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99
499화
“…역시는 역시네.”
이어진 나지막한 목소리에, 디아나가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아와 이안을 눈에 담은 그녀의 고개가 설핏 기울어졌다. 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긴 했지만, 그다지 놀라거나 경악한 기색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디아나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이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요그의 웃음기 섞인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몰랐던 게 더 놀라운데. 그럼 넌, 네가 살던 마경에 고여 있던 그 많은 혼돈과 광기가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경계를 팽창시킬 정도였는데 말이야. 설마, 공허로 돌아갔으리라 여긴 건 아니겠지.
디아나는 멈칫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요그가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에는 그거면 충분했다.
-맞나 보네. 왜 그런 속 편한 결론을 내린 거야, 귀쟁아?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가?
“그야… 위대한 분께서… 벽을 무너뜨리신 거니까…. 알아서 잘… 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윽고 읊조린 디아나가, 슬며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큰 문제 없이.”
요그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킥킥댔다. 웃음소리가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이 녀석을 아공간 안에 던져 넣어 버린 것이다.
“걱정 마.”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전선을 통과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 그런 걱정은 하지도….”
다시 뒤를 돌아보며 내뱉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말투와 달리, 이안의 눈빛과 표정은 전혀 언짢게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황실과 교단이 전말을 파악하고 결론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할 거야. 뭐건, 그때쯤에 넌 이미 고향에 도착한 뒤겠지.”
“…….”
“그러니까 이 문제를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넌 그냥, 길만 잘 안내해 주면 돼.”
디아나의 눈빛이 조금 다른 의미로 흔들렸다. 지금 이안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더는 골치 아프고 위험한 상황에 말려들지 않도록.
“…그래. 알았어. 그럴게.”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디아나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늘 그랬듯, 무슨 대화가 오가건 모르는 척해야겠다고 내심 덧붙이는 채였다.
“…….”
하지만 여전히, 눈가에 들어간 힘이 선뜻 풀어지지 않았다.
디아나가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걱정이 되긴 하네요.”
루시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실과 교단이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백금룡께서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으실 것 같거든요. 어쩌면….”
뒤를 돌아본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그분의 대행자인 이안 님도요.”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내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너한테 무슨 책임이 있는데?”
되물은 건 디아나였다. 어느새 다시 뒤를 돌아본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번졌다.
“신경쓸 필요 없다니까.”
“아니 뭐… 백금룡이야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어쨌든 일단은… 전우이자 은인이기도 하고….”
웅얼대듯 말한 디아나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래서, 무슨 책임이 있는 건데.”
이안은 낮게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선선히 입을 열었다.
“알잖아. 백금룡께서 벽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 서둘러 마무리 지은 건 나 때문이야.”
“…….”
어둠에 잠긴 사막을 돌아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내가 벽을 넘지 않았다면, 이런 부작용은 없었을지도 몰라.”
눈빛이 다시 칙칙하게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은 땅의 혼돈과 광기는, 아무래도 대륙 구석구석까지 번질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검은 땅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주위를 잠식해 나갈지도 몰랐다.
적어도 앞으로 밤이 더 위험해질 것이며, 신들의 영향력도 더 줄어들게 되리란 건 분명했다.
‘다섯 번째 챕터도, 시작됐겠고.’
원탁 의회가 바라던 필연적인 어둠. 진정한 혼돈의 시대가 열린 것인지도 몰랐다.
“글쎄.”
그때,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디아나가 내뱉었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네가 백금룡께 구해 달라고 요청한 건 아니잖아. 그분께서 멋대로 서두르신 거지. 그러니까 네가 책임질 건 없어. 엄밀히 말해… 오히려 너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지는 가운데, 디아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까딱였다.
“그분의 대행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필요한 책임을 함께 짊어지게 됐으니까. 게다가 너 역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잖아. 올바른 방식으로 말이야. 네가 마경을 무너뜨렸다면, 이런 상황은 없었을지도 몰라.”
그녀의 진지한 눈을 잠시 응시한 이안이, 이윽고 풀썩 웃음을 흘렸다.
“요정들은 참 삶이 편하겠네. 본받을만 한 태도야.”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관점이지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 같아요.”
디아나가 한쪽 눈매를 구기는 가운데, 고개를 끄덕이던 루시아가 내뱉었다. 그녀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준비를 철저하게 하셨더라도, 부작용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고요. 마경을 억지로 무너뜨린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안 님이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이윽고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런 건 느낀 적도 없어. 그냥, 나와 내 친구들의 앞날이 걱정될 뿐이야.”
진심으로 한 말이지만, 루시아는 물론 디아나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요. 하긴, 뭐. 이제 와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까요. 사실이 어떻건, 황실과 교단이 참작해 주지도 않을 테고요.“
”맞아.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는 이안의 말을, 루시아가 가로채듯 받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말씀이시죠?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래. 너도 이젠 하산해도 되겠다. 루시.“
”제가 원래, 배움이 빠르잖아요.“
이안의 농담에 능청스럽게 화답한 루시아가, 뒤이어 넌지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주시는 게 어때요, 디아나?“
”어… 지금?“
디아나가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는 채였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오늘 밤은, 일찍 자긴 글러 먹은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야… 뭐….”
디아나가 가면 아래의 턱을 긁적였다.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아미피브… 그 시건방진 귀쟁이들에 대해서였지….”
루시아의 추임새를 곁들인 그녀의 이야기는 한참 이어졌다.
다시 날이 밝고, 어둠에 잠겨 있던 황금의 물결이 일행을 맞이할 때까지.
***
황금 사막은, 먹구름 아래에서도 그 빛이 완전히 바래지 않았다.
일행은 그 한복판을 아주 순조롭게 가로질렀다.
서걱- 서걱-
먹구름은 여전히 자욱했고, 밤중에 습격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황금 사막에도 마물들은 존재했지만. 일행이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
어쩌면 모로의 안장에 걸린 마수 시체 냄새 때문인지도 몰랐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 없는 부분이었다.
사아아아-
중요한 건, 그들이 사막을 거의 다 횡단했다는 사실이었다.
사방에 넘실대던 금빛 사구들이 어느새 잠잠해지고, 저 멀리 병풍처럼 이어진 암벽 능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막보다는 조금 빛이 바랜 듯한 연갈색의 협곡들.
금가루 같은 모래가 섞인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제가, 신기루를 보는 건 아니겠죠?”
홀쭉해진 가죽 수통을 품에 안은 루시아가 읊조렸다.
“…물론이지. 나한테도 보여.”
대답한 건, 지친 듯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디아나였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덧붙였다.
“아마도 자한다르 능선 같아. 사막과 남부를 가르는 대협곡이지.”
“남부 전선이기도 하겠고.”
이안이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꽤 멀건만. 그의 시선은 이미 능선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협곡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성벽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성벽 하단은 지층을 조각내듯 깎아 만들어서, 협곡에서 성벽이 돋아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계곡 중턱을 완전히 가로막은 성벽 한복판에는 거대한 관문이 솟아 있었다. 지층을 통째로 직사각형으로 잘라내 문으로 만든 듯한 형태였다.
‘매번 느끼지만… 괴물들보다 저런 게 더 비현실적이라니까.’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말머리를 전선 요새 쪽으로 돌렸다.
성벽 너머로는 지붕보다 조금 더 높이 솟은 내성의 지붕이 보였다.
제국이나 북부의 요새들과 달리, 그저 네모반듯할 뿐 뾰족한 첨탑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서 그런지, 침식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네요. 이 요새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요.”
조금씩 가까워지는 이름 모를 전선 요새를 눈에 담으며, 루시아가 읊조렸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광기에 물든 마물이라도, 이런 사막을 건너고 나서도 힘이 남아돌진 않겠지. 남부 전선은 위치가 아주 절묘해.”
“그것도 그렇겠네요. 남부 전선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건, 다종족 군단 덕분만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뒤를 돌아본 루시아가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런데도 왜들 남부로 파견되는 걸 기피하는 지도 알겠고요. 모든 남부 전선이 그렇진 않겠지만. 이 근방은 그냥 사막의 일부인 것 같거든요. 북부 전선 북쪽이 사실상 설원지대인 것처럼요.”
…뭐,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부 전선 역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검은 벽과는 멀어졌지만, 정작 방위군은 그쪽으로 가는 걸 꺼려하지 않던가.
“어쨌든,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덧붙인 건 디아나였다. 그녀는 성벽이 아니라 그 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활이나 창을 든 병사들이 곳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갈색 천으로 몸과 얼굴을 둘둘 감은 자들이었다.
물론 이안과 루시아를 긴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게요. 예상대로네요.”
검은 벽이 무너지지 않았던가.
모든 전선의 요새가 비상 상태이리라 유추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고, 황실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계속 경계 태세가 유지될 터였다.
“디아나는 그냥 모로 곁에서 지켜만 봐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태연하게 내뱉은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님은 위엄 있는 표정만 지어 주시고요.”
“…알았으니까 목부터 축여. 목소리가 다 갈라졌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이 턱짓했다.
싱긋 미소 지은 루시아가 수통의 마개를 열어 입으로 가져갔다.
물은 미지근한 데다 슬슬 쉰내가 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예 썩거나 독이 든 게 아니면, 탈이 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저쪽도 우릴 발견했어.”
디아나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슬며시 걸음을 늦춰 모로의 곁으로 붙는 채였다. 이안은 가까워지는 계곡 위의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부우우우-
성벽에서 뿔피리 소리가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뒤이어 성벽 위가 부산스러워졌다. 이미 서 있던 자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비슷한 복장인 다른 병사들이 줄지어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각궁 뿐만 아니라 단창이나 투척용 도끼 따위까지 손에 든 채였다.
“아니… 뭐 저렇게까지….”
디아나가 어이 없다는 듯 읊조렸다.
“이쪽이 셋인 게 뻔히 보일 텐데.”
“그러니까 더 수상해 보이지 않겠어요?”
루시아가 한결 촉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삽시에 백 단위의 병사들이 집결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린 검은 벽이 무너진 뒤에, 셋이서 사막을 건너온 거라고요. 심지어 말까지 타고요.”
디아나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하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뭐, 실제로도 그렇고.”
이안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사이 어느새 땅이 제법 딱딱해지고 있었다. 계곡 중턱에 솟은 관문이 가깝게 보였다.
일행이 저마 복장을 가다듬는 사이.
“…….”
성벽 위의 병사들도 집결을 끝냈다.
다들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드러내고 있었지만. 인간과 오크, 요정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채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각- 다각-
따가운 시선에도 모로의 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녀석은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안이 명령하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을 터였다.
관문 위편의 망루에서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당장 그 자리에 멈춰라!”
생김새와 말투로 봐선, 제국인이 분명했다. 심지어 턱이 둥글었다.
‘…갑옷이 꽉 끼는 것 같은데.’
뭐, 남부로 파견된 스트레스를 먹는 거로 풀기라도 하는 건가.
이안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지휘관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리고 합당한 신분을 밝히거나, 무장을 해제하고 땅에 엎드려 적법한 절차를 기다려라! 두 번 경고하지 않겠다!”
동시에 병사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겨눴다. 이안이 선뜻 고삐를 당겼다. 모로가 콧김을 뿜으며 멈춰서는 가운데.
“그럼, 다녀올게요.”
태연하게 속삭인 루시아가 그대로 훌쩍 옆으로 뛰어내렸다. 수통은 안장 옆에 진작 걸어둔 후였다.
저벅- 저벅-
가볍게 착지한 그녀가 성큼성큼 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낮게 헛기침해 목을 풀면서, 망토 아래의 품을 뒤적이는 채였다.
“……?!”
성벽 위의 시선들이, 다가오는 루시아에게 집중됐다.
그들의 눈매가 꿈틀댄 건 그녀가 소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성벽 위를 응시하는 루시아의 눈동자에, 어느새 주황색 신성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서였다.
이윽고 멈춰선 루시아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 무기를 내리세요.”
그리 크지도 않건만. 그녀의 목소리는 열기를 머금고 종소리처럼 성벽 전체로 번져 나갔다.
자신의 흉갑에 한 손을 얹은 그녀가, 빛나는 눈으로 지휘관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타오르는 여신의 사도이자 화로의 새로운 불씨인 이 몸. 루시페르 애쉬 리우렐이, 대리자로서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