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47
247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르케아스가 자신의 동글동글한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구나. 마력도 아니고, 네가 품은 혼돈과도 전혀 달랐어.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였지. 혹, 짐작 가는 부분은 없느냐?”
그거, 설마 상태창인가?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직전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던 걸 보면, 아예 터무니없는 추론은 아니었다.
‘그럼 뭐, 상태창이 내 영혼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건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부분은 언제나 말을 아끼는 게 좋았다. 상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써먹기 좋은 적당한 핑계도 있었다.
“글쎄. 내 혈통의 힘일지도.”
“흐음… 아무리 고대인의 혈통 인자가 발현한 것이라 해도 너 같은 능력은…. 그래. 나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생각에 잠긴 채 아르케아스가 중얼댔다. 이안은 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방금 본 환영을 곱씹었다.
“혈통의 힘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저 황실의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능력을 타고나니까. 너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 무엇이건, 정말이지 귀중한 힘을 타고난 것이다. 이안.”
그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전에 네 말을 들었을 때는 의문점이 나았었다만. 직접 겪어 보니 네가 얼마나 특별한지 확실히 알겠구나. 그 무엇도 네 영혼을 멋대로 물들일 수는 없겠어. 그래… 어쩌면 네가 그토록 담대하고 침착한 것도 그 덕분일지도.”
…그건 그냥 내 정신력이 높아서 그런 걸 텐데. 상념에서 깨어나며 생각한 이안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어떠시오? 내 기억을 들여다본 소감은.”
“…그래. 내가 잠시 샛길로 빠졌었구나. 지금 중요한 건, 네가 타고난 능력이 아니지.”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도 이안의 손을 맞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반대쪽 손으로도 이안의 손등을 덮으며, 그가 덧붙였다.
“아주 힘들었겠더구나. 고생했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그토록 위험한 짐을 짊어지게 한 주제에, 도와주지도 못해서.”
“…….”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새삼스러웠다.
…뭘 또, 위안이 되고 난리야.
이윽고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지. 그래서 이번 일의 마무리가 잘 안 풀리면, 귀하께 다 떠넘길 생각이었소. 그럴 기회가 오지는 않았지만.”
“아쉽구나. 기꺼이 도왔을 것이거늘.”
“아쉬워하실 필요 없소. 훌륭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면 되니까.”
“물론이지. 내가 너를 모를까.”
아르케아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본래는 내가 가진 보물을 하나 내어줄 생각이었지만. 너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냈더구나. 그러니 나도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야겠지. 분명 신들께선 노여워하시겠지만….”
톡톡, 작은 손이 이안의 손등을 토닥였다.
“염려하지 말렴. 그건 내가 감당할 테니.”
뭐, 초과 달성 보상 같은 거라도 되는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뭔지는 몰라도, 기꺼이 받겠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케아스의 손아귀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안. 조심하렴.”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일렁였다.
“혼돈에 잡아먹히지 않게. 넌 아주 위험한 경험을 했던 거란다.”
…역시, 이 이야기도 하시는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 너무 염려하지는 마시오. 내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직접 겪어 보셨잖소.”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 힘을 달리 혼돈이라 부르는 게 아니란다. 늘 경각심을 가지렴. 만약 그게 끝내 널 삼키고 만다면….”
“믿으시오.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으로 남을 거니까.”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미 안다는 듯한 말투에, 백금룡의 입매가 다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 믿으마. 그리 확언해 주니,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구나.”
만족스럽게 이안의 손등을 토닥인 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한결 느긋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뜻밖이긴 하구나. 그 에드워드 크랄렌이 타락자이자 의원이었다니. 그의 죽음과 정체가 중앙에 알려지고 나면, 여파가 만만치 않겠어.”
“도시의 귀족들은 죄다 목이 달아날 걱정부터 하더군.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말이오.”
“그래…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과정이지.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말렴. 인간들의 역사는 늘 이런 식으로 이어져 왔으니까.”
“의외로 무책임하시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르케아스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흘러야 할 피는 흐르겠지. 하지만 생각 보다 많이 흐르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란다. 혼란은 곧 기회이기도 한 법이니까. 황실과 교단은, 그걸 놓치지 않을 거란다. 아마….”
슬쩍 고개를 옆으로 까딱인 그가 덧붙였다.
“권좌를 노리는 새싹들과, 교단의 주류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특히.”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묘해졌다.
“중앙의 사정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구나. 궁금한 게 따로 있는 거야, 그렇지?”
“뭐, 아예 없진 않소만. 우선순위는 아니오.”
그놈의 황실과는,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을 생각이기도 하고.
이안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게임에선 그들과 엮이면서 걷잡을 수 없이 4챕터로 접어들게 되지 않았던가. 중앙으로 가는 걸 조심스러워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당장 그보다 더 궁금한 것들이 많겠지. 전부 물어보렴. 답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는 대로 이야기해 줄 테니.”
이안은 잠시 그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 보았다.
상태창에 대한 질문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르케아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오래 산 용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알아보지 못할 언어로 쓰여진 무언가를 보았다면, 물어보지 않을 리 없었다.
상태창은, 어떤 식으로든 오로지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대신, 이안은 의뢰와 관련된 것부터 묻기로 했다.
“내게 의회의 일원을 제거해 달라 부탁하신 이유가 무엇이오?”
“…내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었니?”
“돌려서 말씀하시긴 했었지. 그것 말고, 진짜 이유 말이오.”
이안이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귀하의 뜻이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라 여겼소만. 막상 여기까지 오고 보니,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이오.”
방금 본, 당신의 기억도 그렇고.
뒷말을 삼킨 이안이, 아르케아스의 눈을 빤히 마주보았다.
“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잖소. 놈들의 균형이 무너지면, 아마도 더 큰 혼란이 시작될 테고.”
“그래… 역시, 내 대행자는 영특하군.”
기특하다는 듯, 아르케아스가 다시 한번 이안의 손등을 토닥였다.
이건 대체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람. 생각하는 사이,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 평화는 내 목표가 아니란다. 원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지. 너희 인간들이 원대한 야망을 품는 존재들인 이상. 하지만 이 세상이 안정을 되찾길 바라는 건 사실이란다. 적어도, 최종적으로는.”
“…그러기 위해서 혼란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부탁하셨단 거요?”
“내 우둔한 머리로는, 전혀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찾을 수가 없더구나. 대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적은 피를 흘릴 방법을 떠올렸을 뿐이란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능하다면, 흘려 마땅한 이들의 피가 더 많이 흐르게 하면서. 물론 이마저도 너라는 귀중한, 아니, 유일한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면 시작조차 하기 힘들었겠지만.”
“…….”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안정을 위한 차악을 골랐다, 이건가?
전에도 느꼈지만, 아르케아스는 친절한 척하면서 불친절했다. 이야기를 멋대로 건너뛴다는 부분이 특히.
다행인 건, 어쨌든 친절하기는 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대륙의 안정을 되찾는단 말씀이시오? 아시다시피 대륙은 이미 개판이고, 앞으로 더 개판이 될 텐데.”
질문에는 늘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돌려줬으니까.
아르케아스가 낮게 웃음 지었다.
“너는 늘, 한 걸음을 더 들어오는구나. 이상하지. 그 또한 기꺼우니. 그래. 너는 알 자격이 있지. 본래는 술을 마시면서 하려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리 알려주마. 사실, 그리 놀라운 얘기도 아니란다.”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나는, 검은 벽을 없애고 싶은 거니까.”
물론, 이안을 순간 굳어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던 곳이, 바로 검은 벽 너머였으니까.
물론, 아르케아스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리란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검은 벽. 이제는 그 존재가 너무 당연해져 버린 괴물이지. 하지만 동시에 그건, 이 순간에도 조금씩 계속해서 대륙을 좀 먹고 있어. 그러니, 내가 그걸 없애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아르케아스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며, 이안이 물었다.
“그 방법을 찾는 건, 황실과 교단의 역할 아니오?”
“그렇지. 하지만 그들이 방법을 생각해 낼 때쯤엔,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어진 뒤일 거란다. 그들은 그게 당장 사라지길 원하지 않거든.”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평소라면 설정 놀음이라 생각하고 흘려들었겠지만. 검은 벽과 관련된 부분은 그러기 어려웠다.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도 드물 뿐 아니라, 그가 놓친 퀘스트에 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보다 그걸 연구하고,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지. 마탑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마법사들이 검은 벽에 매료되어 있다는 건, 이미 비밀도 아니잖니. 그리고 원탁은, 그걸 가장 좋지 않은 방식으로 이용하려던 자들이지. 그래서 네게 부탁한 거란다.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방법은 찾으셨소?”
“가닥은 잡았지. 그래… 보아하니 너도 검은 벽에 관심이 많았구나. 하긴. 놀랄 일은 아니지. 마법사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매료되곤 하니까.”
아르케아스가 낮게 웃음 지었다. 이안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그가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킨 미증유의 마경에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들어간 자는 있어도 나온 자는 없으며, 그 너머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도 알려진 바가 없지. 어째서 광기와 혼돈을 흩뿌리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야말로 유혹적이야.”
“그 의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시다는 듯한 말투시군.”
“그럴 리가.”
내뱉으면서도,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란다. 나 역시 모든 걸 알지는 못해. 그 너머를 직접 본 것도 아니잖니? 단 한 명이라도 되돌아온 이가 있으면 좋겠구나. 그럼 더 많은 것들이 명확해질 텐데.”
“…….”
그게 바로 난데.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아마 그는 검은 벽 너머를 일부나마 직접 본, 벽 바깥의 유일한 존재일 터였다.
물론, 그 사실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아르케아스라 할지라도.
아주 귀찮아질 건 물론이고,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게임에서 가 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걸 알아듣는 건 둘째 치고, 믿어 줄 리도 없었다.
게다가 현실이 된 지금은, 분명 그때보다 더 끔찍해졌을 터였다.
“설마, 직접 검은 벽을 넘으실 생각이시오?”
대신 이안은 아르케아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럴 리가. 교단도 황실도, 심지어 신도 허락하지 않을 거란다. 밖에서 무너뜨려야 해.”
“그 너머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뭔가 있겠지. 분명, 끔찍한 무언가가. 하지만 네 덕분에, 대비할 시간이 충분히 생겼을 거란다. 내가 준비할 시간도 마찬가지고.”
잠시 말을 멈춘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더는 묻지 말렴. 이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단다. 아무리 너라도. 물론 염려도 하지 말렴. 네게 그걸 대신해 달라 부탁하지도 않을 것이니.”
“부탁하셨다고 해도, 거절했을 거요.”
아르케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래. 그렇겠구나. 그렇다 해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렴. 근시일 내는 아니겠지만, 나는 언젠가 검은 벽을 무너뜨릴 거란다. 그 이후에는 네 도움이 필요해질 수도 있어. 네가 원치 않더라도.”
“…….”
이안은 대답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것도 거대한 흐름이라는 거지.
그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검은 벽을 넘어야 할 운명이었다.
다만 그 시점을 최대한 늦출 생각이었는데. 아르케아스가 검은 벽을 무너뜨릴 계획이라면, 그 한계 시간이 정해진 것이 다름없었다.
말했듯, 외부에서 벽을 무너뜨린다 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었다.
분명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그러니까 무너뜨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설사 아르케아스를 막는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생겨날 게 분명했다.
미지의 영역이지만, 검은 벽은 어떤 식으로든 끝내 무너지게 될 운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임의 그가 벽 너머에 발을 들였었던 것도 그 확신을 뒷받침했다. 넘어갔으니, 다시 돌아오게도 되지 않았겠는가.
‘…어떻게 그러는지는, 공략 글에서도 안 읽어 봤지만.’
이안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아르케아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한 모양이구나.”
“…아니오. 매도 알고 맞아야 대비를 하는 법이지.”
한숨 쉰 이안이 아르케아스를 마주 보았다.
“남은 시간이 충분하기만을 바랄 뿐이오. 내가 살아야 남도 도울 것 아니겠소.”
“참으로 너 다운 이유로구나. 말했듯, 염려 말렴. 적어도 의회가 자멸한 후가 될 거란다. 그들이 만들어낸 혼돈이, 제국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겠지. 내가 뭔가 시도하는 건 그 이후가 될 거야.”
“다행이군….”
이안은 안도를 숨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까.
게임일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더 강해지긴 했지만. 현실이 된 4챕터에서도 통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망캐라는 본질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남은 능력치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당장 전부 투자한다 해도, 여전히 대마법사라 불릴 수는 없을 테니까.
잘 쳐줘도, 마법을 아주 잘 쓰는 전사 정도일 터였다.
그때, 그의 표정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던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네가 나의 대행자임을 숨기고 다닐 줄 알았단다. 그런데 의외로, 너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더구나. 오히려 살뜰하게 이용했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소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어서 말이오.”
“그래. 탓하는 게 아니란다. 오히려 영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작 이름만으로도 네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싱긋 미소 지은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어쩌면, 원치 않더라도 네가 어떤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밝혀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잖니. 그때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 내가 내린 과업을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잖니?”
“대신, 귀하의 목적을 대라는 말씀이시군. 이해했소.”
“그래. 너는 내 부탁으로 검은 벽과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고, 그걸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는 거란다. 사실은 그러면서, 공식적으로는 계속 내 대행자로 남아 주었으면 한다고도 부탁하려 했었지. 더는 아무런 과업도 수행하지 않을지라도.”
“…명목상으로라도 말이오?”
이안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주기만 하더라도 교단은 계속 너를 주목할 테고, 나는 그만큼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네 기억을 보니, 그런 부탁은 할 수가 없겠더구나. 그저 주목하는 걸 넘어,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까지 생겨 버렸으니.”
“뭐, 그럼 공식적으로는 계속 그런 걸로 하겠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던 아르케아스가,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그렇게 해 주겠다고?”
“이제와서 더는 백금룡의 대행자가 아니라고 한들, 내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수긍하고 물러날 리가 없잖소.”
한쪽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똑같을 텐데. 못 할 것도 없지. 게다가 말씀하셨다시피, 귀하의 이름을 파는 게 도움이 되는 순간도 많아서 말이오.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앞으로도 계속 써먹겠소.”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댄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내뱉었다.
“정말이지, 실용적인 이유로구나.”
이안은 풀썩 웃음을 흘렸다. 저런 표정을 다 짓다니. 덕분에 답답하던 기분이 조금은 유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