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03
403화
한순간 조금 더 밝아졌던 진언 회로의 빛이, 이내 다시 위태롭게 잦아들었다.
쿠르릉… 쿠릉…!
또 한 번의 진동이 이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공동이 뒤흔들렸지만, 더는 아무도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지 않았다.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들 숨을 죽인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솨아아….
그가 여전히 왼손을 치켜들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손아귀에 다시 빛무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회로에… 마력을 공급하고 계신 건가…?”
누군가가 나지막이 읊조린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위대한 백금룡께서, 이안 님의 왼손에 진언 회로를 새겨 주셨거든요.”
“과연 그렇군….”
“…역시. 용의 대행자이시기에 가능한 이적이었나.”
몇몇 난쟁이들이 비로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읊조렸다. 하지만 경탄만 섞여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공동의 회로를 안정시킬 만큼의 마력을 공급하는 건 어려우실 텐데….”
누군가가 탄식하듯 덧붙일 찰나.
솨아아-
다시 한번 금빛 파장이 번졌다.
일순간 밝아졌던 공동이 다시 흐릿하게 어두워졌다. 그사이 선명해졌던 이안의 얼굴을 눈에 담은 루시아가, 슬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그게 마력을 급속도로 소모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안은 지금, 진언 회로에 자신의 마력을 밀어 넣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목숨을… 바치고 계신 건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는 이안의 창백해진 안색이 다른 의미로 비춰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어진 속삭임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안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아예 터무니없는 오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필요하다면 정말, 기꺼이 자신의 수명이라도 희생했을 테니까.
솨아아-
다시 한번 이안의 손아귀에서 황금빛 파장이 번진 건 그때였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흐린 빛이었지만.
“되… 된 건가…?”
진언 회로의 빛이 마침내 안정적으로 잦아들었다. 평소보다 어둡긴 했지만, 아까처럼 위태롭게 일렁이지는 않았다.
“됐소. 동력이 유지되고 있어.”
코르보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더는 진동과 굉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
이안이 한숨과 함께 팔을 뚝 떨어뜨린 건 그때였다. 그의 입술이 익숙한 욕설의 형태를 그리고 있다는 건, 아마도 루시아만 눈치챘을 터였다.
“……!”
뒤이어 그가 비틀대자, 퍼뜩 눈을 부릅뜬 루시아가 계단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안은 다시 균형을 잡고는, 맥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앞에 뭐 하나? 내려가자고! 맞이해 드려야 할 것 아닌가!”
그제야 다른 이들도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미 계단을 전부 내려간 루시아가, 중층으로 올라서는 이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안 님! 괜찮으신 거예요?”
“아니. 전혀.”
맥없이 내뱉으며, 이안이 멈추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루시아가 냉큼 멈춰 섰다. 뒤따라온 수비대가 그녀의 뒤로 넓게 늘어섰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이안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충혈되어 있기까지 했다.
루시아는 그게 마력 탈진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역시, 진언 회로에 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마력을 전부 퍼부은 것이다.
‘어쩌면, 혼돈까지 동원하셨을지도.’
루시아가 생각하는 사이, 이안을 바라보던 난쟁이들이 우르르 한쪽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위대한 대전사여….”
“드라그 벨가의 구원자여….”
이어진 나지막한 목소리에, 인간과 오크들도 하나둘씩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저마다의 경의를 표하려는 찰나.
“됐고.”
미간을 살짝 좁히며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내뱉었다. 몇몇이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늘어뜨리고 있던 오른팔을 앞으로 휙 털었다.
“이거나 받으시오.”
“……?”
고개를 든 난쟁이들 중 하나가, 날아오는 궤적을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코르보였다.
“이, 이건…?”
놀란 듯 눈을 깜빡인 그가, 이안이 던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금목걸이가 걸린 손바닥만 한 펜던트. 다만 보석이 있어야 할 한복판에는, 대신 피가 말라붙은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암녹색 보석은 잘게 조각난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카르미엘의 영혼이 담겨 있던 그릇이야. 너희가 알아서 처분해.”
“……!”
이어진 이안의 말에, 코르보를 비롯한 주민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난쟁이들은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펜던트에 박힌 단검이, 아까 그가 경비병들의 죽음을 알릴 때 보여 준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그가 자신들의 복수를 대신 해준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난쟁이는 없었다.
그들과 달리 심드렁한 얼굴로, 이안이 덧붙였다.
“뒷정리도 알아서들 하고. …난 한숨 자야겠으니까.”
말을 마친 그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듯 허물어졌다. 반사적으로 달려나간 루시아가 그의 몸을 받아 품에 안았다.
“휴….”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서로를 돌아본 난쟁이들이 앞으로 나섰다. 다리를 톡톡 치는 그들의 손길에, 루시아가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절하신 거예요. 돌아가신 게 아니라.”
“알고 있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예우를 다하고 싶을 뿐.”
금목걸이를 목에 건 코르보가 말했다. 다른 난쟁이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면.”
비로소 대답한 루시아가, 이안을 그들에게 기울였다.
“조심히 받아. 키 큰 놈들이 뒤로 가고.”
머리 위로 양손을 치켜든 난쟁이들이, 이안의 몸을 가지런히 누이며 받아들었다.
“…….”
모여있던 주민들이 길을 트듯 자연스럽게 좌우로 갈라졌다.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선 난쟁이들이, 이안을 받쳐 든 채 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초인이여….”
난쟁이들이 다시 무릎을 꿇으며 읊조렸다. 인간과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아있던 몇몇 요정들도 못 이긴 척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였다. 비록 본인은 알지 못할 테지만.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시겠지만.’
생각하며 난쟁이들의 뒤를 따르던 루시아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디아나. 당장 가서 백작 각하를 모셔 오세요.”
“…지금? 바로?”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디아나가 홱 고개를 들었다.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 님 말씀 못 들으셨어요? 이 난장판을 정리해야죠.”
***
“…….”
이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는 익숙한 낮은 천장. 그의 숙소인 난쟁이 저택이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뇌리로 요그의 맥없는 속삭임이 번졌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진언 회로끼리 공명하는 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 정말이지, 구역질이 나더군.
그의 현실감을 단숨에 일깨우기에도 충분했다.
‘그런 와중에도 용케 본인의 역할은 다 했네.’
카르미엘의 약점을 알려주던 녀석의 속삭임을 떠올리며, 이안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가 늘 잠들던 방의 구석 자리였다. 다만 푹신한 털가죽이 아래 깔려 있었고, 가죽옷만 남긴 채 갑옷을 싹 벗긴 그의 몸 위로도 훨씬 부드러운 모포가 덮여 있었다.
“…….”
눈을 깜빡인 이안이 광대를 어루만졌다. 약간의 두통이 남긴 했지만,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막판에 마력에 혼돈력까지 박박 긁어 밀어 넣었던 걸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물론, 그 이유를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레벨이 하나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리고도 경험치가 반 이상이 더 쌓였다.
경험치만 놓고 보면, 거대 마수가 준 것보다도 많은 것 같았다.
‘…하긴. 워낙 많이 죽이긴 했지.’
게다가 본래도 레벨업이 그리 멀지 않은 상태이지 않았던가.
어쨌건 덕분에, 일정량의 체력과 마력이 빠르게 회복된 것이리라.
“…그런데.”
이윽고 내뱉으며,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넌 왜 그러고 있냐.”
“……!”
방 건너편. 엉거주춤하게 벽을 보고 서 있던 백금발의 요정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 그게….”
디아나가 더듬대는 사이, 뇌리로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시종이니까. 널 간호하겠다고 하던데. 그보단, 그 핑계로 귀찮은 일들을 빼먹으려는 것 같긴 했지만 말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거든.
고자질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뭐, 숨겨 둔 궐련이라도 있나 뒤져 보고 있었냐?”
“그, 그럴 리가…!”
화들짝 그를 돌아본 디아나가, 이윽고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읊조렸다.
“…있겠습니까. 그게… 그저… 그동안 제가 터무니없는….”
“실망스러웠겠네.”
“오해…. …예?”
이안이 말을 자르자, 멈칫한 디아나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야성적인 사내가 아니라서 말이야.”
“……!”
“설원을 누비는 고독한 야수 같지도 않-”
“…그동안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내뱉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식한 이안이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알면, 그냥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라는 말씀은…?”
디아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이안이 뻐근한 어깨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하던 대로 하라고. 말투가 어떻건, 어차피 네가 내 시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시종….”
떨떠름하게 읊조린 디아나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바로 들었다.
“그렇다면야… 뭐… 기꺼이….”
사양도 한 번 안 하네.
내심 다시 한번 실소를 흘린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얼마나 잤지?”
“네… 가 들어오고 나서, 바로 다시 돌렸다….”
어색하게 대답하며, 디아나가 건너편의 식탁을 가리켰다.
흘러내릴 모래가 얼마 남지 않은 모래시계를 눈에 담은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은 거면, 생각보다 오래 기절하진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 옆에는 마개를 닫은 못 보던 유리병도 놓여 있었다. 안에 담긴 액체가 술이라는 건 본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루시는 뒷정리를 돕고 있고?”
냉큼 술병을 집어 든 이안이 말했다. 벽에 슬며시 기대서며,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모든 인원이 작업 중이야. 네가 명령했으니까.”
“…이렇게 바로 하란 건 아니었는데.”
나는 안 할 거란 뜻이었지.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술을 들이켰다.
똑같은 술이었지만, 놀랍게도 악취가 훨씬 더 옅었다. 아무래도 난쟁이들이 감춰 둔 더 좋은 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옷은, 네가 벗겼고?”
“그, 그럴 리가…!”
이안이 덧붙인 말에, 디아나가 펄쩍 뛸 기세로 고개를 저었다.
“네, 네 장비와 전리품은 난쟁이들이 전부 가지고 갔어. 고작 그런 물건들을 써선 안 된다더군. 아예 새로 만들어 주겠다던데.”
“난쟁이들이? …그걸 기다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안이 심드렁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 물건들도 나름대로 흡족해하지 않았던가.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몇 놈이 공방에 틀어박혔어. 아마 네가 가도 말릴 수 없을 거야. 전리품 중에 전신 판금 갑옷이 있다던데. 그걸 다시 녹여서 새로 만들 거라더군.”
“아, 그래…?”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군.
이안은 체념하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사실 루시아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순간부터. 그리고 유랑단이 이곳으로 쳐들어온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미래이기도 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뜨거운 시선과 낯간지러운 칭송과 숭배가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솔직히 손해 볼 건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앞의 단점들이 너무 치명적일 뿐.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디아나가 덧붙였다.
“각하가 네가 깨어나면 뵙고 싶다고 하던데. 불러올까?”
“가뜩이나 바쁜 양반인데 굳이.”
술병을 한 손에 든 이안이 몸을 돌렸다.
“됐어. 내가 직접 가면 그만이니까.”
“이렇게 바로…?”
“왜. 빨리 끝나면 정리 작업에 투입되어야 해서?”
이안이 되묻자, 디아나가 냉큼 문으로 향했다.
“그, 그럴 리가.”
그거 맞는 것 같은데. 헛웃음을 흘리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거리로 나섰다.
도시 정리는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최상층의 거리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크고 작은 목소리와 소음은 저 아래에서 번졌다.
‘뭐, 알아서들 잘 하고 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도시를 확인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긁힌 흔적이 남은 광장에 이어, 내성 출입문이 가까워졌다.
평소와 달리, 오크 경비병 한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척-
도끼창을 든 그는, 이안이 다가오자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 깍듯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또 시작이네.
오크의 앞에서 멈춰선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일어나시오.”
오크가 벌떡 일어섰다. 고개는 여전히 살짝 숙인 채였다. 이안이 덧붙였다.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명하십시오.”
“날 봐도 무릎 꿇지 말라고. 보는 이들에게 전부 전하시오.”
“…따르겠습니다. 위대한 대전사.”
오크가 더없이 깍듯하게 말했다.
그 호칭도 빼라고 말할까 잠시 고민한 이안은, 이내 술병만 입으로 가져가며 걸음을 옮겼다.
막는다고 해도, 다른 새로운 호칭들이 속속 튀어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훨씬 더 고요한 통로로 접어든 이안이, 이내 덧붙였다.
“설마, 루시아가 또 내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겠지?”
그를 앞장서던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아닐 거야. 더는 네 이야기를 아예 언급하지 않던데.”
역시, 척하면 척이라니까.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후다닥 앞서간 디아나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이안이 멈춰 서는 일 없게 하려는 듯한, 이제는 꽤 능숙해진 움직임이었다.
“……! 오, 오셨습니까…!”
이안이 들어서자, 서책이 잔뜩 쌓인 책상 너머에 앉아 있던 백작이 튕겨오르듯 일어섰다.
등잔에 비친 그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업무에서 해방될 기회가 사라져서 아쉬우시겠소.”
“…제 생각을 읽으신 것 같군요.”
낮은 웃음과 함께 걸어 나온 백작이, 이안의 앞에 멈춰섰다. 이안이 덧붙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감사 인사는 받은 걸로 치겠소.”
“혹시… 정말로 생각을 읽으십니까?”
멈칫한 백작이 물었다. 이번에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럴 리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닐 뿐이오.”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한 이안이, 책상 앞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뭐, 전투에 대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것 아니오?”
“물론 그랬습니다만….”
백작이 공손하게 양손을 앞으로 모으며 대답했다.
“그 사이에 더 중요한 사안이 생겼습니다. 이걸 먼저 말씀드리는 게 순서일 것 같군요.”
“좋지.”
의자를 당겨 앉은 이안이, 손에 든 술병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준비됐소. 하시오.”
저도 모르게 피식했던 백작이, 이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이내 최대한 엄숙한 표정을 지은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태자 전하께서, 성자 대행을 뵙고자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