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203
제203화
정인아가 살며시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당기는 힘은 너무나 약했지만, 나는 그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옷깃을 잡은 그녀의 손이, 그리고 축 늘어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안 갈 수는 있지.”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인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정수리만 보였다. 그녀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고, 그저 내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울고 있을까, 아니면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전에는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말투나 몸짓을 통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우는지 웃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자아낸 그림자가 그녀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그럼, 안 가면 안 돼?”
“…….”
“가지 마.”
정인아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유약한 울음기 대신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여전히 삐죽 튀어나와 있다. 내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아도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틀 전에 갑자기 안 가겠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섭다고 해.”
정인아가 내 옷깃을 한 번 더 잡아당겼다. 나는 맥없이 끌려갔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국교가 달라서, 이슬람이랑 로마니카교가 사이가 나빠서, 위험할 것 같아서 못 가겠다고 해. 아니면 비행기 타는 게 무섭다고 해도 되잖아.”
“무섭지도 않은데 무서운 척을 어떻게 해.”
“왜 못 해? 너 거짓말 잘하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실기고사 때 내가 그녀를 속였던 일을, 그녀는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인아는 한참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 방금은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말했어.”
“아니야. 실기고사 때 일은…… 나였어도 기분 나쁠 만했으니까.
“사실은, 그냥……. 내가 무서워서 그래.”
정인아가 옷깃을 놓으며 말했다.
“뭐가 무서워?”
“못 돌아올 것 같아서.”
“돌아올 거야.”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도 미소를 지어 주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못 돌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테러를 당할 수도 있고, 사탄교가 나타날 수도 있잖아.”
“그런 일은 보통 안 일어나.”
“보통 안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너무 많이 겪었어.”
나는 정인아를 보았다.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눈빛에 그토록 진한 슬픔이 담길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 있어?”
“괜찮아.”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다 이겨.”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노려보았다.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진짜 이긴다니까.”
“자꾸 농담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이번에는 진짜─”
“농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돌아올게, 그리고…….”
네 동생을 낫게 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게.
뒷말은 내뱉지 않고 담아두기로 했다. 나는 선교여행에서 역행의 지팡이를 얻어낼 것이고, 그로 하여금 정윤아를 사람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그녀도, 나도.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선교여행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 약속은 지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뭐?”
내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학교 째고 밥이나 먹자.”
“……방과 후에 가면 되지, 학교는 뭐 하러 째. 양아치야?”
“학교 째고 가면 더 스릴 있잖아.”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그럼.”
그 길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에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입실 시간을 넘긴 뒤였다. 사감이 뭐라고 잔소리를 했다. 맨날 이렇게 늦으면 어떡하냐, 밤늦게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그런 진부한 꾸중이었다.
결국 벌점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렉바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그러면 시간이라도 잘 확인하거라.’
렉바는 아마 내가 입실 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늦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정인아가 멀쩡한 상태라는 것조차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사코 내가 정인아를 만나러 가는 것을 막았던 것이리라.
그래도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 * *
선교여행 당일이 되었다.
공항까지는 각자 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나는 삼촌의 차를 얻어 타서 가기로 했다.
매일 바쁘다고 하며 예배당에 얼굴을 보이긴커녕 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삼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흔쾌히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디라고 그랬더라……. 사우디?”
“어.”
삼촌이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법 여행 분위기가 났다. 삼촌은 하품을 하더니, 껌을 하나 입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사우디면 좀 위험하지 않냐? 이슬람권 국가 아니야?”
“맞아.”
“그쪽은 극단적인 애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뭐, 로마니카교보다 더하겠냐마는.”
“항상 극단적인 애들이 문제지. 고작 2박 3일 다녀오는데 뭔 일 나겠어?”
“야……. 말 조심해. 그거 플래그다.”
“플래그?”
“그런 말 하면 무조건 뭔 일이 난다니까.”
삼촌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마 무슨 일이 나기는 할 것이다. 역행의 지팡이는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것을 훔쳐오는 것이다.
국립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물건을 훔치는데 아무 일도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하다.
허나 나는 박물관 직원의 협조를 구할 수 있고, 역행의 지팡이를 대체할 눈속임용 모조품도 가져왔다. 잘만 하면 작은 해프닝 정도로 상황을 넘기고, 무사히 귀국하는 것도 가능하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너는.”
“그래. 죽기야 하겠어?”
“그렇지, 죽지만 마라. 살아만 있으면 어디든 살길이 있더라.”
삼촌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운전을 계속했다. 내가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삼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사우디면……. 올 때 걔랑 같은 비행기 탈 수도 있겠네.”
“개가 누군데.”
“저번에 말한 저, 경기교단 간부였던 애.”
“이름이 뭐였지?”
“예전 이름으로 부르면 싫어하던데. ‘소피아’라고 부르라더라. 영국에 있을 때 그 이름으로 살았다고.”
“소피아……. 오랜 도피 생활로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약간 그런 것 같아.”
삼촌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소피아, 그러니까 경기교단 간부는 귀국을 위해 이런저런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다. 사탄교가 활동하려는 조짐을 보이면서 출입국 심사가 까다로워진 탓이라고.
삼촌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로마니카교 소속의 위장 신분을 만들어주느라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며 푸념을 덧붙였다.
“뭐, 사탄교 덕분에 돈도 좀 벌긴 했지.”
“뭔 소리야, 그건.”
“출입국 심사가 까다로워지거나, 뭐 전쟁이 날 것 같거나…… 그런 국제적인 불안 상황에서는 단타로 돈을 복사할 수 있거든.”
삼촌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공항 앞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린 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삼촌은 내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들어갔다.
일행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강대만 덕분이었다. 그의 덩치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에 띄었다. 나는 강대만을 이정표 삼아 그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 도선우!”
“목소리 좀 낮춰라, 제발.”
인사하는 강대만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 있는 것은 마유현과 강대만, 그리고 여민서와 한수련이었다. 김진서와 성하연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데 왜 한수련도 있지?
“뭐야? 너 안 온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 그랬지? 근데 마음이 바뀌어서, 그냥 간다고 했어!”
한수련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그리 중요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좋았다. 박물관에서 지팡이를 훔칠 때,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시선이 분산될 테니.
“야, 여민서. 너 비행기 처음 타지?”
아직 안 온 두 명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잡담을 나누었다. 시작은 여민서를 향한 마유현의 시비였다. 여민서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유현을 노려보았다.
“뭔 개소리냐?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아니, 긴장한 것 같길래. 처음 타는 줄 알았지.”
“……나는 원래 사람 많은 곳 안 좋아해, 개새끼야.”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욕을 하냐? 너 설마 진짜 비행기 처음 타냐?”
“사실 나는 아직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라 무척 설레는군.”
두 사람 사이에 강대만이 끼어들었다.
“앗, 그럼 대만아.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어야 되는 것도 모르겠네?”
한수련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며 말했다. 강대만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한수련,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 그럼 승무원한테 팁 줘야 되는 것도 알아?”
강대만은 한수련의 농담에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건 몰랐는데…… 현금을 안 들고 왔다.”
“그래? 빌려줄까?”
“야……. 그만 놀려라. 강대만은 진짜 한다니까?”
마유현이 도중에 한수련을 말렸다. 한수련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강대만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한수련과 마유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민서는 한수련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며 듣고 있었는데, 한수련의 말이 농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김진서가 왔고, 뒤이어 성하연이 왔다. 나는 성하연이 내게 뭐라고 말을 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내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성하연의 표정은 싸늘하고 건조했다. 학기 초, 모두에게 쌀쌀맞던 그때의 성하연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김진서도 내게 손을 흔들어 인사만 했을 뿐, 달리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래서, 승무원에게 팁을 주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아니, 주지 말라고.”
“알겠다! 그럼 신발은─”
뭐라고 말을 하려던 강대만이 말을 멈췄다. 공항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있는 탓이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공항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항 입구로 성직자 무리가 줄을 서서 들어오고 있었다.
행렬은 거대했다. 이름만 선교여행이지 실제로는 관광이 주목적인 우리와 달리, 그들은 사우디에 있는 선교사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기 위해 파견된 성직자들이었다.
성기사, 성전사, 사제가 고르게 편성되어 있었다. 복색이 달라서 구분이 쉬웠다.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 하나가 행렬을 벗어나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남자 옆으로 상대적으로 비리비리해 보이는 남자가 따라붙었다.
둘 다 성기사 규정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덩치와 인상 탓에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 다들 여기 모여 있었네. 반갑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한대호다.”
한대호였다. 그는 우리의 면면을 쭉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선교여행에서, 인솔 겸 안전 요원, 그 외 기타 등등 잡무를 맡게 됐다. 앞으로 3일 동안 잘 부탁한다, 얘들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