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50
신필천하(神筆天下) 150화
어느 순간 곽연이 크게 기합성을 터뜨리며 검을 내려치자, 진양은 수호필을 들어 올려 막다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뒤로 붕 날아가고 말았다.
그 틈에 곽연이 다시 유설에게 쇄도했다.
유설은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순간 상대의 동작이 커진 틈을 타서 잽싸게 검을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이는 북명패검의 절초 중 하나였다.
군더더기없는 그녀의 검공은 정확히 곽연의 심장을 꿰뚫는 데 성공했다.
심장을 관통한 그녀의 검이 곽연의 등 뒤로 삐죽 솟아 있었다.
검공을 펼치긴 했으나, 유설 자신도 이렇게 간단히 통할 줄은 몰랐기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검을 뽑아내며 주춤 물러나자, 곽연은 가슴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가 피눈물이 맺힌 두 눈으로 유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을 가지지 못할 바에 당신이 내 목숨을 가져가길…… 바랐소.”
그제야 유설은 곽연이 어째서 무모하게 공격해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제대로 실력을 보였더라면 이처럼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리라.
유설은 앞으로 고꾸라진 곽연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당신은……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다만 집착했을 뿐이죠. 이제 집착에서 벗어나 편해지시길 바랄게요.”
그녀는 걸음을 돌려 진양에게 다가갔다.
“무슨 남자가 그렇게 약골이에요?”
“약, 약골이라니…….”
“그래서야 절 제대로 지킬 수 있겠어요?”
“난, 난 그가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어째서요?”
“그,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호오. 사랑하는 여인이 당하는 순간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침착함. 절 정말 사랑하긴 하나요?”
“누이!”
진양이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쳤다.
순간 유설이 움찔 떨며 진양을 보더니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미안해요. 농담이었……!”
순간 진양이 유설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유설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은 채 말했다.
“다행이오.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오.”
유설도 곧 미소 지으며 진양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같이 참…….”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구화산을 오르며 유설이 진양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가 저한테 살기를 품지 않았었나요?”
“사실…… 그땐 몰랐소, 경황이 없어서. 나중에 그가 죽은 뒤에 되새겨 보니 살기를 품지 않았더군.”
“뭐라고요?”
유설이 곱게 그를 흘겨보자, 진양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누이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에 처했는데, 상대가 살기를 품는지 안 품는지 판별할 겨를이나 있었겠소?”
“이 사기꾼!”
“하하하!”
“훗. 호호호.”
두 사람이 총단에 들어서며 활짝 웃었다.
* * *
일 년 후.
영락제가 즉위한 지 이 년째가 됐다.
삼보태감(情感交流) 정화가 신필문을 찾아왔다.
또로로롱.
찻잔에 맑은 찻물이 채워졌다.
진양은 정화에게 차를 권했다.
“드시지요.”
정화가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가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 맛이 좋구려.”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태감 나리께서 겨우 차를 마시러 이런 누추한 곳을 찾지는 않으셨겠지요?”
“하하! 누추한 곳이라니. 양 장문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미 천 명도 넘는데, 어찌 신필문이 누추한 곳이 될 수 있단 말이오?”
“아무렴 황궁만 하겠습니까?”
진양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정화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지라 씁쓸히 웃었다.
“내 솔직히 찾아온 이유를 말하리다.”
“예, 말씀하시지요.”
“작년에 황제 폐하께서는 산재한 모든 책들을 분류, 수집해서 수시로 어람할 수 있는 대형 책을 편찬하라고 명하셨소. 그건 알고 계시겠지요?”
“문헌대성(文獻大成)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바로 그렇소. 한데 폐하께서는 책을 어람하시는 와중에 빠진 내용이 많다고 여기셨소. 해서 폐하께서는 다시 중수(重修)하도록 명하셨소.”
정화는 여기서 말을 끊고 진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차를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이쯤 되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 양 장문께서도 아실 거요.”
“소생이 불초하여 잘 모르겠군요.”
“양 장문, 그러지 마시고 내가 부탁을 드릴 테니 힘을 빌려주시오. 신필문의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한 시점이오.”
“이곳에 있는 제자들은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서 저처럼 아둔한 사람에게마저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유능한 인재는 도성에 많이 모여 있지요.”
진양이 거듭 거절의 뜻을 우회적으로 나타내자 정화의 표정이 싸늘히 변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말했다.
“내 듣기로 양 장문께서는 은혜를 중히 여기고, 원한은 가벼이 여긴다고 하더이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요?”
“잊으셨소? 작년 호광 지역의 형산 근처에서 만났을 때 말이오.”
진양은 문득 일 년 전, 객점에서 정화와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정화는 건문제를 보고도 모른 척하지 않았던가.
정화가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양 장문에게 아마 좋은 충고를 해주었을 거요. 그리고 그 충고의 대가를 언젠간 반드시 요구한다고 했지. 기억나시오?”
진양은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진양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이백.”
“……지원을 해드리지요.”
“고맙소. 신필문의 인재들이 이대로 썩는 것은 분명 아까운 일일 것이오. 또 하나 부탁이 있소.”
“무엇입니까?”
“양 장문께서 이 일을 총괄 책임져 주길 바라겠소.”
“그건 받아들이기가 힘들군요.”
“양 장문, 정녕 은혜를 저 버릴 것이오? 만약 내가 입을 열어 황제 폐하께 아뢰기라도 한다면…….”
“정말 그러시겠소?”
진양이 수호필을 가만히 말아 쥐며 중압감이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정화는 비록 환관이었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장군이었다.
하지만 진양이 언뜻 살기마저 피워 올리니, 아무리 배짱이 좋은 그일지라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나 역시 그러고 싶지 않소. 물론 양 장문께서 내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요. 폐하께서는 이제 나를 해외로 보내실 것이오. 이유를 아시겠소?”
진양은 차분히 정화를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 작업에 참여는 하겠습니다만, 제 이름은 역사에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날 소리였다.
진양은 공공연히 지금의 영락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나 정화는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오.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소, 양 장문.”
정화는 차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
며칠 뒤 진양은 제자 이백여 명을 이끌고 도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편집을 주관하는 문연각(文淵閣)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이 일에 가담한 사람은 신필문의 제자들을 포함해 무려 이천여 명이나 됐다. 특히 신필문의 제자들은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일을 도맡았다.
진양은 문연각에서 소장한 송나라, 원나라 때 어부(御府)의 장서들을 토대로 하고, 전국 각지에 사람들을 내보내 경서, 사서, 제자백가의 책들과 그 주해집, 그리고 불경 도경 등을 두루 수집해 집대성했다.
그리고 영락 5년.
장작 사 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원고가 완성됐다.
책은 본문이 모두 이만 이천팔백칠십칠 권이었고, 범례와 목록이 육십 권, 장정한 후의 책은 무려 일만 일천구십오 책이나 됐다.
황제는 이것의 이름을 ‘영락대전(永樂大典)’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친히 책의 서문까지 썼다.
진양은 그의 바람대로 자신의 이름을 일절 역사에 남기지 않았다.
또한 신필문의 이름도 남기지 않았다.
하나 그가 참여한 ‘영락대전’은 고대 문화 전적들을 대량 보존한 소중한 보고가 됐다.
終. 신필대협(神筆大俠)
정월초하루 아침.
백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인이 고요한 방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선풍도골의 풍채를 지닌 노인은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으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성스럽게 감돌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굵고 긴 붓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는데, 어둑한 실내에서도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호필이었다.
수십 년 전, 양진양이 건문제로부터 선물받은 붓.
그렇다.
백염이 성성한 노인은 바로 수십 년 전, 이곳 대별산에 신필문을 세운 신필대협 양진양이었다.
잠시 후 하얀 빛이 스며들면서 전방의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온 중년의 사내가 양진양을 향해 공손히 아뢰었다.
“아버지, 준비가 끝났습니다.”
양진양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가에 잡힌 자잘한 주름이 지나온 세월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수호필을 들었다.
“가자꾸나.”
“예.”
중년의 사내가 먼저 걸어나가자, 진양이 수호필을 들고 뒤따랐다.
그가 새하얀 빛으로 들어가자, 곧 확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난간 아래 가득 모인 삼천여 명의 제자가 보였다.
그들은 진양을 보자마자 일제히 큰절을 올리며 소리쳤다.
“사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삼천여 명의 제자가 한목소리로 외치자, 그 소리가 하늘에 쩌렁쩌렁 울렸다.
진양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난간 옆 온화한 표정의 나이 많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 역시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는데, 진양처럼 두 눈만큼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유설이었다.
진양과 유설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듯한 눈빛을 주고받고는 몸을 돌렸다.
진양이 나온 문이 닫히고 나자, 사람들이 그 위로 크고 하얀 천을 걸었다.
마침 머리가 희끗한 노인 한 명이 진양 곁으로 다가와 먹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벼루를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사부님.”
노인이 공손히 말하자, 진양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운생아.”
그러자 다시 중년의 사내가 다가와서 물었다.
“아버지, 올해의 글자는 무엇입니까?”
“허허허, 말보다 글이 정확한 법.”
진양은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수호필을 먹에 담갔다가 들었다.
이윽고 그가 커다란 천에 일필휘지로 글자를 적어나갔다.
하얀 천을 가득 메워가는 글자는 그야말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마치 필획 하나하나가 살아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듯했다. 그렇게 허공으로 떠오른 글자는 저마다의 가슴 속으로 곧장 스며들었다.
진양의 필체를 우러러보는 제자들은 마음이 먹먹하게 젖어 들어갔다.
글씨를 모두 적은 진양은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았다.
神筆天下
신필천하.
단 네 글자가 난간 아래 모여 있는 수천 명의 제자들 가슴을 강렬하게 때렸다.
진양이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담담하고도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마치 그 목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모든 제자들의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글자에 뜻과 정을 담아내면 신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신필의 경지에 이른다면 천하가 태평하리라. 너희들은 신필의 경지를 바라고 열과 성을 다하라. 글자는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니, 덕과 의를 쌓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신필의 경지에 이르는 지름길이니라.”
진양의 말이 끝나자 수천 명의 제자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신필문에서 솟아오른 우렁찬 목소리가 천하에 가득 울렸다.
천순(天順) 5년.
신필문은 강호에서 가장 거대하고 명망있는 문파로 자리 잡았으니, 세상 사람들 중 신필대협 양진양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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