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구제-3
로치는 많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더럽게 많다.
호수, 파도, 물결, 다양한 수식어를 죄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다.
진이 고심한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열다섯 함선의 함포를 모두 동원해도 호수에서 물바가지 뜨는 셈이란 거지.’
덕지덕지 붙은 함포들이 하나당 백 마리씩 매초 죽인다 해도 행성을 덮은 로치는 계속 틈을 메울 것이다.
우주 너머에서 계속 오는 벌레의 물결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다 죽이는 것을 목표로 싸우는 건 미련한 짓.
우주전이라면 그래도 할 만은 한데 지상군은 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답이 안 보였다.
때문에 전황을 뒤집기 위해 ‘더욱 확실한 대량살상 수단’이 필요했다.
“……그게 이거라고?”
“왜? 나쁘지 않잖아?”
니베아는 어이없다는 듯 제 상관을 쳐다보았으나 정작 그 상관은 제법 뿌듯한 표정이었다.
“질량만큼 쩌는 무기는 없지.”
허공으로 뻗어지는 레이저 함포가 하늘을 가득 메운 벌레들을 격추하는 가운데, 우주선 동체가 지상을 기어 다니며 로치를 ‘닦아냈다.’
경운기가 땅을 갈아엎듯 선수 부분이 땅과 도시 외곽의 잔해를 밀고, 목수가 대패질을 하듯 선체가 땅을 평탄화시켰다.
갈색 벌레 떼는 압도적인 질량에 짓눌려 그대로 검은 지층으로 변모했으나 수가 워낙 많은지라 함선 위로도 우르르 올라타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파지지지직!!
함선에 올라탄 수많은 로치들은 에너지 실드에 지져지며 자외선 해충퇴치기에 달려든 모기 꼴이 되었다.
이런 수법은 사실 미친 짓이다.
고체 접촉에 더 많이 깎이는 에너지 실드인지라 이런 무식한 몸통박치기는 말 그대로 전력 낭비다.
실드 수치가 다 되면 문짝이 뜯기거나 장갑이 손상되며 결국은 침투를 허용하게 될 거고, 그걸 피하겠다고 하늘로 올라가면 더 최악의 선택이다. 로치 우주군이 실드가 사라진 함선을 흰개미가 나무를 파고들어가듯 유린할 테니까.
물론 팀 엔터프라이즈는 해당하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 누가 우주선으로 멋없게 바닥을 구르냐고?”
“어허, 전쟁을 멋으로 하냐?”
니베아의 기가 찬 목소리에 진은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를 기울였다.
“우주선은 함포만 쏜다는 편견을 버려.”
이런 편견은 함선 무장 이외의 공격의 효율이 너무나 떨어져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모두가 로치를 상대로 이런 방식을 썼으리라.
진은 이 ‘선체 공격’을 무협 소설에 흔히 나오는 수법인 나려타곤에 비유했다. 우아하진 않으나 실전에 써먹을 수 있으며 똑같이 바닥을 구른단 점에선 일맥상통한다. 말뜻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쿠르르릉…….!
고정관념을 타파한 엔터프라이즈 호는 수도 요새 주변을 빙 돌았다. 화살촉을 닮은 형태 때문에 독특한 모양의 시계 시침이 한 바퀴 도는 것처럼도 보였다.
10km에 달하는 길이에 널찍한 모양이라 조금만 전진해도 작은 도시가 쏙 들어갈 정도의 드넓은 평원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건물 잔해나 로치 시체가 끼어 느려진다거나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불도저처럼 모든 걸 밀어버렸다.
지상을 구르는 거 말고도 함포도 병행해 쏘고 있어, 하늘에선 함포에 격추당한 생체우주선의 육편 비가 내렸다.
보기 영 좋진 않았지만 고립된 이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시원스러운 모습이리라.
‘근데 많아도 진짜 많네.’
지나가기 무섭게 액체처럼 빈 공간을 빠르게 메우는 갈색 물결에 진은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함장님. 페넬로페 공작에게서 연락이 왔어요.]홀로그램 통신 화면이 떠오르자 그곳에는 강인한 눈매가 인상 깊은, 장군감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크라서스 페넬로페 공작이었다.
귀족이 흔히 입는 고급스런 원단 대신 빳빳한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마치 군부의 장군을 보는 듯했다.
[지원군은 생각도 못했건만, 이렇게 와줘서 정말로 고맙네. 진 테일러 함장.]“지나가다 우연히 지원통신을 들은 것뿐입니다.”
[듣는 것과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그것도 이리 위험한 곳으로 온다는 결정을 한다니 말이야. 용감한 결단에 경의를 표하겠네.]“하하. 별거 아닙니다.”
발리언트 행성이 위치한 이 성단 구역은 로치가 아니더라도 굉장히 위험한 곳이다.
행성이 공전하는 항성이 속한 산개성단은 비활동성이긴 하지만 위험한 건 매한가지인 블랙홀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고, 주변에는 우주의 등대이자 깡패인 중성자별까지 여럿 포진한 상태다.
잘못 길을 들면 그대로 박살나는, 일종의 우주 암초지대나 다름없다.
광활한 우주인지라 얼핏 보면 별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블랙홀의 영향권과 중성자별의 회전축에서 내뻗어지는 파괴적인 파동 및 생물에게 특히 치명적인 강력한 방사선 등 그 주변을 널찍하게 피해 가도록 강제하기에 생각보다 발리언트로 접근할 수 있는 길목은 좁다.
그렇기에 수백 년 전에 여기를 군구의 수도로 결정한 것이다.
[……]“……”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루 종일 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계속 이것만 할 순 없죠.”
[그렇겠지. ……도와준 마당에 염치없지만, 탈출을 도와줄 수 있겠나?]공작이 침묵하며 다소 말을 주저한 이유가 이거였다. 너무나도 어려운 요구였으니.
진은 다소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물었다.
“지금 대피 인원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현재 이 요새엔 대기 중인 인원이 대략 2천만 정도 되네.]대부분의 대도시와 요새는 숱한 희생을 내면서도 대피소 폐쇄와 긴급탈출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으나, 가장 인구수가 많은 이곳 수도 요새는 그게 아직 덜 끝났다.
도시 내에 들이는 것 자체는 성공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그들 모두를 대피소에 밀어 넣진 못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성문이 뚫리기 직전이야. 자네가 와준 덕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성벽 가까이 붙은 것들까지 그런 방식으로 없앨 순 없잖은가.]그 말대로 하늘에서는 강하하는 것들이 그치지 않는 한은 수도 요새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격벽을 닫아야 하네만, 지금 닫았다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생겨버리네. 나와 내 가신들, 병사들은 희생을 각오했으니 자네의 튼튼한 함선에 민간인을 조금이라도 태워줄 순 없겠나?]공작의 강렬한 눈빛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한 듯했다.
‘대피라……’
창고와 격납고 구역을 크게 확장시킨 엔터프라이즈 호라 일반적인 구축함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수백만 명씩 태울 수는 없고 왔다갔다하기엔 요새가 버틸 시간도 촉박했다.
진은 곰곰이 생각하고는 말했다.
“공작 각하. 대피소와 그 주변 구조를 볼 수 있겠습니까?”
***
수도 요새의 최하층에는 억 단위를 수용할 수 있는 초거대 대피소가 있다.
좁은 격벽문에 실드가 집중되도록 만드는 구조라 로치가 온종일 두드려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다.
그런 마지막 대피처로 향하기 위해서는 그 위, 대피소에 버금가는 거대한 대합실로 들어가야 했다.
“질서를 지키세요!”
“밀치지 마! 위험해!”
“범죄 행위는 즉결처분이다. 자제하쇼!”
“자리는 많으니까 안달내지 마라!”
대합실을 향해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는 통로들은 하나같이 공기 반 사람 반이었다.
모든 통로는 터전을 잃고 벌레에게 쫓겨난 피난민들이 내는 소리와 숨으로 시끄럽고 후덥지근했다.
넘어져 압사하는 일이 없도록 병사들이 군데군데 사람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느리지만 꾸준히 아래로 내려갔다.
기나긴 통로의 중간에는 지하철역 승강장과 닮은 공간이 몇 개 있다. 본래 방어시설로 쓰이던 곳으로, 지하 물자수송 철로가 연결되어 진짜 승강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를 향해 기나긴 줄을 선 피난민들 옆으로, 낯선 검은 갑옷을 입은 이들이 부지런히 승강장에 탄약상자를 내놓으고 용접하여 벽을 세우는 등 방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강습병인가?’
‘처음 보는 복장인데.’
덩치가 크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걸 보건대 강습병인가 했지만, 그들은 계급장이 없었고 화난 얼굴을 형상화한 독특한 헬멧을 쓰고 있었다.
승강장의 물자 저장용 창고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나왔다.
‘엇차.’
진의 손에는 무거운 탄약 상자가 가득 들려 있었다. 그의 옆으로 앤젤라의 서브모듈이 장착된 갑옷 중 하나가 탄약을 옮기기 위해 얼른 스쳐 지나갔다.
진이 상자를 내려놓고 잠시 주변을 훑었다.
‘처참하네.’
숱하게 침공을 받아왔기에, 언제든지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짐을 싸놓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된 행성이다. 그럼에도 피난민들의 짐은 너무나 가벼웠다.
짐을 제대로 챙길 새도 없이 로치가 들이닥쳤단 방증이었다.
진은 피난민 대열에서 눈을 떼고 방어를 위해 주변 구조를 살폈다. 한쪽에는 공작이 제공한 설계도를 띄우고.
지하 시설들은 로치가 쉽게 파들어올 수 없도록 단단한 암반의 형태에 맞추어 터널 파듯 짓느라 그리 편의성이 없었다.
대신 방어 기능 하나에는 충실했다.
로치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환풍통로 같이 틈이 생길 시설은 일체 없고, 수많은 격벽들에 각종 함정이 가득 깔리곤 한다.
수백 년 동안 어떻게 하면 로치를 효율적으로 상대할지만을 궁리해온 건축학적인 정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이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나가는 피난민들 사이로 군데군데 뜯겨져 나간 타일과 말라붙은 로치 체액, 부서진 격벽의 파편이 엿보였다.
침공 초반에 로치가 미처 봉쇄되지 못한 보급용 지하철도로 침투했던 것이다. 다행히 방어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시설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쿠르릉……
저 위에서부터 육중한 진동이 잠깐 나타났다 멀어져갔다.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수그렸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수도 요새를 빙빙 돌며 로치를 닦아내고 있는 엔터프라이즈 호의 동체가 지나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얼른 움직이세요!”
한 군인의 말에 모두가 재차 발을 놀렸다.
***
페넬로페 공작은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현재 성벽 상황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구역의 색이 붉은색이었다.
상당수의 병력이 희생당했거나 전선 유지가 불가능하단 의미였다.
로치가 전술을 쓰는 대신 무식하게 뚫으려는 식으로만 밀고 들어와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물론 아니었다.
에너지 실드에 타오르면서도 무작정 성벽을 넘어 오려는 수백만 단위의 크롤러에, 두꺼운 초합금 성벽을 무작정 들이받고 파내는 라이노로 인해 성벽은 당장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공작은 이런 사지에 자발적으로 들어온 인물의 말을 떠올렸다.
-공작 각하. 절 믿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말에 공작은 믿는다고 즉답했다.
사방이 포위되어 죽는 것밖에 답이 없는 상황에 온 유일한 구원자다. 믿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진 테일러는 만약 지금 방어 병력을 모두 후퇴시킨다면, 성벽 자체는 얼마나 견딜 수 있냐 물어보았다.
-성벽과 성문은…… 대충 한 시간? 물론 로치가 더 많이 붙으면 더 짧아지겠지.
-그 시간 안에 바깥의 모두가 최소한 대합실까지는 들어갈 수 있습니까?
진이 지도의 한 부분을 건드렸다.
요새 지하에서 대합실로 내려가는 도중에 위치한 여러 승강장 중, 여러 통로들이 모두 한 곳에서 만나는 대형 승강장이었다.
로치의 유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하철도를 모조리 폭파하고 방어시설이 파괴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곳이기도 했다.
거기서 막아야 할 구멍은 무려 다섯 개.
그렇다고 통로를 폭파하기에는 곤란했다. 침공 이후 나가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
‘대체 어떻게 하겠단 건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진의 의견에 따라 때를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걱정은 태산이었다.
[공작님. 팀 엔터프라이즈의 방어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때마침 공작의 개인 AI, 로잘린이 말했다.
“……방어 병력 모두 후퇴시켜.”
수도 요새의 두껍디 두꺼운 성벽에서 사람과 안드로이드의 형상이 일제히 사라졌다. 높은 첨탑에서 쏴대던 레이저 기관총의 궤적이 사라지고 대공포가 정지되었다. 요새 지상의 모든 바깥을 향한 틈이 봉쇄되었다.
성벽의 무너진 곳 역시 철수를 했다. 어떻게든 수비하던 인간들이 빠지고 안드로이드가 집중되어 시간을 벌었다.
[후퇴! 후퇴!] [크윽, 제임스가 죽었어. 조금만 버티면 되었는데!] [모두 정신차리고 뛰어!]공작은 AI의 감시카메라 화면을 보던 눈을 가신들에게 돌렸다.
“우리도 이제 내려간다.”
그를 포함한 공작가 수뇌부 전부는 갑옷과 총을 챙겨들고 후퇴하는 병사들의 후방에 따라붙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부디……’
공작의 귓가에는 자신들의 군홧발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신이시여. 그리고 진 테일러 함장.
제발 우리를 구원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