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이안은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가는 마법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달렸다.
‘설마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
청색 마법이 사거리가 짧기 때문이라고 해도, 마법사 주제에 아무런 대책 없이 이렇게 앞에 서 있었을 리 없었다.
철컹, 철컹-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든 기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달려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저놈은 내가 맡겠다.”
내뱉은 샬롯이 앞질러 달려갔다. 몇 걸음 만에 도약한 그녀가 치켜든 전투 도끼를 내리쳤다.
쩌엉-!
기사가 지지 않고 양손으로 쥔 검을 후려치며 맞부딪혔다.
타타탓-
이안은 미끄러지듯 놈을 지나쳤다.
이안이 기습을 선택한 건, 이놈들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놈들은 게임에선 상대해 본 적 없는 놈들이었으니까.
몸으로 비집고 들어가 전력을 탐색하는 건 물론 위험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저들의 역량을 그만큼 빠르게 가늠할 수 있었다.
현혹 마법을 소리 없이 펼칠 때부터, 저 프레야라는 뱀파이어의 전투력이 그다지 높지 않으리란 계산도 어느 정도는 깔린 채였다.
물론 그녀의 마법은 충분히 강력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잠깐의 충동. 그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엔, 한참 부족한 마법이었다.
‘…꼭 이렇게 자신만만하다 한 번씩 큰코다치던데.’
생각하며, 이안은 가까워지는 프레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쓰러지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너…!”
인상을 찌푸린 채 뭐라 내뱉으려던 그녀의 목으로, 단죄의 검이 날아들었다.
콰직-
잘려 나간 프레야의 머리가 허공을 돌았다.
“저 녀석과 함께하는 건 의뢰 때문이 아니야. 그게 너흴 다 죽이는 데 도움이 되어서지.”
이안이 떨어진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이 맺히는 사이.
“…일족에 원한이라도 있나 보네. 아쉬운걸. 조사가 부족했어.”
프레야의 잘린 머리가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푸스스-
그녀의 몸이 그림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의 시선이 꿈틀대는 그림자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쩌적-
그의 왼팔 주위로 서리 칼날이 피어올랐다. 칼날 같은 얼음 결정이, 스멀스멀 번지는 그림자를 쫓아 뿜어져 나갔다.
쩌저적-!
땅을 타고 번진 얼음 막이 그림자를 가린 건 그 직후였다.
퍼버벅, 형성되던 서리 방패가 이안이 쏘아 보낸 칼날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지는 가운데.
“불사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지 아나?”
쓰러진 채로 서리 방패를 펼친 마법사가, 그림자에 떠밀리듯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그의 얼굴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마법사가 마력이 가득 맺힌 퀭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력을 축적하고 주문을 연구할 시간이 무한하단 것일세.”
쩡-!
마력 맺힌 지팡이가 땅을 찍었다.
쩌저저저적-!
얼음 가시가 수없이 솟구치며 이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혀를 차며 물러난 이안이 곧바로 서리 방패를 펼쳤다.
쾅-!
폭발과 함께,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쩌저저저적-
방패 위를 두드리는 얼음 파편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이런 식인 거군.’
비로소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현혹의 심판자.
이안의 머릿속에 떠다니던 정보의 파편들이 빠른 속도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를 현혹하거나 변절하게 만드는 게 1순위 목표였다 해도, 프레야는 무력으로 진압할 상황까지 착실하게 대비한 게 분명했다.
적색 마법사를 대비한 청색 마법사 하수인과, 그를 지킬 기사 하수인까지. 거기다 프레야까지 그림자에 숨어 보조한다면, 어떤 의미에선 아스콜드보다도 까다로운 상대일 터였다.
‘두 놈과 동시에 싸웠다면 말이지.’
이안의 시선이 샬롯과 전투 중인 기사의 뒷모습을 훑었다.
“훌륭하구나, 짐승아…!”
둘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완전히 싸움에 몰입하고 있었다.
프레야의 그림자가 스며든 이후로는, 기사의 갑옷과 검이 검게 물들어 흐릿한 잔상을 흘렸다.
흡혈 일족만이 다루는 모종의 흑마법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샬롯이 그와 호각을 이루는 건,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테사이아 덕분이었다. 기사의 그림자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그림자 가시를, 테사이아는 손톱을 휘둘러 베어낼 수 있었다.
‘주문쟁이부터 조지기엔 최적의 환경이네.’
이안의 시선이 서리 방패 너머로 돌아갔다. 가라앉는 폭발 너머, 청색 주문쟁이가 우두커니 다음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탓-!
이안은 더 지켜보지 않고 질주했다.
청색 마법은 대부분 사정거리가 짧은 편이고, 그렇기에 근접전은 보통 현명한 선택이 아니지만.
지금 저놈은 그를 청색 마법사로 오해하고 있으니, 그 오해에 최대한 부응해 주어야 했다.
‘내가 적색도 쓸 줄 아는 걸 알면 태세를 바로 바꿀 테니까.’
본래 적색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온 자였다.
이안이 적색도 사용한다는 걸 알면, 지금처럼 득의양양하게 공격 마법만 펼쳐 대진 않을 터였다.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만 전념하면서, 기사나 프레야의 지원을 받으려 들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럼 개 피곤해지겠지.’
그렇기에 접근전으로 승부하면서, 단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다.
불사신처럼 굴고 있어도, 하수인에 불과한 이상 그럴 리는 없었으니까.
쉬쉭-!
이안이 왼손을 털었다.
번쩍이는 날붙이가 마법사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슈확, 마법사의 발아래에서 먹물 같은 막이 치솟으면서 단검을 막아냈다.
마법사의 시야가 차단된 사이, 이안이 훌쩍 솟구쳤다.
슈학-!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이안이 장막을 뛰어넘으며 솟구쳤다.
마력이 아른거리는 마법사의 느긋한 시선이 그를 맞이했다.
“예상했다네. 후배님.”
쩌저적-
내뱉은 지팡이 앞으로 서리 칼날이 뭉텅이로 피어올랐다.
이안이 볼 때, 이만하면 상위 마법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래 살았단 말이 빈말은 아닌가 보네.’
몸을 비틀며, 이안이 내뱉었다.
“나도.”
“……!”
푸확, 허공에서 터져 나온 돌풍이 이안의 몸을 옆으로 힘껏 떠밀었다.
퍼버벙-!
폭발과 함께 방사된 얼음 파편이 텅 빈 허공을 갈랐다.
놈을 지나친 이안이 묘기를 부리듯 착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쒸엑-!
다급하게 솟구친 그림자 가시가 뻗어 나왔다.
프레야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던 듯, 어설픈 궤적이었다.
이안은 옆으로 두 바퀴 몸을 돌리는 것으로 간단히 피하고는, 그대로 일어서며 검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쩌엉-!
간신히 피어오른 서리 방패에 검날이 비스듬하게 박혔다.
놀람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의 마법사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자넨 아마 내 후배 중에 가장 검을 잘 다루는-”
내뱉던 마법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든 이안의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는데.”
“이게 무슨…?”
바람 빠지듯 내뱉는 마법사의 눈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마법을 펼치려 할지는, 마찬가지로 청색 마법사이기도 한 이안에겐 뻔한 부분이었다. 냉기 파동.
하지만 이미 이안은 주문을 완성한 상태였다.
콰아아아아-!
서리 방패에 박힌 검을 중심으로, 샛노란 화염의 폭발이 치솟았다.
일점 폭발.
“갸- 아아아아악-!”
폭발 한복판에 놓인 마법사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악-!
그림자에서도 비명이 이어졌다.
불이 붙은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도망치듯 허둥지둥 기사 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거, 원래는 저 그림자 속의 본체를 먼저 노리는 게 공략법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춤추는 불꽃을 시전해 그대로 마법사에게 내뿜었다.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퍼버버버벙-!
폭발에 휩쓸린 마법사가 너덜너덜해진 채 튕겨 나갔다. 전신이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타들어 간 끔찍한 상태였지만, 아직 죽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타타탓-! 콰직-!
“……!”
질주해 놈을 따라잡은 이안이, 마법사의 가슴 한복판에 역수로 쥔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검에 꿰여 땅에 박힌 마법사의 입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그대로 자루를 놓으며 물러난 이안이, 단죄의 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콰아아아-!
다시 한번 일점 폭발. 숯덩이처럼 변한 마법사가 비로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불길이 가라앉기도 전에 놈의 앞으로 걸어간 이안이, 달궈진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이 정도면 되살아 나는 게 오히려 고통일 거다.”
콰직-!
이안이 그대로 마법사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떨어진 마법사의 머리통을 발로 차서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아무리 뱀파이어의 흑마법이라도 더는 살려 내지 못하리라.
‘주문쟁이랑 싸운 건 오랜만인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콰앙-!
이어진 상념은, 뒤에서 터져 나온 굉음에 깨끗이 밀려 사라졌다.
“……!”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목덜미에 전투 도끼가 박힌 채로도 검을 내리친 흑기사의 뒷모습. 검 끝에서부터 마구잡이로 솟구친 수많은 그림자 가시들. 거기 휩쓸려 산산 조각난 마차와 고기 토막이 된 말들. 그리고 그 옆, 갑주가 다 찢겨 나간 채 피를 흩뿌리며 튕겨 나간 샬롯과, 그녀를 구하려다 함께 휩쓸린 게 분명한 테사이아까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푸스스….
말과 마차를 토막 낸 그림자 가시가 사그라들었다.
-알드리치…! 내 불쌍한 여덟 번째 사랑….
다행히도, 흑기사는 더 이상 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목덜미에 박힌 도끼를 뽑아 던져 버린 흑기사가 몸을 돌렸다.
-복수해 줘, 스텔란…!
프레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그림자에 완전히 뒤덮인 흑기사, 스텔란이 검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의지만이 남은 듯, 안면 가리개 너머의 불그스름한 안광이 타올랐다.
‘하나를 처치하면 2페이즈인 패턴이군….’
이안은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동시에 스텔란이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넘실대기 시작한 찰나.
쉬학-! 쉬학-!
질주를 멈추지 않은 채, 스텔란이 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검날에서 토해져 나온 새카만 궤적이 초승달처럼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원거리 공격까지 한다고…?’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몸을 날려 궤적을 피했다. 바닥을 구른 그가 곧바로 기사를 향해 마주 달렸다.
저런 식이라면 시전 시간이 긴 마법은 어차피 사용할 수 없었다.
쉬학-!
그림자 칼날이 다시 한번 날아들었다.
화르륵-!
몸을 비틀어 피한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들이 피어올랐다.
“훗…!”
기사, 스텔란이 싸늘하게 비웃으며 그 한복판으로 달려들었다.
이어진 폭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한 그는, 이안이 내리치는 검을 향해 마주 검을 올려 쳤다.
둘의 체구와 힘의 차이는 명확했고, 흑마법의 도움까지 받고 있으니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파스스슷-
이안의 검에 새파란 신성력이 치솟기 전까지는.
“……!”
콰아아아- 콰지직-!
폭발하듯 터져 나온 푸른 궤적이 그대로 스텔란의 검을 부러뜨리고, 그 너머의 두꺼운 갑주마저 가르며 훑고 지나갔다.
검의 달인이었던 흡혈 일족의 심판자조차 막지 못했던 일격을, 뱀파이어의 하수인에 불과한 기사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아….”
낮은 탄식과 함께, 목덜미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간 스텔란의 몸이 비스듬하게 허물어졌다. 피와 내장이 치솟지는 않았다. 그저 푸른 불꽃 같은 티르 엔의 신성력이 살을 불태울 뿐.
-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건, 그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프레야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신성력 때문인지, 또 다른 하수인의 죽음이 비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콰직-!
발작하듯 꿈틀대는 그림자 위로, 아직 신성력의 잔재가 남은 검날이 자비 없이 박혀 들었다.
찢어지는 비명. 푸스스, 복부를 꿰뚫린 프레야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너나 네 하수인들이나 왜 이렇게 안일한 건지 모르겠군. 난 이미 너희 일족의 심판자를 하나 죽였는데.”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숨겨진 한 수도 없을 만큼?”
“무슨… 방심 따윈 하지도…!”
콰아아아아-!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찢어지는 비명. 자루를 놓아 버린 이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그냥, 너희가 좀 내 기대 이하인 거군.”
“……!”
프레야는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말하려고 했다. 검을 쓰는 적색 마법사도 괴상한데, 거기다 청색 마법까지 다루리란 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냐고. 마법사의 검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리란 걸 세상 그 누가 알 수 있겠냐고.
애초에, 그녀의 현혹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내는 건 신실한 사제나 성기사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 건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수준의 마족뿐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런 사실을 이안에게 알려 줄 수 없었다.
콰직!
물결 같은 무늬가 맺힌 단검 날이, 심장을 꿰뚫어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