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ny Employee Who Sees Destiny RAW - chapter (119)
조재민 의원이 말한 최종기한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조 의원은 이미 정 회장과 단독으로 만난 이후 기자들에게 사흘 안에 다시 협상을 시작할 거라고 선포했었다.
그렇게 되니 정호균 회장으로서는 당연히 협상장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정 회장은 일단 협상장에 올라가는 순간 자신들이 원하는 가격대를 고수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현진물산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호균 회장의 아들이자 무진건설기계를 경영하고 있는 정근호 사장은 계속해서 송은채 사장과의 만남을 시도했음에도 송 사장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보내고 협상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야 송 사장이 정 사장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크흠…”
그토록 원했던 송 사장과의 만남이지만 정근호 사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던 송 사장은 군산조선소 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젊은 남자 한 명을 불러 앉혔기 때문이다.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악수를 청하던 그 청년은 송 사장의 옆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어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보라는 식으로 있으니…
게다가 직급이 겨우 과장.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인 건지, 아니면 이 거대한 딜의 실무진이 정말 저 젊은 청년인 건지 감이 오지를 않았던 거다.
“아마 우리가 사장님을 무시해서 그러는게 아닌가 생각하실 것 같아요. 맞나요?”
“크흠…”
송 사장이 싱긋 웃으며 묻자 정 사장은 이번에도 헛기침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 최 과장이 직급이 과장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유능한데다가 우리 애와 약혼할 사이라서 직급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정 사장이 조금 놀란 눈빛으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요? 그럼 조선소 관련한 모든 일을 컨트롤한 사람이 이 친구입니까?”
“맞아요. 오로지 우리 최 과장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뼈대를 잡은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겠죠?”
“그렇다면야…”
정근호 사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 해봐야 서른 중반이 될까 싶어 보이는 친구가 정치인을 엮어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직접 찾아 오셨으니 하실 말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시죠.”
영훈이 말하자 정 사장은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며 입을 열었다.
“조재민 의원을 움직인게 현진물산이 맞나?”
“그럴리가요. 일개 기업이 현역 정치인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조재민 의원이 저러는 건 온전히 그 스스로의 판단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설마 우리가 조재민 의원을 뒤에서 조종했을 거라고 보십니까?”
영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자 그도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원하는 가격대가 있겠지? 얼마면 되는가?”
“8,500억이면 많이 부담스럽기는 해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7,200억만 가져라?”
“커미션 계산을 다시 해야 하니까 그보다는 조금 더 많겠네요.”
“안 돼. 받아들일 수 없어.”
“에이… 솔직히 내일 협상장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훈이 농을 치듯 말하자 정근호 사장은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어린놈이 사장인 자신에게 저런 식의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만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현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럼 제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원하는 가격대가 어떻게 되십니까?”
“…”
“8천억 정도 생각하고 계시겠죠? 그럼 저희는 손 털고 포기하겠습니다.”
정 사장이 발끈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게 할 말인가?”
“엄밀히 말하면 군산조선소와 해주조선해양 둘 다 가진다는 건 여러모로 모험적인 일입니다. 막말로 무진중공업에서도 군산조선소 안 돌리고 해주조선해양만 먹겠다고 지금껏 그 고생을 해온 거 아닙니까? 솔직히 8,500억도 우리는 굉장히 무리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더 가지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손을 터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제가 틀린말 했나요?”
“…”
이번에도 정 사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
영훈은 그걸 보면서 역시 이 자리에 직접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두 사장의 만남에 영훈은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끼어들 직급도 아니었고 굳이 할 이야기도 없었다.
이야기를 한다고 해봤자 지금처럼 서로의 의견만 주구장창 내밀다 결론을 못 내리고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바뀐 건 들어오는 정 사장의 얼굴을 본 이후였다.
턱이 부실하고 광대가 약한 걸로 보아 말년에 고생을 할 상인데 지금 재벌의 신분이니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민희를 송 사장에게 보내 의중을 전달하고 자리에 참석하며 사주를 확인했는데 역시나 사주와 관상이 일치했다.
“우리는 군산조선소를 인수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가격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우리 현진물산의 입장입니다.”
고작 과장 주제에 사장 앞에서 회사의 입장이 이렇다고 결론을 지어 버리는데 옆에 앉은 송은채 사장은 별말을 하지 않는다.
정 사장은 처음 송 사장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어차피 결론은 아버지인 정호균 회장이 내릴 것이기에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잘 알겠어. 회사 잘 구경했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언제 또 보게되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그렇게 합시다.”
그는 그렇게 간단히 인사하고 회사를 빠져 나갔다.
송 사장은 그가 나가자 영훈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자리하고 싶었던 거야? 정 사장에 대해 알고 싶어서?”
“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무진중공업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어때 보였어?”
“전형적으로 아버지의 능력에 기대 사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
“네. 이성보다 감정에 지배당하는 성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 정도 직급에 있으면서 특별한 카리스마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는 크지만 눈빛에 힘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자신이 하는 말에 신뢰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주에 나타난 그의 성향을 방금 전 만나보며 눈에 띄었던 장면들과 엮어 대충 설명했다.
그 말이 그럴듯한지 송 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 과장 말을 듣고 나니까 조금 그래보였던 것 같아. 무진그룹 사장단의 핵심 인물 치고는 조금 많이 어설퍼 보였다고 할까? 그럼 최 과장이 봤을 때 무진중공업은 정 회장이 물러나고 나서 힘들어질 것 같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부하직원들의 능력으로 회사가 성장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 회사에 큰 위험이 닥치면 슬기롭게 헤쳐갈 능력이 없어 보이네요.”
“흐음…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수고는요. 몇 마디 안 했습니다.”
영훈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송 사장이 넌지시 말했다.
“오늘 봤겠지만 최 과장 직급이 그래서 움직이는데 문제가 많이 있을 수 있잖아.”
“네? 아, 뭐…”
“우리 연희랑 결혼할 생각 맞지?”
갑자기 던진 돌직구에 순간 영훈이 멈칫했지만 이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볍게 만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 최 과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최 과장도 알겠지만 회사가 커지다보니까 이제 온갖 곳에서 우리 연희를 만나고 싶어해. 연희 나이도 그렇고 이제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거든?”
“네…”
“최 과장은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내가 그냥 날을 잡을까 하는데 어때?”
결혼이라니…
산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이제 여자와 연애도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긴 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학력도 보잘 것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신 자신에게 딸을 내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희와 연애를 하면서도 어쩌면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렇게 송 사장이 직접 날짜를 거론하니 기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직 연희씨 의견을 듣지도 못했고 프로포즈도 못했는데요?”
“프로포즈야 나중에 둘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고 연희는 반대하지 않을 거야. 내 딸인데 내가 걔 마음을 모르겠어? 괜찮지?”
“네? 네. 괜찮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네.”
영훈이 사장실에서 나오자 연희가 다가왔다.
“정근호 사장 아까 나갔는데 사장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요?”
“어… 사장님이 우리 둘 날짜를 잡겠다고 하시던데요?”
“어머!”
연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영훈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쑥 들어왔다.
그녀는 문을 닫고 영훈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당신 의견도 중요하고 아직 프로포즈도 못했다고…”
“그래서 안 된다고 했어요?”
쌍심지를 치켜뜨는 그녀를 보며 영훈히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다고 했어요. 좋다고.”
“진짜요?”
연희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영훈에게 와락 안겼다.
영훈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프로포즈도 못 했는데…”
“기대하고 있을게요. 아, 참고로 난 사람들 너무 많이 모아놓고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딱 우리 둘이만. 너무 시끄러운 것도 싫고.”
“아…”
“혹시나 센스가 없을까봐 하는 말인데 반지는 좀 좋은 곳에서 해줬으면 좋겠어요. 브랜드는… 까르띠에는 조금 흔하니까 반 클리프 아펠이 좋겠어요.”
“그러면 내가 뭘 사는지 다 알잖아요?”
“더 기대되는 맛이 있을 것 같아요. 아! 미리 전날에 얘기해줬으면 좋겠어요. 구두랑 머리도 오늘처럼 내가 혼자 하고 나올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장소는 호텔보다는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 어때요? 호텔은 너무 뻔하고 지루해. 차라리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리조트가 좋겠어요.”
보아하니 예전부터 그녀가 꿈꾸던 로망이 있었나보다.
황당하긴 했지만 차라리 이렇게 잘 알려주면 혼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네요.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
붉은 노을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아름다운 풍경을 생각하니 괜히 영훈도 기분이 설레어 왔다.
*
하루 뒤,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을 비롯한 협상 관계자들은 인수금액을 확정짓고 계약을 체결했다.
기사에 쓰인 사진은 조재민 의원이 현진물산 송은채 사장과 무진중공업 정호균 회장이 악수할 때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려놓은 모습이었는데 이게 꽤 임팩트가 있었는지 한동안 그 사진이 계속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순간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오른 조재민 의원은 자신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군산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흥분한 김시원 보좌관이 스케줄을 줄줄이 읊어 내렸다.
“내일 오전에 전북의원들과 조찬 간담회가 있고 군산조선소 전 노동자들과 오찬 모임 있습니다. 이 두 개는 빠지면 안 될 스케줄입니다. 그리고 각종 인터뷰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JWBC 8시 뉴스 오늘의 초대석에 의원님을 초청했구요.”
“아, 그래? 언제?”
“모레 생방입니다.”
“가야지.”
전국 단위 종편 8시 뉴스에 단독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기회임을 모르지 않았다.
김시원 보좌관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인터넷에 의원님에 대한 칭찬이 가득합니다. 아직 조선소도 안 돌아가는데 벌써 군산 부동산 가격이 들썩인다는 소식도 들리구요.”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게 꼭 나쁜 게 아니야. 그만큼 사람이 몰린다는 거니까. 도시에 활력이 있어야 경제가 살아나는 거지.”
“맞습니다.”
“너도 신나지?”
“네. 하루에 세 시간밖에 못 자지만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활력이 돕니다.”
“흐흐… 나도 그렇다.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아. 피가 도는 게 느껴져.”
“정말 현진물산과 좋은 관계를 맺게된 게 신의 한 수가 된 것 같습니다.”
앞자리에서 실실 웃는 보좌관을 보며 조재민 의원이 말했다.
“항상 말 조심하고 밖에서 언급하지 않도록 해.”
“아, 네. 죄송합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야 괜찮지만 항상 주의해야 실수를 하지 않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보좌관을 보며 조 의원은 싱긋 웃었다.
그때 현진물산 최영훈 과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고생하셨습니다.]별다른 미사여구 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조재민 의원은 흐뭇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