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80)
“혹시 독립하려고 그러는 게냐?”
독립이라는 말에 벽태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아직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지내는 데 별 불편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얘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그래도 나쁠 건 없을 듯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하오문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니 장원을 유지할 사람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마침 적당한 장원도 하나 있으니······.’
무한에는 천마신교의 안가가 있다. 예전 단영의 혼백을 뽑을 때 써먹고 계속 버려두고 있었는데, 거기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지, 천마신교의 안가는 누군가 임무를 위해 쓸 수도 있으니 거길 쓰는 건 좀 그렇지.’
천마신교를 감싼 현천진이 사라질 때까지는 그럴 일도 없을 것 같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가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그러니 임무를 수행할 귀여운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거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
‘돈도 많은데 하나 지으면 되지.’
벽태수는 생각에 잠긴 동생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예전 걸음마를 막 시작하는 모습에, 너무나 기쁘고 신기해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지켜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독립을 생각하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이 실감났다.
벽태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점점 애틋해졌다.
* * *
서도군은 극도의 긴장감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천천히 걸었다.
서두르면 안 된다. 그리고 속을 드러내도 안 된다. 여긴 복마전이다. 아차하는 순간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긴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바닥이 끈적하게 발바닥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공기도 달라졌다.
거기 담겨 흐르는 기운도 바뀌었다.
간신히 가라앉힌 긴장감이 다시 끝도 모르게 높아졌다.
지독한 피 냄새가 확 올라왔다.
서도군의 걸음이 더 느려졌다.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가니 속도가 날 리 없었다.
이내 복도가 끝났다.
복도 끝에는 넓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에는 사방이 커다란 진열장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진열장 안에는 새까만 호리병이 쫙 놓여 있었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 기괴함이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서도군은 사내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사내가 서도군을 힐끗 쳐다보더니 진열장 중 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도군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서도군은 얼른 사내 옆으로 달려갔다.
“이것들 보이지?”
서도군은 사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검은 호리병을 확인했다.
그 중 세 개의 호리병만 색깔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광혈삼마를 담아뒀던 그릇이다.”
사내가 그 옆에 있는 네 개의 호리병을 손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광동사괴는 이렇게 돌아왔는데······.”
사내의 시선이 서도군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사이하게 빛났다.
“광혈삼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서도군은 억지로 힘을 내서 입을 열었다.
“하면 아직 광혈삼마가 어딘가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내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죽었다. 색이 변했잖아.”
색이 하얗게 변한 것이 혼백의 소멸을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몸도 어렵게 구했는데 말이야······.”
“하면······ 광동사괴의 몸을 다시 찾아볼까요? 그들을 통해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다시 처음 혼백을 여기로 잡았을 때의 상태로 돌아갈 테니까.”
사내가 서도군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서도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최대한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니 쓸 만한 몸을 찾아라. 강한 혼백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몸을 말이야.”
서도군은 속으로 안도하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순간, 사내의 눈에서 핏빛 광망이 일어났다. 그 빛은 서도군의 몸을 칭칭 휘감더니 꽉 조였다.
“크윽!”
서도군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임무는 임무고 날 속이려 한 벌은 받아야지?”
서도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다 알고 있었구나!’
서도군은 방안을 꽉 채운 핏빛 광망이 모조리 자신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비명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사내는 무심한 눈으로 서도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끝
벽태수의 부인인 채미령은 최근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있었다.
당연히 벽태산 때문이었다.
벽태산이 호무련으로 갈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 뒤가 더 문제였다.
가서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건지, 갑자기 호무련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입이 쩍 벌어지는 제안을 쏟아내는데, 금벽상단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호무련과 거래를 해서 큰돈을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금벽상단 정도면 굳이 호무련과 거래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무련과 거래를 하면, 부가적인 효과를 얻게 된다.
일단 다양하면서도 강력한 인맥이 쌓인다.
호무련은 호북의 유명한 무가가 모인 조직이다. 당연히 각 무가와의 연결점이 될 수 있다.
또한 호무련과 중요한 거래를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보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아무나 함부로 금벽상단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금벽상단을 건드릴 때면 언제나 뒤에 있을지 모를 호무련을 고려해야 하니까.
아무튼 그런 상황이 이어지니 채미령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한데 거기에 벽태산이 돌아오자마자 그쪽에 줄을 대려고 움직이는 자들이 있으니 더 짜증이 났다.
채미령이 그렇게 분을 삭이고 있을 때, 벽천일이 찾아왔다.
“어떻게 됐나요?”
채미령은 벽천일이 들어오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벽천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장주님께서 모든 권한을 가져가셨다고 합니다.”
채미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태산이 그걸 다 포기했다고요?”
“예.”
채미령의 입가가 한껏 올라갔다.
“그럼 그 중 하나를 우리 제혁이에게 밀어줄 수도 있겠군요.”
벽천일이 그런 채미령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채미령은 충분히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장주인 벽태수의 부인이니까.
“한데 장주님께서 이번 사업 순수익의 일 할을 벽태산에데 주기로 약조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채미령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녀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게 누구 돈인데 그걸 벽태산에게 준단 말인가.
“벽태산에게 표국 사업을 맡기는 일은 어찌 되었나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맞지요?”
벽천일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벽태산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채미령은 어이가 없었다.
“거절했다고요? 대체 무슨 생각이지? 뭔가 알아낸 것 없나요? 호무련과 그 정도 관계를 엮고 온 놈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일을 거절했을 리가 없잖아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채미령의 표정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알아내세요.”
“예.”
“무슨 수를 써서든 다 알아내세요. 벽태산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호무련의 누구인지, 또 혹시 벽태산의 뒤를 봐주기로 한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그게 누구인지, 벽태산의 약점은 없는지, 벽태산 주변에 혹시 반감을 가진 사람은 없는지까지 전부!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지시해야 하나요?”
와르르 쏟아낸 채미령의 말에 벽천일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벽천일을 향해 채미령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차기 조서각주 자리에 앉을 수 있지 않겠어요?”
벽천일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망과 두려움, 모멸감이 뒤섞인 감정이 그의 심장을 세차게 자극했다.
* * *
벽태산은 호무련에서 돌아온 후, 이틀 정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밥도 방에서 먹고, 목욕도 방에서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호무련에 다녀오는 일이 워낙 고되서 푹 쉬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벽태산은 이번 호무련 행에서 얻은 것들을 그 이틀 동안 차분히 정리했다.
그러면서 수련도 병행했고.
현재 벽태산은 천둔보에 푹 빠져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천둔보를 수련했는데, 하면 할수록 새로웠다.
그리고 요즘 들어, 천둔보가 증혼마공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명확히 무언가를 알아낸 건 아니지만, 분명했다.
거기서 시작한 의문이 천마신교의 다른 무공으로 옮겨 붙었다.
그래서 지난 이틀 동안 그 부분에 관해 깊이 고민하고 분석했다.
덕분에 어느 정도 확신을 얻었다.
천마신교의 기본공이 어떤 식으로든 증혼마공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물론 기본공이라고 해도 천마신교의 하급 무사들이 익히는 무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스무 명 정도를 이끄는 조장은 되어야 지급되는 무공이었다.
그나마도 모든 기본공을 다 지급받으려면 제법 큰 공을 연달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천마신교에는 이름만 거창한 기본공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이 즐비하다.
그러니 기본공을 포상으로 지급받는다고 해도 막상 그걸 제대로 익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거의 없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벽태산이었다.
하지만 벽태산도 기본공을 익히면서 인정했다. 이건 실전에서 거의 쓸모가 없는 무공이라고.
하지만 수련에는 큰 도움이 되는 무공이었다.
천둔보만 해도 그렇다.
그저 제대로 수련하는 것만으로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고, 육체의 균형을 맞춰주니까.
천마신교의 기본공이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그 기본공이 증혼마공과 엮여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기본공에 대해 한 번 정리를 한 벽태산은 드디어 방을 나섰다.
이번에 수채에서 얻은 영력이 워낙 뛰어나 치료에 가속이 붙었다.
이런 식이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몸을 완벽한 상태로 만들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때부터 제대로 수련을 해서 심기체를 단련해야 하니까.
물론 그건 쉬엄쉬엄 천천히 해도 된다.
아니, 느긋하게 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다시 살게 된다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기로 하지 않았던가.
치열한 삶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
벽태산이 방에서 나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화옥이 다가왔다.
그녀는 벽태산의 시비이기도 하지만, 하오문과의 연락책이기도 했다.
또한 벽태산의 일정을 관리하는 일도 함께 맡고 있었다.
하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걸 정말 잘했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화옥의 정중한 인사에 벽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쪽으로 전각 내부를 오가며 잡일을 하고 있는 다른 시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벽태산은 턱을 쓰다듬으며 화옥과 다른 시비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화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벽태산이 자신을 보는 눈길이 어딘가 묘해서 화옥은 살짝 긴장했다.
벽태산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무한의 기루를 초토화 시키고 야왕이라는 별호를 얻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를 이미 의창에 있을 때 들었다.
하오문이라서 얻은 정보가 아니라, 기루를 운영하고 있기에 들은 얘기였다.
즉, 기녀들 사이에서 벽태산은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 기대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고 보니 네가 열 번째였지.”
화옥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기대하던 말을 듣지는 못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아!”
화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표정부터 수습했다.
“공자님께서 쉬시는 동안 손님이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일단 공자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전부 적당히 돌려보냈습니다.”
벽태산이 잘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화옥이 말을 이었다.
“일단 호무련의 순찰당주께서 오셨었습니다. 서문덕 대협은 알고 계시지요?”
“안다.”
“그리고 천약방의 두 의원도 하루에 세 번 이상씩 찾아왔었습니다. 아마 오늘도 찾아올 거라 예상합니다.”
“그리고 동호표국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동호표국?”
동호표국은 예전 종리세가를 짓밟을 때 잠깐 써먹었던 천마신교의 비밀조직이다.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것들이······ 뭐 하자는 거지?”
천마신교의 비밀조직은 이런 식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딱 주어진 임무만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 경우에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상부인 천마신교에서 무언가 명령을 내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의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벽태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화옥이 한껏 긴장했다.
“왜······ 그러시는지요.”
“아니다. 계속해라. 손님은 그게 전부더냐.”
“훨씬 많습니다만, 워낙 자잘한 자들인지라 따로 소속과 이름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