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27
“힘드시니 그만 누우셔요. 예?”
저를 걱정하느라 그새 더욱 여윈 뺨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이상한 일이다. 세상천지에 아무도 저를 저리 바라봐 주지 않았는데, 그 누구의 어떠한 모습에도 이리 가슴이 떨린 적이 없는데.
하여 무자리는 손을 뻗었다. 서현의 뺨을 어루만지노라니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에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칼에 베이고, 호랑이 발톱에 챈 것처럼 고통스러운 통증이 아니었다. 조금은 아릿하고, 뭉근하면서도, 또한 따스한 통증이었다. 전에는 무자리가 세상에 있는 줄 몰랐던 그런 통증이었다.
* * *
호랑이에게 다쳐 돌아온 무자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은 겨우 여드레 만의 일이었다. 아흐레가 되던 날에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도 계곡으로 가서 제가 죽였던 호랑이를 가져다가 움막에서 손질했다.
“내다 팔면 값 좀 받겠다.”
“마을에 가시게요?”
“그래. 손질이 다 끝나면 한번 다녀와야지.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있고. 우선 내일은 사냥부터 나가 볼까.”
“하지만 아직 완쾌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러다 덧나면 어쩌십니까?”
“상처는 다 나았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모두 네 덕이다.”
서현이 걱정하며 만류하자 무자리는 그리 말하며 덤덤하니 웃었다. 어쩐지 그 눈빛이,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다고 서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무어 그리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산골의 하루는 다시 이전과 같이 흘렀다. 이른 아침이면 무자리는 물을 길어 놓고 사냥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고, 서현은 종일 집안일을 하고 저녁밥을 지은 채 무자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온 무자리는 저녁밥에 반주를 곁들이고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서현을 안지는 않았다. 그런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여 서현은 그의 몸이 아주 다 나은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사냥에서 돌아온 무자리의 밥상에는 술이 함께 올랐다.
“저…… 안주라도 해 올까요?”
“됐다. 그저 몇 잔 마시는데 무슨.”
“그래도…… 콜록콜록.”
서현이 기침을 토하자 술 사발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무자리가 사뭇 인상을 썼다.
“너 어째 기침이 더 심해졌다. 맥문동이 다 떨어졌지? 단풍마도 그렇고.”
“아, 아뇨. 그것이…… 콜록콜록.”
서현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또다시 기침이 쏟아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무자리가 깊게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가쁘게 숨을 내쉬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 마을 약방에 다녀와야겠다.”
“콜록, 지금도 눈이 내리잖아요. 내일이면 더 많이 쌓여서 위험할 텐데요.”
“아니다. 내일은 눈이 아니 올 것이다.”
“정말요?”
“그래. 하지만 이튿날부터 제법 큰 눈이 한동안 내릴 거야. 그러니 내일 얼른 다녀오마.”
“그런데 이리 눈이 왔으면 산사에 가는 길도 끊어…… 콜록콜록…….”
“그놈의 기침!”
기어이 무자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서현의 기침이 겨우 멎자 두 사람은 곧 이부자리를 펴고는 베개를 나란히 한 채 누웠다. 그러나 서현은 잠들지 않고 있었다. 요즘은 무자리가 제게 손을 대지 않는 건 알지만, 어쩐지 오늘 밤에는 그가 제 몸을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자니?”
아니나 다를까 무자리가 넌지시 그녀를 불렀다.
“예? 아, 아뇨.”
“고뿔은 좀 어때? 정말 기침 말고 다른 곳이 아프진 않아?”
“예, 인후통도 없고, 신열도 오르지 않아요. 그냥 기침만 나오네요. 하지만 생강차를 수시로 먹으니 많이 가라앉았어요. 정말로 걱정하지 마셔요.”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그러니 내일 약방은 가지 마십시오. 길도 좋지 않은데.”
“알았다. 대신 조만간 산사에 한번 다녀올까 한다.”
그 말에 서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요? 언제 가시는데요?”
무자리는 어둠 속에서도 서현이 반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장은 아니고. 이번에 오는 눈이 멈추고 나면, 더 큰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올까 한다.”
“왜, 왜요? 혹 그곳에 무슨 일이 있나요?”
더럭 겁이 난 서현의 음성에 걱정이 배어들었다. 한껏 들떴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무자리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니. 전에 말했잖아, 그 땡중이 도끼나물을 좋아한다고. 마지막으로 갖다 준 것이 그때 네 아우 데려다주었을 때야. 벌써 달포도 넘었으니 필시 공양간의 고기가 진즉에 떨어졌을 게야. 그런데 아무래도 눈 때문에 땡중이 못 오는 모양이니 내가 가져다주려는 거뿐이다.”
“그럼 저도…….”
무자리의 설명에 서현의 얼굴에는 불안 대신 기대가 피어올랐다.
“안 돼.”
그러나 무자리가 단호하게 말을 끊어 냈다.
“이 눈길에 고깃근은 물론이고 식량까지 짊어지고 가야 한다. 오가며 적어도 몇 밤은 산속에서 노숙도 해야 해.”
그러나 서현은 쉽게 기대를 접을 수가 없었다.
“전에도 다녀왔던 길이 아닙니까. 잘 알아요. 하니 노숙은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눈이 와서 그 절벽을 오르내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어. 알 텐데.”
그러나 무자리가 덧붙인 말에 더는 조를 수가 없었다.
“……예.”
그 높디높고 가파른 절벽을 식량을 짊어지고 오르내려야 하는 무자리에게 차마 자기까지 업고 오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끊어졌다.
다시 잠자리에 누웠지만 서현도, 무자리도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서현은 간혹 잔기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그녀는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으니 이윽고 깊이 잠든 서현의 고른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오자 무자리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옆으로 돌렸다.
서현은 평생 몸에 밴 습관대로 베개에 머리를 올린 채 반듯하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달빛에 드러난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선이 마치 화공의 붓놀림처럼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겨우 잠들었구나.’
무자리는 서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둥근 이마와 버선처럼 모양 좋은 코나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아니었다. 감은 채 파르라니 떨리는 눈꺼풀이었다.
혹 깊은 잠에 빠져서 또 어머니를 찾으며 눈물 흘리는 건 아닌지 바라보았다.
지난번 산사에 오가는 동안 밤마다 화톳불을 지키기 위해 잠들지 않은 채 새벽이 다 되도록 깨어 있던 무자리는 잠든 서현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편안한 잠이었다. 제 아우를 품에 안고 있는 덕인지 잠꼬대도, 눈물도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달랐다. 그 그립고 애달픈 아우를 두고 오는 길이라 그러했는지 잠든 서현이 흘리는 울음은 더욱 슬프고, 더욱 서러웠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다 무자리가 무심코 손을 뻗자 그 처량한 흐느낌이 더 커졌다.
무자리는 죽도록 그리운 이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존재도 없던 어미는 그리울 리 만무했고, 저를 자식이 아니라 짐승 보듯 대하고 그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아비 역시 보고픈 이는 아니었으니.
간혹 소사를 떠올리긴 했으나 제 가여운 누이도 죽도록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심장이 아릴 뿐이었다. 그런데 서현은 꿈에서도 그립고 그리워 눈물 흘릴 만큼 제 어미가 보고픈 것이다.
날 때부터 버려져서 애틋한 육친의 정 따위는 모르니, 서현의 그 애절한 마음을 짐작도 할 수 없는 무자리는 처음에는 화가 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 심장이 칼에 베인 듯 저미도록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남의 슬픔이나 아픔일랑 한 번도 무자리의 마음을 흔든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서현의 울음은 무자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더군다나 서현과 저의 첫 결합은 결코 화락한 결합이 아니었다. 서현이 응당한 거래의 이행이라면서 먼저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그녀를 지독히 참담하고, 한없이 고통스럽게 했을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밤에 서현의 울음은 더욱 서러워졌다. 흐느낌도, 잠꼬대도, 몸의 뒤척임도 더욱 거세어졌고, 또한 고통에 차 있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아는 무자리는 그리하여 더더욱 잠들 수 없었다. 그저 잠든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가 다쳤다 깨어났을 때 저를 지키고 있던 서현의 말간 얼굴만 자꾸 떠올랐다. 아니 서현의 모습이 온종일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마다 자꾸 가슴이 두근거리니 무자리는 어쩌면 제가 그때 퍽 심하게 다쳤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크고, 사나운 호랑이였으니.
“어, 어머니…… 흑흑…… 싫어요, 어머니…….”
결국, 이 밤에도 서현은 잠든 채 흐느꼈다. 무자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젖은 뺨을 어루만지며 달래 주었다.
“쉬이, 울지 마. 곧 네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흑…….”
“네 아우도 만났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부디 편히 자도록 해.”
“흐윽…….”
“내가 어떻게든 네 어미를 찾아 줄게. 그래서 만날 수 있게 해 줄게.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그 말에 서현이 무자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현이 젖은 뺨을 무자리 가슴팍에 묻고는 아이처럼 비볐다.
잠결이었다. 그런데도 무자리는 매번 그렇듯 가슴이 철렁했다. 마음이 아려 왔다. 무자리가 팔을 뻗으면 언제나 이렇듯 스스로 제 품에 안겨 오는 서현. 그것은 그녀가 혼몽 중이라는 의미였다.
꿈속에서 서현은 무자리를 믿고 의지하는 듯, 그의 품에 안기면, 그가 달래면, 어느 결에 흐느낌을 멈추곤 했다.
그리하여 오늘 밤도 무자리는 서현을 안고,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울지 마. 그리고 부디 단꿈을 꿔. 그 꿈속에 네 어미가 있을 거야.”
어느덧 방울방울 흐르던 서현의 눈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미약한 흐느낌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으니, 하여 무자리는 밤이 깊도록 잠들 수 없었다.
* * *
무자리의 말대로 다음 날은 눈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이 지나기 무섭게 하늘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폭설이 쏟아져 내렸다. 낮은 밤 같고, 밤은 오히려 눈빛으로 환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사흘을 내리다 어느 아침에 눈발이 겨우 수굿해졌다. 조심스레 마당에 나가 보니 쌓인 눈이 그간의 갑절이었다. 그러나 무자리는 늘 그렇듯 그 눈을 아무렇지 않게 쉽사리 쓸어 놓은 후에 사냥을 나갔다.
“세상에나. 봄이 온다 하여도 이 눈이 다 녹기나 할까. 봄소식은 아직 멀었는데 만 송이 매화가 한꺼번에 피었구나.”
눈길 닿는 곳마다 모조리 은세계로 변해 버린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서현은 혀를 내둘렀다. 한없이 펼쳐진 하얀 능선을 보고 있노라니 막막할 지경이었다.
“과연 봄이 오기나 할는지…… 콜록콜록.”
그러다 문득 원우가 있는 암자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이리도 많이 내렸으니 그 좁은 산사 마당에도 한길 눈이 쌓였겠구나. 비축해 둔 식량이 넉넉하기는 할까? 우리 원우,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겠지? 행여 또 아프진 않으려나.”
어린 아우 생각을 하노라면 걱정과 함께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와 서현을 덮쳤다.
머나먼 그곳이 눈에 보일 리 없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노라면 서현의 눈가에는 어느덧 서러운 눈물이 고이기 일쑤였다. 그 눈물이 볼을 따라 또르르 흐르면 서현은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찍어 내고는 그리움을 떨치기 위해 더 바지런히 몸을 놀려 집안일을 했다.
“원우야, 조금만 기다려 줘. 봄이 오지 않아도 이 설산의 눈이 조금이라도 녹으면, 어떻게든 이 누나가 널 만나러 갈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무사히 있어야 해. 콜록콜록.”
쏟아지는 기침을 삼키고 눈물을 훔치며 서현은 무쇠솥의 뚜껑을 열어서는 뜨거운 물을 퍼다 빨래를 했다. 잿물에 삶고, 볕이 있을 때 얼른 마당에 널고 하느라 바빴다.
그러고 나서 솥에 다시 깨끗한 눈을 퍼 넣던 서현은 문득 제 손을 보았다. 물일 때문에 유난히 희었다. 그런데 팔뚝을 보다가 그만 인상을 찌푸렸다. 손처럼 희고 가느다란 팔뚝이었으나, 제대로 씻은 지는 오래였다. 관노로 있을 때야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씻지 않았다. 그래도 무자리의 오두막에서 지내면서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매일 몸을 닦고, 속곳을 입은 채 부엌문을 단단히 잠그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재빨리 몸을 씻기는 했으나 성에 차지 않았다. 온몸을 뜨거운 물에 온통 담가 본 지가 언제던가.
“에구머니나, 까마귀 보면 동무 하자 하겠네.”
예전에 철없고 어린 서현이 목욕하기 싫다고 딴청을 피울 때마다 유모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면서 노상 하던 말이었다. 그러다가 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뜨거운 물을 보았다. 서현은 저녁에 돌아오면 항상 씻는 무자리를 위해서 이렇듯 늘 무쇠솥에 끓인 물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 물을 쓰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운 우물물을 뒤집어쓸 뿐. 하여 아침이면 무쇠솥 그득하던 물은 죄 졸아붙어 버리고 없었다.
“밤새 끓다 김이 되어 사라지느니 내가 쓰는 게 낫지.”
한번 목욕을 하자 마음먹고 나니 그 생각이 몹시 간절했다. 아직 한낮이었다. 비록 구름에 가려 그 빛이 밝지 않으나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무자리가 돌아오려면 한나절은 있어야 할 터였다.
서현은 서둘러 목욕 준비를 하고 좁은 부엌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예전처럼 녹두 가루 갠 것으로 얼굴을 씻고,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복숭아씨 우린 물이나, 단향 푼 물을 욕조에 받아서 몸을 담그는 호사야 누릴 수가 없었지만, 오랜만에 하는 목욕은 참으로 개운하여 기분 좋았다.
평소처럼 물에 적신 무명천으로 몸을 꼼꼼하게 닦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몸에 끼얹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느긋하여 한가로웠다. 단속곳을 벗고 저고리와 속속곳만을 걸칠 정도로 대범하여도 불안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얼굴을 씻고, 발을 담그고 있노라니 어느덧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고, 마음도 느른하게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