐다. 무공을 익힌 그에게조차 이해할 수 없는 압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더욱 멀어져서 소리와 공기의 진동만 느껴질 뿐이었다. 일 각이 지나고, 이 각도 훌쩍 지났는데……. 싸우는 소리는 여전했다.
“무지막지한 놈들. 저런 공방을 주고받으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할 텐데, 그걸 아직도 유지하다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벌판 위가 아직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쥐 죽은 든 조용해졌다.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는 경외의 심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무인들이 일순 침묵을 지켰다.
“끝난 것 같군.”
수라천군이 침묵을 깨었다.
흑룡이 물었다.
“누가 이겼을 것 같습니까?”
수라천군은 고개를 저었다.
“가서 확인해 보지 그러나?”
“미쳤소. 만약 그 괴물이 이겼으면 어쩌려고.”
“저런 대결이었다면 이긴 쪽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네만. 최소한 내공은 바닥이 나지 않았겠는가.”
흑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기다리지 뭐. 이긴 녀석이 걸어오겠지.”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곳을 찾아오는 그림자가 없었다. 참지 못한 흑룡이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급히 주저앉았다. 이미 금강역골경이 풀린 상태였다. 그보다는 온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 없는 그였다. 그때 환몽영이 수라천군에게 다가왔다.
“제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수라천군의 허락이 떨어지자 환몽영은 장기를 십분 발휘하여 땅에 꺼지듯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그가 놀라운 보고를 올렸다.
“아무리 일대를 뒤져도 그들을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달리 괴물이겠어?”
흑룡의 말에 맹주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졌다지만, 역시 인간일 뿐일세.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네. 그만큼 공력을 쏟아냈으면 끝났어도 오래전에 끝났어야지.”
“그럼 땅으로 꺼졌다는 말입니까, 하늘로 솟았다는 말입니까?”
“둘 중 아무것도 아니다.”
환몽영이었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맹주가 물었다.
“소협은 무언가를 본 듯하네만, 그게 무엇인고?”
“무종(無終)이라는 글귀가 들판 한 곳에 크게 적혀 있더군요.”
“무종?”
풀면 끝이 없다는 뜻인데,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역시 같은 표정들이었다.
“다른 건 없던가?”
환몽영은 대답 없이 근처에 있는 친황대를 찾았다. 상대가 소천룡이라는 것을 알 리 없지만, 관직에 몸담은 자에 대한 예를 차리고 사자비가 썼으리라 짐작되는 글을 전해주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섬서 서안부(西安府) 동문으로 나흘 안에 도착하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대인께서 친황대가 맞다면, 그렇습니다.”
소천룡은 다른 대주들을 바라보았다. 갈천이 말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서둘러야겠습니다.”
마지막 두 고수의 대결이 의문투성이로 남았지만 명이 떨어졌으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글을 바닥에 남겼다는 건 아직 총감이 살아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적어도 그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친황대는 인사 한마디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지옥교도에게 결계가 걷히는 시간을 들은 그들이라 주저함이 없었다.
☆ ☆ ☆
사자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처 입은 요마를 등에 업고 걷기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시간이 되어서야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수백 번도 더 고민했지만 결국, 그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잘 지냈니?”
사자비는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왜소한 혈의인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네!”
맑고 깨끗한 음성, 하지만 짙은 어둠이 도사리는 목소리가 혈의인의 어깨를 타고 흘러 넘어왔다. 혈의인의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죄송해요.”
사자비는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고개를 저어주었다.
‘네가 왜 사과를 하느냐?’
그 말이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요마를 쓰러뜨리고 마라겸으로 그의 목을 자르려 할 때 그는 지금의 혈의인을 보았다. 반신이 싸늘한 기계로 만들어진 여자 인간,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그녀가 처음에는 요마를 돕고자 나타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요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사자비는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녀까지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에 힘이 빠졌다.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내려앉는 고통이 느껴졌다.
– 오빠!
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잊었는데…….
구사일생했던 걸까? 지옥교에 의해 구원받은 걸까?
도대체 그 몸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니?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자 그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혈의인, 예전의 동생이지만 지금은 지옥교의 소교주, 소금이 몸을 돌렸다.
싸늘했다. 반쪽의 쇳덩이와 반쪽의 피부는 완벽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쳐다보기조차 부담스러웠다. 반쪽의 무표정과 반쪽의 인간적인 표정. 사자비는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저를 구해주었어요.”
사자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덕분에 오빠와 제가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저는 만족해요. 하지만…….”
반쪽의 얼굴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저 참 이기적이죠?”
사자비는 눈으로 물었다.
뭐가?
“오빠를 죽이려 했던 사람을 살려달라고 해서요.”
사자비는 힘겹게 입을 뗐다.
“이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니?”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뒤에 그녀가 말했다.
“이 몸을, 이 인간이 아닌 몸을 유일하게 사랑해주시는 분이세요.”
‘고작 이유가 그거냐?’
사자비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이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까? 저 몸을 사랑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뜻인가!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분이에요. 짝사랑이지만!”
반쪽은 여전히 싸늘한 무표정인데, 남은 반쪽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연모일까?
사자비는 고개를 돌려 그의 등에 기대어 있는 요마를 보았다. 말라비틀어진 피부, 반 강시이며 반 인간인 사람. 사자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빠에게 사랑하는 연인을 밝히는 수줍은 동생의 모습이 여느 여인과 다름없어서 애처로웠다.
“그러니……. 그분을 살려주신 걸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훗날 그분이 오빠를 원망하고, 또 죽이려 한다고 해도요.”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
‘내 평생 진심으로 가슴에 담은 후회는 단 하나밖에 없단다. 너를 좀 더 일찍 찾아가지 못했던 것. 그 외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겐 후회 따윈 없을 테니 걱정 마라.’
사자비는 처음으로 미소 같은 것을 입가에 드러냈다.
“이기적이라고 했니?”
그는 하하거리며 웃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오빠만큼 이기적이진 못해. 그러니 그런 작은 이기정도는 부려도 널 미워하지 않아.”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오누이는 다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을 동안 침묵하다가 소금이 작별을 고할 때 사자비가 물었다.
“그때, 내 입에 넣었던 건 뭐였니?”
“천환단!”
“천환단?”
사자비는 짐짓 모른 척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금도 그 가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보양에 좋은 약이에요.”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사자비는 다시 웃었다. 소금이 몸을 돌려 떠날 때까지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문득 전음을 보냈다.
[그가 널 괴롭히면 날 찾아오렴. 내가 혼내주마!]
저기 멀어지는 소금의 등 뒤로 그녀의 미소가 담긴 전음이 들려왔다.
[오빠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잘 있어요. 그리고 꼭 행복하세요.]
소금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붙잡고 싶었지만,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처지도 여유도 없었다. 소금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음 편하게 웃으며 보내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소금이 보이지 않는데도 먼 곳을 응시하다가 문득 기이한 생각을 했다.
반쪽짜리 인간!
“진짜 반쪽짜리는 나지.”
소금은 신체가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완전한 인간이었다. 진정 반쪽짜리는 자신이었다. 소금과 그는 닮았지만 결코 닮지 않았다.
“행복이라……, 과연 내게 그런 게 있을까?”
인간의 마음이라는 면에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반쪽이 지금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있지!”
순간 사자비의 표정이 바뀌었다. 동생을 떠나보내는 오빠의 아련한 얼굴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점철되고, 냉철한 권력자의 빠른 판단과 강렬한 욕구가 얼굴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곧장 규보의 무덤으로 향했다. 이 힘, 절대적인 이 힘은 한 사람의 것일 때만 의미가 있다. 그는 그 의미를 지킬 생각이었다.
콰콰쾅!
무덤이 있던 절벽이 무너지면서 낙수까지 무너져 일대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사자비는 다시 강기를 뿌려 수면 아래 있을 통로까지 허물었다. 그리고 섬서성 서안부로 향했다. 거기서 친황대를 만나야 하고, 곧장 황도로 가야 했다.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의 반쪽이 바라는 유일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 ☆ ☆
– 반란이 일어났다.
북경으로 향하던 사자비와 친황대가 접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뒤이은 소문은 전혀 뜻밖이었다.
– 하루 만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도대체 어떡해?
그에 대한 소문은 북경에 도착해서도 들을 수 없었다. 황실에서 아직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모와 반란에 대한 일을 불언(不言)한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갈천은 그렇게 말했다. 사자비에게 잘된 일이지만 누구보다 친황대 전원, 그리고 동창 전원에게 더욱 잘된 일이었다. 모두 내색하지 않았으나 사자비는 그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었다.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그런 반란이라면 사전에 발각되어야 한다. 그들의 계획을 황실이 미리 알고 대비를 해놔야 한다.
사자비가 아는 조정례는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쁜 일이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실망도 있었다.
또 다른 의문도 있었다. 반란을 진압했다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그조차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역도의 무리를 모두 추려내지 못했을지도. 아니면 반란의 중심인물을 가릴 증인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그런 생각으로 친황대에 도착했을 때, 갑작스러운 부름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부름은 황실 내부의 취조실이었다. 하지만 사자비는 묵묵히 취조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 그도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되고, 이후에는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기가 막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충심으로 보필하겠다는 말만 몇 번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황제와 작별을 고하고 나올 때까지도 사지비는 얼떨떨했다.
그는 친군지휘부 무장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내궁 정문을 빠져나왔다. 순간 마주 오는 인물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허옇게 들뜬 얼굴, 보일 듯 말 듯 그러진 입가의 미소, 의도적으로 굽혀진 허리. 나이 든 얼굴에 관록이 묻어나오고, 걸음걸이에는 가볍지만 무게가 가득 실려 있어 기품이 느껴졌다.
사자비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거만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도 사자비를 본 모양. 황급히 근처까지 다가오더니 공손히 몸을 숙인다.
“친군지휘부 제독으로의 승진을 경하드립니다, 대인!”
사자비는 가만히 숙여진 그의 머리를 보았다.
“고맙네. 그대도 축하하네. 장인태감으로 복직했다지?”
“니예!”
“대단하군. 이번 역모를 밝혀내어 전 친군지휘부 제독 유장 전하께 고했다고 들었네만?”
“모두 대인의 도움 덕분 아니겠습니까.”
사자비는 가소롭다는 웃었다.
“다 자네의 조작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조 태감!”
숙여진 머리가 올라왔다. 거기에 조정례의 미소 섞인, 아부까지 잔뜩 들어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무슨 말씀을…….”
사자비의 입가에도 은근한 미소가 서렸다.
“대단하군. 태감들을 선동하여 뒤로 역모를 꾀하고, 자신은 유장 전하와 폐하께 사실을 알려 공을 세운다?”
사자비는 크게 웃었다. 조롱이 아니라 호쾌한 웃음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날 끌어들였나? 눈엣가시 같은 태감들을 다 잘라내는 정도를 위해 그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 공도 혼자 독차지할 좋은 기회였을 텐데 말일세.”
사자비가 황실에 불려와 들은 바로는 조정례와 자신이 공모하여 역모의 조짐을 파악하고 조정례는 내부를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반면, 그는 외부에서 역모를 주도한 단체, 즉 지옥교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아 소오태산으로 향했다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었다. 그간 비밀을 유지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서 사자비가 올 때까지 황실은 함구를 선택했다.
조정례의 미소가 깊어졌다.
“저 혼자 힘으로 어찌 모두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나와 함께 하면 괜찮고?”
“제 잔재주와 대인의 큰 안목이 더해진다면…….”
조정례의 눈빛이 일순 밝아진 듯했다.
“감히, 문무대신의 누가 우리의 적이 되겠사옵니까.”
“달콤한 말이로군. 하나, 날 죽이라 했다지?”
조정례가 황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그럴 가능성을 계산하기는 했습니다만, 결코 대인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제 진심을 보이고자 한 가지 사실을 알려 드리겠나이다.”
“뭔가?”
“소정동! 그리고 그를 따르는 동창 내부의 부대.”
사자비는 놀랐다.
“소정동과 나와의 친분을 알고 있었나?”
“그래서 그를 구채구로 보냈지요. 물론, 소정동은 제가 그 사실을 알고 보냈다는 건 모릅니다만, 그를 따르는 수하들은 알고 있습니다, 니예!”
잠깐의 침묵을 깬 사자비가 갑자기 감탄했다는 듯 무릎을 쳤다.
“놀랍군. 자네의 지혜가 나보다 낫네.”
그렇게 치하했지만 사실 조정례가 반반의 확률을 점쳤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죽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걸 조정례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끄집어내어 무얼 하나. 결과는 과정을 모두 무시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황실의 비열한 권력 다툼에서는!
“그래서 자네의 뜻은 뭔가?”
“대인의 뜻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내 뜻을?”
“충심을 다해!”
“그걸 어찌 믿나?”
“어찌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사자비는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는 듯 고민 한번 하지 않고 말했다.
“두 가지를 들어주면 되네.”
조정례가 놀란 표정이 되고 곧이어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무엇입니까?”
“첫째, 소정동을 동창 수장에 앉히게.”
“그, 그건……. 그의 경력이 일천하여 외부에서 말들이…….”
“그 소란을 누를 능력이 자네에겐 있지 않은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정례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셋째 전하를 모시는 아이 중에 진학이라는 친구가 있네. 조만간 첫째 전하께서 황태자로 책봉된다지?”
거기까지만 듣고도 조정례는 고개를 조아렸다.
“진학의 자리를 바꾸어 놓겠습니다.”
사자비가 당부했다.
“자네가 옆에서 데리고 다니며 많은 걸 가르쳐 주게.”
감시자로 붙이겠다는 뜻이지만 조정례는 군말하지 않았다.
“니예!”
마지막으로 사자비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이때는 약간 노여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내 남성이 살아 있다는 건 언제 알았나? 그리고 그걸 왜 폐하께 고한 거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께 사실을 고한 이유는 그래야만 친군지휘부에 들어가실 수 있을 테니까요.”
피식 미소를 짓는 그는 손을 저었다.
“폐하의 부름을 받은 것이겠지? 바쁠 테니 이만 들어가 보게.”
“니예. 한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가?”
“어디에 뜻을 두고 계신지……. 그걸 알면 제가 더욱 전폭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사자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은 알 필요 없네. 다만, 무종! 이걸 기억하게.”
그리고는 휘적휘적 외궁 정문으로 이어진 대로를 걸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조정례의 얼굴은 밝게 웃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눈을 보면 알지. 난형난제! 내가 낫다지만 그건 지모일 뿐, 대담함은 네가 낫다. 그래 도와주마!”
그도 몸을 돌려 내궁으로 들어갔다.
사자비는 외궁까지 벗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채구의 하늘과 이곳의 하늘은 별개의 세상처럼 달랐다.
그의 눈빛이 저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지금 진짜 미소를 지었다. 조정례와의 만남에서 흘린 의도적인 미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미소였다.
소정동이 동창을 장악하면 황실의 모든 정보를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진학이 황태자를 모시게 되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황실 내부를 훤히 꿰뚫고, 문무대신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겠지. 거기에 조정례의 전폭적인 도움. 마지막으로 그 자신은 권력의 외피를 벗어던진 또 다른 권력, 친군지휘부의 무력을 손에 쥔다.
사자비가 낮게 중얼거렸다.
“용상의 자리에 앉지 말란 법도 없지. 무종. 갈 길이 아직 멀다. 조정례는 그 의미를 아마 짐작하고 있겠지.”
순간 낭랑한 그의 웃음이 하늘 높이 치솟아 넓게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