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32
432화
묵직한 가방을 짊어진 늑대들이 걸음을 옮겼다.
선두의 세렌 역시 짐 가방을 들쳐 멘 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옆을 따르는 전마의 안장에는 세 개의 가방이 연달아 묶여 걸린 채였다.
‘완전 군장이 따로 없네.’
조금 떨어진 뒤에서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안장에 여러 개의 가방을 묶은 흑마를 제외하면, 이안 일행은 아무도 가방을 짊어지지 않은 채였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이긴 했지만, 굳이 이안도 안장에 묶인 가방을 풀지 않았다.
무리해서 말을 몰고 망치를 휘둘러댄 탓에, 온몸이 삐그덕대고 있지 않던가.
부러진 곳은 없으니 하루 이틀이면 완전히 회복되겠지만, 그만한 여유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뭐, 어차피 늑대들은 전초 기지까지만 동행하니까….’
쉴 사람들은 쉬어야지.
내심 읖조리며, 이안은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목까지 넘실대는 안개의 물결 위로, 변이된 나무들이 듬성듬성 이어지고 있었다.
침엽수처럼 높이 솟은 나무들은 멀어질수록 조금씩 더 빽빽해졌다.
그 너머의 부자연스러운 어둠 너머는, 이안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그림자 숲.’
어둠을 응시하는 그의 뇌리로, 환영에서 본 이나스 커글의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위태롭게 이글대던 잿빛 안광도.
놈은 분명 엄청나게 강할 터였다.
요그는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지 못한 실패작이라 폄훼했지만, 약했다면 그럴 자격조차 얻을 수 없었으리라.
히케드과 흑사자들이 함께 한다 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긴장했군. 친구.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요그의 나른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러려면, 지금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지만.
친구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바람 빠지듯 잦아드는 사념을 느끼며, 이안은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공간에서 친구들과 보낸 시간이 꽤 피곤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물론, 요그의 도움도 필요했다.
이나스 커글과의 전투를 길게 이어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경험상, 그런 놈을 상대로는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단시간에 승부를 보는 쪽이 차라리 안전했다.
그가 여러 경우의 수를 묵묵히 정리하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
“모로. 어때요?”
디아나와 함께 뒤따르던 루시아가 불쑥 속삭였다.
이안이 돌아보자, 녀석이 좌측에 나란히 걷는 흑마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말 이름 말이에요.”
“…그걸,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냐?”
흑마가 알아들은 것처럼 투레질하는 가운데, 이안이 긴장이 탁 풀린 웃음을 흘리며 내뱉었다.
루시아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님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생각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이제 날 너무 잘 아네.
이안이 내심 읊조리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가문에서 기르던 말의 이름이에요. 그 녀석도,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을 가진 명마였죠.”
“그런 좋은 말을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면….”
“당연하죠. 이안 님이 오셨을 땐, 이미 죽었으니까.”
한쪽 어깨를 으쓱인 루시아가 덧붙였다.
“버논 오라버니의 말이었거든요.”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끝내 누이의 칼에 목숨을 잃었던 메브의 동생을 떠올린 이안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정작 루시아의 눈빛은 태연했다. 이윽고 이안이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말의 이름을 붙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그 반대에요. 한 번 죽음이 방문했던 이름이니, 다시 찾아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그래서 말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은 거고요.”
별의 별 미신이 다 있네, 진짜.
이안이 헛웃음을 삼키는 사이, 루시아가 덧붙였다.
“제가 알던 녀석과 닮아서 낸 의견이에요. 이안 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아니야.”
말을 자른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루시아의 말대로, 굳이 다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기 떄문이다. 솔직히,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줄 자신도 없었다.
“네. …들었지?”
빙긋 미소 지은 루시아가 냉큼 고개를 돌렸다.
“이제 네 이름은 모로야.”
흑마, 모로가 그르렁대며 콧김을 뿜었다.
루시아는 저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이안은 저 녀석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루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행이네요. 기분이 조금 풀리신 것 같아서요.”
모로를 보는 이안의 얼굴을 살핀 루시아가 이내 덧붙였다.
이안이 바라보자, 녀석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생각이 많아 보이셨거든요.”
…그래서 꺼낸 말이었나.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았어. 걱정마.”
“…글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린 건 디아나였다. 그녀는 아까의 이안과 마찬가지로 오른편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안의 미소가 굳어지는 가운데, 루시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디아나는 왜요?”
“너한테는 안 느껴지나 보네. 루시페르.”
루시아의 눈을 내려다 본 디아나가 덧붙였다.
“아까부터, 저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것들이 있어.”
“……!”
그제야 눈을 치켜뜬 루시아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건, 낮게 깔린 잿빛의 안개와 어둠 너머로 불길하게 이어지는 마경의 나무들뿐이었다.
디아나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림자 마수들일 거야. 이안이 고민한 것도 그것들 때문이겠지.”
…전혀 아닌데.
심드렁하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숲으로 이어지는 어둠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에게는 마수들의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경 특유의 불길함과 대기에 섞인 혼돈이 그의 감각을 교란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거야. 저 안은, 완전한 놈들의 영역이니까.”
디아나가 억눌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차라리 편하겠네. 그땐 제발로 찾아와줄 테니까.”
물론 디아나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말일 터였다.
결연한 눈이 되어 고개를 끄덕인 건 루시아 뿐이었다.
소리 없이 한숨만 내쉬던 디아나가 불현듯 앞을 바라본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설마… 또?”
이번에는 이안도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갈대가 흔들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그림자 마수들의 발소리였다.
크르륵….
뒤이어 기척을 느낀 듯, 모로가 콧김을 뿜었다. 세렌의 흑마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게 분명했다.
전진 속도가 느려지고, 늑대들이 지팡이처럼 땅을 딛고 있던 창을 하나 둘씩 치켜 들었다.
“시발… 숲에 처박혀서 새끼만 까댄 건가…?”
살짝 자세를 낮춘 디아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혼돈의 정수가 낮은 울림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파사사사사-
뒤이어 저 앞에서 그림자 마수들의 발소리가 삽시에 커졌다. 헐떡대는 듯한 숨소리 역시 선명해졌다.
“……?!”
놈들이 엄청난 속도로 물러나고 있었다. 디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루시아, 그리고 앞서 걸어가던 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때문에 도망치는 건가?’
미간을 조금 더 좁인 건 이안 뿐이었다. 마수들의 기척이 멀어지자 정수의 공명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있었다. 일부러 저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처럼.
‘…이 새낀 꼭 이럴 때 자고 있지.’
요그가 깨어 있었다면 잘난 척과 함께 설명해 줬으련만.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내 미련을 떨치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야 어쨌건, 마수들이 물러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사실, 오늘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대체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늑대들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종류가 다를 뿐, 의문을 느끼는 건 저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래… 우리를 노리던 게 아니었군.”
숲의 가장자리를 끼고 선회하듯 이동한 탓에,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저 너머의 야트막한 언덕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 주위는 고요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바닥에 자욱한 잿빛 안개는, 보이지 않는 둑에 가로막힌 것처럼 언덕 주위로는 침범하지 못했다.
“이안 님, 저건 설마….”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루시아가 속삭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하가 뭔가 하신 모양이군.”
완벽한 것 같진 않았지만, 어쨌건 또 다른 권역이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림자 마수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형성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이나스 커글에게도 이미 들켰을 테니, 굳이 존재를 감출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아마 저기가, 전초 기지겠고.”
이안의 시선이 언덕 위로 향했다.
한때 꽤 높은 탑이었을. 그러나 지금은 채 반도 남지 않은 실루엣이 우두커니 솟아있었다.
루시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제가 상상한 모습이랑은 꽤나 다르네요.”
“흑요정의 탑이군.”
대답한 건 뜻밖에도 디아나였다.
눈구멍 너머의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가 씹어 뱉듯 덧붙였다.
“놈들이 주위를 감시하고 역겨운 의식을 치르기 위해, 숲 근처에 탑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마물들을 노예로 부렸다더군. 보아하니, 이나스 커글을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지만.”
탑을 바라보는 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만한 크기의 탑이 무너진다면 폭삭 주저앉아야 할 텐데. 대체 어떻게 아래쪽은 멀쩡하게 남긴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벽면을 돌아가며 비스듬히 썰어버린 게 아니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하긴. 공간을 열어서 유성도 떨어뜨리는 세상인데.’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여, 마법사 다운 호기심을 떨쳐 버렸다.
어쨌거나 탑의 위치는 꽤 절묘했다.
숲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고.
반대편 능선으로 진입하면 숲에서는 접근하는 게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본래는 권역 결계의 범위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테니, 일대가 이 꼴이 되지만 않았다면 이나스 커글이 눈치채기 전에 놈의 숲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으리라.
쿠우….
혼돈의 정수가 토해낸 울림이, 이안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안은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어느새 안개를 벗어나 거뭇한 땅에 발을 디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들이 뿜어내던 어둠에서 느껴진 것과 같은 서늘한 감각이 이어졌다.
‘확실히… 그자의 영역이네….’
늑대들의 걸음이 빨라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같은 보폭을 유지하며, 이안은 다시 언덕 위를 올려다 보았다.
늑대들이 조금씩 멀어지는 가운데, 무너진 탑의 형태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 아래, 일렬로 넓게 늘어서며 마주 언덕을 내려오는 또 다른 무리도.
“…정말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셨네.”
디아나가 안도한 듯 읊조렸다.
밖에서 저들이 보이지 않았던 건, 주위의 어둠에 동화된 듯한 칙칙한 모습들이기 때문일 터였다.
검푸른 안광만이 때때로 흐릿하게 일렁였다.
물론, 이안은 그들을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었다.
숫자는 많지 않은 데다, 전원이 중무장한 상태였다.
좌우로는 도보로 걷는 늑대들이. 그리고 그들 안쪽에는 사제들이 쓰는 두건 망토를 걸친 둘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망토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물든 것처럼 칙칙했다.
그 안쪽 좌우에는 마수 전마에 탄 판금 갑옷의 기사가 둘 있었다.
한 명은 검과 방패를 들고, 또 한 명은 기다란 도끼 창을 한 손으로 든 채였다.
“그럼 저 분이 바로….”
행렬의 정중앙을 바라보던 루시아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두 사자를 좌우에 낀 채, 칠흑처럼 새카만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사내가 한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그가 탄 검은 전마 역시 아주 크고 위엄이 넘쳐 보였다. 마수라기보다는 일각마라 불러야 할법한 형태였다. 물론, 이안은 말에는 눈길조차 두지 않았다.
“…….”
이안은 그가 걸친 갑옷이 정화자들이 착용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흉갑 한복판에 음각된 커다란 원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본래 황금이 덮여 있어야 할 원의 내부는, 지금은 그저 새카맣기만 했다.
형태가 변한 건 투구도 마찬가지 같았다.
본래는 한쪽 관자놀이에서 정수리를 지나 반대쪽으로 이어지는, 원을 세워 놓은 형태의 장식이 되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윗부분이 뚝 부러져서, 양쪽 관자놀이에 비대칭의 뿔이 돋은 듯한 형태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흑태자라고 부르는 게 맞겠네.’
선대 황태자 히케드가 분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 일대를 어둠을 물들인 장본인이기도 할 터였다.
그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설핏 시선이 맞닿은 순간, 혼돈의 정수가 또 한 번 낮은 울림을 토해냈으니까.
“……!”
히케드와 그의 병사들이 멈춰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과 눈이 마주쳐서는 아니었다. 앞서 걸어가던 세렌의 늑대들이 멀지 않은 곳에 당도해서였다.
이안은 그들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지 않은 터라, 어느새 제법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흑기사들이 훌쩍 말에서 뛰어내리는 가운데, 세렌을 필두로 한 늑대들이 멈춰 섰다.
이안 일행이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가운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든 세렌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용맹한 전하께 승리 있으라…!”
멈춰선 늑대들이 일제히 창대 끝으로 땅을 찍으며 소리쳤다.
“승리 있으라!”
건너편에 선 이들이 화답하듯 저마다의 무기로 땅을 내리찍었다.
훌쩍 말에서 뛰어내린 히케드가 그대로 성큼성큼 세렌을 향해 걸음을 옮긴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곧 그의 모습이 늑대들의 뒷모습에 가려 이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흑사자 세렌 비쿠스. 황명에 따라, 전하를 보필하기 위해-”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세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한 가운데, 쇠와 쇠가 가볍게 맞닿는 소리가 뒤이어 귀를 스쳤다.
일으켜 세워 어깨를 토닥였거나, 끌어 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왜 멈춰 섰지?”
뒤이어 이안이 멈춰 서자, 등에 부딪칠뻔한 디아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늑대 행렬의 후미까지는 열 걸음쯤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이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
두 줄로 서 있던 늑대들이 좌우로 갈라지듯 물러서면서 그들 쪽을 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쩍에 일렬로 선 이들의 시선 역시 이안 일행에게로 집중되는 가운데.
한복판에 우뚝 선 히케드와, 그의 바로 아래에 보필하듯 이쪽을 보고 선 세렌의 모습이 드러났다.
적막은 아주 잠깐이었다.
“무릎을 꿇고,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늑대들이 멈춰서자 세렌의 엄숙하게 가라앉은, 그러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번져 나갔다.
숨을 멈춘 채 굳어져 있던 디아나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
하지만 응당 이어져야 할 목소리는 번지지 않았다. 소리 없이 고개를 갸웃한 디아나가 슬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곧 가면 너머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안은 물론 루시아까지, 여전히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