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진정한 적-1
바이올린과 피아노 선율이 귓가를 울리고,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와 짠하는 잔 떨리는 소리, 그리고 하하호호 웃는 목소리들이 가득한 곳.
이 기쁨 가득한 연회장은 프록시마의 정보부 본부였다.
“인류여 영원하라!”
“완전한 승리를 기념하여, 건배!”
“이제 통합전쟁이 끝난 거지?”
“그렇지. 그때 선전포고 했던 종족이 이제야 다 없어졌으니까.”
연회의 규모는 드로칸을 완전 몰락시켰을 때보다도 성대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인류가 완전히 은하의 지배권을 확보한 날이지 않은가!
지금만큼은 모두가 일을 내려놓은 뒤(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는 두고) 골치 아픈 건 싹 다 잊은 채 오늘을 즐겼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물밑과 물위에서 온갖 일을 도맡아 해온 정보부다. 그들이라면 이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자리를 만끽할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여기까지 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못 온다고 했다고?”
“예. 지금 바쁜 일이 있답니다.”
정보부 장관 그렌 카나비어는 참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숨을 내뱉었다.
지지부진한 수백 년간의 악의 고리를 끊어낸 결정적인 장본인이자 연회의 가장 큰 주인공이 불참하다니! 그의 팀을 위해 별도의 진귀한 별미 코스도 마련해 뒀는데 말이다.
“이유는?”
“그건 정확히 얘긴 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리고 또 무적함선을 모두 한 곳으로 모아달라고도 했습니다.”
“갑자기?”
“예.”
“뭐, 들어주게. 연회야 아쉽긴 하지만 나중에 또 준비해주면 되지. 준비해둔 코스는 애들한테 줘.”
“알겠습니다.”
소식을 전달한 요원을 돌려보내고 포도주를 입가에 대려던 장관에게 그의 부관이 넌지시 말했다.
“장관님. 왜 갑자기 AI 함선들을 한 군데에 모으라고 한 걸까요?”
목소리에 은근한 기색이 어려 있어서 장관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부관을 흘긋 보았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정보부 요원으로서의 교육자료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언제든 변심할 수 있는 존재다.”
부관은 진의 행동을 수상쩍다 여기고 있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났는데 갑자기 함대를 한 곳으로 모은다고?
그것도 진 테일러가 지휘권을 가지고 있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AI함선들을?
그 수가 고작 2천여 대로 인류의 전체 함선 수에 비한다면 한 줌도 되지 않으나, 전투력으로 따진다면 제국 함대 전체와도 맞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맞는 말이야. 사람은 변심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말도 있잖은가? 새싹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탄탄한 거목이 될지 해만 끼치는 가시나무가 될지 결정된다고.”
평소의 대우가 속마음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이다. 역심이 없을지라도 대우가 박하면 생길 수 있고, 역심이 있을지라도 배부르게 해준다면 없어질 수 있다.
“지금껏 진 테일러에 대한 조사자료를 보면 그 친구가 허튼 짓을 할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 그가 정보부의 친우로서 역사에 전면으로 등장하기 전의 행보를 보면 더욱 그렇고.”
“그렇긴 합니다만, 사람은 힘을 쥐면 변한다지 않습니까. 역사상 성군이 폭군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그거야 본성이 드러날 환경이 갖춰지니 그런 거지. 이런 즐거운 자리에서 내가 굳이 그를 변호해 줄 필요는 없고, 가서 더 공부하고 오게. 그거 내려놓고.”
빙그레 웃으면서 술잔을 가리키는 장관. 부관은 그가 짜증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
“자네는 내 부관일세. 내 눈과 귀 둘 중 하나를 책임지는 자리지. 그 자리가 의심이 필요한 자리라는 건 부정하지 않네. 하지만 동시에 넓은 시야가 필요한 자리이기도 하지. 좁은 시야로 의심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상관으로서 응당 더 넓은 길을 가르쳐 줄 의무가 있어. 그러니 얼른 교육자료에서 관련 내용을 탐독하고 오게나.”
“……알겠습니다.”
괜한 말을 한 것 같다는 후회와 함께 부관은 연회장에서 쫓겨났다. 그 등 뒤를 보는 장관도 입맛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저 부관은 과거의 자신이기도 했으니까.
‘나도 한때는 그 친구를 의심하긴 했지.’
인망에 물류에 군사력에 여러 기술에다가 인기까지.
이미 토끼 여러 마리를 잡아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단 상태다. 거기에 제국의 유지에 치명적인 비밀까지 여러 개나 알고 있다.
그런 인물이 야망을 품었다면 진작 그 보따리를 풀어 일을 저질렀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행동들마저 야망을 이루기 위한 인내의 계략이라면, 그건 당해줘야지.’
그 정도로 모두를 속일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일 터. 당해도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으론 궁금하긴 했다.
‘대체 뭐 때문에 모으라는 건지.’
***
진이 AI를 시켜 정보부에 연락해 연회 불참과 함대 집결을 부탁하기 몇 시간 전.
팀 엔터프라이즈의 함선이 스톤나이트의 고향인 어머니 암반 행성의 위에서 워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로치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유전자 주입 시도가 실패할 것을 대비해, 황제에게서 워프 지도 제작 툴을 받았다.
가면서 워프 지도를 그려놔 유사시 워프로 심장부를 치겠단 속셈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금방 워프를 타고 올 수 있었다.
“얼른 강하해.”
[네!]팀이 급히 여기로 온 이유는 갑자기 어머니 암반과의 통신을 담당하던 AI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 때문.
앤젤라는 다급히 다른 AI들과 통신하려 했으나 아무리 접속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진에게 장착된 이후로 일종의 독립서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앤젤라다.
따라서 딱히 전파 방해 요소가 없음에도 접속에 장해를 받는단 건, 다른 AI들이 모두 존재하는 사이버 공간에 큰 문제가 생긴 거라고 봐야 했다.
“파비안, 너는 느껴지는 거 없어?”
“딱히 없습니다. 애초에 어머니 암반께서는 저희들에 대해 지배력 같은 걸 행사하지 않으시니까요. 단순히 여기서 생겨났을 뿐 완전히 독립된 개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팀 엔터프라이즈는 어머니 암반 행성에 온 걸 환영하는 스톤나이트들을 대강 받아주며 얼른 내려갔다.
지하층까지 내려가려 하자 저번 방문과는 달리 언질이 없었기에 병사들이 막아섰다.
“이곳은 스톤나이트의 공용 무덤입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함장님. 저 뒤에, 저번에 우리가 여기 왔을 때 안내한 사람이 있어요.]“거기 병사 분. 저번 방문과 동일한 목적입니다. 사제님들께 연락해 주십시오. 급한 일입니다.”
짧은 통신 이후 문이 열리고 진 일행은 서둘러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예전에 마중 나온 적 있던 사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팀은 심상찮음을 느끼고 푸른 동굴 내부를 급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어머니 암반의 아바타가 있는 방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 마네킹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파비안이 경악하는 가운데, 진은 얼른 문을 열어젖혔다.
“잘, 오셨, 습니다……”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사제들의 잔해가 가득했다. 아직 살아있는 사제들은 누워 있는 어머니 암반을 둘러싼 채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몸에서는 스마터늄의 색깔을 닮은 푸른 안개가 일렁이며 어머니 암반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머니께서, 놈들에게, 당하셨습니다……!”
평소에 어머니 암반이 연락하는 수단인 단말기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여기, 어머니께서, 남기신 겁니다.”
한 사제가 품 넓은 옷 안에서 칩 하나를 넘기고는 그대로 부스러져 흰 가루가 되었다. 쓰러지며 부서진 머리 내부에서 검은 돌조각이 튕겨 나와 바닥을 뒹굴렀다.
“……방해되지 않게 모두 나가자.”
방 밖으로 나온 팀원들은 대체 이게 뭔 일이냐며 당혹스러워 했다. 파비안은 참담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진은 칩을 단말기에 삽입했다. 그러자 녹음된 음성 기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구나 진 테일러. 이걸 들을 때쯤이면 나는 너와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겠지. 너도 지금쯤이면 대충 알겠지만 지금 그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공격을 가하고 있단다.]진이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로치를 이용한다는 회의 내용을 전달받은 이후부터 쭉 말 한 마디 없더니.
수다 떨기 좋아하는 어머니 암반의 성격상 로치가 여러 변화를 보이면 분명 개입이 있을 거 같다니 뭐니 하면서 진의 옆에서 떠들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사실, 나는 승천하지 못한 자들처럼 비물질계에 정신을 두고 있어.]몸체는 물질계에, 정신은 비물질계에 있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 암반이었다.
[원래는 승천하지 못한 동족들과 한 공간에 있었지만 그들이 눈치 채기 전에 벽을 쳤지. 비물질계에서의 장악력은 내가 한 수 위거든.]왜냐면 물질계에서 살다가 승천 실패로 인해 굴러 떨어진 그들과는 달리, 어머니 암반은 처음부터 비물질계에서 정신이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진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어머니 암반의 정보창이 안 띄워졌는지.
‘애초에 존재하는 세계 자체가 달라서였나.’
이후 시간이 흐르며 어머니 암반이 지배하는 비물질계는 인간이 스마터늄으로 AI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사이버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신생종족의 터전이 되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기나긴 평화는 불과 며칠 전에 깨져버렸다.
짧은 한숨에 많은 게 담겨 있었다.
[벌써 사이버 공간 태반이 무너졌어. AI들은 급히 한쪽으로 옮겨놔서 당장은 인류에게 지장이 가진 않을 테지만, 이대로라면 좋진 않겠지.]어머니 암반의 음성이 비장해졌다.
[저들이 사이버 공간을 완전히 무너뜨리면 AI에 크게 의존하던 인류 문명도 큰 타격을 입을 테고, 나는 그 꼴 못 본다.]어떻게 보면 인류의 발전의 절반 정도는 어머니 암반에 의해 이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류가 가장 첫 접촉을 한 외계 종족은 스톤나이트였다. 그들의 온순함과 공리적인 소소한 기술 공유로 인해, 심우주로 갓 걸음마를 떼며 적대 외계인을 만날까 노심초사하던 인류는 안심하고 진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스마터늄으로 인한 AI 기술은, 크게 뻗어나간 인류 문명이 조각나지 않고 지속적인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어머니 암반이 인류에 대해 애정을 가졌다기보다는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이룩된 세력 구도가 도로 붕괴되는 걸 우려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비물질계에서의 싸움은 내가 좀 더 유리하겠지만 수적 차이는 무시할 수 없어. 그래서 아마 나는 패배 내지는 치명상을 입을 지도 몰라. 하지만 만만치 않은 피해는 입힐 자신이 있단다.]어머니 암반은 제 몸을, 아니 정신을 바쳐 시간을 벌어주겠노라 했다.
[그렇게 되면 물질계든 비물질계든 수작을 부릴 여유가 없어서 그들이 꾸미는 계략도 잠시 미뤄질 거야.]짧은 숨소리 다음에 미안한 기색이 첨가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말을 못해주어 미안하구나. 한창 로치 상대하느라 바쁜데 추가적인 걱정거리를 더해주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워낙 경황도 없었고.]말 많으신 어머니 암반은 위급한 상황이라면서도 저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달려드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이제 가봐야겠구나. 마지막으로 조언하자면, ‘특별한 존재인’ 네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구나. 내가 마련한 시간을 부디 현명하게 써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