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일행은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다.
메브는 검을 뽑아 들며 몸을 비스듬하게 곧추세웠고, 샬롯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도 전투 도끼를 빙빙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검을 뽑아 든 필립도 방패를 앞세우고 자세를 낮춘 채, 달려오는 혼혈 고블린들을 눈에 담았다. 그와 샬롯 사이, 나무 둥치에 묶인 말들만이 콧김을 뿜으며 두려움을 표출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오히려 놈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키아악, 순식간에 가까워진 고블린 몇 마리가 거의 온몸을 내던지듯 그를 향해 팔을 내뻗으며 달려들었다.
푸화악-!
이안의 주위로 돌개바람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한 방울의 혼돈력을 더한 휘몰아치는 방벽. 하지만 몸을 날리던 놈들을 튕겨 내기엔 그거면 충분했다.
달려오다 엉겁결에 휘말린 몇 마리도 튕겨 나가, 뒤따르던 놈들과 부딪혀 뒤엉켰다.
콰직, 땅에 떨어진 놈의 머리 위로 이안의 검이 내리 찍혔다. 그대로 몸을 옆으로 돌리며 검을 뽑은 이안이, 일어서려는 옆 놈의 찌그러진 머리통을 다시 내리찍었다.
정수리에 검날이 박힌 놈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아무리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놈들이라도, 머리가 깨지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검날을 뽑으며 다시 내달리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재빠른 몇 놈이 다시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건 기형적으로 긴 팔을 거미처럼 내뻗은 놈이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왜 이래? 이 새끼들.’
그의 왼팔이 한순간 출렁였다.
손을 떠난 투척용 단검이 팔 긴 고블린의 얼굴 한복판에 박혔다.
고개만 뒤로 튕기듯 꺾인 놈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뒤따르던 다른 혼혈 고블린들이 바들대는 놈을 짓밟으며 내달렸다.
푸확, 어느새 완성된 휘몰아치는 방벽이 다가서는 놈들을 또다시 밀쳐냈다.
하지만 드러난 빈 공간으로 달려 나온 이안의 미간은 여전히 좁아진 채였다.
‘왜 이렇게들 저돌적이지.’
아무리 소굴이 코앞이라 눈이 뒤집혔다지만.
이안의 뇌리로 아까 전, 모조리 태워 죽였던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스쳐 지나갔다. 우두머리가 공격받는 와중에도, 몇 놈을 제외하곤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렸었다.
하지만 지금 바닥을 나뒹구는 이놈들은 전혀 딴판이었다. 숫제 죽으려고 작정한 놈들처럼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족장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건가.
이유 따윈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적당히 밀쳐내고 길을 뚫어, 족장을 향해 달려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냥 불 한 번 질러 버려?’
그래도 불나방처럼 달려들 것 같은데. 한 놈을 더 후려치며, 이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놈들의 화염 저항력은 보기보다 높았다. 아까 전의 전투에서 의도한 것보다 마력을 많이 소모한 것도, 이것들이 쉽게 타죽지 않아서였다.
하위 마법들로 틈을 만들고 찔러 죽이는 게, 몸은 더 수고로워도 훨씬 가성비가 좋았다. 이젠 체력도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은 수준이지 않은가.
게다가 족장은 말까지 하는 놈이었다. 혼돈력을 다룰 게 분명한 만큼, 무슨 개 같은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놈을 상대하기 위해 마력에 여유를 두는 편이 좋았다.
퍼엉-
어깨로 검날을 받으며 밀고 들어오려던 놈이, 진공 폭발에 어깻죽지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체액이 연기처럼 흩날리는 와중에, 이안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두 마리가 더 쪼개졌다. 마지막 한 마리의 목덜미를 가슴팍까지 썰어 버린 순간, 효과를 다한 바람 칼날이 잦아들었다.
이안이 축 늘어지는 놈을 발로 차 떨쳐내는 사이, 좌우에서 동시에 두 놈이 몸을 던졌다.
혀를 찬 이안은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몸을 일으키는 찰나의 순간, 저 뒤편 일행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에 들어왔다.
메브는 고블린 하나가 던진 화염구를 그냥 맞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뒤, 한 놈을 도끼로 내리찍은 샬롯은 반대쪽 손으로 다른 한 놈의 목을 붙잡아 땅에 내리찍고 있었다.
필립도 방어를 굳건히 한 채 한 놈을 상대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검을 쥔 장갑 위로 은은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검날이 빛을 머금고 아른거렸다. 새끼, 유물이라도 하나 얻었나 보네.
어쨌건 그의 움직임에 여유가 있는 건, 비단 저 흐릿한 신성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쪽의 혼혈 고블린들은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시발, 그럼 나한텐 왜 이러지.
‘어그로가 죄다 나한테 끌린 건가.’
푸확, 휘몰아치는 방벽이 완성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대로 일어나 달리려던 이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돌개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떡 벌어진 근육질에 거적때기 같은 가죽 갑옷을 걸친 놈이었다. 자주색이 일렁이는 눈동자. 부족장이었다.
‘맨손으로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바람 칼날을 머금은 북부 전사의 검이 부족장의 목덜미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실전을 거듭하며 수없이 반복해 온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부족장이 팔을 치켜들어 막은 건 거의 동시였다.
서걱-
바람 칼날이 굵은 팔뚝을 사선으로 가르며 흩어졌다. 검날은 그 너머의 목덜미에 박혀 쇄골 아래에서 멈췄다. 단숨에 심장까지 가르기엔 힘이 조금 모자랐다. 투쟁의 축복이 있었다면 양단을 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정도 싸움은 그 양반 눈에 차지도 않겠지.’
팔에 더 힘을 주려는 순간, 놈이 피가래 섞인 고함을 지르며 팔을 뻗었다. 억센 손아귀는 이안의 목 대신 견갑을 움켜쥐었다.
놈은 칼날이 더 깊이 박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껴안으려 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안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짧은 의문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퍼억! 혼혈 고블린 한 마리가 부족장의 등에 온 몸을 던져 부딪쳤다. 이안이 튕겨 나가듯 뒤로 넘어졌다. 부족장의 몸이 그의 위를 덮었다. 그 충격으로 검이 더 깊이 살을 찢으면서, 날을 타고 두근대는 박동이 번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자루를 비틀어 맥동을 끊어 버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진 충격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머리가 약간 띵 했다. 땅에 뒤통수를 박은 여파인 모양이었다.
볼 안쪽이 터진 듯 쇠 맛이 났다.
“키- 아악!”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숨이 끊어진 부족장의 등에 올라타 역겨운 숨결을 토해내는 혼혈 고블린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번들댔다. 이안은 부족장의 시체를 밀어내고 검을 뽑으려 했다. 고블린이 팔다리를 들썩이며 그를 짓누른 건 그 직후였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 새끼도 이러네. 인상을 찌푸리던 이안의 뇌리로, 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 정작 귀담아듣진 않았던 내용이 떠올랐다.
훌륭한 씨앗.
‘설마….’
떠올린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하는 역겨운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이안의 시선이 다시, 그를 짓누르는 혼혈 고블린의 면상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그를 향해 마법을 쓰는 놈도 없었다.
끼아악, 비명과 함께 두 마리의 혼혈 고블린이 더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활짝 펼친 채였다.
‘이 개 토 나오는 새끼들이….’
미간을 구긴 이안의 눈동자에 마력이 휘몰아치려는 순간이었다.
허공에 핏방울을 흩뿌리며, 은빛 궤적이 뿜어져 나와 그를 지나쳤다. 기다란 검을 움켜쥔 전신 판금 갑옷. 메브였다.
콰앙-!
달려들던 한 놈을 어깨로 들이받아 날려 버린 그녀는, 곧바로 몸을 휘돌리며 검을 내리쳤다.
단죄의 검보다 조금 더 길고 두꺼운 검날이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달려들던 다른 놈의 허리가 그대로 토막 났다.
메브는 체액을 흩뿌리는 놈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려왔다.
그리고는 이안의 위에 올라탄 놈의 머리를 붙잡아 그대로 끌어당기며 패대기쳤다.
몸을 숙인 그녀가 왼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마구 내리찍었다.
분노가 느껴지는 주먹질이었다.
그녀가 고블린의 얼굴을 함몰시키는 동안, 이안은 비로소 위에 덮인 시체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숨을 고르는 그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한차례 휘몰아쳤다. 푸확, 메브에게 달려들던 놈들이 돌풍에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메브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여전히 무모하게 싸우는구나, 이안.”
거친 숨결. 놀라서 전력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입에 머금은 피를 탁 뱉은 이안이 대답했다.
“덕분에 마력을 아꼈소.”
“…다쳤구나, 이안.”
그를 돌아보고 멈칫한 메브가 이내 내뱉었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관자놀이 근처를 문질렀다. 피가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머금고 있던 피였다.
“별 것 아니오.”
“아니.”
메브의 목소리에 스산한 한기가 서렸다.
“네가 흘린 피의 대가는, 저것들의 피로 받아내겠다.”
“…….”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푸스스, 그녀가 늘어뜨린 검 끝에서 피처럼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거로도 된다고…?’
심지어 머리의 상처는 이미 출혈이 멎은 상태였다.
분명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발동 조건이 있는 것이리라. 그게 뭐건, 지금 들을 얘기는 아니었다.
“뭐, 마음대로 하시오.”
혼혈 고블린 몇 마리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달려든 건 그 직후였다. 메브가 등을 돌리고 있으니 기회라 여긴 모양. 하지만 그들을 반긴 건, 그녀가 몸을 돌리며 만들어낸 붉은 궤적이었다.
콰직-!
달려들던 고블린 하나가 비스듬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연달아 세 번의 검격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지고, 그때마다 시체 토막이 두 개씩 늘어났다.
이윽고 호흡을 내쉰 메브가 옆으로 늘어뜨린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검날이 붉게 물드는 가운데, 그녀가 내뱉었다.
“길을 열겠다.”
붉은 검날이 횡으로 선을 그었다. 푸화악, 부채꼴로 방사된 신성력이 앞에 걸리는 모든 것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피 보라가 자욱하게 솟구쳤다.
역시 신성력만한 게 없구만. 생각하며, 이안이 질주했다.
썰려 나가 허물어지는 놈들 너머로, 비로소 족장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대검을 어깨에 얹은 채 이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좀 있다, 이거지? 씹새야.’
이를 악문 이안이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그리고는 잘린 팔을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혼혈 고블린의 머리를 짓밟으며 재차 도약했다.
파치칫-
그가 쥔 검신을 타고 새하얀 뇌전이 줄기줄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몰아친 바람이 그의 등을 더 힘껏 떠밀었다.
돌진을 시작하며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이 비로소 재현되고 있었다.
뇌전이 모여드는 속도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랐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이안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
족장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뒤이어 인상을 와락 구긴 놈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은 건, 이안이 치켜든 검이 심상치 않게 번쩍이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아주 현명한 대응이었다.
‘내가 그럴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말이지.’
이안은 치켜들었던 팔을 힘껏 내려치며 검을 내던졌다.
새하얀 뇌전이 가득 맺힌 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정확히 족장을 향해 날아갔다.
“……!”
검을 던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듯, 족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동시에 놈이 대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그건 반사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콰릉!
검과 검이 맞닿은 찰나.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눈부신 벼락이 족장을 관통했다.
뒤이어 뇌전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오- 아아아악-!”
눈부신 점멸. 대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굳어진 족장이 울부짖었다.
놈의 목소리는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굵었다. 변성기가 지난 것처럼.
촤아아악-
그사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놈의 바로 앞까지 미끄러지고서야 멈춰 섰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거무튀튀한 마법봉이 들려 있었다. 사령술사의 지휘봉.
고개를 든 이안이, 붉게 이글대는 눈으로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내 씨앗이 탐나냐?”
그가 마법봉을 내뻗었다. 불기둥처럼 솟구친 샛노란 폭발이, 아직 뇌전을 다 떨쳐내지도 못한 족장의 전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