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8
18화
18. 성장 중이다
애왕은 당대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하는 45명의 고수를 격파할 목적으로 무상제일공을 만들었다.
일천 자의 구결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수집한 무공을 집대성하고 깨달은 바를 글로 풀어서 완성한 것이고.
삼왕자는 그 일천 자의 구결을 한 시진 만에 모두 외웠고, 이해했다.
사실 천재라고 해도 애왕이 평생에 걸쳐 완성한 상승의 이치를 한 시진만에 이해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삼왕자 스스로도 신기했다.
하지만 무상제일공의 요체는 색즉시공(色卽是空).
특히 칠정과 오욕은 강함을 추구하는 무인에게 독과 같으니, 이를 비워 허무하게 만들수록 무상제일공의 위력은 강해진다.
이는 칠음과 오음의 절맥으로 인해서 태생적으로 오욕과 칠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삼왕자의 심신 상태와 자연스럽게 일맥상통했다.
그렇기에 탐구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무상제일공의 요체를 받아들인 삼왕자.
구결을 떠올리며 어렵지 않게 체외의 기를 감지하니, 물 흐르듯 정수리의 백회혈(百會穴)이 열렸다.
일반적으로 호흡을 통해 기를 받아들이면 각 심공의 운기법에 따라 기경팔맥(奇經八脈)과 십이경락(十二經絡)을 촘촘히 거쳐 하단전에 이르고 후천기(後天氣)로 쌓아지는데, 이를 내공이라 했다.
하지만 무상제일공은 백회혈로 기를 받아들이고 임맥을 타고 곧장 하단전으로 내려보낸다.
그러하기에 쌓아지는 양과 정결함은 그 어떤 상승의 심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
그러나 삼왕자의 경우엔 백회혈로 받아들인 기운이 임맥을 단단히 막고 있는 유독 커다란 기운에 저지당했다.
그래서 명치 바로 위 중정혈 부근에 중단전을 형성하여 내공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중단전은 하단전의 내공을 더 원활하게 전신으로 흘려보내는 보조적인 거점에 불과했고, 그래서 장기적으로 볼 때 내공을 축적하는 양에 한계가 생기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졌다.
하지만.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된 것만도 크나큰 발전이니까.’
벌써 실망하긴 일렀다.
삼왕자는 무상제일공의 운기법에 따라 중단전의 내공을 움직였다.
워낙 희박한 양이고, 여기저기 막힌 혈 때문에 시원시원하게 전신을 오가지는 못했으나,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내면을 관조할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이 깊은 몰입감 속에서 이대로 몇 날 며칠이고 운기행공에 빠져들 거 같았으나.
“…….”
운기를 멈추고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다.
무상제일공을 습득하며 오감과는 별개로 발현한 육감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보내 의식이 절로 반응한 것이지만,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침상 옆에 세워 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달라진 건 없구나.’
기적적인 변화를 바란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내공이 생겼으니 뭔가 신체적으로 감각적으로 호전되지 않았을까 했던 기대는 무너졌다.
그러나.
‘조금씩이지만, 나는 분명히 성장 중이다. 그런데도 여유를 잃고 조급해지기만 하니, 나란 놈은 참.’
삼왕자는 고작 한 수저를 입에 물고 배가 부르길 바랐던 자신을 반성하며, 절뚝절뚝 힘겹게 창문으로 걸어갔다.
남쪽 담장 위, 뿌연 시야 너머로 노을처럼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시력이 떨어지는 그에게 이 정도로 보일 정도면 화재의 규모가 꽤 크다는 의미였다.
창틀을 잡고 촉감에 집중하여 부족한 청각을 보완했더니, 흐릿하지만 비명과 함성도 감지되었다.
왕성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심상치 않은 난리가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주나라 왕실에 불만을 가진 어떤 세력이 쳐들어온 거겠지.’
그러나 왜, 누가, 어떻게, 라는 의문이 아니라, 지금이 도망칠 기회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 나인, 아니 우미림 소저를 기다릴 상황이 아니다.’
등에 멜 수 있도록 만든 보따리에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보았자 잠잘 때도 곁에 두는 탐식유랑기 원본, 솥, 가죽집에 넣은 식칼과 허리띠, 옷가지 두 벌이 다였지만, 그에게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소중한 것들이라 절대 놓고 갈 수 없었다.
“후, 후, 후…….”
지팡이에 의지해서 힘겹게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중에 마 상궁의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마 상궁은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사람이니, 밖에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고 단꿈에 빠져 있으리라.
‘이대로 그냥 두고 떠나면 마 상궁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녀를 걱정할 입장과 상황이 아니지만, 진 상궁의 말이 떠올라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목적이 옳으면 과정 중에 일어나는 희생은 괜찮다고 생각하실까 봐요. 나쁜 사람이라면, 혹은 나쁘다고 알려졌다면 죽음으로 징벌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실까 봐 두려운 거예요.’
마 상궁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솔직히 어느 한쪽으로 단정 짓지 못하겠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 바보 같을 만큼 너무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할 만큼 독해지길 원한 게 아니었어요.’
소중한 사람이 아니면 죽건 말건 위기에 빠지건 말건 외면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자신은 독한 사람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하지만 독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부정적 감정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다.
진 상궁을 만나면 당연히 탈출 과정을 빠짐없이 이야기할 거고, 사실을 알았을 진 상궁이 또다시 실망하고 걱정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이기적이고 편협한 마음에서 나오는 욕심일 수도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 상궁, 어서 일어나요.”
몇 번을 흔들어도 요지부동이라.
“냠냠…….”
어쩔 수 없이 따귀를 때렸다.
철썩!
“뭐, 뭐야!”
한 번에 일어나는 걸 보면 꽤 아팠던 모양이다.
“어머, 미쳤어! 삼왕자님이 왜 내 방에 들어와 있어요! 설마!”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기에 정색하며 아니라고 하자, 아직 새벽인데 왜 깨웠냐고 화를 냈다.
하지만 곧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사색이 되었다.
“어, 어떤 제후국에서 쳐들어온 거죠? 초나라? 제나라? 진나라?”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 알 수도 없지만, 일단 쳐들어온 이들이 누구건 관심이 없었으니까.
주나라가 무너지건, 어떤 제후국이 그 자리를 대체하건,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테고, 생각은 피신하고 나서도 늦지 않으니, 어서 나갑시다.”
평소 삼왕자를 무시해 왔던 마 상궁이지만,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값어치가 될 만한 순서로 해서 짐을 챙기고, 삼왕자를 뒤따라 방을 나왔다.
그런데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삼왕자가 멈췄다.
마음이 급했던 마 상궁은 신경질적으로 따졌다.
“왜요, 왜 안 가는데요?”
대답은 삼왕자의 입이 아니라, 어둑한 담장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마침 삼왕자님께서 나와주셨군요. 소관은 기도위 교흥입니다. 전하의 명을 받아 삼왕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교흥의 뒤로 5명의 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과 고민으로 어두웠던 마 상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곤녕궁에 있을 때 먼발치에서 교흥을 몇 번 보았고, 무공도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삼왕자는 괜히 찝찝했다.
고왕이 자신을 데려오라 했다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평생에 걸쳐 외면했으면서도 죽는 건 원치 않는 거 같으니까.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사소한 부분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래서 물었다.
“왜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교흥과 군사들은 담장을 넘어서 온 게 분명했다.
정문이든 뒷문이든 닫혀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면 두드리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없고 급해서일 수도 있겠으나, 문을 부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저들의 능력이면 한 번만 힘껏 걷어차도 정문이 부서지거나, 빗장이 부러질 테니까.
또한, 그랬다면 삼왕자와 마 상궁이 소란을 듣고 깨어나, 놀라서 뛰어나오는 부가적 효과도 생겼을지 모르고.
‘물론, 괜한 오해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대답하지 않는 교흥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고.
‘저들은 날 죽일 생각이다.’
처음엔 아니었는데, 지금은 눈동자에서 노골적인 살의가 보였다.
문득 이런 상황에서도, 아니 이런 상황이기에 자신을 죽일 기회로 삼고, 교흥 등을 부릴 만한 신분의 사람이 떠올랐다.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교흥 등의 의도를 알아챈 삼왕자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한 박자 늦게 교흥 등의 태도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마 상궁도 뒷걸음쳤다.
“삼왕자님,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가시지요.”
말은 그렇게 해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교흥과 군사들의 손은 칼의 손잡이로 움직이고 있다.
그때, 지붕 위로 2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게 누구신가. 고왕의 발바닥이나 핥고 있어야 할 똥개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두 사내 중 앞서 있는 이의 얼굴을 본 교흥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냉안마도(冷顔魔刀)!”
얼굴이 늘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다고 해서 별호가 냉안마도인 영소는 무림에서 유명한 도객이다.
하지만 교흥이 그를 알아본 건 무림의 명성 때문이 아니라, 왕자 희조의 최측근이었던 대부 빈기의 식객이자 호위로 왕성을 찾아왔을 때 마주쳤던 인연이 있어서였다.
게다가 그냥 마주치기만 했던 게 아니라, 윗분들의 자존심 싸움에 엮이어 비무까지 했던 사이다.
그 결과가 치욕스러워 떠올리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주눅이 들진 않았다.
그때의 패배로 이를 갈며 무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이번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냉안마도 영소!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지?”
왕자 희조가 암살당한 후, 빈기와 잔당들은 오월이 멸망하고 무주공산이 된 태호 동쪽으로 도망쳤다고 알려졌다.
당연히 냉안마도도 빈기의 호위로서 함께 갔을 테니,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교흥은 냉안마도의 대답도 듣지 않고,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버럭 소리쳤다.
“설마 왕성을 공격한 게 역적 희조의 잔당이었던 거냐!”
냉안마도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너하고 잡담을 나누러 온 줄 아냐.”
빈기가 그를 보낸 건, 웅사여가 삼왕자를 반드시 제거하라면서도 삼왕자를 노렸다는 걸 누군가 목격하고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은밀히 처리해야 한다며, 직접 그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웅사여는 냉안마도라면 절대 실패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거다.
“상 사제, 일단 방해물부터 제거하자.”
냉안마도와 함께 온 건 그의 사제 다정마도(多情魔刀) 상치였다.
늘 미소를 짓고 있어 다정해 보인다는 의미의 별호를 얻었으나, 어릴 때 사부에게 맞아 얼굴을 다친 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웃는 상이 되었을 뿐, 냉안마도 못지않게 냉혹한 자였다.
사실 잔혹하기는 다정마도가 더 했다.
냉안마도보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부족한 걸 잔혹성으로 메워 명성의 균형을 맞춘 결과였다.
“그럽시다, 사형.”
교흥과 군사들이 삼왕자를 호위 중이라고 오해한 냉안마도와 다정마도는 곧장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젠장!’
교흥은 냉안마도와 다정마도가 왜 하필 유일각에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으나.
“역적놈들을 죽여라!”
군사들과 함께 땅에 착지한 둘에게 달려들었다.
“삼왕자님, 우린 이 틈에 빠져나가요.”
마 상궁이 삼왕자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너는 삼왕자에게 가봐!”
냉안마도와 다정마도를 상대하는 사이에 삼왕자가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교흥이 군사 1명을 그들 쪽으로 보냈다.
주나라에서 무공 실력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신과 일류고수에 준하는 최정예 군사 4명이면, 냉안마도와 다정마도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다.
“마 상궁, 이쪽으로 와요.”
삼왕자는 당황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 상궁을 주방 쪽으로 잡아끌었다.
군사는 놀라서 서둘러 달려왔다가, 주방에 따로 출구가 없다는 걸 알고 어이가 없었다.
‘막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멍청이들이 어딨어.’
그런데 삼왕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작은 항아리까지 집어 드는 게 아닌가.
삼왕자의 눈짓을 받은 마 상궁도 머뭇거리며 항아리를 집어 들었다.
‘설마 저걸 던져 저항하겠다고?’
군사는 최후의 발악인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코웃음을 쳤다.
항아리 따위로 자신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군사는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뛰어들려던 그때, 뒤에서 교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조심해!”
하지만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매서운 기운이 군사를 휩쓸었다.
서걱-
목이 잘린 군사의 머리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풀석-
젖은 짚단처럼 무너진 몸은 핏물을 울컥울컥 뿜어냈다.
그리고 군사가 삼왕자를 피신시키려는 줄 알았던 냉안마도가 보낸 다정마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전혀 다정하지 않은 시선으로 두 사람의 위아래를 훑으며 히죽거렸다.
“이제 너흴 보호해 줄 잡것들은 없다. 그러니까 순순히 목을 내밀어. 아니면 한 번 괴롭히고 죽일 거, 두 번 괴롭히다 죽일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