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31
31화
31. 천 배, 만 배
방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너라도 이미 완성된 음식을 어떻게 바꿔.”
확실히 세상에는 한 번 완성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바꿀 수 없는 게 있다.
음식도 그중 하나.
“소면은 면이 생명인데 이렇게 끊기다 못해 풀어 헤쳐질 지경이고, 염소 고기는 건져내서 다시 볶는다고 해도 이 시커멓게 탄 양고기는…….”
남매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자, 방희는 헛기침하며 말을 급히 마무리했다.
“하여튼, 엎질러진 물은 도로 담을 수 없잖아.”
그러나 바꿀 수 없다는 건 실패가 분명하기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원동력이 되고, 미련 두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쓸데없이 재료, 시간, 노력을 낭비할 거 없이, 그냥 다…….”
방희는 말을 하다 말고 진천의 속셈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새로 만들 수밖에. 요 영악한 것. 그래, 어차피 나가서 사 먹으려고 했으니, 네가 만든다면 굳이 나갈 이유는 없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님. 그렇다면…….”
진천은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얼떨떨해서 쳐다보는 남매에게 말했다.
“주방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한 번에 여러 개를 만들어야 하니, 둘이 옆에서 보조도 해줘야 합니다. 보다시피 한 손이 이래서요.”
대답을 망설이는 남매에게 방희가 말했다.
“내 동생은 내가 아는 한 중원 최고의 숙수야.”
남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인 데다,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기엔 진천이 너무 어려 보여서다.
‘게다가 본인도 인정했다시피 오른손이 없고.’
손이 하나뿐인 숙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하지만.
“내 동생이 너희의 보조를 받아서 요리한 음식을 가져오면 이 망친 음식까지 포함해서 값을 계산해 줄게.”
방희의 말에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남매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모든 말씀하세요.”
* * *
“나는 진천이라고 합니다.”
“전 안홍이에요. 동생은 안수고요.”
안홍, 안수 남매는 진천보다 어렸다.
“저…….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안홍이 조심스레 친근한 호칭을 써도 되냐고 물은 건, 칼을 지닌 방희와 탁발을 설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진천과 친해 두어야,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최악의 상황에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진천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럼요.”
안수도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도, 형으로 불러도 돼요?”
“되죠.”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어투는 존대인지라, 진심인지 형식적인 대꾸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안홍은 말했다.
“진천 오빠, 우리가 어리니 말씀을 편히 하세요.”
“나는 나이로 상하 구분을 짓고, 어투를 바꾸지 않습니다.”
진천에게 반말은 2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
하나는 진 상궁처럼 더할 수 없이 친근하고, 믿을 수 있는 상대를 대하는 어투.
다른 하나는 전혀 존중해 줄 필요가 없는 상대라고 판단할 때 쓰는 어투.
안 남매는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으니, 말을 놓을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사실 오빠, 형 호칭을 받아들인 것도 요리 과정의 원활함을 위해서지, 안 남매와 친근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자, 그럼 식재료부터 시작합니다. 고기의 신선도는 냄새로도 알 수 있어요. 시큼한 냄새가 나면 부패가 시작된 거죠. 고기의 색이 붉은빛이 아닌 푸른 빛을 띠면 변질을 의심해야 하고요. 표면이 갈라졌다면 육즙이 빠져나갔을 만큼 오래되었다는 의미예요. 만약 표면이 끈적거리면 상했다는 징후니까, 절대 사면 안 됩니다.”
진천은 각 음식에 사용하는 식재료의 구성과 고르는 법, 다듬는 법 등을 남매에게 설명하고.
“어쩔 수 없이 숨이 죽은 야채라도 조리 전에 물에 담가두면 신선도가 살아나요.”
“소면의 면은 삶은 즉시 찬물로 여러 번 닦아야 특유의 텁텁함이 사라지고, 쫄깃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요. 그러고도 가장 마지막에 넣어야 해요.”
“칼집을 촘촘히 내면 고기가 연해져요. 다만, 끊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볶음 같은 경우엔 물을 너무 많이 넣지 말아요. 시간이 지나면 야채에서도 충분한 물이 나오니까.”
그러나 실제로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완성하는 과정은 남매가 모두 직접 하게 했다.
“칼을 잡을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손잡이를 세 손가락으로 잡고 집게손가락을 칼날 등 쪽에 붙인 다음 엄지손가락을 칼날 면에 대고 힘 있게 쥐는 겁니다. 손잡이를…… 저밀 때는 칼 끝부분으로 시작해 칼 중간 부분으로 저미면 더욱 정교하게 할 수 있어…….”
이후로도 진천은 과하다 할 만큼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진천은 말만 하고, 손을 쓰는 건 모두 남매였지만.
안수는 지시를 따라 요리하기도 바빠 그저 열심이었으나, 안홍은 내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왜 말로만 설명하고, 아무것도 안 하지? 혹시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협잡꾼 아냐?’
생각해 보면 설사 왼손잡이라도 보조할 손도 없이 식재료를 칼로 썬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방희는 진천에게 직접 요리하게만 해주면 모든 값을 치르겠다고 했으나, 오늘 처음 본 손님의 약속이라 지킬 거라 굳게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불안하기도 했고.
결국.
“진천 오빠는 아무것도 안 하실 거예요? 직접 만들지 않으면 요리가 아닌 건데, 오빠의 누님이 그걸 핑계로 딴죽을 걸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잠시 생각하던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사실 진천의 목적은 남매가 빠르게 습득하도록 유도한 것이었고, 혹시 자기가 칼질하는 걸 보면 남매가 위화감을 느끼고 주눅이 들어 자신감을 상실할까 직접 하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
“여기 있는 재료는 내가 다듬겠습니다.”
그리고 진천은 오른 손목으로 고정할 것도 없이 왼손으로 칼만 휘둘러 재료를 순식간에 썰어냈다.
“…….”
안홍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 만큼 엄청난 칼솜씨였으니까.
안수 역시 마찬가지.
“와~ 형! 어떻게 하면 그렇게 칼질을 잘할 수 있는 거예요? 오른손은 보조도 하지 않는데, 와, 엄청 신기해요.”
그러나 진천의 대답은 건조하게 느껴질 만큼 단순했다.
“될 때까지 계속 썰어야죠.”
진천은 글을 쓸 때처럼, 불편한 왼손으로 식재료를 실수 없이 썰기 위해 틈나는 대로 수없이 연습했다.
“얼마나요? 천 번? 만 번?”
진 상궁이 그랬다.
‘노력은 숫자로 셀 수 없어요.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으면, 어떤 숫자도 부족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숫자는 무의미했다.
세보지 않았으니, 대답할 말도 없었고.
그러니 진천의 대답은 이전과 똑같을 수밖에.
“그냥 계속 썰어야 해요.”
안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안홍은 달랐다.
“죄, 죄송해요. 제가 바보 같고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요.”
뒤늦게 진천이 대단한 숙수임을 깨닫고, 말로만 가르쳤던 의도 또한 알아채고 반성하며 사과한 안홍은 이후 불평불만은커녕 진천에 대한 믿음만 단단해졌다.
자기들이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완벽한 모양새의 음식이 만들어진 걸 보고는 저도 모르게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음식마다 양을 조금씩 많게 했어요. 다음에 만들 때는 그걸 고려해서 조금씩 적게 해서 만들면 돼요. 시식해 보라고 더 많이 한 거니까, 둘이 맛을 봐봐요.”
안 남매는 조심스레 소면을 먹어보았다.
“와, 소면이 이렇게 맛있다고?”
“의숙부님이 만드신 소면보다 맛있어!”
소면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야채가 너무 상큼해!”
“양고기가 원래 이렇게 부드러웠다니”
“양념이 이렇게 달콤하고, 담백할 줄이야!”
진천은 술단지의 향을 한 번 더 맡아보고는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며 그릇을 비운 남매에게 물었다.
“이 술은 의숙부님이 빚은 거죠?”
“네.”
“여분은 얼마나 있죠?”
“창고 가득 있어요. 숙성시켜야 하신다고 미리 많은 양을 빚어두셨거든요.”
“다행이네요. 술은 설명을 듣는다고 단번에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만드는 방법은 알려주겠지만, 더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해요. 그리고 비용도 많이 들죠. 당장은 이 정도 술이 딱이에요. 물론, 여유가 생기고, 숙련도가 늘면 더 좋은 술을 빚어야 할 거예요. 자, 이제 음식을 누님과 형님께 가져다 드리죠.”
진천은 안 남매와 함께 음식을 챙기고 나가면서, 기억하라고 당부하며 황주 제조법을 차근히 몇 번을 반복해 설명했다.
“형님, 누님, 음식 나왔습니다.”
“좋았어!”
끄덕끄덕
방희가 맛을 보지도 않았는데 환호부터 지르는 건, 그만큼 진천의 요리 솜씨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다.
실제로도 맛은 훌륭했고.
“어머나, 맛있어라! 동생도 얼른 앉아서 먹어! 여보야, 술도 한잔해. 나도 한잔. 캬, 안주가 좋으니까, 술맛도 좋다. 그지, 여보?”
끄덕끄덕
신이 난 방희는 남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너희도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우리 동생한테 많이 배웠고?”
“네, 진천 오빠가 알려주신 대로만 하면 앞으로 욕먹을 걱정은 없을 거 같아요.”
“누나, 그게 아니지. 진천 형 덕분에 우리 객잔은 대박이 날 거라고!”
“어머, 그렇네. 오빠는 우리 객잔의 은인이세요!”
방희가 술을 홀짝이다가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맞다, 내가 아까부터 말한다, 하면서 깜빡했는데, 너희 객잔의 이름부터 지어.”
“객잔의 이름이요?”
“대박이 나려면 입소문이 나야 하고, 그래서 누구나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좋아야 하는데, 여긴 모든 게 두루뭉술이야. 객잔만이 아니라, 음식에도 이름을 붙이고.”
안홍은 자연스레 진천을 쳐다봤다.
“오빠, 이름을 뭐로 해야 할까요?”
“글쎄요. 음, 이름은 누님이 지어주세요.”
애초 방희가 아무 생각도 없이 꺼낸 말은 아닐 테니까.
역시나 짐작대로 방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오미객잔 어때. 네 가지 음식과 하나의 술이 맛있다는 의미의 이름이지.”
“좋은데요!”
“누나, 오늘부터 그냥 바로 오미객잔이라 부르자.”
“그래, 그러자. 명판은 나중에 돈이 생기면 만들고.”
진천은 품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명판은 이걸로 만들어요.”
여가상단과 헤어지며 받은 급료였다.
“네? 안 돼요. 오빠가 요리하는 법도 알려주시고, 이미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런 큰돈은 받을 수 없어요.”
“돈은 필요할 때 쓰라고 있는 거예요. 난 당장 쓸 필요가 없으니, 둘이 이걸 써요.”
“그래도 안 돼요.”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갚아요.”
물론, 다시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망설이던 안홍은 눈물을 글썽이며 돈을 받았고.
“꼭 갚을게요. 오늘 베풀어주신 은혜는 천 배, 만 배 키워서 돌려 드릴게요.”
“그러려면 오미객잔이 지금보다 천 배, 만 배 잘 되었다는 뜻이니, 나는 그때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받겠습니다.”
“하하, 분위기 좋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누님께서 음식들의 이름도 지어주마.”
방희가 소채를 가리키며 막 이름을 말하려는데.
“안홍아! 안수야!”
웬 노파가 다급히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인근에서 당호로를 파는 송 씨였다.
“할머님, 무슨 일이신데 그러세요? 일단 이리로 앉으세요.”
“지, 지금 앉을 때가 아니야. 두, 두 숙수가! 너희 의숙부가 죽었어!”
* * *
웅성웅성!
송 노파의 말을 듣자마자 온 힘을 다해 마을 중심으로 달려간 안 남매는 인파가 둘러싼 매화나무 꼭대기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의숙부님!”
“안 돼요, 안 돼요!”
의숙부 두태가 매화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명과 같은 외침에 반응하여 뒤를 돌아본 사람들은 안 남매를 알아보았고, 좌우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남매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거의 기어가듯 매화나무를 향해서 나아갔다.
“들어가게만 하면 끝인가. 저 애들이 무슨 힘이 있어 시신을 내린다고 빤히 구경만 해.”
안 남매를 뒤따라온 방희가 역시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며 투덜거리는 말에 사람들은 이 여자는 뭔데 자기들을 비난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방희가 등에 멘 칼이 덜렁거리는 걸 보았고, 뒤이어 엄청난 거구의 탁발이 역시 커다란 칼을 등에 메고 있는 걸 보자, 반박은커녕 경쟁적으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진천은 그러려니 하며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지나쳤다.
안 남매는 저 위로 축 늘어져 있는 두태의 발밑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오열했다.
방희와 탁발은 내막을 알지 못하면서도 죽음 그 자체가 발산하는 막연한 슬픔에 동화되어 찹찹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고.
주위를 둘러싼 이 많은 사람이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숙덕이는 것도 죽음이 태생적으로 가진 어두운 힘에 압도되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진천만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전체적인 모양새는 자살인데, 분리하여 세부적으로 보면 타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뒤에서 마치 진천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이 들려왔다.
“저거 교살인데?”
교살(絞殺)이라는 건 여러 살인 기술 중에서도 목을 졸라 죽이는 방식이다.
숙덕거림조차 사라지고, 심지어 오열하던 안 남매까지도 누가 그런 대담한 주장을 했는지 확인하려고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방희가 깜짝 놀라며 말이 들려온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말을 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목적지가 같고, 자칭 거지라고 주장하던 무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진천의 경우엔 이름도 알았다.
‘제갈신기.’
의심을 사면 안 되니까, 이목을 끄는 짓은 하지 말라고 했건만.
그러나 제갈신기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서 죽은 것도 아니야. 여기서 목을 맨 거면 아래쪽 구멍에 힘이 풀려 바닥이 온통 똥오줌으로 질척해졌을 거라고.”
그래서 주위에 악취 또한 진동했어야 할 텐데, 시신의 발밑은 안 남매가 무릎 꿇고 있어도 될 만큼 말끔하다고 말한 사람은 남궁쾌였다.
남궁쾌 옆에 있던 당무독도 듣고만 있지 않았다.
“교살을 감추기 위해 시신을 이리로 가져왔고, 줄로 목을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둔 거네. 얼마나 정신 나간 놈이기에 사람을 죽여놓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저런 수작을 해놓은 거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매달아둔 것도 기이한 일이다.
그때였다.
“공무 중이니, 길을 비켜라!”
포쾌를 선두로 다수의 정용이 우르르 나타나 사람들을 좌우로 밀치고, 매화나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희들, 본관의 진로를 막지 말고 물러나!”
주저앉아 있는 안 남매에게 신경질적으로 명령한 선두의 포쾌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남매가 비키려는 거 같긴 한데, 일어나는 움직임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굼벵이도 이런 굼벵이들이 없네! 이것들아, 내 말을 무시하냐?”
포쾌는 가까이 있던 안수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진천이 시기적절하게 지팡이로 포쾌의 발을 툭 밀어냈다.
지팡이를 쓰는 움직임이 보기엔 단순하나, 신묘한 기교가 담겼다.
사량의 힘으로 천근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이다.
즉, 포쾌가 발길질에 담은 힘을 몇 배로 부풀려서 되돌려 주는 상승의 수법이었다.
그래서 포쾌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가볍게 밀어냈을 뿐인데도, 포쾌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한 바퀴 크게 빙그르르 돌아서, 꼴사납게 벌러덩 넘어지게 된 거다.
물론, 사람들 눈엔 발길질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포쾌가 단순히 지팡이에 걸려 넘어진 걸로 보였겠지만.
포쾌는 상상을 넘어선 충격에 욱신거리는 허리와 엉덩이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천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진천이 어떤 엄청난 무공을 펼친 걸로 생각해 놀란 건 아니었다.
‘내가 고작 저따위 병신의 지팡이에 막혀 넘어졌다고?’
라는 생각을 하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진천은 말했다.
“느긋이 기다리든가, 못 기다리겠으면 빙 돌아가면 되지,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왜 발길질을 해요?”
포쾌는 예상하지 못한 지적질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동자가 뒤집힐 것처럼 눈을 치켜뜨며 삿대질했다.
“네놈이 감히 포쾌인 내게 훈계를 해!”
그러나 진천은 전혀 놀라거나 겁먹지 않고,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마치 당신이 삿대질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이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 포쾌는 정용들에게 버럭 호통쳤다.
“감히 본관을 능멸한 저 어린 병신새끼를 당장 포박하고, 내가 그만두라 할 때까지 매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