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71)
벽태산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호무련의 총관은 사례의 표시로 무한까지 이동하는 모든 경비를 책임지기로 했다.
이미 하오문에서 배를 구했지만, 그 비용까지 모두 정산해서 전해주었다.
그리고 현재 호무련 차원에서 금벽상단과 큰 거래 몇 가지를 진행 중이라는 얘기도 해 주었다.
원한다면 그 거래의 책임자로 벽태산을 요청할 수도 있으니 언제든 말만 하라는 생색도 내고 말이다.
물론 벽태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다들 배에 탔다.
그리고 무한을 향해 배가 출발했다.
벽태산은 선수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이라······.’
그건 추억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어찌 보면 천마신교를 제외하면 벽태산의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곳이었으니까.
끝
의창에서 무한까지 돌아가는 길은 지극히 평온했다.
올 때와 달리 배는 고작 한 척뿐이었고, 별다른 깃발을 달지도 않았지만, 수적이 달려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중간에 멈출 때마다 천추신의와 화옥이 주변 정보를 싹 모아왔는데, 그걸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최근 수적의 출몰 자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벽태산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눈을 번득였다.
“냄새가 나는군.”
“그렇죠? 누군가가 수적을 이용해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요.”
벽태산이 말한 냄새는 음모나 수작의 냄새가 아니라 영약의 냄새였지만, 굳이 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화옥이 눈을 반짝이며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녀는 벽태산의 시비가 된 이후부터 눈에 띌 정도로 안정을 되찾아 이제는 웬만해선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런 화옥을 보며 벽태산이 물었다.
“그런데 넌 나에게서 뭘 본 거지?”
“예?”
“처음에는 확실히 본 줄 알았는데, 지내면서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화옥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전 그 사람의 본질을 짧은 장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짧은 장면이라······.”
벽태산은 흥미로웠다. 사람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능력도 그렇고, 그걸 짧은 장면을 통해 본다는 것도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평범합니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싸우거나, 피를 흘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그걸로 본질을 알 수는 있느냐?”
“네. 그걸 보면서 충분히 느낌이 옵니다.”
벽태산이 여전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화옥을 쳐다봤다.
“공자님에게서는······ 시커먼 괴물이 세상을 먹어치우는 장면을 봤습니다.”
“세상을 먹어치운다고?”
“정확히는 세상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을 먹어치우는 장면입니다.”
벽태산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은가. 자신이 살아있는 것들의 혼백을 뽑아서 먹어치우는 건 맞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보이느냐?”
“처음 만났을 때 가장 강한 느낌이 옵니다. 그 뒤에는 장면이 너무 흐릿해서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 아무튼 그게 그렇게 무서웠나?”
화옥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좀 착각을 했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걸 본 경험이 있어서······.”
“비슷한 걸 봤다고?”
“예. 제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라서 좀 착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화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누구와 착각을 했느냐?”
“아주 대단한 분이었지요. 물론 그분이 누구인지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지만요.”
화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천마라 불리시던 분이었습니다.”
벽태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옥을 쳐다봤다.
사실 예상은 했다. 화옥이 과거에 다시 태어나기 전의 자신을 봤을 거라고 말이다.
한데 자신의 기억에는 없었다.
“그게 언제쯤이지?”
“제가 여섯 살 때였으니까······ 이십삼 년쯤 되었군요.”
벽태산은 기억을 더듬었다.
다시 태어난 이후, 과거의 기억은 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사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생생했다.
필요할 때마다 그렇게 기억을 뽑아내서 써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호한 시기를 가지고 기억을 더듬는 건 시간이 좀 걸렸다.
또한 상황이나 글귀, 무공 같은 것은 명확히 기억나는데, 정작 그걸 구성하는 사람 자체에 대한 기억은 좀 모호했다.
어쩌면 그 모호함이 이렇게 되살아난 것에 대한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튼 한동안 기억을 더듬으니 비로소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물론 자신을 멀리서나마 지켜봤을 어린 소녀에 대한 기억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떠올랐을 뿐이다.
“광동사괴. 이제야 기억이 좀 나는군.”
당시의 상황은 광동사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어쩐지 별호가 낯설지 않더라니.”
화옥이 놀란 눈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광동사괴와 연이 있으십니까?”
벽태산이 피식 웃었다.
“연은 무슨. 그저 지나가다 한 번 본 거지.”
“그렇다면 그들이 잃어버린 이십여 년 기억 중의 단면을 공자님께서 보신 거로군요.”
벽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동사괴와의 만남은 정말로 이십여 년 전이었다.
당시 광동사괴는 천마신교 소속 여 무인을 능욕하고 죽였다.
물론 천마신교 소속인 줄 모르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어쨌든 천마신교를 건드린 셈이었다.
당시 그 일에 천마가 직접 나섰다.
마침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외부에 나가 있었기도 했고, 광동사괴가 저지른 일이 천마의 마음에 정말 안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동사괴가 비록 제법 강한 고수 축에 들긴 하지만, 천마신교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천마와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그 과정에서 마을 하나의 협조를 받았는데, 화옥이 아마 그 마을에 있던 꼬마 아이였던 모양이었다.
당시 천마는 그들의 양물을 짓이기고, 그 고통을 오랫동안 느끼게 해준 다음 머리를 박살 내서 죽여 버렸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단 말이지? 더 젊어진 몸으로.’
벽태산이 묘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화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놈이 다른 말은 안 하더냐? 생각해보니 그놈이 대형 어쩌고 하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화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이요? 그런 건 없었습니다. 혹시 몰라 다른 연결점이 있는지 다방면으로 확인했습니다만 그들이 기억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거 이상하구나. 허튼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화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꼭 누군가가 개입해서 광동사괴의 머릿속에 있던 정보를 왜곡하거나 삭제한 듯하지 않은가.
“일단 그 문제는 차츰 고민해 보도록 하지. 참, 이번에 합류한 의원들은 어때? 뭐 좀 보이는 게 있었나?”
“평범했습니다. 약과 검이 보이더군요.”
“약과 검?”
“어릴 때부터 약과 검을 두고 살아온 모양입니다. 천약방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던 장면입니다.”
“천약방이라······ 그것들은 무림맹 소속이 아닐 텐데?”
“변화가 생겼는지도 모르지요. 그것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재미있군. 하오문에서 제법 잘 먹힐 만한 능력이야. 꼭 본질만 보는 것 같지도 않고.”
화옥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벽태산 앞에 있으면 그의 말을 거스르기가 정말 힘들었으니까.
화옥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벽태산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의 시비들은 좀 특이했습니다.”
“누구? 설마 셋 다?”
화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 세 명에게서 똑같은 걸 봤습니다.”
“똑같은 것?”
화옥이 가만히 벽태산을 바라봤다.
“공자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
“예. 셋 모두 똑같았습니다.”
벽태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금벽상단에 남아 있는 여섯 명의 시비들도 전부 같다면, 자신이 그들에게 뭔가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리라.
“재미있군.”
“그리고 연하린 소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연하린도?”
점점 더 확실해진다. 벽태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화옥을 쳐다봤다.
한데 화옥이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왜? 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수적들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화옥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천추신의와 일침괴에게서 본 장면도 벽태산이 웃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뭐,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고 선실에서 나갔다.
화옥은 속으로 안도하며 이 근방에서 하오문에 연락할 방법이 뭐가 있을지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 * *
천추신의와 일침괴는 무림맹에서 나왔다는 두 의원과 함께 배의 바닥에 마련된 선실에서 시체를 보고 있었다.
일단 무림맹에서 나왔다는 두 의원의 실력을 좀 확인하고 싶어서 두 사람에게 먼저 살펴보라고 했다.
시체는 총 세 구였는데, 하나는 광동사괴 중 한 명이었고, 나머지 둘은 반강시의 시체였다.
반강시의 시체도 하나는 그냥 반강시였고, 다른 하나는 무공을 익힌 반강시였다.
종류별로 하나씩 마련해 놓은 것이다.
두 의원이 꼼꼼하게 시체를 살피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추신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침괴에게 말했다.
“살피는 모양새가 제법인 것 같지 않소?”
“네 눈이 너무 낮아져서 그런 거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의원을 너무 오랫동안 못 봤어. 저 정도면 제대로 공부한 평범한 의원이다.”
“그런가? 뭐, 일단 좀 더 두고 봅시다.”
그렇게 한동안 시체를 살피던 두 의원이 비로소 손과 눈을 떼고 물러났다.
“이 셋이 전부 반강시라는 말입니까?”
의원 중 한 명이 묻자, 천추신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뭘 봤는지나 얘기해. 지금 우리가 너희랑 같이 뭘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중이다.”
두 의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신의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우리도 어디 가서 괄시 받을 실력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걸 좀 확인해 보자니까?”
“우리는 죽은 자의 몸을 본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천추신의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말을 뭐 그리 길게 해? 그냥 모르겠다고 하면 끝날 것을.”
두 의원이 발끈했다. 하지만 소리를 높이거나 눈에 띌 정도로 인상을 쓰지는 않았다.
천추신의는 일침괴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형님 말이 맞는 것 같소. 의창에 있는 동안 내 안목이 썩은 것 같소. 이래서야 우리가 뭘 알려줘도 그걸 제대로 전달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우리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천추신의가 또 비웃음을 날리려고 할 때, 벽태산이 내려왔다.
“이 음침한 데서 뭐 하는 거야?”
“아, 공자님 오셨습니까. 뭐······ 실력 확인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쓸 만해?”
“영 못쓰겠습니다.”
벽태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의원을 쳐다봤다.
“천약방에서 나온 거 아니었어?”
두 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걸 어떻게······!”
“오, 진짜였어?”
벽태산은 화옥의 능력이 생각보다 재미도 있고 쓸모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한 두 의원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넘겨짚은 것뿐인데 자신들이 넘어갔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항의를 표할 틈도 없었다. 천추신의가 바로 나선 것이다.
“무림맹이라고 하지 않았나? 천약방이 무림맹에 들어간 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그럼 호무련 총관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그 거짓말을 너희는 그냥 방관했고?”
천추신의의 말에 두 의원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이번 일에 한해 무림맹과 손을 잡기로 했을 뿐입니다.”
“이번 일?”
“반강시 말입니다. 거기에 독마가 엮여 있다고 해서 저희 천약방이 나섰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천약방이랑 독마가 아주 앙숙이었지?”
“앙숙이라는 말로는 모자라지. 원수지, 원수.”
옆에서 일침괴가 거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벽태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야, 천약방이랑 독마 사이가 안 좋았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뭐······ 이런저런 일이 많지만, 시작은 독마가 자기가 천약방보다 위라는 걸 증명하겠답시고 천약방 근처에 독을 풀어버린 일이죠.”
“그것도 진짜 곱게 미친놈은 아니야.”
“독마 아닙니까.”
천추신의가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하지만 웃는 건 잠깐이었고, 금세 표정을 지운 다음 두 의원을 노려봤다.
“시작이야 그렇게 하는 거고······ 결국 이러다보면 무림맹 밑으로 들어가는 게 수순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두 의원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천약방이 무림맹 산하로 들어갈 일이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천추신의는 벽태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데 공자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지······ 혹시 위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벽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슬슬 주변을 돌아보려고.”
“이 주변을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