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아르케아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쁘구나. 얼마든지 그러렴. 내 공식적인 대행자는, 앞으로도 너뿐일 거란다.”
“대신, 귀하께서 알려주실 수 있는 부분들도 다 알려 주셔야 할 거요. 말했듯이, 매도 알고 맞아야 대비를 할 것 아니겠소.”
“그래… 물론 그렇겠지. 네가 대행자로 남아주지 않았더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언제 즐거워했었냐는 듯,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다시 씁쓸해졌다.
머뭇대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그 얘기는, 나가서 계속하지 않으시겠소?”
“나가서?”
“은밀하게 나눠야 할 얘기는 일단락된 것 같아서 말이오.”
“…흠. 그래.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긴 하였지. 네 벗들이라면 믿지 못할 이들도 아니겠고. 그러자꾸나.”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아르케아스가, 묘하게 장난스러운 눈빛이 되어 이안을 돌아보았다.
“네 의뢰의 보수도, 벗들이 보는 앞에서 주도록 하마. 그편이 더 즐겁잖니?”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셔놓고, 뭐하러 물으시오?”
풀썩 웃은 이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케아스가 어서 가자는 듯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못 이긴 척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그런데, 이 손은 언제까지 잡고 계실 거요?”
“네 벗들이 보기 전까지.”
“……?”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잖니. 기회가 있을 때 예뻐해야지. 내 하나뿐인 대행자인데.”
“그건 대외적인 거고, 사적으로는 전우로 돌아간 것 아니었소?”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를 올려다본 아르케아스가 미소지었다.
“그것도, 유일하긴 마찬가지란다.”
“…….”
***
“오, 오셨습니까…!”
이안과 아르케아스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의자를 튕겨내듯 일어선 필립이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필립처럼 요란을 떨지 않았을 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백금룡과 그의 대행자에게 예의를 갖췄다.
필립은 로브를 벗어 버리고 전신 판금 갑옷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벗은 로브는 잘 개어서 식탁 옆에 올려 두었다.
메브는 여전히 로브를 걸친 채였다. 그게 벗은 차림보다 더 단정하다 여기는 것이리라.
가볍게 손사래를 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반가움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아닙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전혀 길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말하려던 테사이아의 입을 샬롯이 막는 가운데, 메브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장내를 돌아보던 이안이 내뱉었다.
“짧게 느껴질 만하군. 다들 아주 바빴겠는데.”
식당의 전경이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망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건만.
지금은 모든 식탁과 의자가 반듯하게 각잡혀 놓여 있었다. 벽과 식탁에도 촛불들이 반짝였고, 쓸고 닦기까지 한 듯 돌바닥 역시 깨끗했다.
“아무리 그래도, 위대하신 분을 지저분한 곳에서 모실 수는-”
“아르케아스.”
메브의 말을 자르며,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이름으로 불러주겠니, 메브?”
“……! 예, 아르케아스 님.”
살짝 숨을 들이켰던 메브가,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나는 알려진 것과 달리 전혀 위대하지 않단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인 아르케아스가 손짓했다. 일행들이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이 와중에도 샬롯은 여전히 손을 뻗어 테사이아의 입을 막은 채였다. 테사이아는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노려보면서도, 평소처럼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렴.”
이안에게 속삭인 아르케아스가, 일행이 앉은 길쭉한 식탁의 측면으로 향했다.
가장 앞의 두 자리만을 비워 둔 식탁 위에는 주석 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르케아스가 가져온 술은 식탁 정중앙에, 개봉도 하지 않은 채로 자리했다.
아르케아스가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일행보다도 작았다.
“내 대행자의 과업을 도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보니 정말 다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주었더구나. 물론 모두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행을 차근히 훑던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맨 끝자리에 앉은 나세르에게서 잠시 멈췄다. 나세르의 미소가 석상처럼 굳어지는 가운데,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마. 너희들의 이름을 다음 천년이 지나도 기억할 것이다.”
일행들이 저마다 감격한 듯한 얼굴이 되는 가운데,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물론 인사만으로 끝내기엔 아쉽지. 너희들에게도 작은 선물을 주마. 작은 보답이라 너무 서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마음 같아서는 내 둥지에 잠자고 있는 보물들을 하나씩 선물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단다.”
내뱉으며, 그가 양팔을 식탁 위로 얹었다. 양 손아귀에서 황금빛 광채가 번지더니, 곧 하나의 작은 진언을 이뤘다. 아르케아스가 짧은 왼팔을 그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팔은 진언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 한복판으로 파고들듯 사라졌다.
“……!”
일행들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그 안에서 꺼낸 물건들을 순서대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성인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길이와 두께를 지닌 유리병들이었다.
밀봉된 내부에는 금색을 넘어 옅은 갈색에 가까운 액체가 담겨 있었다.
파스슷….
진언이 증발하듯 흩어졌다.
삽시에 장내가 확 어두워진 듯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식탁 위에 놓인 여섯 개의 유리병 속에 은은한 황금빛이 일렁였다.
“하나씩 나눠 가지렴. 만약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안에 든 걸 전부 마시도록 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너희를 구해 줄 거란다.”
아르케아스 가까이에 앉은 메브와 샬롯의 시선이, 그를 지나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 사양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메브와 샬롯이 아르케아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르케아스 님.”
“감사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 둘이 옆 사람에게 하나씩 전달했다. 일행들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다들 유리병 속의 은은한 빛에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그 병도 버리지 말렴. 아주 단단해서 좀처럼 깨질 일이 없는 물건이니까. 물론 그걸 쓸 일이 없으면 더 좋겠다만…. 너희들은 위험과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들 같더구나.”
그의 시선이 뒤에 선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내 대행자처럼. 놀라운 일은 아니지. 벗은 서로 닮는다고들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병은 네 거란다. 이안.”
그의 손짓에 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이것도, 귀하의 피로 만든 거요?”
“여러 신의 축복이 깃든 성수에 내 피를 한 방울 섞어, 약간의 주문을 곁들인 물건이지.”
“생명의 영약이… 위대하신 분의 작품이었던 거군요.”
나세르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나세르가 유리병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정화자들이 아주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때 교단에서 종종 지급하곤 하는 영약입니다. 이걸 받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그런 만큼 효과는 확실합니다. 마시면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힘이 솟으니까요. 하지만….”
나세르가 유리병 안의 액체를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렇게까지 색이 진한 건 처음 봅니다.”
“그건 몇 가지 공정을 더 거쳐 희석한 물건이라 그렇단다. 수량을 늘리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 지금 너희에게 주는 건, 그보다 조금 더 좋은 거란다. 사실, 이게 진짜 생명의 영약이라 할 수 있지.”
친절하게 설명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희석해서 쓸 생각은 하지 말렴. 개봉한 순간 바로 마시지 않는다면, 금방 쓸 수 없게 된단다.”
“명심하겠습니다.”
“예. 잊지 않겠습니다.”
일행들이 저마다 대답하는 사이, 이안은 자신의 병을 집어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정보창도 물론 확인할 수 있었다. 유일 등급의 소모품. 생명의 영약.
생명력을 7할까지 단번에 회복시켜 주는 데다 육체에 작용하는 모든 상태 이상을 정화하고, 일정 시간 동안 추가적인 회복력과 저항력까지 부여하는 물건이었다.
나세르가 말한 영약은 그도 게임에서 본 적이 있었다. 회복의 영약이라는 이름으로. 그것과는 여러모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이었다.
이건 먹으면서도 아깝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런 귀중한 영약을 이렇게 여러 개 넘겨주셔도 괜찮으신 거요?”
“조금 무리하고 있긴 하단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잖니. 자. 그거 내려놓고 이리 가까이 서렴.”
아르케아스가 옆으로 몸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
아, 그래. 이제 내 차례란 거군.
선선히 영약을 내려놓은 이안이 그를 마주 보고 섰다.
일행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더 짙어진 황금빛 안광을 머금은 아르케아스가 입을 열었다.
“왼손을 이리 주겠니?”
“…….”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왼손을 내밀었다. 아르케아스의 양손이 그의 왼손을 아래위로 덮었다. 작은 손아귀에서 황금빛 용의 마력이 번졌다.
“이안 호프. 이 세상에 남은 내 유일한 전우이자 대행자야. 너는 내가 내린 무거운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해 주었다.”
아르케아스의 목소리 역시, 어느새 메아리치듯 울리고 있었다.
“감사의 증표를 이 왼손에 새기노니. 너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단단한 방벽이 되리라.”
방벽…?
이안이 뭔가 내뱉기도 전에, 샛노란 광휘가 눈부시게 번졌다.
솨아아….
빛이 이내 잦아들었다. 광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르케아스가 손을 뗐음에도, 이안의 왼손 손등에 여전히 남아 일렁였다.
육각형을 그리는 황금빛 선. 그리고 그 한복판에, 자그마한 진언이 원을 그리며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언 회로였다.
“…….”
손등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저마다 눈을 감거나 얼굴을 가렸던 일행들도 경탄을 숨기지 못하는 가운데.
“이제야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구나. 자. 한번 확인해 보렴.”
미소 지으며 말한 아르케아스가, 아직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양손을 활짝 펼쳤다.
지잉-
그 순간, 이안의 손등에 새겨진 진언 회로에서 황금빛 육각형이 솟구쳤다.
이안의 팔뚝을 절반이나 가릴 정도의 크기였다. 육각형의 중심부는 손등에서 살짝 떨어진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안이 손을 움직이자 자력에 고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정화자의 두건 망토에 새겨진 백금의 가호와 달리, 완전히 불투명한 황금색 역장이었다.
이안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정보창을 멍하니 눈에 담는 사이, 아르케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낯설지는 않을 거야. 나와 함께 싸울 때에, 비슷한 것을 이미 사용해 보았잖니. 물론, 이건 그보다 더 좋은 거란다.”
“방패… 인 겁니까?”
필립이 더듬대며 물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대행자는 지나치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며, 위험할수록 더 몸을 던지는 무모한 성정을 지녔지. 용과 싸울 때조차 그랬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한데, 그러면서도 결코 방패는 들지 않더구나. 지켜 보는 입장에선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
숨 쉴 틈 없이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황금색 방패의 끄트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직접 선물할 수밖에. 결코 몸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아니….”
드물게도 얼빠진 표정으로 굳어있던 이안이 비로소 탄식을 흘렸다. 황망하게 아르케아스를 마주 본 그가 말을 이었다.
“보상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거 아니었소…?”
“저번에는 그랬지.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라 약속한 기억은 없구나. 혹, 또 나의 진혈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니?”
싱긋 입술을 말아 올린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용의 진원은 마실 때마다 효과가 더해지는 영약이 아니란다. 너는 이미 진원을 품었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너무 눈에 띄잖소. 내가 마법사라는 건, 알고 계실 텐데…?”
“잘 알지. 그런데 내 대행자는 날붙이를 휘두르며 싸우는 걸 더 좋아하더구나.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왜 방패를 사용하지 않는지 알고 있단다, 이안. 마법을 사용하기 불편해서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닐 거야. 방패를 들고도 왼손으로 얼마든지 주문을 펼칠 수 있을 테니.”
“…….”
“조금 눈에 띄는 건,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상관없잖니. 너는 앞으로도 나의 대행자이니.”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면, 들어주실 거요?”
현기증이 이는 듯 잠시 눈을 감았던 이안이 읊조렸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그럴 수 없단다. 이미 주문은 새겨졌으니. 게다가… 그러고 싶지도 않구나.”
다시 눈을 뜨는 이안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며, 아르케아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렴, 이안. 너는 네가 마법사라는 걸 감추고 싶어 하잖니.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네가 눈앞에서 마법을 쓴다 해도 마법사라 여기지 않을 거야.”
“아니… 하….”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이안이,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자신의 손등을 중심으로 펼쳐진 육각형의 마력 방패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르케아스가 그의 기억을 직접 엿본 게 생각지도 못한 나비 효과를 불러온 게 분명했다. 아마도 격전을 치를 때마다 너덜너덜해지는 자신의 대행자가 어지간히도 걱정된 것이겠지.
하지만 어쨌든, 이안의 예상이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보상이었다.
본래는 마력량을 올려달라고 하거나, 진언 마법이 새겨진 마법 봉 같은 걸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방패라니.
‘이게 맞아, 진짜…?’
그것도 이렇게나 눈에 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