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56)
*
바로 며칠 전, 레오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연락에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던 차였다.
‘레오! 잘 지내?’
가슴께에도 안 오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스무 살이 넘어 나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커진 레오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근사했다.
물론 직접 얼굴 본 지는 꽤 되었고, 레오의 출연작을 꼬박 꼬박 챙겨보는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영화 봤어?’
‘당연하지.’
‘나도 찬 영상 보고 연락한 건데, 반갑네.’
‘내 영상?’
레오가 쏭하 채널을 본다는 건 알았지만, 새 영상이 업로드될 때마다 챙겨보는 열렬한 구독자일 줄은 몰랐다.
거기에 하필이면 내가 출연했던 방송까지 봤을 줄은.
‘어, 음, 그걸 다 봤구나···.’
‘응, 영어 자막 있어서 완전 좋던데?’
좀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게 계기가 되어 간만에 레오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 감수할 수 있다.
‘레오가 이렇게 잘 큰 걸 볼 때마다 괜히 내가 다 감개무량하거든.’
이제는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회귀 전의 레오를 떠올리면 더더욱 말이다.
여하튼, 오늘 역시 방송 스케줄이 있었는데.
“···음, 근데 방송을 너무 지나치게 나가는 걸까요.”
“지나치다뇨?”
사무실에서 서지연 과장, 아니 서 실장과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버렸다.
“음, 그게···.”
나는 최근 느끼는 불안감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잠시 후, 내 말을 다 들은 서지연 실장이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박 선생님 말씀은, 통역사라는 본분에서 너무 벗어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되신단 거죠?”
“네, 정확합니다.”
“음.”
서지연 실장은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 불안감이야 이해하지만, 가끔 보면 박 선생님은 거기에 너무 얽매인 것 같아요.”
“네?”
“통역사로서의 정체성 말이에요.”
“···!”
“하지만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셔도 되지 않을까요?”
자유로워진다라.
···나는 여태껏 내가 거기에 얽매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박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그러면서도 실력 또한 최상급인 통역사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
“그리고 그 사실은, 이제 어떠한 새로운 도전을 하든 간에 변함이 없을 거고요.”
새로운 도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서 실장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깃들었다.
“뉴프레드의 가사처럼, 우리 인생은 결말이 정해진 서사 같은 게 아니잖아요?”
세상은 이미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다고.
짧게는 5년 뒤, 10년 뒤, 더 나아가 20년 뒤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또한 변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아니, 그녀가 뜻하는 바는 그 이상이었다.
변하는 게 당연할 뿐 아니라, 변해야만 이 세상에 발 맞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박 선생님이 눈앞의 인기에 휘둘려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시는 건 잘 알아요. 그런 마음가짐은 여전히 존경스럽지만, 그렇다고 굳이 새로운 기회를 거부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실장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어디 맞다뿐인가.
새로운 깨달음에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 드는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도 가끔 잊어버리긴 하지만, 박 선생님은 이제 겨우 40대 초반이잖아요?”
“···이제 겨우 인생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이 말씀이군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내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자, 서지연 실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여하튼 오늘, 뉴프레드 님이랑 예능 같이 나가시죠? 파이팅이에요!”
그리고 때마침, 스마트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홍식이 형의 SNS 채널에 새 게시물이 올라온 듯했다.
[오늘은 찬영이와 에 나가는 날! 홍식찬영 케미 지켜봐주세요#뉴프레드#정홍식#박찬영#못친소아님#찬영이노래듣고싶다]
그리고 서 실장 또한 알림 설정을 해놓았는지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박 선생님 오늘 나가서 노래도 부르실 거예요?”
“···.”
새로운 도전, 다 좋은데.
···오늘만큼은 좀 도망치고 싶었다.
*
10여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왕좌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랩퍼 뉴프레드.
그는 과거만 해도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언젠가부터 예능에 자주 출연하며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번에 내가 나갔던 도 그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의 일종이었다.
패널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현실 친구를 게스트로 섭외해 다양한 게임을 같이 하는 것이 골자인데.
‘상당히 힘든 하루였지.’
방송 분량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지만, 그 짧은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 무려 6시간 넘게 촬영을 했을 뿐더러.
게임에서 진 탓에 벌칙으로 노래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에 대한 반응이 내 팬카페는 물론,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것이 몹시 민망했고 말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주 힘든 하루였어.”
– 크크, 노래만 잘하던데. 실력이 살아 있어, 촨용 팍.
처음부터 끝까지 본방을 봤다는 추의 말에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나마 반응이 좋았으니 다행이지만.”
– 그나마라니, 장난하냐? 그냥 좋은 게 아니고 아주 난리가 났던데, 난리가.
“난리라고 할 정도까진 아닌 것 같던데.”
– 뭐래, 크크. 야, 울 와이프님도 아주 싱글벙글인 거 알아? 너 나온 영상들 조회수가 급상승했다고.
‘울 와이프님’이란 추가 송하늬를 부르는 말.
뭐,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얘네도 여전히 꿀이 떨어지는 분위기다.
“좀 적당히 놀리시지.”
– 놀리는 거 아니라니까? 너 팬카페 반응 못 봤어? 찬영 님이 노래까지 잘 부른다고, 동안 빼고 다 가진 남자라고-
“야.”
그렇게 나는 추와 꽤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가장 최근 있었던 일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전부이지만, 십년지기와 나누는 대화는 시시콜콜할수록 즐거운 법이다.
– 여튼 그건 그렇고··· 오늘 출간 기념회라고 했지?
“어, 안 그래도 기념회 장소로 이동 중.”
–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친구야.
“흐흐, 고맙다.”
그래.
추의 말대로 지금 나는 내 생애 첫 번째 책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로 향하는 중이었다.
*
그로부터 약 30분 후, 광화문 교보문고 안에 자리한 어느 북카페.
앞쪽에는 자그마한 무대와 객석이 자리해 있었다.
그 무대 위, ‘저자와의 만남’ 행사를 진행할 사회자와 마주 앉은 나는 생각보다 꽤 긴장해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저쪽에 앉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디 출판 행사뿐일까.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행사에서 외국어로 진행 및 통역을 담당했던 만큼, 이런 자리는 익숙하다 못해 일상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이게 ‘내가 쓴 책’의 행사라고 생각하니 사뭇 긴장이 된다.
“지금부터 의 저자, 박찬영 통역사님과의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에 저 아래 객석에서 우렁찬 호응이 나온다.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무시한 채,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찬영입니다.”
그러자 아까보다 한층 커지는 함성.
그것을 시작으로 ‘저자와의 만남’ 행사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는 스타 통역사로 유명하신 박찬영 통역사님의 첫 책인데요···.”
절반은 에세이이자 절반은 (외국어 공부법에 대한) 실용서 느낌의 책.
내가 어떻게 통역사를 지향하게 되었는지, 외국어 공부를 어떻게 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사회자의 간단한 소개 멘트가 끝난 후, 곧바로 시작된 질의응답.
“그럼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봐도 될까요?”
객석에서 던진 첫 번째 질문에 나는 마이크를 잡고 대답했다.
“음,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외국어 공부의 기술에 관한 책이되, 거기에 저의 개인적인 경험담과 생각을 곁들였다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출간을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리터스 출판사의 윤주하 대표였다.
‘저는 된다고 보거든요, 이 책.’
함영사에 근무할 시절부터 독립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별명을 유지하고 있는 윤주하.
그녀가 제안한 출간 기획서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고, 나는 그 후 약 1년 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이 책의 집필에 골몰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인 셈.
“제목이 재밌습니다. 찬영 통역사님이 스스로 천재라는 걸 인정하시는 걸까요?”
농담처럼 누군가 던진 질문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어떻게 아셨죠?”
한 차례를 너스레를 떨어준 후,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천재’란 말은 약간의 어그로성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천재 통역사.
이건 언론에서 나를 수식할 때 ‘스타 통역사’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볼 때마다 나는 문득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천재란 대체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따지자면 천재란 하늘에서 내린 재능의 소유자를 말하지만.
내 경우는 그보다는 에디슨이 말한 정의에 더 가깝지 않을까.
“굳이 정정해보자면, ‘노력 천재 통역사’라는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또다시 잔잔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
“하지만 그에 앞서, 통역이 오늘날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부터 짚어보자면···.”
그렇게 관객을 대상으로 말을 이어나가며 나도 모르게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처음만 해도 천재가 되고 싶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것이 내 욕망의 전부였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독기가 지나치다 못해 이기심에 가까웠던 초반의 동기가 옅어지고, 다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결심이 든 것이.
이 어마어마한 기회를 이용해 못 이룬 꿈을 이룰 뿐 아니라, 주변의 소중한 이들 모두 더 나은 내일을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
“···애초 통번역학은 근본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독립된 기술이자,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 사이의 매개체인데···.”
바벨탑이 탄생한 이후로 통역사는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만큼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요긴한 다리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통역의 진정한 의의가 아닐까요.”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내 목소리만이 공간 안을 울린다.
내게로 집중된 좌중의 시선을 느끼며 이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책 본문에서 확인해주시죠.”
광고성의 마무리 멘트에 푸흐흐 하고 웃는 사람들.
그렇게 약 한 시간에 걸친 대화가 끝나자마자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와, 실제로 보니까 더 잘생기셨어요!”
“찬영 님 저 10년 전부터 팬이었는데 점점 회춘하시는 것 같아요···.”
“정말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형님!”
처음 보는 이들도, 몇몇 행사에서 얼굴을 마주친 적 있는 익숙한 팬들도 있었다.
언제 보든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나는 진심을 다해 내 이름 석 자를 책 면지에 적어넣었다.
[감사와 진심을 담아, 박찬영 드림]예전에 언젠가, 사인해달라는 요청에 몹시 어색해하며 어설프게 내 이름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누군가에게 사인해주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감사해하는 마음만큼은, 늘 초심을 유지해야 하는 법.’
나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인을 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지난날을 세세하고도 진솔하게 적어넣은 이 책, 를 품에 안은 채-
이제는 제일 소중한 이들에게 책을 선사할 차례였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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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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