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아주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소식이 빠르지도 않고, 그리 자세하지도 않으니까요. 제가 아는 정보와 지금 일어나는 상황 사이에는 꽤나 간극이 있을 겁니다. …아.”
루카스가 문득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경은 아겔 란 왕국과 인연이 깊으셨죠.”
“나에 대해 잘 아시는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잠시 멈칫한 루카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안 경.”
“사과보단 설명이 듣고 싶소만.”
몸을 일으켜 책상에서 작은 노트를 들고 온 그가 말을 이었다.
“닝글로슬에서 경을 만난 이후로, 화로의 사원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이안 경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요.”
“뒷조사를 하신 거군.”
“아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컸습니다. 화로의 사원을 구원하고, 티르 엔의 성전사이며 닝글로슬에 침투한 마족을 격퇴한 분이시니까요. 이안 경을 불신한 건 아닙니다.”
필사적이군. 하긴. 루카스의 눈빛이나 말투만 봐도 거짓말 같진 않았다.
별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그래서, 답신은 만족스러우셨소?”
“그 이상이었습니다. 여기, 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이안 경을 뵙게 되면 드리려고 가지고 다녔습니다.”
공책을 펼친 루카스가, 그사이에 끼워 뒀던 잘 접힌 편지를 내밀었다.
“사원에 이안 경을 오래 안 분이 계신 모양이더군요.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리라고는 이미 예상했습니다만….”
편지를 펼쳐 본 이안의 눈매가 묘하게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입꼬리는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실 만하군.”
답신을 쓴 건 루시였다. 하지만 내용을 불러 준 건 미구엘이 분명했다. 루시가 이런 걸 냅다 써 댈 리가 없었으니까.
“늪지대의 용 사냥꾼. 아겔 란의 마물 참수자.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아겔 란의 구원자이며 불씨의 운반자….”
내용을 다 외운 듯 루카스가 읊조렸다.
이안은 이제야, 오랜만에 만난 루카스가 왜 더 깍듯해진 건지, 그리고 말해 봐야 좋을 것 없는 얘기들을 왜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댄 건지를 확실히 알게 됐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젊은 지휘관의 호감을 잔뜩 산 것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용병이며, 맡은 의뢰는 무슨 수를 써서든 해결하는 분이시라더군요.”
“다는 아니오. 계약 내용이 달라지거나, 계약자의 상황이 달라지면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도 있었소.”
우르드 영감의 의뢰처럼.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안이 말했다.
빙긋 미소 지은 루카스가 턱짓했다.
“하단에 경께 남기는 말씀도 있습니다.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경을 만나면 꼭 보여 달라고 쓰여 있더군요. 그래서 항상 가지고 다닌 겁니다.”
“…그래. 지금 읽고 있소.”
루시의 편지였다.
자신은 화로의 사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이제는 루 엔테르의 신성이 담긴 불꽃도 피울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직접 보여 줄 날이 있길 바란다며.
이안은 미구엘도 루 엔테르를 섬기기로 했다는 부분에선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 수행 사제라고…?’
그가 사제복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꼴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엄연히 쓰여 있는 사실이었다.
다시 만나는 날이 있다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리라.
“그래… 덕분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군. 고맙소.”
편지를 접으며 이안이 말했다.
루카스가 안도하듯 미소 지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서, 아겔 란은 어떻게 되었소?”
“가장 먼저 수세에 몰린 게, 애석하게도 아겔 란이라더군요.”
“…그럴 리가.”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겔 란에는 메브 리우렐이 있으니까.
그녀는 신성력 없이도 홀로 백 명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는 강자였다.
거기다 국경 지대에서 병사들을 지휘한 경험도 풍부하니, 변방 왕국 간의 전쟁에서 쉽사리 수세에 몰릴 리가 없었다.
루카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국왕이 전군을 직접 통솔하는데, 용병술이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패퇴 후에 후퇴했고, 휘하의 영주들에게 신뢰를 잃었다는데. 그 이후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국왕이… 전군을?”
메브가 아니라?
이안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이건 게임일 때나 펼쳐졌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메브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
‘설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겔 란을 떠나기라도 한 건가.’
하긴.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녀는 물론이고 필립조차, 국왕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필립이 바람을 넣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터다.
“혹시 다른 정보가 더 들어온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요새에서의 일이 끝나면 트라벨가로 복귀하게 될 테니, 소식을 더 자주 전해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해서, 경은 왜 절 찾으시려던 겁니까? 산맥 인근에서,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그렇소.”
이안은 간결하게 설명했다.
지하 궁전을 발견했으며, 거인 여왕과 그녀가 봉인한 악마를 죽였고, 이후로 거인 대장군이 봉인된 유적지를 거쳐 산맥을 빠져나왔노라고.
물론 담담한 건, 이안의 말투뿐이었다.
“…….”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점점 턱이 벌어지던 루카스는, 이안이 말을 끝낼 때쯤엔 거의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듣고 있소?”
이안이 내뱉자, 그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였다.
“…너무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그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면, 입증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증거물이 있소. 그것들을 제값을 받고 처분하고 싶은데, 마침 루카스 경이 떠오르더군.”
“처… 분이요.”
“그렇소. 엄연히 전리품이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경에게 하겠소?”
“그야… 그러시겠지만. 으음.”
잠시 침음한 루카스가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 경, 여기서 하루만 더 묵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밤에 다시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슴팍에 손을 얹은 그가 덧붙였다.
“일행분들 모두 머무실 수 있는, 안락한 숙소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뭐, 안 될 것 없지. 그럼 그 얘기는 다시 나누는 걸로 하고….”
잠시 말끝을 흐린 이안이, 이윽고 넌지시 덧붙였다.
“이 요새에서 경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나 되시오? 그저 잠깐 거쳐 가는 관리이신가?”
“명목상이긴 하지만, 일단은 요새 사령관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경이 병력을 다 빼 가니 병사들 사기가 많이 떨어졌을 텐데.”
“아무래도, 영향이 없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잠시 턱을 긁적인 이안이, 이윽고 툭 내뱉었다.
“나랏돈으로 생색 한번 내 보시지 않겠소?”
“……?”
***
“감사하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이안의 손을 붙잡으려다 실패한 파엘이, 대신 꾸벅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요새에서 그가 싣고 있는 식료품들을 죄다 사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파엘이 야인들을 등쳐먹던 가격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어쨌건 트라벨가에 거래하려던 정도의 수익은 올릴 수 있었다.
심지어 트라벨가까지 가지 않고도 생긴 수익이니, 파엘이 이토록 감사해하는 건 당연했다.
트라벨가를 오가는 시간만큼 늘어날 품삯도 아끼게 된 셈이었으니까.
‘역시, 생색은 남의 돈으로 내는 거군.’
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 술을 마음껏 얻어 마신 보답이오.”
“안 그래도 귀하께 드릴 술을 몇 병 따로 빼 뒀소. 보르가 귀하의 부하에게 가져다줬을 거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를 바라보던 파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오? 아까 관문 대장과 지휘병이 귀하를 대하는 태도를 보았소. 보통 용병에게 그리 깍듯할 리가 없는데. 정말 불씨의 운반자시오?”
“난 그냥 용병이오.”
덤덤하게 대답한 이안이, 잠시 턱을 긁적이고는 덧붙였다.
“불씨의 운반자도 맞고. 그런 거창한 호칭은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걸 보니 칭호가 여럿 있으시군. 더는 묻지 않겠소. 보르의 말이 맞았군. 귀하는 내가 품기엔 너무 대단한 위인이오.”
“…품다니?”
“사실은, 귀하의 용병단을 상단에 고용할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라서 말이오.”
큰 꿈을 꾸셨군. 헛웃음을 짓던 이안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그래서 이런 퀘스트가 생겼던 건가…?
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몸값은 아주 제대로 쳐 드렸을 거요. 하지만 이제보니, 귀하는 그냥 반가운 손님으로만 남기는 게 내 분수에 맞을 것 같군.”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상단의 운명.
그가 창을 닫는 사이, 파엘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직속 경호병인 보르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건을 다 내린 그는, 곧바로 다시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보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인사일 터였다. 그는 트라벨가에 가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경호병을 잘 구하셨소.”
“……?”
“감이 좋은 친구요. 위험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의 말은, 귀담아듣는 것이 좋소.”
눈을 끔뻑인 파엘이 이내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저 친구는 종신이오. 창을 들 힘이 없을 때까지 끌고 다닐 생각이오.”
“훌륭하시군.”
“혹 제국의 보르타 인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꼭 들르시오. 내 언제라도 귀하게 모시겠소.”
“손님으로만 모신다면야.”
“물론이오. 꼭 들러 주시오.”
“기억하겠소. 보르타의 파엘.”
한 번 더 강조한 파엘이 걸음을 옮겼다.
“저 친구가 널 평생 곁에 두라더군. 감이 좋은 친구라고 말이야.”
“역시, 강자다운 안목이군.”
둘의 대화를 뒤로한 채, 이안은 일행의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하려 대기하는 병사를 지나친 이안이, 안에서 기다리는 샬롯과 테사이아에게 턱짓했다.
“가자. 얘기 끝났으니까.”
양손에 술병을 든 테사이아와 샬롯이 벌떡 일어났다.
보아하니 치즈도 한 덩이 주고 간 모양이었다.
은혜를 아는 양반이군.
피식하며 병사의 뒤를 따르는 이안의 귓가로,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 이유가 뭐지?”
“뭐가.”
“그 상인의 물건을 다 사게 한 이유. 정말 단순히 보답은 아닌 것 같은데.”
“…….”
은근히 눈치 빠른 녀석이라니까.
“이제부턴 저런 자들이 따라다니는 게 더 귀찮으니까. 그뿐이다.”
내뱉으며, 이안은 멀어지는 파엘 무리를 돌아보았다.
마지막 연계 퀘스트인 상단의 운명은, 완료 조건이 두 가지였다.
트라벨가까지 동행하거나, 상단주가 제국으로 돌아가게 설득하거나.
보통 이런 퀘스트의 경우엔, 어려운 쪽이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엔 후자였다.
파엘은 트라벨가에 가기를 원했으니까.
말로 설득하고 싶진 않았으니, 마침 찾아온 편법을 사용할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게임에선, 이런 식으로 헤어진 캐릭터들을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마주치곤 했다.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거나, 선물을 받거나, 그도 아니라면 또 다른 퀘스트를 선사하는 식으로.
‘보르타의 파엘이라….’
현실이 된 지금도 그럴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렸다.
어차피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부분이었다.
***
루카스가 제공한 숙소는, 요새 외곽의 집 한 채였다.
귀빈용 숙소가 틀림없었다. 나름대로 푹신한 침대에 책상, 벽난로까지 있었으니까. 한쪽에는 목제 욕조까지 놓여 있었다.
테사이아는 침대에 누워 다리만 까딱댔다. 이 와중에도 안대는 벗지 않은 채였다.
이안과 마주 앉은 샬롯은 술을 홀짝대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이안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 소리도 내지 않는 채였다.
이안은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변방 왕국들의 전쟁. 메브. 테사이아. 루 사드. 그리고 북부에 일어나게 될 일들.
없을지도 모른다 여겼던 거인 왕국 망령들의 침공이, 아무래도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주 상단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미리 알지 못했을 단서였다.
어쩌면 변방의 전쟁처럼, 이 역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포함되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심지어 게임에서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거인 여왕을 죽인 것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가속 시키는 트리거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게임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몰랐다.
아직 북부 장벽 요새들의 병력이 전부 빠진 게 아니었으니까.
좀 전의 파엘이 그랬듯, 북부 장벽 역시 그의 선택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여지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런다면… 퀘스트가 여럿 날아가겠지.’
본의 아니게 산맥 인근의 퀘스트를 너무 많이 해결해 버렸다.
그건 루카스와 관련된 트라벨가의 퀘스트가 이미 여럿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장벽 요새까지 무너지지 않는다면, 남은 퀘스트들도 대부분 사라지게 되리라.
하지만 그건 동시에, 수많은 목숨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안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어이없네. 내가 언제부터 타인의 목숨을 신경 썼다고.’
아무래도 몇 번 영웅이니 구원자니 하는 취급을 당하다 보니, 정말 자신이 그런 대단한 존재라도 된 양 착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는….’
“온다.”
상념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