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글루미르, 미로 저택.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니그리안테 백작 부인이 화들짝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맺혀 있던 자주색 광망이 사그라들었다.
“대체….”
놀란 얼굴로 읊조린 그녀가 앞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양손을 얹고 있던 건,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몇 가지 짐승의 뼈를 이어 붙인 듯한 끔찍한 형태의 작은 두개골이었다.
법구였다. 아는 자들은 암흑 성물이나 심연의 우상이라 부르는.
그녀가 북부까지 의식의 파편을 보내 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이 법구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
작은 눈구멍 속의 심연을 응시하는 검붉은 눈동자에, 비로소 잠시 밀려났던 피로와 상념이 몰아쳤다.
“…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셨나 보군요.”
어둠 너머에서 나지막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륵, 창가의 커튼이 조금 벌어지고, 그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내리쬈다.
핏기없는 노인의 얼굴이 설핏 드러났다. 대외적으론 그녀의 남편이나, 실상은 그녀의 가장 오래되고 충실한 시종인 백작이었다.
“벌써 심판자를 둘이나 잃으셨습니다, 이 이상의 피해는….”
백작의 입이 닫혔다. 백작 부인이 피로한 얼굴로 검지를 입술 위에 얹은 까닭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속삭였다.
“…차가운 분노와 그 아래 억눌린 광기가 느껴졌어요. 아주 찰나였지만. 날 압도할 정도로 엄청났죠.”
“그게 무슨….”
“주문이 깨지면서 의식의 파편이 잠시 흩어졌어요. 다시 심연의 틈으로 빨려들어 돌아오기 전에. 그때 느껴지더군요. 아마 공허의 마력이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킨 거겠죠.”
“…….”
그제야 그녀가 놀란 것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어떤 존재였습니까?”
“글쎄요. 알고 싶지 않네요. 다만.”
백작 부인의 입가에 흐릿한 호선이 스쳤다.
“머잖아 북부에 큰 혼란이 찾아오리란 건 확실히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시선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자매를 보내겠어요. 그 아이들이 가장 신중하고 교활하니까. 은밀하게 지켜보면서, 실험체를 회수할 기회를 노리라고 하세요.”
기다리겠다는 백작 부인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이안이 자신들을 찾아올 때까지 실험체를 마냥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사제의 다음 방문까지 남은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본래는 이안이 제안을 거절하면 가장 강한 심판자들을 여럿 보낼 계획이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이다.
“혼란의 폭풍이 휘몰아칠 땐, 누구라도 빈틈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그리 전하겠나이다.”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직 백작 부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 사드에도 혼란이 필요할 것 같군요.”
“……!”
“이 땅을 피와 죽음으로 충분히 적셔 둬야겠어요. 필요해질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내 도시가 비탄에 잠기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백작 부인은 뒷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안 호프에게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그저 검을 잘 다루는 마법사라는 특이한 이력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특별한 무언가가.
그렇지 않다면 일족의 심판자를 둘이나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개인에 불과한 용병이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장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빛나는 건 오직 검붉은 눈동자뿐.
이윽고, 씁쓸함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번져 나왔다.
“…그 역겨운 작자의 일을 돕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일행은 관도를 따라 나아갔다.
황량한 평야와 잿빛 숲, 계곡. 그 끝에 또 하나의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금이 간 낡은 성벽. 그 너머의 산 능선에 솟은 요새 역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드문 일이군. 여긴 보통 방위군이나 이주민들이 오가는 관문인데. 거기다 증명서부터 면면까지 특이하지 않은 게 없으시군. 용병단이시오?”
중년의 관문 대장이 이안이 내민 증명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눈빛에 호기심과 흥미를 감추지 못한 채였다.
근무가 어지간히 지루했나.
“그렇소.”
“장벽을 넘어갔다 돌아온 용병단이라… 보통 분들이 아니시군. 하긴, 딱 봐도 그래 보이지만. 그래서, 트라벨가로 가시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오?”
“남동쪽 관도를 타고 사흘 정도만 더 내려가면 도착할 거요. 당신들을 따라 복귀하고 싶군….”
관문 대장이 고개를 주억대며 읊조렸다.
확인이나 빨리해 줄 것이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트라벨가 소속이신가 보군.”
“그렇소. 한 달씩 돌아가며 근무하지. 보다시피 상주할 이유가 없는 곳이라서 말이오. 말이 벨리움 요새지, 여긴 그냥 관문이나 초소라고 부르는 게 맞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이 관문 이름이 벨리움이오?”
“그렇소. 이 동네 이름이기도 하고. 왜, 사연이라도 있으시오?”
“…아니오, 아무것도.”
심드렁하게 대꾸한 것과는 달리, 이안은 차근히 좌우로 이어진 성벽을 눈에 담았다.
‘어쩐지 뭔가 낯이 익더라니.’
이 낡은 관문은, 게임에선 주요 퀘스트의 배경이 되는 장소였다.
검은 벽을 기준으로 하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설원 지대를 중심으로 하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장벽을 돌파한 언데드 군단이 남하하던 시점.
루카스를 포함한 소수의 방위군은, 트라벨가로 들어서는 길목인 이곳에서 결사의 항전을 펼쳤었다.
루카스가 가장 신뢰하는 용병이었던 이안도 물론 이곳에 있었다.
카링기온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관문을 지키는 게 목표였다.
‘진짜 빡셌는데….’
보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반 마물과 정예 마물이 섞여 밀려오는 것뿐인데도 몇 번이나 게임 오버 화면을 봤었다.
물론 지금의 그는 그때보다 훨씬 강하고, 이번엔 장벽이 뚫릴 일도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여길 통과하면 이제 자치령 중심부라 할 수 있소. 트라벨가에서 괜찮은 의뢰를 건지시길 바라겠소.”
관문 대장이 양피지를 건넸다.
어쩌면 이자도 그땐 관문을 지키려 싸웠을지도.
내심 피식댄 이안이 덧붙였다.
“트라벨가 인근에 야인 정착지가 있다고 들었소만.”
“가는 길목에 있소. 하루쯤 더 가면 숲으로 꺾이는 갈림길이 나올 것이오. 그 안에 있지.”
관문 대장이 냉큼 대답했다. 턱을 긁적인 그가 덧붙였다.
“고마운 자들이지. 그들이 이주하고 나서 인근의 마물이 거의 사라졌으니까. 모피 가격도 싸졌고. 어쨌건 외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접근하지 마시오.”
“알아 두겠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친절한 사람이네. 보통 우릴 보면 경계부터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멀어지는 관문을 돌아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내뱉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만큼 지루했던 거겠지.”
게다가 여기까지 온 이들은 사실, 굳이 신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어쨌든 잘됐네. 이제 사흘만 더 걸으면 된다니. 안 그래?”
이안은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게임에선 불과 몇 분 거리였지만.
이런 변화는 이제 일상적인 부분이었다.
기대된다, 하고 중얼대며 헤실대던 테사이아의 시선이, 문득 옆의 샬롯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야옹이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며칠째.”
“…신경 쓰지 마라.”
샬롯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몸 상태가 안 좋나? 열이 난다거나. 옆구리가 욱신거린다든가.”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거의 다 아물었다. 솔직히 당장 싸워도 괜찮을 정도야.”
“그럼 뭔데? 뭘 해도 뚱하고, 많이 먹지도 않고.”
테사이아가 덧붙이자, 샬롯이 슬쩍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넌 왜 실실대는 거냐? 정신 나간 것처럼.”
“내가 그랬나…? 하긴, 뭐.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테사이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망할 놈의 심판자도 또 하나 죽었고. 앞으로도 너희들이 날 버릴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이보다 좋을 수 없지.”
“…그래. 거참 잘됐군.”
샬롯이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야, 재미없게. 우리 야옹이 고민이 뭘까. 응?”
“친한 척하지 마라. 귀쟁아.”
“운명 공동체끼리 이런 얘기도 못 해?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탄식을 삼키듯 잠시 눈을 감았던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전사로서의 고민이 있을 뿐이다.”
“드디어 날 죽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거야?”
“…….”
“어머. 정말인가 보네.”
“…날붙이만으로 죽일 수 없는 적들을 상대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너도 예외는 아니지.”
멍하니 눈을 끔뻑인 테사이아의 입가에,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긴 넌 별거 아닌 마법에도 픽픽 쓰러지고, 혼자선 망령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때려잡긴 하지.”
“…….”
샬롯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대신 넌 다른 걸 잘 때려잡잖아.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렇게 타협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거다, 귀쟁아.”
“그래서, 답은 찾았어?”
샬롯이 멈칫했다.
“…아직은.”
“그러면서 말은.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더 못생기게 하고 있지 말고, 네가 못 하는 건 나한테 맡겨. 어차피 우린 한 몸이잖아?”
“…….”
그게 싫은 거라는 듯, 샬롯이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가 놀리듯 싱글댔다.
…저것들도 많이 친해졌네.
이안은 둘을 슬쩍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만하면 그의 조치는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었다. 강제적이라도 서로의 목숨을 몇 차례 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료 의식이 싹튼 것이다.
이제는 그가 곁에 없다 해도 서로의 목숨을 노릴 일은 없으리라. 그걸 넘어, 당연하게 서로를 지킬 터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트라벨가에 도착하면.”
이안이 입을 열었다. 투덕대던 둘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마법 무구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지. 네 갑옷의 주문 회로를 되살릴 방법은 없는지도.”
샬롯의 눈이 설핏 커졌다. 사실 그녀가 고민하는 부분의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법을 택할 수 없는 이유도 명확했다.
“구할 수 있다 해도, 그걸 살 돈이 없다, 이안.”
“나한테 있어.”
“……!”
“교회에서 왕관 대금을 곧바로 치른다면 더 넉넉해질 테고.”
“난 이미 도끼도 받았는데, 네가 또 돈을 쓰게 할 수는….”
눈을 치켜뜬 샬롯이 더듬대는 사이, 테사이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안, 그럼 나는? 난 뭐 없어?”
“너한테는….”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대답했다.
“신발을 사 줘야겠군. 새 옷이랑.”
“아니… 왜 난 자꾸 그런 것만 사 주는 거냐고….”
왜겠냐?
망토 아래론 넝마를 걸친 거나 다름없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은, 이윽고 말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흐릿한 먹구름이 일행을 뒤따르듯 번지고 있었다.
***
관문 대장의 설명은 정확했다.
이안은 숲 한복판, 듬성듬성한 목책을 두른 마을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단 큰 것 같은데….’
이안은 인근에 트라벨가 같은 대도시를 두고도, 굳이 따로 마을을 만들어 생활하는 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통은 문명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지켜 낼 수 있건만.
물론 이것 역시, 그가 현대인이기에 가지는 생각일 터였다.
저들에겐 이게 생존을 위해 최대한 타협한 결과이리라.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다, 외지인. 여기서부턴 너희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땅이다.”
마을 입구. 일행을 빤히 응시하던 두 전사 중 하나가 내뱉었다. 둘 다 창을 언제든 내뻗을 수 있게 콱 움켜쥔 채였다.
멈춰선 이안이 경고한 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전하러 온 거다. 머잖아 다른 야인들이 이주해 올 테니까.”
“…어느 마을에서?”
“검은 숲 언덕 마을.”
“검은 숲 언덕…? 기다려라. 말을 전하겠다.”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은 전사가, 이내 휙 몸을 돌렸다.
이안이 남은 하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전할 말은 다 했다만.”
“네가 정말 검은 숲 언덕 마을에서 온 거라면,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뭔 책임.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말을 전하겠다 한 건 그였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곧 전사들 여럿이 다가왔다. 한복판에 우르드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늙은이를 앞세운 채였다.
“검은 숲 언덕 마을의 전사들이 이주해 온다는 게 사실이오?”
멈춰선 노인이 물었다. 그 역시 얼굴 곳곳에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렇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하군. 그들이 성상을 버리고 이주할 리가 없는데. 외지인에게 소식을 전달하게 할 리도 없고.”
더럽게 따지는 것도 많네.
이안이 할 말을 고르는 찰나, 뒤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이안은 외지인이 아니거든. 대전사니까.”
“대전사…?”
이안을 돌아본 노인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우리뿐 아니라 검은 숲 언덕 마을까지 모욕하는군. 북부인 같지도 않은 외지인이 대전사라니….”
“거짓말이 아니다, 늙은이.”
이번엔 샬롯이었다.
낮게 으르렁댄 그녀가, 이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너희들의 신이 이안을 선택했지.”
이안이 테사이아와 샬롯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사실인데 뭐가 문제냐는 표정들.
“…….”
내심 한숨을 삼킨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노인은 물론, 전사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