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72
72화
72. 비교도 안 될 매운맛
루주를 대면하고 가장 의아했던 건 너무나 어린 외모가 아니라, 그녀에게서 광풍회 회주와 철혈방 방주보다 더 강한 기도가 느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루주의 입에서 평천우명교의 교주가 거론될 줄이야.
‘루주가 평천대성이 말한 사제 중 하나였나 보군.’
게다가 평천대성의 다른 호칭이 우마라는 건 진천도 금시초문이고, 평천우명교의 교도들도 몰랐던 만큼, 루주와 평천대성의 내밀한 역사는 평천우명교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 하는 짓이나, 말하는 꼴이나, 순순히 떠날 거 같진 않군.”
루주와 평천대성이 어떤 관계이든 진천은 관심이 없었다.
“반응이 재미없네. 나와 우마의 관계가 안 궁금해?”
“궁금하지 않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지 뭐. 왜 내가 루주를 그만두고, 허현을 떠나야 하는데? 공격 안 할 테니까, 안심하고 대답해.”
공격할 의지가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건지, 루주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을 그리듯 옆으로 움직이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진천은 새삼 제자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떠나야 제자들을 포함한 주사청루의 여인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자유? 하하하, 내가 제자들을 억지로 붙잡아두었다는 거야? 제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족쇄를 채웠니?”
제자들은 일제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들었지?”
“물질적인 것만이 속박은 아니다. 이상한 규칙을 만들어 정신적으로 강제하고, 원치 않는 행위를 하게 만든 것도 속박이다.”
“진 문주는 말을 빙빙 돌리는 나쁜 버릇이 있네. 남녀가 몸을 섞는 게 입에 올리기도 역겨운 짓이니? 고고한 척은.”
“당신은 오직 돈을 위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런 정도 없는 사내와 잠자리를 가져야만 하는 게 옳다는 건가?”
“옳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가 아니지. 나는 생존은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거든.”
“생존?”
루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제자들아,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구나. 이럴 때는 뭐가 필요할까?”
제자들은 일제히 음악이라 말하고, 각자가 물러나 있던 벽에 걸린 악기들을 꺼내 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좋구나, 좋아.”
그러자 단순히 원을 그리듯이 걸음을 옮기던 루주가 음율과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볍게 들썩이던 춤이 빠르게 동작이 커지면서, 실로 경탄이 나올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변모했다.
루주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 물었다.
“진 문주, 나의 춤이 어떠하냐?”
“훌륭하군.”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나의 고명하신 천마(天魔) 사부는 이 춤을 수없이 보고도 단 한 번 칭찬한 적이 없으셨지. 대신 다른 걸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하셨어. 그게 뭘까?”
“…….”
“진 문주는 똑똑한 애송이니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답이 뭔지 알 거야.”
모를 수가 없었다.
춤 자체가 몸매의 선을 살리는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풀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맨살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이 춤은 음악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목적이 아니야. 사부가 느끼는 내 몸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거지.”
루주의 설명을 듣고 나니, 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물에 씻기듯 사라졌다.
루주에게 분풀이를 해야겠다는 의지도 사그라들었고.
“나는 어릴 때부터 춤을 사랑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 하지만 사부는 그런 재능에는 관심이 없었어. 나의 제자들을 봐. 춤과 노래, 악기를 다루는 것에서부터, 차를 만들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 거의 못 하는 게 없을 만큼 다재다능해. 제자들뿐만이 아니야. 주사청루와 화류항에 속한 여인들은 최소 하나 이상의 예술적인 기술을 습득했지.”
제자들의 연주는 점점 구슬퍼지는데, 루주의 춤은 색정적인 색이 점점 진해졌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태생적 욕망은 바뀔 수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어느 남자도 제자들의 재능에는 관심이 없어. 화류항의 아이들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화려하게 춤을 추고, 매혹적인 문장의 시를 써도, 남자들의 관심은 똑똑한 애송이도 짐작하고 있는 그것뿐인 거야. 이건 뭐 교미밖에 할 줄 모르는 짐승과 다를 게 없어요.”
말만 들어도 루주가 남자를 혐오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해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었고.
그렇다고 규칙까지 정해서 주사청루와 화류항에 매색을 정착시킨 루주의 선택이 이해된다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욱 수긍이 가지 않았다.
“진 문주, 주사청루는 기루가 아니야. 화류항도 유곽이 아니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어.”
그렇다면 지금의 주사청루와 화류항은 뭐란 말인가.
“나는 우마에게 빼앗은 돈을 남김없이 투입해서 이 거리에 여자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단다. 그리고 버려지거나, 도망쳤거나, 팔렸거나, 납치되었거나, 어떤 이유로든 갈 곳이 없는 여자는 누구나 살 수 있게 했어. 하지만 먹고 사는 것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으니까, 화류항 내에서만 받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받으라고 했지. 요리하든, 옷을 지어주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주든, 물건을 팔든,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의뢰를 받으라고 말이야.”
루주의 춤은 색정을 넘어 음란해졌다. 그녀의 낯빛도 달아오른 것처럼 붉어졌고, 숨결도 끈적끈적해졌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은 남자뿐이고, 술을 팔라고 하더니, 결국 술에 취해서는 잠자리를 요구하는 거야.”
그러나 기이하게도 음성은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기만 했고, 또렷하게 들렸다.
“잠시 고민했지만, 춤을 추고 돈을 받나, 몸을 잠시 빌려주고 돈을 받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더라고. 그래서 의뢰를 받으라고 했지. 알겠어? 우린 몸을 판 게 아니라, 의뢰를 받은 거야.”
“…….”
“대신 여자들을 쉽게 본 남자들이 기고만장해서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규칙을 정했어.”
루주는 자신의 결정으로 구축한 운영방식을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화류항을 찾는 남자는 갈수록 늘어갔지. 흑도문이 관리하던 기루의 고객들까지 이쪽으로 몰려들어, 그쪽 기루는 몽땅 망했어. 부자이거나 성공한 남자들은 경쟁적으로 돈을 뿌리며 주사청루에 오르는 걸 당연시했고. 광풍회 같은 잡것들이 보호해 주겠다고 치근덕거리긴 했으나, 뭐 큰 문제는 아니었어. 흑도가 그렇잖아. 강자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것들이라, 개인적으로 수장들을 찾아가 무력 시위를 하자, 몇 푼 주는 것으로 간단하게 타협이 되더라.”
광풍회 회주와 철혈방 방주가 힘을 합쳐도 루주를 감당할 수는 없었을 테니, 적은 돈이라도 챙겨 위안으로 삼았을 거다.
“진 문주, 내가 이 바닥을 관리하면서 뭘 깨달았는지 알아? 여자가 갑이 되고, 남자를 을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공짜가 아니라는 걸 남자에게 명확하게 각인시켜주는 거야.”
진천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게 당신의 변명인가?”
루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답답한 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자가 뭘 알겠어. 자기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자들이 얼마나 큰 두려움에 맞서고,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려울 거야. 권력자는 대부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냉철한 자들이니까. 타인의 희생과 고통도 자기에게 피해가 없고, 이득이 된다면 당연하게 생각하지. 당신처럼.”
“뭔 개소리지?”
“다수의 대중을 억압하는 권력과 탐욕의 주체는 성별의 구분이 없어.”
“개 소리 하지 마!”
“명령하는 사람. 명령을 받는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이지?”
“…….”
“평천대성에게 빼앗은 돈으로 화류항을 건설한 건 훌륭하다. 설사 당신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하지만 당신은 그 이후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했지? 지금 당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현령을 지키기 위해서 제자들이 목숨을 건 대가는 어느 주머니로 들어간 거냐. 여자들이 풍족해지고, 갑이 되기 위해서 수많은 남자에게 몸을 내주어도 된다는 논리는 도대체 누굴 위한 변명이냔 말이다.”
루주는 즉시 반박했다.
“내가 거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알아? 나는 선의를 베푼 거야.”
“다른 흑도문처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여자들을 착취하는 건 위선이고, 위선은 결코 선이 아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했는데?”
“힘들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지. 오래 걸리더라도 다른 방법을 시도했어야지.”
“흥, 어느 세월에?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시달리고, 학대당하다가 다 죽고 나서?”
“당신이 시달리지 않게, 학대당하지 않게 보호하면 되잖아.”
“내가 왜? 거주할 곳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나는 할 만큼 했어.”
“당신은 강하다.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고. 여자들을 보호하겠다고 작심까지 하고, 이미 시작까지 했다면, 중간에 포기해선 안 돼.”
“세상의 여자들을 내가 다 지키라는 거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혼자 안 되면 제자들과 함께하고. 그래도 역부족이면 제자들을 더 늘리면 되잖아.”
“그게 쉬운 줄 알아?”
“누가 쉽다고 했나. 어렵겠지. 고통스러울 거고. 하지만 극복할 수 있잖아. 끔찍한 사부 밑에서도 꿋꿋하게 참아내며 무공을 연마한 끝에 결국 속박에서 벗어나, 이렇게 당당히 살아 있는 당신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순간 루주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어렸다.
진천은 저 미묘한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문득 루주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당신처럼 약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무공을 익혔다. 당시엔 힘들었으나, 지금 그 결실을 보고 있지. 당신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루주가 웃었다.
그러나 즐거운 웃음도 아니고, 비웃는 웃음도 아니고,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뭔가 겁을 먹은 듯한 웃음이었다.
“애송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나의 힘으로 당당히 벗어난 게 아니야. 천운처럼 생겨난 기회를 틈타 도망친 거지. 사부에게? 아니야. 그 무섭고 강력했던 사부를 죽인 자로부터 도망쳤다. 내가 왜 마음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할 수 있는 잡것들과 협약을 맺은 줄 알아? 죽지 않기 위해서 숨어 있는 중이니까. 함부로 나댔다가 그자에게 발각되면 안 되니까. 멍청한 우마도 그랬고, 나보다 강한 다른 사형제들도 마찬가지 꼴이지.”
“…….”
“그리고 문주는 착각하는 게 하나 더 있어. 우마를 상대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 오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긴 했었나 보네. 왜 그런 줄 알아? 우마와 나는 무공 따위를 익혀서 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이야.”
순간 춤을 추던 루주의 옷이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내가 가진 힘은 마공이다!”
그녀의 몸에서 안개 같은 것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5층 전체를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 * *
진천은 환골탈태한 후로 고검치를 상대로 싸웠던 때를 제외한다면 위협에 직면했던 적이 없었다.
사실 고검치의 경우도 위기로 보긴 어려웠고,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경험하듯 싸웠기에 실전이면서도 비무에 가까웠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이는 모든 상대가 무공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있었고, 진천은 막대한 선천기와 다양한 상승 무공의 이치를 담은 무상제일공을 통해 해석하고, 포용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루주의 공격은 무공과 궤를 달리하여 광범위하게 시야를 차단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괴이한 수법이지, 하며 고민할 것도 없이 일단 벽 혹은 지붕을 부수어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향기?’
아무리 좋아도 자꾸 맡다 보면 익숙해지고, 질리기까지 하는 음식의 인위적인 냄새 같은 게 아니었다.
맡을수록 계속 맡고 싶어지는 나무와 꽃의 순수한 숨결 같은 향기가 뿌연 안개를 타고 스며오듯 후각을 침투해 왔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향기를 맡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독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내공을 휘돌려 탐색하려고 했으나.
‘이런.’
단전에서 선천기와 내공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뭔가 의식에서 단전으로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연결된 선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숨을 참았다.
하지만 곧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시야를 가린 안개와 같은 것이 이슬처럼 옷에 들러붙어 피부를 촉촉하게 적신 순간, 급격히 가중된 현기증에 비틀거리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향기에 내포된 미지의 성분은 피부를 통해서도 침투한다는 의미.
게다가 청각을 두드리는 음악도 이전과 달라졌다.
음악의 색이 더욱 우울해졌고,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심하게 울리다 보니, 위치를 종잡기가 어려웠다.
마공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진 문주, 나의 강심신공(鋼心神功)을 맛본 소감이 어때? 우마의 강피신공과는 비교도 안 될 매운맛이지?”
깔깔거리는 웃음을 동반한 루주의 음성도 어지럽게 울리고 있어서 위치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순간 희뿌연 안개가 출렁이고, 수십 명에 이르는 루주가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