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41
341화
이안이 미간을 좁히자, 루시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축성 의식을 마무리할 매개체가 필요하거든요. 아마 축복이 내릴 것 같은데, 이왕이면 이안 님의 검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축복이라….”
이안의 미간이 다시 매끈해졌다.
하여간, 기특한 생각을 잘도 한다니까.
내심 읊조리며 침대맡에 기대 놓은 진은 강철검을 돌아본 이안이, 문득 멈칫했다.
“무기가 상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의 표정을 본 루시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화로 가장자리에 얹어만 둘 거거든요. 성화에 닿지 않게요.”
“그래서 고민하는 게 아니야.”
대답한 이안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입가를 닦는 그를 바라보며,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운을 뗀 이안이 일어섰다. 걸치고 있던 털가죽 조끼를 벗어버린 그가,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옆, 늑대 가죽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자신의 장비들을 훑어보는 채였다.
“저 화로는 충분히 튼튼하냐?”
“……?”
“부서지거나 넘어지면 난리가 날 것 같은데.”
덧붙인 이안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을 숙인 그가 사슬 조끼를 목에 뒤집어쓰고는, 판금 흉갑을 집어 들어 상반신에 걸쳤다.
“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리그가 그를 돕기 위해 달려가는 가운데,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화로는 지금 성화를 담는 그릇이에요. 신성이 화로를 감싸고 있어서, 물리적인 충격으로는 부수거나 파괴하기 쉽지 않아요. 성화를 먼저 끄거나, 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하죠.”
“그래…? 잘됐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루시아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어졌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신 거예요? 장비는 왜 벌써 착용하시는 거고요. 그냥 저한테 검만 전달해 주시고, 천천히 준비하셔도 돼요.”
“네가 들기는 어려울 거야. 무겁거든.”
“……?”
루시아의 눈빛이 더 어리둥절해지는 가운데, 이안이 물었다.
“다들 떠날 준비는 잘 마무리하고 있나?”
“네. 소리를 들으셨겠지만, 새벽부터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작은 소란들도… 없진 않았지만요.”
“작은 소란?”
“남게 된 전사들이요.”
입꼬리만 살짝 치켜든 루시가 말을 이었다.
“따라가겠다고 난리를 피우거나, 보급 상자나 마차에 숨어들었다가 끌려나가고 그랬어요.”
“아, 그런 소란.”
낮게 실소를 흘린 이안이 덧붙였다.
“설마 그중에 아스켈도 섞여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았어요. 계속 아쉬워하긴 했지만요.”
이안이 문득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이랑 벌써 친해진 거냐?”
“조금은요. 많이는 아니고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의 시선에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기가 관리하는 전사들이 그러니까, 화가 잔뜩 났더라고요. 두들겨 패면서 끌고 나오는데, 볼만 했어요. 겁 없는 아스켈이라더니, 주위 시선은 신경도 안 쓰더라고요.”
“겁 없는…?”
이젠 정반대의 별명이 생겼군.
피식한 이안이 일어섰다. 어느새 모든 방어구를 착용한 것이다. 어느 부위 하나 느슨하지 않게 제대로 착용한 채였다.
진은 강철 장검까지 허리춤에 고정한 그가, 리그와 루시아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제 둘 다 문 앞까지 물러나.”
“……? 네.”
루시아가 리그에게 손짓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아공간에서 꺼낸 그림자 망토까지 어깨에 두른 이안이 몸을 돌렸다.
망토가 펄럭이는 가운데, 문을 바라보며 선 이안이 오른팔을 옆으로 내뻗었다.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던 오른손이, 뒤이어 커다란 자루를 움켜쥔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
리그가 입을 쩍 벌렸다. 굴러떨어질 것처럼 치켜뜬 눈동자에,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거대한 대검의 모습이 아로새겨졌다.
날 끝이 살짝 휘어진, 어지간한 성인의 키만큼 거대한 검날. 리그의 멍한 시선이 고대 주문이 음각된 거무튀튀한 칼날을 훑는 사이.
“……?”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이안의 한쪽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대검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처음 이걸 손에 넣었을 때만 해도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동안 투쟁의 축복을 받았을 때만 이걸 꺼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린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옅은 쓴웃음이 번졌다.
‘이젠 축복 없이도 쓸 수 있게 된 건가….’
하긴. 그때 이후로 힘 수치가 열 개도 넘게 더 오른 건 사실이었다.
이안은 자루를 쥔 왼손을 놓았다.
검 끝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투쟁의 축복을 받을 때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건 아직도 무리일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대검의 검날을 훑어보았다. 날 곳곳에 생긴 크고 작은 흠집과 자잘한 균열들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그리고 보니 그토록 높았던 내구도 역시 어느새, 채 삼 할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건 수리가 불가능한 유물이며, 그동안 숱한 전투에서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지 않았던가.
진작 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히려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도 전투 몇 번은 충분히 버티겠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검날을 슬며시 아래로 늘어뜨릴 찰나.
“루 엔테르 맙소사….”
루시아의 나지막한 탄식이 이어졌다. 녀석은 드물게도 놀람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런 엄청난 걸 가지고 계셨었군요….”
하긴. 그녀는 이걸 본 게 처음이었다. 동시에 이안이 화로의 내구성에 대해 묻고, 직접 들고 가겠다고 한 이유도 깨달았을 터였다.
“전, 이안 님이 진은 강철 검을 주실 줄 알았어요.”
“축복이 내린다면 이게 더 효율적일 거야.”
이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침식이 시작되면 카르하가 투쟁의 축복을 내릴 확률이 높았다. 야인 군단과 함께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다수의 마물을 상대하는 데에도 대검이 제격이었다.
물론 백금의 발톱을 활성화하면, 진은 강철 장검도 살상 범위가 늘어나긴 하지만. 그걸 사용할 때는 힘 수치나 축복, 추가적인 강화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모든 걸 두부처럼 갈라 버리는 칼날이 아니던가.
“대전사께선… 정말로 초인이셨군요.”
리그가 읊조린 건 그때였다. 이안이 돌아보자, 녀석이 멍하니 덧붙였다.
“저도… 언젠가는 대전사처럼 될 수 있을까요?”
“잘 먹고 열심히 훈련하고, 잘 씻으면, 아마도?”
“……!”
라그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나가서 네 친구들에게 말을 전하게 해. 다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집결하라고. 그리고 나선 닐라를 데리고 광장으로 와라. 알고 있겠지만, 데리고 나온 다음엔 굳이 고삐를 잡지 말고.”
“예! 대전사!”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깜짝 놀랄만큼 큰 목소리로 대답한 리그가, 곧바로 몸을 돌려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나 보네.
피식한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어느새, 뭔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대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냐?”
“저걸 화로에 얹으면, 검날에 성화가 닿을 것 같아서요. 검날이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표면에 새겨진 주문 회로는 망가질지도 몰라요. 만약 축복이 내리지 않는다면… 그냥 검만 상할 수도 있어요.”
…이 와중에도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니.
소리 없이 웃음 지은 이안이 내뱉었다.
“상관없어. 휘두를 수만 있으면 돼.”
게다가 그가 보기엔, 타오르는 여신이 나 몰라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그와는 좋은 인연을 맺지 않았던가.
“가자.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먼저 가서 문을 열어 두고 있어.”
“…네.”
그제야 검이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듯, 루시아가 문으로 향했다. 이안은 천천히 녀석의 뒤를 따라 걸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검에 부딪힌 식탁이 와르르 부서진 건, 이안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조금씩 물결치듯 남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게 눈보라의 전조랬나…?’
생각하며, 이안은 루시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드드드득-
키만 한 대검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밭을 갈듯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떠날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주민들을 한 번씩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역시 우리 대전사시군. 저런 엄청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가시다니. 거인의 유물 같은데.”
“수인 노예와 장님 요정을 데리고 산맥 지하의 거인들을 죄다 쓸어 버리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노예라니. 그 수인은 훌륭한 전사였다. 우리 검은 숲 언덕 마을에서는, 그녀를 도끼 흑표범이라고 불렀었지.”
“벨리움에서는 저런 걸 본 기억이 없는데…. 하긴. 그때는 푸른 빛의 성검을 들고 계셨지. 그것도 위대했어.”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아공간에서 대검을 꺼내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미리 들고나온 게, 오히려 더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목덜미가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저 체구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시는 건지 모르겠군.”
“몰랐나 보군. 대전사께선 세 살 때 이미 곰을 맨손으로 죽이셨다던데.”
“그, 그래…? 역시 대단하시군…. 하긴 내가 듣기론 태어나자마자 걸으셨다니까. 곰을 때려잡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
“분명 카르하의 후손이실 걸세. 태초의 혈통을 타고나셨다 이 말이지.”
대체 무슨 탄생 설화들을 지어내고 있는 거야…?
때때로 들려오는 허무맹랑한 말들에,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전설이나 신화 같은 건 죄다 이딴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뇌리를 스쳤다.
‘늪지에서 깨어난 순간을 태어난 걸로 치면,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들도 아니긴 한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광장을 가로지른 이안은, 이내 단상 위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대화를 주고받던 이들도 어느새 다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이안이 화로로 향하고 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안은 화로 옆으로 솟은 제단을 오르는 대신, 그대로 단상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로는 몰라도, 저 조악한 계단은 대검을 든 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단상 높이를 제외하면 화로 자체는 그의 눈 아래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솨아아….
화로에 일렁이는 새하얀 성화가 또렷해졌다. 뜻밖에도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포근할 정도의 온기만 전해질 뿐이었다.
이안이 다가가자 불길이 그를 향해 손짓하듯 넘실대고 있는데도 그랬다. 불길 내부에서 흐릿하고 기묘한 존재감이 전해졌다.
‘이게 며칠에 걸쳐 미리 기도를 올려 둔 효과인 건가…?’
진짜 들여다보고 있을 줄이야.
생각하며, 이안은 제단을 오르는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녀석도 이 존재감을 느끼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시작할게요. 화로에 얹어 주세요.”
그와 눈이 마주친 루시아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확실히. 이제는 축복 없이도 휘둘리지 않고 휘두를 수 있겠네.’
만에 하나 카르하가 또 개 같은 변덕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다시 한번 확신하며, 이안은 검 면을 눕혀 화로에 얹었다. 두툼하고 긴 검날이 화로 위를 가로질러, 성화를 가리며 놓였다.
루시아의 말대로 화로는 삐걱대지조차 않았다. 새하얀 불길이 대검 날을 어루만지듯 일렁였다.
“때가 되면 대검을 다시 들어 주세요.”
제단에 무릎 꿇은 루시아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여신께서 기도에 화답해 주신다면, 축복이 내릴 거예요.”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눈을 감은 루시아가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성화가 기도에 응답하듯 낮게 잦아드는 가운데, 비로소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세 방향으로 대로가 이어진, 한층 더 각진 형태로 넓어진 광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그 한복판으로 줄지어 모여들고 있는 전사들의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