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Epilogue
타계의 불문율이 있다. 보따리장수는 플레이어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
환생의 기회가 물 건너갈까 두려워 그 누구도 감히 금기를 깰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별종도 그런 별종이 없어.”
“…….”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공간.
끝없이 펼쳐진 백색의 고원에 보따리장수가 서 있다. 처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규율을 어겼으니, 너의 영혼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알고는 있겠지?”
“후회는 없습니다.”
환생의 문턱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보따리장수는 플레이어를 위해 희생을 감내했다.
“시간을 돌이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마음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래도 네 덕에 큰 재미를 봤으니, 절대자로서 아량 정도는 베풀어 줄까.”
보따리장수의 콧등에 잔주름이 잡혔다.
절대자의 아량이라…… 우스운 말이었다.
플레이어의 시련이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에 깨우쳤기 때문이다.
망가진 체스 말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간혹 버그가 발견되면 잠시 흥미를 느낄 뿐이었다.
“좋아, 너도 귀환시켜 주지.”
“다시 그 짓을 반복하라고요?”
다시 한번 체스 말이 되어 유희에 어울려 달라는 건가.
보따리장수는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렸다.
“싫습니다. 차라리 소멸시켜 주세요.”
“아니.”
절대자의 손끝이 보따리장수의 이마에 맞닿았다.
툭.
“세상의 관심과 애정은 패자에게 과분하지. 너는 그림자의 삶을 살게 될 거야.”
“그림자의 삶…….”
보따리장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절망하리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었다.
“바라던 바예요.”
“역시 재미있다니까!”
어둠 속에서 빛을 지켜보는 삶. 보따리장수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보따리장수로 살았던 기억은 어떻게 되나요?”
“몰라서 물어?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승자의 특혜야.”
치사하게시리. 사람 기억을 가지고 장난질이었다.
보따리장수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기왕이면 그 아이의 그림자가 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 * *
“진짜 X 같은 꿈이었어.”
“로또 사라. 혹시 몰라. 조상님의 계시일지.”
조상님의 계시는 무슨. 승주는 콜라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간밤의 꿈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꿈속에서 자신은 무려 사이비 신도였다.
해괴망측한 팻말을 들고 포교 활동을 펼쳤지만,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로또는 기대도 안 해. 재수 옴 붙어서 굿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근데 짐은 왜 챙기냐? 벌써 일어나게?”
승주는 반쪽짜리 햄버거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현재 시각 오후 두 시. 설렁설렁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 시간이 딱 들어맞는다.
“나 취직했어. 김치 공장.”
“뜬금없이 웬 취직이야? 너 복학은 어쩌고.”
“복학도 돈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나 먼저 간다.”
이십 대 초반. 승주는 한 연예 기획사 담당자로부터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
장학금 따박따박 받아 가며 잘 다니던 대학까지 휴학하고서 연습에 몰두했다.
데뷔 조가 엎어지기를 수차례. 승주는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획사 퇴사 후로는 자포자기하는 심경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다녀오니 이십 대 후반. 그는 이제라도 자신의 인생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빡세게 1년만 벌어서 복학하자.’
일은 고되어도 시급을 생각하면 이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함께 일하는 여사님들도 아들처럼 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승주가 고개를 들어 옥외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해외에서 한창 인기몰이 중인 보이 그룹이 얼굴을 비쳤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
승주와 동고동락했던 연습생이 넷. 레이블을 옮긴 뒤로는 무탈하게 데뷔에 성공했다.
국내 반응은 미미하지만, 서양권에서 MOC의 후배 그룹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미련도 후회도 없었으나 이따금 승주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을 대입해 보곤 했다.
상념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김치 공장 통근 버스가 도착했다.
“승주, 이번 주부터 야간 조 근무구나?”
“네에, 새벽 조 근무하다가 밤낮 바꾸려니까 힘드네요. 억지로 눈 붙였더니 꿈자리가 뒤숭숭했어요.”
승주는 하품을 쩍 하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통근 버스는 김치 공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번득이는 옥외 전광판 불빛은 점차 멀어져 갔다.
* * *
근무 시간대는 바뀌었지만, 승주는 여전히 총각김치 파트에 배정됐다.
김치 공장 사장이라는 작자가 ‘너는 총각이니까 총각김치 파트’라고 외친 게 화근이었다.
‘X나 노잼. 사형.’
듣기로는 김치 공장 말고도 다른 사업체를 하나 더 운영하고 있다는데.
그 센스로는 어디서든 욕을 얻어먹으리라 확신했다.
“뭐 인마? 그날 본가에 내려간다고? 어머니 생신? 그럼 애들 스케줄은 누가 동행하는데!”
김치 공장 입구.
닷새 만에 나타난 김 사장이 휴대 전화를 붙들고 역정을 냈다.
“온건이 대신 가면 안 되냐고? 너 지금 나하고 말장난하냐?”
귀가 아프다. 승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총각무를 버무렸다.
바로 그때, 김 사장이 승주의 손목을 잡아챘다.
“총각김치, 운전면허 있어?”
“장롱 면허인데요.”
“따라와.”
승주는 영문도 모른 채로 김 사장을 뒤쫓았다.
작업복을 고이 벗어 두고서 향한 곳은 강변역 인근 사무실이었다.
“총각김치, 너는 오늘부터 여기서 일해라.”
“저는 김치 공장에 취직했는데요.”
“부서 이동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
총각김치 파트에서 배추김치 파트로 이동하면 또 몰라.
김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다 무너져 가는 사무실이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나락.”
큰일이다. 도통 업종이 짐작 가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승주의 생존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총각김치, 어디 가!”
“따라오지 마세요!”
승주는 정신없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행인과 맞부딪치고 말았다.
“아, 대갈빡…….”
“괜찮으세요?”
행인이 조심스레 승주의 안부를 살폈다.
귓가에 스며드는 중저음에 승주는 조급히 고개를 들었다.
“세게 부딪친 것 같은데…….”
“…….”
바람결을 따라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 티브이에서나 나올 법한 수려한 외모였다.
승주는 선우의 눈 밑에 찍힌 눈물점을 멀거니 응시했다.
“선우야, 그 자식 꽉 잡아! 너희 새 매니저니까!”
“새 매니저요? 매니저 형 또 튀었어요?”
승주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선우가 슬그머니 손에 힘을 풀었다.
이윽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붙잡혀서 오신 거죠? 대표님께는 제가 잘 설명해 드릴 테니까, 어서 가세요.”
“왜…….”
자신을 놓아주는가.
승주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의식이 있는 채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할게요. 매니저.”
“어? 진심이세요?”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후회막급했으나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희 사무실 진짜 별로거든요.”
“선우 너, 쓸데없는 말은 왜 하고 있어! 나락은 돈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참 직장이야!”
승주의 이직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업무는 블랙시즌의 매니저 겸 마케팅 홍보 담당자 겸 사무실 전화 응대 담당자 겸…….
네 번째 업무부터는 떠오르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주 업무는 블랙시즌의 매니저 일이었다.
사무실에 배우 하나가 들어오는 바람에 일손이 부족하다나 뭐라나.
“새 노예도 들였겠다, 회식이나 하러 가지.”
“대표님, 대놓고 노예라고 부르는 건 좀…….”
지금 노예라고 불린 건가? 승주는 듣는 귀를 의심했다.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서도 승주는 선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들 모였나?”
“네에.”
입사 기념 회식은 사무실 인근 삼겹살집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블랙시즌 멤버들과 두 매니저. 느지막이 나타난 온건까지 합류했다.
“오랜만에 건배사 한번 외칠까?”
“제발 그러지 마세요.”
“김 대표가 미래다!”
“쓰읍…….”
나락 식구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 와중에도 승주는 묵묵히 삼겹살을 구웠다.
도겸이 입을 열었다.
“승주 형은 올해로 몇 살이세요?”
“스물여덟이요.”
“와, 저하고 몇 살 차이 안 나는 줄 알았어요.”
잠자코 경청하던 하준이 거들었다.
“승주 형, 매니저 하기에는 너무 잘생겼어요!”
“별로…… 평범한 편인데요.”
“말 편히 하세요!”
승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승주 형.”
“…….”
삼겹살을 뒤집던 승주의 손이 멈칫했다.
턱을 괸 선우가 지그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아.”
승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건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작업 멘트야 뭐야. 솜털 곤두섰어. 하하.”
“참나, 이제는 하다 하다 매니저까지 꼬시냐?”
“내버려 둬. 습관적 플러팅이야. 카사노바 습성은 쉽게 못 고친대.”
“저는 이미 포기했어요. 입을 막아도 얼굴로 꼬시고 다니더라고요. 옆 라인 할머니도 넘어갔어요.”
멤버들이 몰아붙이자, 선우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승주는 열렬히 반론하는 선우를 두고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탁, 탁.
라이터를 켜고 담배 끝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뒤 훅하고 내뱉었다.
“멤버들이 장난이 좀 짓궂죠? 혹시 기분 상하셨어요?”
“…….”
승주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옮겨갔다. 바로 뒤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승주는 겨우 한 모금 들이마신 장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짓눌렀다.
“본 적 없어.”
“그럼 제가 착각했나 봐요.”
선우는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쓱쓱 문질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근데 내가 아는 것 같아. 그쪽을.”
지금처럼 얼굴을 마주하는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우는 소리 없이 눈꼬리를 휘어 접었다.
* * *
연말 특집 심야 음악 방송 《고요한의 크레파스》에 블랙시즌이 출연하게 됐다.
덕분에 승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X벌, 누가 보면 내가 방송 출연하는 줄 알겠네.’
승주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더운 숨을 토해 냈다.
연예인 매니저도 할 일이 못 되구나. 노동 강도와 비교하면 임금이 지나치게 짰다.
“승주 형.”
“…….”
고개를 돌리니, 무대 의상을 갖춰 입은 선우가 토스트를 들고 서 있었다.
승주는 힘없이 토스트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일은 좀 어때요?”
“정신없는데 나쁘지는 않아. 뒤에서 지켜보는 게 적성에 맞거든.”
주연보다는 조연 미만을 희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매니저 일은 천직이라 할 수 있었다.
“시시하지?”
“그럴 리가요. 지켜보는 분들이 있어서 저희가 빛날 수 있는 거예요.”
승주는 눈을 크게 떴다.
선우는 기지개를 쭉 켜며 말을 이었다.
“그 어떤 아름다운 별이라도 누군가 발견해 주지 않으면 그건 그냥 돌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런가.”
괜스레 멋쩍어져서 승주는 토스트 모서리를 베어 물었다.
공복에 먹은 토스트는 아주 맛이 좋았다.
“식어도 맛있네.”
“따로 빼 뒀어요. 전에 토스트 좋아하던 게 생각나서.”
언제 같이 토스트를 먹은 적이 있었던가.
승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우는 검지를 세워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들겼다.
“제가 기억하니까요.”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선우는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스태프의 신호에 맞춰 블랙시즌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소년들은 관객의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승주의 눈꺼풀이 얼어붙었다. 선우의 말대로였다. 시선 속 소년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둘, 셋. I’ll be your seasons! 안녕하세요. 블랙시즌입니다.”
승주의 심장이 거세게 일렁였다. 앞으로 블랙시즌이 그려 나갈 우주는 또 얼마나 황홀할까.
그 반짝임을 눈으로 좇고 싶었다. 그 끝이 어디든지 쫓고 싶었다.
망돌의 수납멤버가 회귀했다 에필로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